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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15일 (금) 23:33 판

최시형
崔時亨
출생1827년
조선 경상도 경주
사망1898년 (72세)
대한제국 대한제국 한성부
성별남성
국적조선 조선
대한제국 대한제국
별칭초명(初名)은 최경상(崔慶翔)
아호(雅號)는 해월(海月)
직업종교인, 교육자, 사상가
부모최종수(부)
자녀최동희(아들)
최윤(딸)
최동호(아들)
친척최익환(손자)
최진환(손자)
최옥환(손자)
정순철(외손)
최인혜(증손녀)
최제우(친척 아저씨)
천도교
주요 인물
최제우 · 최시형 · 손병희 · 박인호
전봉준
경전
동경대전 · 용담유사
해월신사 법설
의암성사 법설
교리
시천주 · 사인여천 · 인내천 · 후천개벽
역사
동학 · 동학 농민 혁명
관련 단체
천도교 중앙총부
천도교 연원회
천도교유지재단
천도교청우당
문화유산
천도교 중앙대교당 · 천도교 임실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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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시형(崔時亨, 1827년 ~ 1898년)은 조선의 종교인, 교육자, 사상가이자 동학의 제2대 교주이다. 초명은 경상(慶翔), 호는 해월(海月), 본관경주(慶州)이며 경상도 경주에서 출생하였다. 최종수(崔宗秀)의 아들이다. 먼 일족이었던 최제우가 청년이었던 그를 거두어 가르친 뒤, 최제우의 수제자가 되었고 그의 도맥을 이어 받아 동학의 제2대 교주로 취임했다.

생애

최시형은 일찍이 고아가 되어 고생을 하였으며, 종이 만드는 조지소(造紙所)에서 일하였다. 1861년(철종 12년) 종이 조지소를 찾아 온 먼 일족인 최제우와 세상과 철학 담론 등을 논하다가 그의 제자가 되어 동학교도가 되었고 1863년 최제우의 후임으로 제2대 교주가 되었다.[1] 1864년 조선 정부의 탄압으로 최제우가 처형되자 태백산에 은신하였다가, 뒤에 관헌의 감시를 피해 안동, 울진 등지로 돌아다니며 포교에 힘썼다.

1871년(고종 8) 이필제(李弼濟, 또는 다른 이름은 이필)가 그의 승낙 없이 교조 신원 운동을 전개하여, 영해(寧海)에서 이필제의 난을 일으켜 동학에 대한 정부의 탄압이 가중되자 소백산의 암굴에 피신하였다. 그 뒤 영월을 거쳐 인제에 가서 《동경대전》을 간행하고, 이어 단양에서 《용담유사》를 발간하는 등 경전을 완성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으로 정국이 소란하여 동학에 대한 탄압이 완화되자, 조직 강화에 힘써 육임제(六任制)를 확립하고 전국에 육임소(六任所)를 설치하여 종교로서의 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1892년 손천민(孫天民), 손병희 등의 주장에 따라 충청도 관찰사에게 교조의 신원과 포교의 자유 및 탐관오리의 숙청 등을 요구하는 글을 보냈으나 묵살당하였다. 1893년흥선대원군은 동학도들이 상경하여 경복궁 앞에서 복합상소운동을 벌이는 기회를 이용하여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다.[2] 정교는 1893년 2월 11일부터 2월 13일까지 3일간 박광호를 소두로 하는 약 50명의 동학교도들이 상경하여 궁궐 앞에서 교조 신원을 탄원하며 연좌시위를 벌인 사건을 대원군이 시킨 일이라고 주장하였다.[2] 이때 정교는 대원군이 은밀히 동학당 수만 명을 서울로 불러 모임을 갖고 장차 불궤를 도모하여 그의 손자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고 하였다.[2] 최시형은 전봉준 등이 흥선대원군 등과 모의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대원군에 의해 이용당하리라는 것이 최시형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전봉준은 이 뒤로도 동학농민군에 대한 지원을 약속하는 흥선대원군의 말을 신뢰하고 그와 연결을 계속 하였다.

1893년 2월 동학교도들은 제2차 신원운동을 전개하여, 박광호(朴光浩)를 소두(疏頭)로 하여 각 도의 동학 대표자 40여 명을 보내어 고종에게 직접 상소를 올리고 대궐 앞에서 사흘 밤낮을 통곡하게 했다. 고종으로부터 해산을 조건으로 선처를 약속받고 일단 해산했으나, 시행될 기미가 보이지 않으므로 다시 제3차 신원운동을 계획하고 보은대도소(大都所)에 전국 교도들의 집결을 명령하였다. 그와 함께 교조의 신원과 부패 관리의 처단 및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며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기치를 들고 대대적인 시위를 감행하려 했다. 이에 당황한 조정으로부터 파견된 선무사 어윤중과 면담하여 선처를 약속받고 우선 경상도 관찰사 조병식(趙秉式), 영장(營將) 윤영기(尹泳璣) 등 탐관이 파면되자 자진 해산했다.

그는 모든 운동에서 일체의 폭력 사건을 엄금하도록 시달했다. 그러나 1893년 12월부터 94년 1월에 올린 동학도 및 농민군의 상소 중 최시형의 탄핵 상소에 의해 경상도 관찰사 조병식(趙秉式), 영장(營將) 윤영기(尹泳璣) 등이 파직되긴 했으나 이후 고관들은 농민들의 상소문을 검열하였고, 사태는 나아지진 않았다. 도리어 조병갑전봉준과 그의 일가를 잡아들이고, 전봉준의 부친에게 형문을 가해 죽게 한다. 1894년 고부 접주 전봉준이 농민과 동학도를 지휘하여 동학 농민 운동을 일으키자, 초기에는 그러한 폭력 사건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3] 취하였다. 나중에 교주로서 이에 호응하여 북접(北接) 산학 동학도를 궐기시켜, 청산(靑山)에 집결했다가 회덕(懷德)의 관아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했으나 관군과의 충돌을 피해 우선 해산시켰다.

그러나 각지의 관군을 격파하여 요구 조건의 이해를 수락 받고, 동학군을 해산시켰던 전봉준이 일본군의 상륙과 정부의 요구 조건 불이행을 이유로 음력 9월 다시 기포(起包)하자 그도 북접 각지의 접주들에게 총궐기를 명령하였으며, 10만 명의 병력을 인솔하여 논산에서 남접군(南接軍)과 합세하였다.

이에 관군·일본군의 연합군과 공주에서 싸워 참패하고, 논산을 거쳐 장수 등지에서 연패하고 영동·청주로 피신했다가 1898년 원주에서 송경인(宋敬仁)의 밀고로 붙잡혀, 한양으로 압송되어 사형되었다.

죽은 뒤 1907년 고종의 특지로 신원되었다.

기타

이필의 민란 당시

최시형은 인내천 사상을 중심으로 평화적인 선교와 정치문제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내세웠다. 그러나 1871년 충청북도의 동학 접주 중의 한사람인 이필제가 교조의 신원을 명분으로 봉기하려 하자 최시형은 이를 반대하였다. 또한 승산이 없을 것이라고 경고를 했는데, 이필의 봉기군은 대패하고 말았다.

동학 농민운동 당시 대응

제2대 교주 최시형이 이끄는 북접은 북접의 다른 지도자였던 전봉준의 기병을 탐탁지 않게 여겨 왔다. 당시에 동학의 주요 지도자였던 오지영의 진술에 따르면, 최시형은 호남의 전봉준과 호서의 서장옥은 나라의 역적이고 사문난적이다 라 규정하고, 동시에 남접의 농민군을 칠 예정이었다.[4] 당시 남접의 지도자인 김개남 등은 조선 정부를 부정하고 스스로 개남국왕(開南國王)이라 칭하였다. 최시형은 전봉준 역시 조선 정부를 부정하고 새 나라를 세우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관군과 함께 농민군을 압박하자, 최시형 등은 처음에는 협상론인 화전론(和戰論)을 펼치다가, 마침내 현실상황의 급박함을 인식하여 스스로 자신의 주장을 포기하고 북접을 전봉준의 무장투쟁 노선에 동참시켰다.[4] 인심이 즉 천심이고 이는 천운이 이르는 바이다. 고로 너희들은 도중(道衆)을 동원하여 전봉준과 협력, 이로써 교주의 원한을 풀어 드리고 나아가 우리 도의 큰 뜻을 실현시키라! 이로써 손병희 등이 이끄는 북접이 남접과 힘을 합쳐 봉기[4]에 가담했다.

가족

  • 부친 최종수(1804~1841)
  • 아들 최동희,최동호
    • 손자 최익환(1913~1999)최진환,최옥환
      • 증손녀 최인혜

주석

  1.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동학혁명〉, 최시형.
  2.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2007.4, 경인문화사) 315~316쪽.
  3. 신복룡. 《한국사 새로 보기》 초 2쇄판. 서울: 도서출판 풀빛. 168~179쪽쪽. ISBN 89-7474-870-3. 
  4. 양필승, 세계사 속에서 전봉준:한국민족주의의 형성과 문명사적 위기, 중앙일보 WIN, 1996년 7월호

관련 항목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