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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15일 (금) 16:00 판

충헌공 김익훈
김익훈의 묘소
성별남성
별칭자(字)는 무숙(懋叔), 호는 광남(光南), 시호는 충헌(忠獻)
학력한학 수학
직업문신, 군인, 정치인
종교유학
부모아버지 김반, 어머니 서씨
배우자안동김씨
자녀김만채 김만선
친척숙부 김집, 조부 김장생, 형 김익희, 형 김익겸, 조카 김만기, 조카 김만중, 종손녀 인경왕후, 종증손 김춘택
김익훈 (金益勳)
별명 자(字)는 무숙(懋叔), 호는 광남(光南), 시호는 충헌(忠獻)

김익훈(金益勳, 1619년 ~ 1689년 3월 11일)은 조선시대 후기의 외척이며 문신, 군인, 정치인으로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의 종조부였다. 본관은 광산으로 자(字)는 무숙(懋叔)이고 호는 광남(光南)이며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음보(蔭補)로 출사하여 부총관, 병마절도사 등을 지내고 보사공신 2등으로 광남군(光南君)에 봉군되었다.

서인(西人) 중진이자 척신계열의 정치인으로 남인을 공격하였으며, 1680년(숙종 6) 복창군(福昌君)·복희군(福喜君)·복평군(福平君) 등과 허견(許堅)과 모역을 꾀한다는 고변으로 경신대출척을 일으켜 김석주(金錫胄)와 더불어 남인들을 몰아내는 데 적극 가담하였다. 허견의 비리와 부패행위 정보를 입수하여 사건을 확대, 숙종의 외당숙 김석주와 함께 역모 사건을 날조하여 남인들을 일망 타진하려다가 서인노론, 소론으로 분당되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사계 김장생의 손자이자 김반(金槃)의 아들이다. 병자호란때 순절한 김익겸의 동생이며, 숙종의 장인 김만기, 서포 김만중 형제의 숙부였다. 예학자 김집의 조카였다.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생애

생애 초기

할아버지 사계 김장생
서인 예학의 종조였다.

광남 김익훈은 1619년 김장생의 손자이자 참판을 지내고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김반(金槃)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첨중추(僉中樞) 김진려(金進礪)의 딸이다. 예학자이자 북벌론자이며 효종민회빈 강씨의 사면 복권을 주장하던 신독재 김집의 조카였다. 인경왕후의 할아버지이자 병자호란 때의 순절신 김익겸은 그의 형이었다.

인경왕후의 친정아버지 김만기구운몽, 사씨남정기의 저자 김만중은 그의 조카였다.

우암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송시열이이와 할아버지 김장생, 숙부 김집의 학맥을 계승한 서인의 학자이며 성리학, 예학의 권위자였다. 우암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한 그는 인조병자호란이 발생하자 강화도로 피난갔다가, 여진족을 피해 다른 곳으로 이동하였다.

정치 활동

관료 생활

그 뒤 1648년(인조 26) 음보(蔭補)로 출사하여 음직으로 의금부도사에 제수되고 사옹원 직장을 거쳐 전생서 주부, 사복시 주부를 지냈다. 이후 여러 관직을 지내고 현종금부도사, 남원 부사, 사복시(司僕寺)의 첨정(僉正), 첨정으로 내승(內乘)을 겸했고 장성부사로 취임, 선정을 베풀어 거사비(去思碑)가 세워졌다.

이후 공조정랑, 한성서윤, 군기시첨정, 사도시정 등을 지내고 수원부사로 나갔다.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장악원정, 돈녕부도정을 거쳐 외직인 남원부사, 수원방어사, 충청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이 기간 중 송시열송준길의 예론을 문제삼아 종통과 적통으로 양분하려 한다는 윤선도, 허목 등을 비판, 남인에서 정도를 걷는 사람을 탄압한다, 사특한 간계를 꾸며 학자를 모해한다며 남인을 비판, 공격하였다.

1678년(숙종 4년)에는 광주부윤(廣州府尹)으로 부임하였으나 남인의 탄핵을 당했다. 어영대장에 임명되었다가 전라병사로 임명되었으나 또 반대파의 반대로 1680년(숙종 7) 다시 광주부윤에 임명되었다가 한성부 우윤 겸 부총관이 되었다. 1680년 경신대출척을 일으켰을 때 남인을 숙청하는 주동역할을 하고, 그 공으로 보사공신(保社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남인 제거 기도

식암 김석주
그와 함께 남인 제거 공작을 주도하였다.

그 후 형조참판, 어영대장(御營大將) 등의 요직을 역임하면서, 훈척세력의 일원으로서 송시열 등과의 협력관계를 바탕으로 힘을 얻어 병권을 장악하고 정국을 주도하였다. 1675년 조카 김만기의 딸이었던 세자빈숙종의 즉위와 함께 인경왕후가 되면서 왕비의 종조부인 김익훈은 어영대장으로 군권과 병권을 장악했다.[1] 이어 함경남도병마절도사로 나갔다. 그러나 그해 곧 남인이 집권하면서 그해 11월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였다.

그러나 남인 홍우원, 허목, 북인 윤휴 등이 예송을 빌미로 송시열을 사형시키려 하자 그는 김석주(金錫胄)와 모의하여 남인을 일망타진할 계획을 수립한다.

1680년(숙종 6) 김석주와 함께, 남인과 왕족 복창군(福昌君)·복희군(福喜君)·복평군(福平君) 등이 허견(許堅)과 모역을 꾀한다는 고변을 한다. 이로써 1680년(숙종 6년) 경신대출척을 일으켜 남인을 정계에서 축출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남인의 역모를 미연에 방지한 공로가 인장되어 보사공신(保社功臣) 2등에 녹훈되고, 광남군(光南君)에 책록되었다. 한성부 좌윤, 형조참판에 임명되고, 이후 광주 부윤·형조 참판·다시 어영대장 등을 지냈다.[1] 허견의 옥사윤휴, 허목, 허적남인 거물들을 숙청하는데 성공한다. 1681년(숙종 7) 경기총융사에 겸임되었다가 어영대장을 거쳐 1687년(숙종 14) 초 부총관, 동년 가을에 충청도병마절도사에 제수되었다.

노소 분당과 기사환국

1682년 김대비의 사촌인 김석주(金錫冑) 등과 함께 남인을 타도할 목적으로 허새(許璽), 허영(許瑛), 유명견(柳命堅) 등에게 반역을 하도록 계략을 꾸민뒤 서인으로 남인 오정위의 서녀를 첩으로 둔 김환을 시켜서 정보를 빼내오게 했다가, 오히려 서인노론, 소론으로 갈리는 원인이 되었다. 김석주와 함께 허새, 허영, 유명견이 처벌받게 하였으나, 서인 내부의 소장파인 한태동(韓泰東)·조지겸(趙持謙) 등이 이를 반대하여 서인 내부에서도 논란이 발생했고, 그를 역처벌하라는 탄핵 여론이 나타났다.

그 뒤 그가 남인을 가혹하게 처벌하면서 이에 반발하던 서인 소장파 박태유(朴泰維)는 그가 남인(南人)을 무자비하게 숙청한 데 반발, 가혹하고 방법이 끔찍하다며 이를 비판, 탄핵하다가 거제현령(巨濟縣令)으로 좌천되었다.

그런데 허새의 옥사 등이 김익훈과 김석주가 확대시킨 것으로 밝혀지면서 서인 내부에서는 논란이 벌어진다. 당은 다르지만 허위 날조로 상대방을 말살하려 해서는 안된다는 여론이 나오면서 이후 김익훈 처벌을 놓고 서인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이때 송시열은 처음에 김익훈의 처벌을 주장하였다가 한성으로 상경한 뒤 서인 노장파의 의견을 듣고 의견을 선회, 이태조의 시호 추시 문제 등 다른 문제를 거론하다가 결국 처벌을 반대하여 서인노론, 소론으로 분당하게 되었다.

이후 스승 송시열, 김수항 등이 숙종이 왕자 균(후일의 경종)의 세자 정호를 반대하다가 기사환국이 발생한다.

숙종 15년(1689) 후궁 장씨가 왕자를 낳음으로써 9년 만에 재집권한 남인들은 과거사 청산에 나섰다. 남인 허새·허영 등을 역모로 고변해 죽게 만든 임술고변의 기획자 김석주는 숙종 10년(1684) 이미 사망했으므로 김익훈이 주요 대상이었다. 남인들은 의금부에 국청을 설치하고 숙종 15년 2월 25일 김익훈 등 6인을 체포해 투옥했다. 이 날짜 『숙종실록』은 “한수만(韓壽萬)은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고 전하고 있다. 한수만은 김익훈의 사주로 전 병사(兵使) 김환 등과 함께 허새 등을 고변한 기패관(旗牌官:군영의 장교)이었다. 고변자 이회는 허새가 화약과 화전(火箭:불화살)을 주었다고 진술하다가 다섯 차례의 혹독한 형신(刑訊:형장을 치며 묻는 것) 끝에 “김익훈이 은 100냥을 주어 화약과 화전을 샀다”고 실토했다. 김환도 다섯 차례의 형신 끝에 ‘김익훈이 강상(江上)에다 집을 사서 주면서 사람들을 기찰(譏察)하게 했다”고 자백했다.[2]

형문과 죽음

그 뒤 형조참판(刑曺參判) 겸 오위도총부부총관이 되었다. 그러나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정권을 잡자, 공신호를 빼앗기고 평안북도 강계로 유배되었다. 이후 무고한 사람을 많이 죽였다는 죄명으로 압송되어 추국, 그해 3월 남인 형관으로부터 장형과 고문을 연이어 당하다가 형문을 받던 중 죽었다. 당시 그의 향년 70세였다.

김익훈은 죽은 김석주에게 정치공작의 책임을 전부 떠넘겼으나 끝내 장하(杖下)에서 물고(物故)당했다.[2] 사후 이조판서(吏曺判書)가 추증(追贈)되었다. 갑술환국 이후 우승지김만채가 아버지의 억울함을 하소연하여 복권되었으나 경종 즉위 후 소론이 집권하면서 추탈되었다. 1720년(경종 즉위년) 다시 손자 김진상(金鎭商)이 조부의 억울함을 상소했다가 그해 가을 전라 감사(全羅監司) 한지(韓祉) 등이 반론을 제기하는 등 논쟁거리가 되기도 했으나, 곧 묻혀졌다. 이후 영조 때 최종 복권되었다.

사후

아들 김만채 등은 그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유배되었고, 시신은 가까운 친지들에 의해 장사하고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무수리에 안장되었다. 묘(墓)는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무수리 산 4-3번지에 있다.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하면서 복권되고 후에 이조판서추증되었다. 그 뒤 경종소론이 집권하면서 1722년 추탈되었다가 영조 때인 1760년 최종 복권되었다.

가계

기타

허영 허새의 옥사가 확대된 사건이라는 것이 알려지자 서인 유생들은 사태를 확대시킨 김익훈과 김석주의 처벌을 원하였다. 그러나 상경한 송시열이 당초 약속을 뒤집고 김익훈과 김석주의 편을 들면서 실망한 서인 유생들은 윤선거윤증의 편으로 돌아서게 된다.

김익훈을 연기한 배우

함께 보기

주석

참고 문헌

  • 숙종실록
  • 연려실기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