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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9일 (토) 15:39 판
이억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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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61년 조선 한성부 |
사망 | 1597년 조선 칠천량 해전 |
사인 | 전사 (화기에 의해 사망) |
성별 | 남성 |
국적 | 조선 |
별칭 | 자는 경수(景受), 시호는 의민(毅愍) |
학력 | 선조조 무과 |
직업 | 무신, 군인 |
종교 | 유교 (성리학) |
부모 | 이경수 |
친척 | 양녕대군(5대조), 이순신 (친족) |
이억기(李億祺) | |
출생지 | 조선 경기도 한성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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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지 | 칠천량해전 |
복무 | 조선 |
복무기간 | 1578년 ~ 1597년 |
최종계급 | 종2품:가선대부 전라우도 수군절도사(종2품급) |
주요 참전 | 임진왜란 |
기타 이력 | 증 자헌대부(정2품) 병조판서(정2품) |
이억기(李億祺, 1561년~1597년 6월 19일)는 조선 중기의 왕족 출신 무신(武臣), 군인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수(景受), 시호는 의민(毅愍)이다.[1] 전라우도수군절도사로 이순신, 원균, 권율 등과 함께 왜군 수군과 교전 중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의 명령에 의하여 출정했다가 전사했다. 사후 증 자헌대부(정2품)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완흥군(完興君)에 추봉되었다.
생애
이억기는 1561년 양녕대군의 4대손 이연손의 아들로 태어났고, 어렸을 때부터 무예가 뛰어났으며 17세 때 사복시내승(司僕寺內乘)이 되고 이후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경흥부사(慶興府使), 온성부사 등 국방상의 요직을 역임하여 북방의 여진족을 격퇴하는 데 큰 공을 세워 무인으로서의 능력을 인정받게 된다.
1591년 임진왜란 때는 전라우도 수군절도사(全羅右道水軍節度使)가 되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李舜臣),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원균(元均)과 연합함대를 구성한 뒤 조선 수군의 기동타격군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여 일본 함대와의 여러 해전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조선 정부와 원균의 무리한 공격 명령을 받고 휘하의 함대를 이끌고 일본군을 공격하다가 칠천량 해전에서 패하여 최호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사후에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이 되어 증 자헌대부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고 완흥군(完興君)으로 추봉되었다. 의민(毅愍)이라는 시호가 내려져 의민공(毅愍公)이 되었다. 1600년 여수의 충민사(忠愍祠)에 이순신과 함께 제향되었다.
연관인물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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