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양: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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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사를 탈출한 윤석양은 [[한국기독교협의회]]를 찾아가 양심선언문과, 80일간의 보안사 체험을 정리했다. [[9월 24일]] 저녁에는 [[언론노보]] 기자로 일하던 대학 1년 선배인 양정철에게 전화를 걸었고, 다음 날 [[종로]]에서 만나 보안사에서 사찰자료를 들고나온 사실을 밝혔다. 자료를 받은 양정철은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 사무실에 돌아와 [[권영길]] 언노련 위원장 등 간부들과 심야대책회의를 벌였다. [[9월 26일]] 양정철은 [[한겨레]] 경제부에 근무하던 대학 학보사 선배인 이인우 기자에게 사찰 자료를 건넨다. 이인우는 성유보 편집국장에게 내용을 보고했고, 김종구 경찰청 출입기자, 이인우 기자, 김성걸 기자, 곽윤섭 사진부 기자로 특별 취재팀이 구성됐다. 사전 취재를 통해 취재팀은 윤석양의 양심선언 후 서울대 근처 모비딕이라는 호프집을 위장 운영하던 보안사의 사찰 활동을 확인해 보도하게된다.<ref>{{웹 인용|제목=‘모비딕’의 숨은 또 다른 주인공 |url=http://www.hani.co.kr/arti/culture/movie/484340.html |날짜= 2011-6-24 |저자=김도형 선임기자 |출판사=한겨레 |확인일자=2012-09-08 }}</ref>
보안사를 탈출한 윤석양은 [[한국기독교협의회]]를 찾아가 양심선언문과, 80일간의 보안사 체험을 정리했다. [[9월 24일]] 저녁에는 [[언론노보]] 기자로 일하던 대학 1년 선배인 양정철에게 전화를 걸었고, 다음 날 [[종로]]에서 만나 보안사에서 사찰자료를 들고나온 사실을 밝혔다. 자료를 받은 양정철은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 사무실에 돌아와 [[권영길]] 언노련 위원장 등 간부들과 심야대책회의를 벌였다. [[9월 26일]] 양정철은 [[한겨레]] 경제부에 근무하던 대학 학보사 선배인 이인우 기자에게 사찰 자료를 건넨다. 이인우는 성유보 편집국장에게 내용을 보고했고, 김종구 경찰청 출입기자, 이인우 기자, 김성걸 기자, 곽윤섭 사진부 기자로 특별 취재팀이 구성됐다. 사전 취재를 통해 취재팀은 윤석양의 양심선언 후 서울대 근처 모비딕이라는 호프집을 위장 운영하던 보안사의 사찰 활동을 확인해 보도하게된다.<ref>{{웹 인용|제목=‘모비딕’의 숨은 또 다른 주인공 |url=http://www.hani.co.kr/arti/culture/movie/484340.html |날짜= 2011-6-24 |저자=김도형 선임기자 |출판사=한겨레 |확인일자=2012-09-08 }}</ref>


윤석양은 [[1990년]] [[10월 4일]] 한국기독교협의회 인권위 사무실에서 보안사 민간인 사찰 내용을 폭로했다. 이로써 당시 정국의 최대 현안이었던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의 관철과 [[이상훈]] 국방부장관, 보안사령관이 경질되고 보안사령부 명칭을 [[기무사령부]]로 바꾸게 했다. 폭로 후 한국기독교협의회의 보호를 받던 윤석양은 [[1991년]] 5월 지역 신문사 편집부로 자리를 옮겨 [[1992년]] 3월까지 일했다. 지역신문 기자로 일하던 10개월 동안 지역 주민들의 삶을 체험하며, 민중들의 구체적 현실을 체화했다. 기자 생활을 하던 중 관공서와 경찰서 등에서 취재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ref> {{저널 인용|저자=양승균 |날짜=1992-11 |제목=윤석양의 수배일기 |저널=월간 말 |권= |호=11월 |issn= |url= |형식=월간지 |확인날짜=2012-09-07 }}</ref>
윤석양은 [[1990년]] [[10월 4일]] 한국기독교협의회 인권위 사무실에서 보안사 민간인 사찰 내용을 폭로했다. 이로써 당시 정국의 최대 현안이었던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의 관철과 [[이상훈 (1933년)|이상훈]] 국방부장관, 보안사령관이 경질되고 보안사령부 명칭을 [[기무사령부]]로 바꾸게 했다. 폭로 후 한국기독교협의회의 보호를 받던 윤석양은 [[1991년]] 5월 지역 신문사 편집부로 자리를 옮겨 [[1992년]] 3월까지 일했다. 지역신문 기자로 일하던 10개월 동안 지역 주민들의 삶을 체험하며, 민중들의 구체적 현실을 체화했다. 기자 생활을 하던 중 관공서와 경찰서 등에서 취재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ref> {{저널 인용|저자=양승균 |날짜=1992-11 |제목=윤석양의 수배일기 |저널=월간 말 |권= |호=11월 |issn= |url= |형식=월간지 |확인날짜=2012-09-07 }}</ref>


2년여 수배생활 끝에 [[1992년]] [[9월 23일]] 오후 9시 20분 [[대구시]] 남구 대명10동 1647-7 박서방회집에서 윤석양후원사업회 양승균 사무국장과 저녁을 먹던 중 기무사와 대구 헌병대 요원 등 7명에게 연행되어 군형법상 군무이탈 혐의로 육군 3사단 헌병대 영창에 구속, 수감되었다.
2년여 수배생활 끝에 [[1992년]] [[9월 23일]] 오후 9시 20분 [[대구시]] 남구 대명10동 1647-7 박서방회집에서 윤석양후원사업회 양승균 사무국장과 저녁을 먹던 중 기무사와 대구 헌병대 요원 등 7명에게 연행되어 군형법상 군무이탈 혐의로 육군 3사단 헌병대 영창에 구속, 수감되었다.

2013년 2월 2일 (토) 12:45 판

윤석양(1966년 ~ )은 1990년 10월 4일 당시 대한민국 육군 이등병 신분으로 보안사 민간인 불법 사찰 내용양심선언해서, 그해 가을 노태우 정권 퇴진 운동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된 사람이다.

생애 초반

전라북도 익산에서 2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이후 서울로 이사와서 초등학교 6학년때 어머니를 잃고 누나들의 보살핌 속에 고려고등학교를 나와 1985년 한국 외국어 대학교 노문학과에 입학했다. 1년 동안 외대 학보사에서 학생기자로 활동했다. 장래 패기있는 신문 기자를 꿈꾸며 학보사 활동을 했으나 뜻이 맞지 않아 이후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외국어 대학교 학생 운동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1988년에는 CA 그룹 학생회장 후보 선거운동본부 조직국장, 혁명적 노동자 계급투쟁동맹(혁노맹)의 전신인 “혁명의 불꽃” 그룹 선동국장을 맡기도 했다. 경기도 소래 ‘작은자리’에서 일주일간 개최된 혁노맹 결성대회에 참가하고 있던 1989년 8월 19일 아버지가 죽었다.[1]

운동권 생활에 지쳐가던 중 1990년 5월 1일 대한민국 육군 현역병으로 입대했다. 3사단 훈련소에서 6주간 훈련을 받고 1990년 6월 20일 강원도 철원의 자대에 배치받아 소대원으로 복무하던 중 7월 3일 연대 인사과장에게 불려간다. 대공상담소라고 적힌 예하 보안부대에 가서 이승섭 계장과 김효수 반장에게 혁노맹 활동과 다른 조직원의 신상에 대해 심문을 받았다. 이후 서울 서빙고 분소로 옮겨 7월 5일부터 이승섭 계장과 이덕렬 부장, 김효수 반장 등에게 이상재, 정헌, 임찬수 등 군투입자와 중앙위원 거주지 계속 심문을 받았다. 대학교 앞에서 현장 활동을 거쳐 보안사 편에서 일하기로 신임을 얻고 8월 22일에는 장자동 보안사로 이동했다. 다시 서빙고로 와서 보안사 대공처 수사3과 분석반에서 김용성 과장, 이승섭 계장, 이덕렬 부장, 박대호, 조재은과 함께 근무하던 중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등 1,303명의 민간인 사찰 카드와 컴퓨터 디스켓 3통 등을 가방에 넣어 9월 23일 새벽에 보안사를 탈출했다.[2]

양심선언

보안사를 탈출한 윤석양은 한국기독교협의회를 찾아가 양심선언문과, 80일간의 보안사 체험을 정리했다. 9월 24일 저녁에는 언론노보 기자로 일하던 대학 1년 선배인 양정철에게 전화를 걸었고, 다음 날 종로에서 만나 보안사에서 사찰자료를 들고나온 사실을 밝혔다. 자료를 받은 양정철은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 사무실에 돌아와 권영길 언노련 위원장 등 간부들과 심야대책회의를 벌였다. 9월 26일 양정철은 한겨레 경제부에 근무하던 대학 학보사 선배인 이인우 기자에게 사찰 자료를 건넨다. 이인우는 성유보 편집국장에게 내용을 보고했고, 김종구 경찰청 출입기자, 이인우 기자, 김성걸 기자, 곽윤섭 사진부 기자로 특별 취재팀이 구성됐다. 사전 취재를 통해 취재팀은 윤석양의 양심선언 후 서울대 근처 모비딕이라는 호프집을 위장 운영하던 보안사의 사찰 활동을 확인해 보도하게된다.[3]

윤석양은 1990년 10월 4일 한국기독교협의회 인권위 사무실에서 보안사 민간인 사찰 내용을 폭로했다. 이로써 당시 정국의 최대 현안이었던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의 관철과 이상훈 국방부장관, 보안사령관이 경질되고 보안사령부 명칭을 기무사령부로 바꾸게 했다. 폭로 후 한국기독교협의회의 보호를 받던 윤석양은 1991년 5월 지역 신문사 편집부로 자리를 옮겨 1992년 3월까지 일했다. 지역신문 기자로 일하던 10개월 동안 지역 주민들의 삶을 체험하며, 민중들의 구체적 현실을 체화했다. 기자 생활을 하던 중 관공서와 경찰서 등에서 취재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4]

2년여 수배생활 끝에 1992년 9월 23일 오후 9시 20분 대구시 남구 대명10동 1647-7 박서방회집에서 윤석양후원사업회 양승균 사무국장과 저녁을 먹던 중 기무사와 대구 헌병대 요원 등 7명에게 연행되어 군형법상 군무이탈 혐의로 육군 3사단 헌병대 영창에 구속, 수감되었다.

2년간의 수배생활 동안 노동을 통한 건강한 운동적 삶을 살려고 성실히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나 행동에 나서려 할 때마다, 군입대 후 보안사의 강요 때문에 몸담았던 학생운동조직의 수사에 협조한 기억이 나의 뒷덜미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 사찰사건을 폭로 후 2년간 수배생활을 하다가 기무사 요원들에게 연행되기 전

출소 이후

1994년 10월 2년 형기를 마치고 공주교도소에서 만기출소 후 복학해서 학교를 졸업하고, 상명여대를 중퇴한 뒤 반월공단에서 4년간 노동운동을 하며 여공생활을 했던 김미화와 1996년 6월 14일 결혼했다.

기타

윤석양의 어머니가 죽고 난 후 아버지와 결혼했던 민인숙은 이후 한준수 전 연기군수와 재혼했다.[5]

작품

  • 2011년 영화 모비딕(박인제 감독)의 실제 주인공

주석

  1. 정희상 (1990년 11월). “분단조국 그리고 윤석양의 삶”. 《월간 말》 (월간지) (11월). 
  2. 정희상 (1990년 11월). “나에겐 아직도 갚아야 할 빚이 있다”. 《월간 말》 (월간지) (11월). 
  3. 김도형 선임기자 (2011년 6월 24일). “‘모비딕’의 숨은 또 다른 주인공”. 한겨레. 2012년 9월 8일에 확인함. 
  4. 양승균 (1992년 11월). “윤석양의 수배일기”. 《월간 말》 (월간지) (11월). 
  5. 심규상 (2005년 2월 11일). “내부고발자 실상 알면 양심선언 못해”. 오마이뉴스. 2012년 9월 8일에 확인함. 

함께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