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무열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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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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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개소문 (드라마)|연개소문]]》([[SBS]] ~ [[2006년]],[[2007년]] 배역 : [[김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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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백 (드라마)|계백]]》([[MBC]], [[2011년]] ~ [[2011년]] 배우:[[이동규]])
* 《[[대왕의 꿈]]》([[KBS]], [[2012년]] ~ [[2013년]] 배역 : [[최수종]], [[채상우]])
* 《[[대왕의 꿈]]》([[KBS]], [[2012년]] ~ [[2013년]] 배우:[[최수종]], [[채상우]])


== 기타 일화 ==
== 기타 일화 ==

2013년 1월 29일 (화) 19:30 판

신라 태종 무열왕
新羅 太宗 武烈王
신라의 제29대 국왕
재위 654년 ~ 661년
전임 신라 진덕여왕
후임 신라 문무왕
부왕 문흥대왕
신상정보
부친 문흥대왕
모친 문정태후
배우자 문명왕후,영창부인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604년 ~ 661년 음력 6월)은 신라의 제29대 (재위 654년 ~ 661년)이자 신라의 정치가였다. 성은 김(金), 는 춘추(春秋)이다. 김용춘문정태후(文貞太后) 김씨의 아들이며 진골귀족 세력으로 선덕여왕·진덕여왕 시기에 국가의 중역으로 활약하였으며, 대당 외교를 주도하였다. 진덕여왕 사후 국인들의 추대로 진골 최초의 왕으로 즉위하였으며, 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졌다.

진평왕 사후 한때 유력 왕위계승자로 지목되어 사촌누이이자 이모인 선덕여왕의 견제를 받았으나 그의 재주를 알아보고 당나라고구려, 일본 등에 외교관으로 파견했다. 고구려백제 등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신라는 자구책으로 외교활동을 했고, 그는 외교관으로서 중국의 통일왕조인 수나라, 당나라와의 연합을 추진하여 성사시켰다. 무열왕의 부계는 진지왕의 자손이고 모계는 진평왕의 자손으로 부계와 모계 모두 신라의 왕족인 성골이었다. 그러나 무열왕 이후 부계만이 왕족인 진골 계열이 왕위를 계승하였으므로 상징적인 의미에서 그를 진골의 시조로 간주한다.

김유신의 처남이자 장인이 된다. 김유신은 그가 왕위 계승자라는 점을 내다보고 자신의 여동생을 시집보냈고, 본부인의 사후 무열왕의 딸을 재취 부인으로 맞이했던 것이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전에 사망하였으나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진 군주이기도 했다. 이견의 소지가 있으나 보통 한국 역사상 조종(祖宗)법 묘호를 받은 첫 임금이기도 하다.

생애

생애 초반

유년기

김춘추604년 신라 금성에서 태어났다. 진지왕의 손자로 아버지는 진지왕의 아들 김용춘(金龍春, 또는 김용수{金龍樹})이며, 어머니는 진평왕의 딸 천명공주(天明公主, 또는 천명부인(天明夫人)) 김씨이다. 원래 용춘과 춘추의 가계는 성골이었으나, 어느 시기·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사료에 처음 등장하는 김춘추의 신분은 진골로 나타나고 있다. 진지왕이 재위 4년만에 퇴위되었기 때문에 진골로 강등되었다고 보기도 하며, 김춘추가 진골인 김유신의 누이와 혼인하였기 때문에 강등되었다고 보기도 한다.[1]

김춘추는 의표(儀表)가 영특하고 어려서부터 제세(濟世)의 뜻을 가지고 있었다.[2] 소년 춘추 역시 궁궐에서 자라났고 화랑도에 가입하여 풍월주를 지내기도 했다. 그는 같은 불우한 처지였던 가야의 왕족 출신 김유신과 친밀해졌고 이후 김유신은 그와 그의 아들 법민을 도와 《삼국통일》의 뜻을 실천해 나간다

정략 결혼

김춘추김유신의 누이인 문희와 혼인하였는데, 문희와의 혼인에 얽힌 설화가 전해진다. 기록에 따르면 김춘추김유신과 함께 김유신의 집 앞에서 축국을 즐겼는데, 유신이 고의로 춘추의 옷깃을 밟아 떨어지게 하였다. 그래서 춘추는 유신의 집에서 옷을 수선하게 되었다. 유신은 보희와 문희라는 두 누이가 있었는데, 전날밤 보희가 남산 위에서 소변을 보니 금성 전체가 소변에 잠기는 상서로운 꿈을 꾸었다. 문희는 보희에게서 이 꿈을 샀는데, 옷을 수선하기 위해 보희가 방에 들어서자 코피가 나서 수선하지 못하였으며, 대신 문희가 나서 옷을 수선하고 춘추와 동침하였다. 이후 춘추는 자주 유신의 집에 내왕하여 문희와 교제하다가 문희가 임신하게 되었고, 유신은 문희의 행실이 문란하다 하여 불태워 죽이려 하였다. 이를 우연히 보게 된 왕은 자초지종을 듣고 문희와 춘추를 혼인시키게 되었다고 한다.[3] 이후 문희의 언니 보희도 김춘추의 소실로서 들어오게 되었다.

이들의 결혼을 통해 몰락한 진지왕계 왕실의 정치적 영향력과 가야계 진골귀족의 군사력이 결혼동맹을 통해 연결되었다고 평가된다. 이를 통해 김춘추김유신으로 대표되는 신귀족 세력이 성립되어 구귀족 세력과 균형을 이루었다.[3]

그의 즉위에는 오래 전부터 상당히 복잡한 정치적 문제가 있었다. 김춘추김유신의 누이인 문희와 정략적인 측면에서 혼인함으로써, 왕위에서 폐위된 진지왕계와 신라에 항복해 새로이 진골귀족에 편입된 금관가야계간의 정치적·군사적 결합이 이루어졌다[3]는 것이다.진지왕계인 김용춘·김춘추김유신계의 군사적 능력이 그들의 배후세력으로 필요하였다. 또한 금관군주 김구해계(金仇亥系)인 김서현·김유신김춘추계의 정치적 위치가 그들의 출세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이러한 상호이익에 입각한 양파의 정치적 결탁은 신라 중고왕실(中古王室)의 진골귀족 내에서 새로운 신 귀족집단을 형성하게 되어 성골계로 대표되는 구 귀족집단의 견제와 반발을 받았다.

관료 활동

진평왕이 죽자 그는 왕위 계승권자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6촌 누나이자 이모인 선덕에게로 왕위가 돌아갔고, 이후 그는 선덕여왕의 즉위 초기 경계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나 그의 재능을 알아본 선덕여왕은 그를 외교 사절로 고구려백제, 당나라에 파견하였다. 6세기 이래 비약적인 팽창을 이룬 신라백제고구려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중국의 통일왕조인 수(隋)·당(唐)과의 연결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김춘추는 주로 외교분야에서 활동했다.

춘추는 선덕여왕 시기에 활발한 정치 활동을 하였다. 선덕여왕은 구 진골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김춘추김유신을 위시한 신귀족 세력을 중용하였는데, 춘추와 유신은 이를 통해 중앙 정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642년에 그는 이찬의 관등에 있었는데, 백제대야성(경상남도 합천)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때 대야성의 성주는 춘추의 사위인 이찬 품석이었으며, 성중에는 딸 고타소(古陀炤)도 있었으나 모두 백제의 장군 윤충에 의해 살해당했다. 백제의 장군 윤충대야성 성주 김품석고타소의 목을 베어 말에 실어 금성으로 보냈고 김춘추선덕여왕은 이를 목격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춘추는 고구려와의 연합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왕에게 건의, 직접 고구려에 사신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고구려와의 외교는 진흥왕 때 획득한 영토의 반환 문제로 결렬되었고, 오히려 고구려에 억류되어 있다가 김유신의 무력시위와 고구려의 대신 선도해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외교 활동

647년에 구귀족세력인 상대등 비담(毗曇) 등이 정변을 일으키자 김유신 형제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진압시킬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선덕여왕이 사망하였고, 마지막 성골인 진덕여왕이 국인에 의해 옹립되었다. 춘추와 유신은 진덕여왕을 보위하여 정권을 완벽하게 장악하였다. 정권을 장악한 춘추는 당나라와 적극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는데, 이듬해인 648년에 아들 문왕과 함께 직접 당나라에 입조하였다.

김문왕당나라에 남아 당나라와 적극적으로 외교를 취할 수 있게 하였으며, 국내에서도 당나라의 연호를 사용하고 중국의 복색을 받아들이는 등 [4]내정 개혁과 함께 친당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러한 외교의 성과로 춘추는 당나라의 대백제 지원군을 약속받았으며, 왕권을 강화시키는 다양한 개혁을 수행할 수 있었다.[3]

김춘추는 웅변에 능하고 외교적 수완이 뛰어났고, 여러 차례 수나라당나라에 다녀왔다. 649년 김춘추당나라에 건너가 백제 정벌을 위한 군대를 요청해 당 태종으로부터 군사 지원을 약속받았다. 또 당나라의 문물과 제도를 신라에 도입하게 하여 발전시켰다. 관직은 대아찬을 거쳐 각간에 이르렀다.

654년, 진덕여왕이 사망하자 진골귀족 세력은 상대등 알천에게 섭정을 청하였으나 알천은 이를 사양하고 춘추에게 왕위에 오를 것을 권하였다. 춘추는 이를 사양하다가 마침내 국인의 천거를 받아 왕에 즉위하였다.

치세

제도 정비

무열왕은 진골로서는 최초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 직후 무열왕은 왕위 계승권을 박탈당하고 죽은 아버지 김용춘을 문흥대왕(文興大王)으로, 어머니 천명공주문정왕후(文貞王后)로 추봉하여 왕권의 정통성을 확립하였다. 즉위 직후 당나라에 책봉고명사신을 파견하고, 당나라 고종으로부터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신라왕(新羅王)의 책봉을 받았다. 이후 매년 당나라에 사신을 정기적으로 파견하였다. 또한 백제일본의 외교 관계를 인식하여 즉위년인 654년 고구려에도 특별 사신을 파견했으나 거절당하였고, 이후 당나라와의 외교관계에 치중하게 된다. 그는 당나라수나라 및 과거 열조들이 고구려에 당한 수모를 상기시켰고, 이는 성공을 거두었다. 친당외교를 통해 당나라를 후원세력으로 삼고 내정에서는 측근세력의 정치적 포석을 통해 왕권을 안정시킨 다음, 고구려·백제에 대한 전쟁을 수행하였다.

내부 체제 정비도 단행, 이방부령(理方府令) 양수(良守)에게 명하여 율령(律令)을 발표하게 하고, 지방행정에 관련된 조항인 이방부격(理方府格) 60여 조를 제정하고, 지방관을 중앙에서 직접 파견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655년에는 장남인 법민(法敏)을 태자에 책봉하였으며, 아들 문왕(文王)을 이찬으로, 노차(老且)를 해찬(海飡)으로, 인태(仁泰)를 각찬(角飡)으로, 지경(智鏡)·개원(愷元)을 각각 이찬으로 삼았고, 이듬해에는 당나라에 파견되었다가 귀국한 차남 김인문군주(軍主)로, 658년에 다시 당나라에서 귀국한 셋째 아들 문왕을 집사부 중시(中侍)에 새로이 임명하는 등 친족을 중심으로 내각을 구성하여 왕권을 안정시켰다. 또한 656년(무열왕 3)에는 신라의 개국 공신인 서라벌 6부 촌장을 왕으로 추존하였다. 이알평은 은열왕(恩烈王), 소벌도리는 문열왕(文烈王), 정지백호는 감문왕(甘文王), 손구례마는 문의왕(文義王), 배지타는 장열왕(壯烈王), 설호진은 장무왕(壯武王)으로 각각 추봉하였다. 이는 신라 6부의 귀족가의 시조에게 왕을 추존함과 동시에 이들에게도 진골의 지위를 부여하여 진골계를 강화하려는 그의 의도였다.

그리고 그의 즉위에 절대적인 기여를 한 김유신에 대해서는 660년상대등으로 임명해 왕권을 보다 전제화(專制化)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태종무열왕이 즉위하기 전인 중고시대의 상대등은 귀족들의 모임인 화백 회의의 대표자로서 왕권을 견제하는 존재이거나 왕위계승 경쟁자로서의 자격이 있었다. 그러나 무열왕 이후 상대등을 왕이 임명함으로써 화백회의혜공왕조 이전까지 왕권 아래에 복속시켰다.

통일 전쟁 준비

이러한 왕권을 바탕으로 무열왕은 고구려 및 백제와 본격적인 전쟁에 참여하였다. 당나라와의 적극적인 공조를 통해 고구려 및 백제의 침입을 방어하는 한편, 659년부터는 백제 정벌을 추진하였다. 660년 3월, 당나라소정방이 13만의 군대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덕물도에서 신라와 공조하였다. 기벌포로 상륙한 당나라군이 백제의 주력군을 격파하였고, 5월에는 무열왕과 김유신이 5만 명의 정병을 이끌고 이를 지원하여 황산벌 전투에 참여하였다. [5]7월에 사비가 함락되고 의자왕이 항복하면서 백제는 멸망하였으며, 무열왕은 의자왕이 따르는 술을 받고 사위 부부를 살해한 모척, 검일을 처형하여 복수하였다.

660년 11월에는 금성으로 귀환하여 논공행상을 하고, 백제의 관료들에게도 능력에 따라 관직을 내리는 등 회유책을 쓰기도 하였다. 이후 백제 지역에서는 백제 부흥군과 신라·당군의 전쟁이 계속 이어졌으며, 그리고 백제 멸망(660년 7월) 이후에 항복해온 백제의 관료들도 처벌하지 않고 구 백제 지역을 경영하기 위해 압독주를 설치하였다.

한편 고구려는 655년에 신라를 공격하여 33개 성을 공취하는 등 적대적인 정책을 취하였으나 당나라의 견제를 받아 신라를 적극적으로 공격하지는 못하였다. 660년 11월에는 백제 정벌을 틈타 칠중성을 공격해와 군주 필부가 전사하기도 하였다.


말년

백제를 정벌한 뒤 그는 경상북도 경산에 압독주(押督州)를 설치하고 도독을 임명하여 백제지역을 관리하게 했다. 그러나 당나라에서 사비성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도독을 의자왕의 아들 부여 융을 임명하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신라 조정에서 항전과 반발 여론이 나왔으나 무열왕은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였다. 신라백제를 정벌하는 동안 불안감을 느낀 고구려는 각각 신라를 침공한다. 660년 가을 고구려신라의 칠중성(七重城, 지금의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을 공격해왔다. 661년 고구려의 장군 뇌음신(惱音信)은 말갈군과 연합하여 술천성(述川城, 지금의 경기도 여주)을 공격하고 다시 북한산성을 공격하였다.

북한산성 성주인 대사(大舍) 동타천이 산성의 함락을 막아 무열왕은 동타천의 관등을 대나마(大奈麻)로 승진시켰다. 이 해에 압독주를 다시 가야지역인 대야성(大耶城)로 다시 옮기고 아찬(阿飡) 종정(宗貞)을 도독에 임명함으로써 정복된 백제지역의 관리에 적극성을 보였다. 한편 백제의 귀족들은 다시 일본에 구원군을 요청하였고, 사비성을 중심으로 부여 풍, 검모잠 등이 백제부흥군을 거병하였다. 무열왕은 정벌군을 편성하던 중 음력 6월 병으로 사망했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59세였다. 시호는 무열(武烈), 신라 최초로 묘호를 올려 태종(太宗)이라 하였다. 영경사(永敬寺)의 북쪽에 묻혔다.

사후

금성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를 지냈다. 시호는 무열(武烈)이며, 묘호(廟號)는 태종(太宗)이다. 문무왕은 그에게 특별히 태종의 묘효를 추봉하면서, 성한에게는 태조, 박혁거세를 시조로 하고 종묘를 세웠다.

일제 강점기 당시 그의 비석은 잘려나갔으며 귀부와 거북이 이수부분만이 남아있어 판독불능이었으나, 거북 이수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 새겨져 있어 그의 묘가 무열왕릉임을 판독하였다.

화랑세기에서의 기록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태종무열왕의 생애와 몇가지 사실에 대해서 통설과 전혀 다른 사실을 전하고 있다.

  • 진지왕에게는 용수와 용춘 두 아들이 있었고, 동생인 용춘이 천명공주와 혼인하여 춘추를 낳았으나 용춘이 일찍 사망하자 다시 용수와 천명공주가 재혼하여 춘추가 용수의 양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용춘과 용수는 형제인 두 사람이 되나, 《삼국사기》를 비롯한 전통적인 사료의 기록 및 해석에 따르면 용수는 용춘의 이명(異名)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황룡사 중수기에는 용춘이 《화랑세기》의 기록과 달리 후대에도 생존해 있는 상태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화랑세기》의 위서론의 중요한 근거 가운데 하나이다.[6]
  • 진지왕에게는 용수와 용춘 두 아들이 있었고, 형인 용수가 천명공주와 혼인하여 춘추를 낳았으나 후에 동생 용춘이 천명공주를 아내로 삼고 춘추를 아들로 삼았다고 한다[7]

이에 따르면 용수와 용춘이 형제인 두사람이 되나, 기존의 전통적인 사료 및 해석에 의하면 용수는 용춘의 이명(異名)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에는 용춘이 200명의 소장을 이끌고 황룡사구층탑을 645년에 완공하였다고 한다.《화랑세기》의 기록에 의하면 용춘은 태화 원년(647년) 8월 세상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춘추가 왕위에 즉위하자 갈문왕으로 추존하였다고 한다.[7]

평가

신라인들은 백제의 정벌과 고구려를 상대로 외교를 감행한 것, 나-당 동맹을 성사시켜서 백제, 고구려 정복의 기틀을 마련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또한 가야는 이미 진흥왕때 정벌하였으나, 가야계와 혼인을 통해 유대관계를 형성한 것 역시 가야계를 완벽하게 흡수한 것으로 인식했다. 따라서 그의 사후에는 시호 '무열' 외에 특별히 '태종'이라는 '묘호'를 부여하였다. 묘호는 중국에서 종묘에 제사지낼 때 사용하던 특수한 호칭으로 그는 신라 역사상 묘호를 받은 최초의 군주였다.[8]

그는 외교력과 수완을 발휘하여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외세를 끌어들어 민족사적 강역을 축소시켰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그 밖에 신라가 삼국통일을 할 무렵 민족이라는 개념도 없었고, 고조선-부여 계열인 고구려, 백제와, 고조선-진-진한과 흉노 계열이며 스스로 중국인의 후손으로 인식한 신라인이나 김춘추 사이에 동류 의식이 있었는가에 대한 회의도 제기되고 있다. [9][10][11][12]

그러나 중국사서(史書) 중 <구당서>만 살펴보더라도 중국인들이 보기에는 신라, 고구려, 백제가 서로 풍속이 비슷한 ‘삼한의 후예’였지만, 실제로는 신라인들은 고구려백제를 동족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 또한 세 나라 지배층 사이에 신화나 제사 체계는 물론 언어라든가 행정 체계 등이 서로 다른데다 누적된 적대감까지 가미돼 동족이 아닌 경쟁세력일 뿐이었다는 것, 5세기 후반부터 신라백제고구려를 공동의 적으로 삼아 서로 가까워졌으나 540~550년대에 이르러 한강 유역과 가야를 둘러싼 갈등이 계기가 되어 다시 적대자가 되고, 554년신라와의 전투에서 백제의 제26대 왕(재위 523∼554)이 전사하자 불구대천의 적이 되고 말았다는 것, 마찬가지로 642년김춘추연개소문 사이 교섭의 결렬이 보여주었듯이, 신라죽령 바깥으로 손을 뻗지 말아야 하고 오늘날 영남 지역만을 차지하는 약소국으로 남아야 한다는 고구려의 제국주의적 야망과 한강유역을 잃고서는 패망을 면할 수 없다는 신라 지배자들의 인식이 타협의 여지 없이 상충됐다는 것 등이 김춘추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로 작용하고 있다.

사방의 적에 둘러싸여 궁지에 몰린 신라는, 외세를 끌어들였다기보다는 수나라의 수치스러운 패배를 복수하여 천하통일을 완수하기 위해 어차피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요동을 복속시키기로 마음먹은 당나라 태종(재위 626-649)의 대외 정책에 편승했을 뿐이었다는 것, 그 결과는 ‘만주의 상실’이라기보다는 전쟁을 종식시키고 영토를 확충시킨 신라 문화의 전례 없는 융성과 고구려의 계통을 이은 발해의 등장이었다. 서로 종족적으로 이질적이고 정치적으로 적대적이었던 신라발해는 나중에 각각 고려·조선금나라 계통으로 이어져 한반도요동 문화의 요람이 됐다. 백제 정복으로 그 영토가 확충된 신라가 후대의 한반도 통일국가인 고려, 조선의 태반이 됐다는 의미에서는, 이미 7세기 말에 신라인들이 사용했던 ‘일통’ ‘통일’ 같은 용어를 계속 쓰는 것이 충분히 가능해졌다는 평가이다. [13]

가족 관계

  • 아버지 : 김용춘
  • 어머니 : 천명공주(天明公主, 진평왕의 딸)
    • 왕후 : 보라궁주(寶羅宮主, 양명공주의 딸)
      • 딸 : 고타소(古陀炤) - 김품석에게 하가
    • 왕후 : 문명왕후(文明王后) 김씨 - 이름은: 김문희, 소판(蘇判) 김서현(金舒玄)의 차녀
      • 아들 : 김법민(金法敏) - 제 30대 왕 문무왕이 된다.
      • 아들 : 김인문(金仁問) - 김주원김헌창의 조상이 된다.
      • 아들 : 김문왕(金文王)
      • 아들 : 김노차(金老且)
      • 아들 : 김지경(金智鏡)
      • 아들 : 김개원(金愷元)
      • 아들 : 선원전군(仙元殿君)
      • 딸: 지소부인(智炤夫人) - 김유신이 60살 되던 해에 하가
    • 왕후 : 보희부인(寶姬夫人,金寶姬) - 소판(蘇判) 김서현(金舒玄)의 장녀
      • 아들 : 김지원(金知元)
      • 아들 : 김개지문 (金皆知文), 김지원
      • 딸 : 요석공주(瑤石公主) - 학자 설총의 어머니
    • 후궁 : 용보(龍寶) - 13대 풍월주 용춘공(龍春公)의 딸
      • 아들 : 김차득(金車得)
      • 아들 : 김마득(金馬得)
    • 후궁 : 용태(龍泰) - 13대 풍월주 용춘공(龍春公)의 딸
    • 후궁 : 보룡(寶龍) - 12대 풍월주 보리공(菩利公)의 딸
      • 아들 : 당원전군(幢元殿君)
    • 후궁 : 여씨(呂氏)

관련 작품

드라마

기타 일화

  • 그의 시호 중 묘호인 '태종'이라는 것은 지증마립간의 시호 지증과 함께 중국식 시호를 받아들인 또다른 증거로 지목되기도 한다. 지증마립간의 지증이 중국식 시호를 도입한 것이라면 그의 시호 무열왕 외에 묘호 태종은 중국식 묘호를 도입한 것으로 해석한다. 문무왕은 그를 '태종'으로 묘호를 추시하면서 성한을 '태조', 박혁거세를 '시조'라 하였다.
  • 재임 중 657년 신라의 개국공신과 6촌 촌장들을 왕(王)으로 추존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내렸다.
  • 사후 무속 신앙에서 숭배하는 무속신의 하나로도 숭배된다. 주로 경주와 그 주변 지역에서 숭배되어 왔다.[3]

체육을 좋아했던 그는 축국(소의 내장 또는 돼지의 내장에 바람을 넣어 공처럼 만든 것)을 즐겼는데, 그가 유력한 왕위 계승권자임을 알아본 김유신은 일부러 그의 옷이 찢어지게 한 뒤 여동생 문희와 보희에게 옷을 수선할 겸 시중들게 하였다. 언니인 보희는 전날 꿈에 자신이 눈 오줌이 금성(경주)에 범람하는 꿈을 꾸었다가 동생인 문희에게 꿈을 팔았는데, 그의 옷을 수선하려 할때 코피가 나서 다른 곳으로 물러나야 했다. 춘추의 옷을 수선한 문희는 곧 그와 동침했고 수태하게 되었다. [3]

문희가 임신했으나 본부인(설씨)이 있던 김춘추는 관심갖지 않았고, 김유신은 경주 읍내에 장작더미를 쌓아놓고 여동생 문희를 올려놓고 화형을 기도하였다. 입궐하던 귀족의 제보로 선덕여왕이 읍내에 나타나 사연을 묻고 춘추와 문희를 결혼하게 하였다. 이때 문희가 춘추의 정식 부인이 된 것은 아니며, 고타소 등 두 딸을 낳은 본부인 설씨의 사후에 춘추의 정실 부인이 되었다. 이후 문희의 언니 보희도 김춘추의 소실로서 들어오게 되었다.[3]

같이 보기

참고

참고 문헌

  • 김부식, 《삼국사기》
  • 일연, 《삼국유사》
  • 김경중, 《조선사》
  • 신채호, 《조선상고사》
  • 이기백, 《상대등고》( 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1974)
  • 이기백, 《稟主考》(李相佰博士回甲紀念論叢, 1964)
  • 강무학, 《김춘추의 사상과 정치전략》 (신원문화사, 1981)
  • 신형식, 《武烈王權의 成立과 活動》(韓國史論叢 2, 1977)
  • 井上秀雄, 《古代朝鮮》 (日本放送(NHK)出版協社, 1972)
  • 井上秀雄, 《新羅政治體制의 變遷過程》(新羅史基礎硏究, 東出版, 1974)
  • 이덕일, 《여인열전》 (김영사, 2003)
  • 이종욱, 《춘추:신라의 피 한국 한국인을 만들다》 (효형출판, 2009)
  • 이기담, 《선덕여왕》 (예담, 2009)
  • 박순교, 《김춘추 외교의 승부사》 (푸른역사, 2006)
  • 예종화, 《김춘추와 선도해》 (현대출판사, 2003)
  • 김태식,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 (김영사, 2002)
  • 방기환, 《김춘추 1~3》 (고려출판사, 1987)
  • 신채호, 《조선상고문화사 (독사신론, 조선사연구초, 사론, 외)》 (박기봉 역, 비봉출판사, 2007)

주석

  1. 주보돈, 〈신라 骨品制 연구의 새로운 傾向과 課題〉
  2. 김춘추(네이트)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4. 김부식 (1145). 〈본기 권5 진덕왕〉. 《삼국사기》. 二年... 遣伊湌金春秋及其子文王朝唐 ... 嘗召燕見 賜以金帛尤厚 問曰 “卿有所懷乎” 春秋跪奏曰 “臣之本國 僻在海隅 伏事天朝 積有歲年 而百濟强猾 屢肆侵凌 況往年大擧深入 攻陷數十城 以塞朝宗之路 若陛下不借天兵 翦 除凶惡 則敝邑人民 盡爲所虜 則梯航述職 無復望矣” 太宗深然之 許以出師 春秋又請改其章服 以從中華制 於是 內出珍服 賜春秋及其從者 詔授春秋爲特進 文王爲左武衛將軍 (2년... 이찬 김춘추(金春秋)와 그의 아들 문왕(文王)을 보내 당나라에 조공하였다. ... 어느날 [춘추를] 불러 사사로이 만나 금과 비단을 매우 후하게 주며 물었다. “경(卿)은 무슨 생각을 마음에 가지고 있는가?” 춘추가 꿇어앉아 아뢰었다. 신(臣)의 나라는 바다 모퉁이에 치우쳐 있으면서도 천자(天子)의 조정을 섬긴 지 이미 여러 해 되었습니다. 그런데 백제는 강하고 교활하여 여러 차례 침략을 마음대로 하였습니다. 더욱이 지난 해에는 군사를 크게 일으켜 깊숙이 쳐들어와 수십개 성을 쳐서 함락시켜 조회할 길을 막았읍니다. 만약 폐하께서 당나라 군사를 빌려주어 흉악한 것을 잘라 없애지 않는다면, 저희 나라 인민은 모두 사로잡히는 바가 될 것이고 산 넘고 바다 건너 행하는 조공마저 다시는 바랄 수 없을 것입니다. 태종이 매우 옳다고 여겨 군사의 출동을 허락하였다. 춘추는 또 장복(章服)을 고쳐 중국의 제도에 따를 것을 청하니, 이에 내전에서 진귀한 옷을 꺼내 춘추와 그를 따라 온 사람에게 주었다. 조칙으로 춘추에게 관작을 주어 특진(特進)으로 삼고, 문왕을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으로 삼았다. ) 
  5. 김부식 (1145). 〈본기 권28 의자왕〉. 《삼국사기》. 六月… 高宗詔 左武衛大將軍蘇定方爲神丘道行軍大摠管 率左驍衛將軍劉伯英•右武衛將軍馮士貴• 左驍衛將軍龐孝公 統兵十三萬以來征 兼以新羅王金春秋 爲嵎夷道行軍摠管  將其國兵 與之合勢 蘇定方引軍 自城山濟海 至國西德物島 新羅王遣將軍金庾信 領精兵五萬以赴之 ([당나라] 고종(高宗)이 조서를 내려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삼아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유백영(劉伯英)•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 풍사귀(馮士貴)•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방효공(龐孝公)을 거느리고 군사 13만 명을 통솔하여 와서 정복하게 하고, 아울러 신라 왕 김춘추(金春秋)를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으로 삼아 그 나라의 군사를 거느리고 [당나라] 군사와 세력을 합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城山)에서 바다를 건너 우리 나라 서쪽의 덕물도(德物島)에 이르렀다. 신라 왕은 장군 김유신을 보내 정예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 방면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 
  6. 화랑세기#용수 문제에 자세한 내용이 있다.
  7. 김대문. 《화랑세기》. 소나무. ISBN 89-7139-546-X 93910. 
  8. 그러나 고구려의 태조왕의 경우에는 묘호로 봐야 되는가, 시호로 봐야 되는가에 대한 이견이 있다. 그 밖에 태조의 묘호를 받은 성한이나, 국조의 묘호를 받은 박혁거세도 존재한다.
  9. 실제 1970년대 이후 대한민국 경상북도에서 그의 아들 문무왕이나 김인문의 묘비명에는 자신들을 중국 한나라의 흉노족 재상 투후 김일제를 시조라 기록해 놓은 것이 발견되기도 했다.
  10. 단재 신채호는 “다른 민족을 끌어들여 동족인 고구려, 백제를 없앤 김춘추”를 가리켜 “역사의 죄인”이라 단죄하고, “단군 이후로는 한국 민족의 모든 영토를 제대로 통일시킨 사람은 아직 없없다”고 단정했는데 이유는, 무엇보다 “만주라는 한국의 고토(故土)와 한반도”를 모두 한 나라로 만든 국왕이 단군 왕조 이후로 나타나지 않았다는 의식 때문이었다. 또한 민족주의적 논리대로 고구려백제, 신라가 다 똑같이 ‘신성한 부여족’, 즉 ‘조선 한민족의 형제’라는 인식으로 고구려가 아닌 중국과 손을 잡아 고구려백제를 친 신라는 “도둑을 도와 자기 형제를 친 부끄러움을 남긴” 나라로 서술했다.(<독사신론>, 1908)
  11. 한국 민속학의 원조이기도 한 손진태(1900∼50)는 김유신이나 김춘추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동족을 공격하기 위해서 이민족과 연맹하는 것이 민족적으로 최대의 죄악이다. 신라가 그렇게 한 것은 귀족 국가의 비민족적 본질 때문이다”라며 “외세와 손잡은 신라”로 비난했다.(<한국민족사개론>, 1948)
  12. 당나라의 한반도 경략에 발맞추어 외세와의 공조로 백제만을 겨우 정복한 신라에는 “통일을 완수할 힘도 의도도 전혀 없었다”고 단정하고 ‘통일신라 시대’ 대신에 ‘신라와 발해’ 내지 ‘남북국 시대’라는 용어의 사용을 적극 주장했다. 김영하 교수(성균관대, 1993), 또한 한국역사연구회의 <한국역사>(1992)는 통일이라는 용어를 쓰긴 하되 그 '통일의 불완전함'과 ‘남북국 시대’라는 그 다음 시대의 성격을 강조했다.
  13. “신라는 민족의 배신자인가”. 한겨레21. 2012년 1월 2일에 확인함.  이름 목록에서 |이름1=이(가) 있지만 |성1=이(가) 없음 (도움말)

바깥 고리


전임
염장공
제18대 풍월주
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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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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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대 신라 국왕
654년 ~ 661년
후 대
문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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