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에다 도시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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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치아이 카오루 이쿠가(落合芳幾画)

마에다 도시마스(일본어: 前田利益 まえだ とします[*], 덴분 2년(1533년)[1] ~ 게이초 10년 음력 11월 9일(1605년 12월 18일)[2])는 센고쿠 시대 말기 ~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이다. 마에다 도시이에의 의붓 조카. 어린 시절 다키가와씨에서 마에다씨의 양자로 들어갔고, 생부는 다키가와 이치마스라는 설이 유력하다. 그는 마에다 게이지(前田慶次) / 게이지로(慶次郎)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렸고 호탕하고 박력있는 반면 언제나 제멋대로 이면서도 그릇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시(노래), 악기연주, 검무, 검술을 두루두루 잘 했고 창술의 달인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마에다 도시마스에게 '꽃피는 경차', '천하제일창' 등의 별명이 붙었다. 그 용맹이 일본 내에서는 삼국지 연의의 여포(呂布)와 비견되기도 한다.

생애[편집]

요네자와시 도모리 젠코지(堂森善光寺) 공양탑

어렸을 때 마에다 도시이에의 형인 마에다 도시히사의 양자로 들어갔다. 어떤 사건을 계기로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를 혼내주고 그와 교우관계를 맺었고 항상 형을 구박하고 무시하는 고지로(小次郎)를 다른 이유를 잡아서 참수하기도 했다. 만나는 어떠한 이들과도 교분을 쌓으며 풍류를 즐겼다.

그의 천부적 재능을 눈여겨 본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는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마에다 도시마스를 영입하려 했으나 마에다 도시마스는 끝내 이 영입을 거절했다. 마에다 문중의 번주가 마에다 도시이에로 결정되자 마에다 도시마스의 고쿠다카는 0석이 되어버렸고 이 때문에 마에다 도시마스는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막역한 친우인 나오에 가네쓰구를 따라 '고쿠조인 소노사이'라는 가명으로 우에스기 가게카쓰(上杉景勝)의 가신이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하자 우에스기 가게카쓰는 서군에 가담했는데 그 서군이 패배하자 우에스기 가게카쓰는 항복하여 동군의 맹주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 의해 봉지(封地)를 삭감당하게 되었다. 그 사건 이후 도시마스는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죽을 때까지 여기저기를 떠돌며 낭인으로서 은둔생활을 하게 된다.

인물・일화[편집]

덴마에다 이익소용 자주색 이토위 주칠도 오매동 구족(伝前田利益所用 紫糸威朱漆塗五枚胴具足, 요네자와시 미야사카 고고관 소장(宮坂考古館所蔵))

마에다 도시마스는 천하를 뒤엎을 만큼의 천부적 재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에 대한 욕심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마에다 도시마스는 다이묘라면 누구나 탐내는 인물이었다. 누구를 만나든 그냥 '친구'일 뿐이고 그 성격탓에 그 당시의 일본인이었다면 누구나 어렵게 생각하는 거대번주 다테 마사무네를 면전에서 꾸짖는가 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생일날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찾아가서 원숭이춤을 추며 조롱하는 한편 자신을 죽이러 온 구노이치를 꾀어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각주[편집]

  1. 덴분 원년(1532년) ~ 덴분 10년(1541년)이라는 설이 있다.
  2. 게이초 17년 6월 4일(1612년 7월 2일)이라는 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