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원의 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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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원의 치(開元之治)는 당 현종 시기의 태평성대를 의미한다. 시기적으로는 713년부터 741년까지 28년간을 가리킨다. 당 현종은 713년 연호를 개원(開元)으로 바꾸고, 정치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그의 휘하에는 유능한 재상들이 많았는데, 요숭(姚崇), 한휴(韓休), 송경(宋璟), 장구령(張九齡), 소숭 등이었다. 이들 모두 각각의 능력이 출중하고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지극하였다 한다.

그 중에도 요숭의 공이 가장 높아, 당 현종 이융기는 그를 승상에 임명하기도 했다. 요숭은 그에게 치국의 10가지 조건을 제시하였고, 현종은 이것을 모두 수용하였다. 이 밖에 한휴는 언제나 당 현종에게 직언을 올렸다. 하지만 소숭은 이융기에게 언제나 순종적이고 아첨을 하였다한다. 잔소리가 심한 한휴에 대해 신하들이 왜 내치지 않느냐고 묻자 당 현종 또한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그것이 바로 "한휴 때문에 짐은 마르더라도 천하와 백성들이 살찌면 아무 여한이 없다."라는 것이다. 당 현종이 재위 초기에 얼마나 정치에 전력을 쏟았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당 현종은 중앙의 유능한 관리를 지방에 도독이나 자사로 파견하였고, 적성에 맞지 않는 관리는 모두 교체하였다고 한다.

당 현종은 사찰과 승려의 수를 줄이고, 권력가들을 제압하는 한편, 조정을 정비하여 상벌을 엄정히 나누어 주어서 중종 이현 이후 혼란스러웠던 정치 상황을 안정시켰다. 심지어, 나라에 가뭄이 돌자, 당 현종은 황궁의 쌀을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는 등 어진 정치를 행하였고, 환관과 인척을 정사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러한 정치를 하자 당의 국력은 강성해졌으며, 당 태종 이세민이 이룩한 태평성세에 버금가는 치세를 하여 후세 사람들은 이를 당시의 연호인 개원(開元)을 따 '개원의 치(治)'로 불렀다. 이러한 그의 치세도 745년 양옥환을 귀비로 맞으면서 서서히 끝자락을 달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