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궁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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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궁 김씨
상궁
이름
김개시(金介屎)
이칭 김개희(金介姬), 김가시(金可屎)
신상정보
부친 김씨
모친 강씨
배우자 광해군
자녀 없음

상궁 김씨(생년 미상 ~ 1623년)는 선조, 광해군 때의 상궁으로, 본명은 김개시(金介屎)이다. 광해군 때 국정에 개입해 권력을 휘두르다가 인조 반정으로 참수되었다. 연산군 시절의 장녹수와 함께 조선시대의 폐비이다.[1]

광해군의 세자시절 처소인 동궁에 입궁하게 되었다. 머리가 똑똑하고 문서처리에 능하여 선조의 나인으로 발탁된후, 선조의 승은(承恩)을 받아 특별상궁이 되었으나,[2] 후궁에 오르지는 못했다. 춤과 노래에 능하고 판단력, 정치감각이 뛰어나며 술수에 능하여[3][1] 광해군의 측근이 된후 정승 버금가는 권력을 휘둘렀다. 광해군을 배신하고 서인들이 주도한 인조반정에 협력하였으나 반정후에 요부로 지목되어 처형되었다.[4]

생애[편집]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에는 "김상궁은 이름이 개시(介屎)로 나이가 차서도 용모가 피지 않았는데, 흉악하고 약았으며 계교(計巧)가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다.[5] 『계축일기』에서는 '가히'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또 그의 이름이 『연려실기술』과 『공사견문록』 등에 각각 '개희(介姬)', '가시(可屎)'라고도 표기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그의 이름 '개시(介屎)'는 기존에 흔히 알려져 있는 '개똥이'가 아니라 '가희'의 음차인 것으로 보인다.[6]

원래 춘궁(왕세자, 즉 광해군)의 시녀였는데, 글을 잘알고 문서 처리에 능했기에 선조의 나인으로 발탁되었다.[1] 이후 광해군의 아버지인 선조의 승은(承恩)을 받아 특별상궁이 되었으나,[2] 후궁에는 오르지 못했다. 민첩하고 꾀가 많아 선조와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다.[7] 연산군 시절에 장녹수는 예술적 재능만 있었으나 김개시는 춤과 노래뿐만 아니라 판단력이 뛰어나고 정치적 감각이나 술수에 능했다.[3][1]

광해군의 왕위 계승을 위해 광해군을 추종하는 세력인 대북파와 손을 잡았다.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는 지밀나인이 되었다가[1] 훗날 제조상궁이 되었다.[8] 선왕의 특별상궁을 가까이 한다하여 비난의 소리가 있었으나[8] 광해군은 김개시를 신임했고 김개시 역시 광해에게 충심을 다하며 온갖 악역을 도맡아 했다.[8] 반대 세력인 소북파 숙청작업, 선조의 유일 적자인 영창대군 사망,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왕후 서궁유폐에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김개시는 권신 이이첨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권력을 휘둘렀다.[8] 매관매직(賣官賣職)을 일삼는 등[9] 그 해독이 커서 윤선도, 이회(李洄) 등이 여러 번 상소하여 탄핵하였으나, 도리어 그들이 유배되었다.[4] 조야집요에 따르면, 그의 권력은 중전 유씨를 능가하여 광해군이 어느 후궁의 처소에 침소를 드는 것까지 광해군에게 직접 정해줬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반정의 주력인물인 김자점에게서 뇌물을 받고 광해군을 배신하였다. 수 차례 반정에 관한 상소가 올라왔으나 김개시는 광해군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었다.[10] 인조반정 당일 구체적인 반정 참여명단이 포함된 상소가 올라왔지만 광해군은 김개시의 말만 듣고 이를 무시한채 연회를 즐겼다.[11][12] 1623년(광해군 15년) 3월 13일 서인들이 주도한 인조 반정이 성공한 뒤, 인조 측에 의해 요부로 지목된 후 처형되었다.[4]

일화[편집]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와 대립관계였는데, 인목왕후가 정명공주를 회임하였을 때 도깨비 소동으로 유산을 시키려 했다는 이야기가 《계축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가계[편집]

  • 아버지 : 김씨
  • 어머니 : 강씨

상궁 김씨가 등장한 작품[편집]

영화
드라마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네이버 지식백과] 김개시 (문화원형백과 e조선궁중여성, 2004., 문화원형 디지털콘텐츠)
  2. 최태응 <불륜의 조선사> 새벽이슬 2011년 p345
  3. 신명호 <궁궐의 꽃, 궁녀> 시공사 2004년 p47
  4. [네이버 지식백과] 김개시 [金介屎]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5. 《광해군일기》 [중초본] 69권, 광해 5년(1613년) 8월 11일 11번째 기사 중 "金尙宮名介屎 年壯而貌不揚, 兇黠多巧計." (김상궁은 이름이 개시로 나이가 차서도 용모가 피지 않았는데, 흉악하고 약았으며 계교가 많았다.)
  6. 사람이름 - 가히·논개 한겨레신문, 2007.10.15.
  7. 《광해군일기》 [중초본] 69권, 광해 5년(1613년) 8월 11일 11번째 기사 중 "以春宮舊侍女 因王妃得進御, 仍以祕方驟幸 後宮無與爲伍, 遂與王妃却矣." (춘궁의 옛 시녀로 왕비를 통하여 왕의 잠자리를 모실 수 있었는데, 비방(祕方)을 써서 갑자기 승은을 받았으므로 후궁들도 더불어 무리가 되는 이가 없었으며, 결국엔 왕비와 틈이 생겼다.)
  8. 신명호 <궁궐의 꽃, 궁녀> 시공사 2004년 p48
  9. [신병주의 조선판 탄핵] 연산군과 장녹수, 광해군과 김개시 국정 쥐락펴락한 왕의 여인들 <매일경제> 2017.03.20.......광해군의 후원 속에 김개시는 관리들의 인사에도 나섰다. 위로 감사·병사(兵使)·수사(水使)로부터 아래로 권관(權管)·찰방에 이르기까지 천 냥, 백 냥 하는 식으로 관리를 낙점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도 벌어졌다. “김상궁은 선조 때의 궁인으로 광해군이 총애해 말하는 것을 모두 들어줌으로써 권세를 내외에 떨쳤다”는 ‘광해군일기’ 기록에는 광해군 후반 최고의 권력을 휘두른 김개시의 모습이 나타난다.
  10. [신병주의 조선판 탄핵] 연산군과 장녹수, 광해군과 김개시 국정 쥐락펴락한 왕의 여인들 <매일경제> 2017.03.20.....광해군 정권 내내 국정을 농단한 그녀였으나, 정작 마지막에는 광해군 편이 되지 못했다. 반정군 쪽에 포섭돼 김자점 등에게서 뇌물을 받은 김개시는 여러 차례 반정을 알리는 상소를 받은 광해군을 안심시켰다. 이귀와 김자점 등의 반역 모의를 알리는 전언에 대해 김개시는 광해의 손을 잡고 크게 웃으며, 광해군에게 반정의 징표를 묵살하도록 했다.
  11. 《속잡록》 계해년 1월
  12. [ 광해군일기, 중초본 ] 187권, 광해 15년 3월 12일 5번째기사...... 이반의 상소를 올렸으나 왕이 여러 여인들과 어수당(魚水堂)에서 연회를 하며 술에 취하여 오랜 뒤에야 그 상소를 보았는데, 역시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겼다. 이에 유희분·박승종이 두세 번 비밀리에 아뢰어 속히 조사하게 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이 명을 내렸다. 대신 이하 관원들이 대궐에 나갔으나 대궐문이 벌써 닫혔으므로 비변사에 모였는데, 비변사 당상들도 와서 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