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충주 탄금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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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가와 일본사가 둘다[편집]

한국사가와 일본사가 둘다 탄금대전투의 조선군수에 대한 확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알기론 한국내에서 조선군의 숫자가 8만 이상이었다고 제기하시는분은 한분만 계신걸로 알고 있는데 8천명이 허구였다는것을 공공연하게 위키백과에 등재하는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 국내외 사가의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고싶습니다.-- 이 의견을 작성한 사용자는 Rlfgkr (토론)이나, 서명을 남기지 않아 다른 사용자가 추가하였습니다.

이 문서는[편집]

○이 문서는 독자 연구가 아니라 디시 역갤에서 널리 통용되는 내용입니다. (역갤 관련 아이디 싴빠,조도18,황룡,風后 등등)

누가 자꾸 백과를 반달하는데. 관련 기록의 정확한 표기는 기여자의 공로이므로 이를 자꾸 반달하는 이유를 모르겠네요. 이 토론문서에 반달의 이유를 기재해주세요.-- 이 의견을 작성한 사용자는 210.205.208.187 (토론)이나, 서명을 남기지 않아 다른 사용자가 추가하였습니다.

-○루이스 프로이스 , 난중잡록 저자인 의병장, 선조실록 사관 보고 따지는게 어떨런지.., 일단 8천명이 허구라는건 충분히 설명됐습니다만. -○이 문서는 독자 연구가 아니라 디시 역갤에서 널리 통용되는 내용입니다. (역갤 관련 아이디 싴빠,조도18,황룡,風后 등등)-- 이 의견을 작성한 사용자는 210.205.208.187 (토론)이나, 서명을 남기지 않아 다른 사용자가 추가하였습니다.

디시 역갤이라니... 그거 출처는 있는 내용입니까? --팝저씨 (토론) 2013년 11월 11일 (월) 18:45 (KST)[답변]
본인 스스로, 디시 역갤에서 통용된다는 사실만으로 공정성이 있다고 느끼지 않으시란 걸 알고있겠지요. 210.205.208.187님의 행동이 도리어 문서를 훼손하고 있습니다. 즉시 멈춰주세요.--아드리앵 (토·기) 2013년 11월 11일 (월) 22:38 (KST)[답변]

문서의 대대적인 정리가 필요합니다.[편집]

이건 백과사전인지, 신문인지, 자기 연구 발표문인지도 모를, 정말 뭣도 아닌 문서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위키문법에도 전혀 맞지 않고, 가독성은 형편없으며, 그나마 관련 지식이 있으신 것 같아 희망을 걸었던 IP사용자는 정리를 좀 하자는데 이걸 문서 훼손으로 치부하지 않나, 정말 답답합니다. --팝저씨 (토론) 2013년 11월 11일 (월) 19:03 (KST)[답변]

일단 내용은 올리고 그 상황에서 정리를 해 주는게 제일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 Ellif (토론) 2013년 11월 11일 (월) 21:10 (KST)[답변]
지금 저 문서가 정리가 잘 되어있다고 주장하니 이를 어쩝니까... --팝저씨 (토론) 2013년 11월 11일 (월) 21:37 (KST)[답변]
위키백과는 문헌집이 아닙니다. 따라서 관련 사료들은 위키문헌으로 옮기고, 근거가 되는 출처는 "선조실록 71권, 29년(1596 병신/명 만력(萬曆) 24년)1월 24일(신묘) 3번째기사"라던가, "일본 서정일기 4월27일자"로 간단히 표기하고, 물론 바깥고리로 해당 위키문헌을 확인할 수 있게 하는 방법으로 편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팝저씨 (토론) 2013년 11월 12일 (화) 15:20 (KST)[답변]

8천설 허구 토론[편집]

아마도 110.13.49.230님과 동일한 사용자이시겠지요? 제가 110.13.49.230님에게 남긴 토론에서 말씀 드렸듯이 출처가 지금 해 놓은 것보다 훨씬 분명해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심지어 번역된 책을 책 제목만 보여서는 출처라 할 수 없겠지요. 정확한 서지와 쪽 수를 밝혀 주세요. 그리고, “신립군 8천설의 허구” 항목은 완연히 위키백과:독자 연구 금지에 위배됩니다. 객관적 서술이라면, “군 병력 수 논란”이라는 표제어를 두고, “기존 연구에서는 몇 명이라고 한다, 어떤 데서는 몇 명이라고 한다.” 식으로 객관적 정보를 출처 갖춰 보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해당 항목은 의도적으로 한 쪽의 의견에 치우쳐 서술되어 있습니다. 당부 드립니다. 역사에 대한 관심, 혹은 조예를 일방적으로 이곳에 풀어 내려고 하지 마시고, 기존 문서와 조화를 이루는 서술, 체계를 갖춰 주시기 바랍니다.--Eggmoon (토론) 2013년 11월 11일 (월) 02:12 (KST)[답변]

-신립군 '8천'이 허구라는건 백과에 적은 내용만 봐도 충분히 알수있습니다. 충주에서 징집한 병력만 가지고 논합니까. 궁궐에서 징집한 병력이 수천(정만록에 의하면 1만명)이고 유성룡이 신립에게 따로 준 장사 수만 해도 8천명입니다.

위키백과는 그걸 논하는 곳이 아닙니다. 그리고, 해당 항목은 신립군 8천설을 까기 위한 것이라 한쪽에 치우쳐 있으므로 객관적 서술이 아닙니다. 〈군 병력 수 논란〉이라는 항목을 두고 어디서는 8천, 어디서는 1만...., 명확한 출처를 갖춰 제시하면 된다는 말씀입니다. 백과사전은 옳고 그름을 재단하는 곳이 아닙니다. 사실을 출처 갖춰 보여주면 됩니다. 자신의 의견이 맞다는 논설은 210.205.208.187님의 블로그에 쓰거나 학회에 논문으로 발표하세요. 백과사전은 논문이 아닙니다. 위키백과:위키백과에 대한 오해 중 “위키백과는 개인의 의견이나 생각을 발표하는 곳이 아닙니다.”, “위키백과는 설명서, 안내서, 교과서, 학술 잡지가 아닙니다.”를 찬찬히 읽어 보고 편집에 임해 주기 바랍니다.--Eggmoon (토론) 2013년 11월 11일 (월) 20:14 (KST)[답변]

-객관적 서술이 아니라는건 당신 생각이고. 충분히 백과에 표기했습니다. 불만이면 징징대지말고 반대 의견을 적든가요.

신립군이 8천이든 100만대군을 몰고 갔든, 그건 위키백과에서 논하는 사항이 아닙니다. 그냥 출처를 갖춰 제시만 하세요. 지금 우리가 신립군은 8천인데 왜 아니라고 하냐 이걸 주장하고 있는 줄 아십니까? 불만은 귀하가 한쪽으로 치우쳐서 편집하는 것이지, 신립군의 규모가 아닙니다. --팝저씨 (토론) 2013년 11월 11일 (월) 21:09 (KST)[답변]

-신립군이 8천이 아니라는건 한쪽으로 치우쳐 편집하는게아니라 '팩트'를 기술하는겁니다. -- 조선군의 숫자에 대해서는 그동안 8천 정예 병력으로 알려져 왔으나, 실록에 전하는 바는 이와 다르다.

유성룡의 징비록 : "신립이 충주 고을들에서 8천 군사를 모았다."

그러나 독실한 예수회 신자 고니시 유키나가의 친구이자 일본쪽 예수회 신부들의 우두머리인 루이스 프로이스는 그의 저서 [일본사]에 탄금대 전투 당시 신립군의 숫자를 8만이라 적고 전투 상황을 조선 기록들과는 달리 상세하게 기술하였다.

"충주 근처에는 수량이 풍부한 강이 흐르고 있다. 아고스띠뇨(고니시)가 군대를 거느리고 그 마을에 도착하자, 역관(경응순)이 약속대로 와서 기다리기는커녕 조선 국왕의 회답 대신 최후의 운명을 걸고서 서울로부터 온 8만 명의 군대가 그들을 목표로 출진(出陣)해 왔던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기마병으로서 일본군과의 야전을 치르기 위해 선발된 왕궁의 신분 있는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병력 수에서도 훨씬 우세하였고, 아고스띠뇨의 군대가 도중에 피로를 무릅쓰면서 무리해서 진격해 오기 때문에 승리는 자신들에게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사실 일본인들도 피아의 병력 차가 너무 크고 불균형한 것을 보고 적잖게 당황하고 주저하였다."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

따라서 유성룡이 말한건 단지 '충주 고을들'에서의 8천을 징집했다는 것이다.

다음은 선조실록의 내용이다. 신립군을 10만 정예병 대군大軍이라고 적는다.

"변란이 있을 처음에 신립(申砬)이 도순찰사(都巡察使)가 되어 대군(大軍)을 거느리고 조령(鳥嶺)에서 적을 방어하였는데, 신립이 험조한 곳에서 대항할 생각을 하지 않고 평원 광야(平原廣野)로 영입(迎入 :적군을 유인)함으로써 좌우에 적이 가득 차서 미처 교전도 못하고 10만의 정병(精兵:정예병)이 모두 패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끝내는 경성(京城)을 지키지 못하고 임금이 파천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變初, 以申砬爲都巡察使, 領大軍, 禦賊于鳥嶺。 砬不爲據險把截之計, 迎入於平原廣野, 左右彌滿, 曾未交鋒, 而十萬精兵, 一敗塗地。 遂使京城不守, 乘輿播越, 痛哉! -선조실록 71권, 29년(1596 병신 / 명 만력(萬曆) 24년) 1월 24일(신묘) 3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keyword=신립

다음은 의병장 조경남의 난중잡록 내용이다. 각 도의 정예병과 중앙군으로 구성된 6만이라 적는다. 6만 대군大軍이라 적고있으며 충주백성들은 신립군사가 대군大軍이기에 피난가지않았다고 적는다.

"신립은 여러 도의 정병(精兵)과 무관 2천 명, 종족(宗族) 1백여 명, 내시위(內侍衛)의 군졸 등 도합 6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조령으로부터 다시 충주로 후퇴하였는데" 申砬盡率諸道精兵及武官二千,宗族百餘員,內侍衛卒幷六萬餘兵.自鳥嶺還退忠州.從事金汝?.因李鎰之言.請堅守山路. 砬不聽曰.過海之賊.不能?步.遂背?川.結陣于彈琴臺.>. <我 國 精 兵. 盡 殲 於 忠 尙 之 兩 役 云.비안(庇安)의 왜적이 예천(醴泉)의 다인현(多仁縣)으로 나가 주둔하고 중도(中道)의 대부대 왜적이 인하여 충주를 함락시키니, 목사 이종장(李宗長)은 도망쳐 달아나다. 그때 충주 등지의 사람들은 신립의 대군만을 믿고 집에 있다가 변란을 당한 것인데 뜻밖에 신립의 군대가 패하였다. 적병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죽이고 약탈하고 하는 참상이란 더욱 말할 수 없다. 왜적이 우리나라에 말을 전해오기를, “정탁(鄭琢)과 이덕형(李德馨)을 내보내라. 운운.” 하다."-의병장 조경남의 난중잡록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 , 선조실록 ,난중잡록이 적는 신립군의 숫자는 8만,10만,6만으로 숫자가 서로 비슷하다.

다음은 일본측 정사 기록 '서정일기'의 내용이다. 신립군을 '수만'이라 적고있다. 수천은 확실히 아닌 것이다.

"4월28일 맑음, 인각에 문경 출발, 진각에 안보 통과, 오각에 충주 도착. 충주부 북쪽 반리 지점 송산에 신입석(신립의 오류) 장군이 수만의 병력을 이끌고 결진. 대주(종의지)와 섭주(소서행장) 병력이 공격하여 전과 참수 3000급, 포로 수백명. 적 대장 신입석 전사." - 일본 서정일기 4월27일자

이외에도 신립의 병력이 8천이 아니라는건 아래의 신립의 병력 모집 사항과 관련 기록을 보면 충분히 알수있다.

그럼 그걸 신립군의 규모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각 사료마다 다르게 표시하고 있다.고 간단히 적을 수 있는 문제 아닙니까. 그러고 나서 주석으로 8만의 근거, 10만의 군거, 6만의 근거 이렇게 적으면 되지, 정리를 좀 하시라구요. --팝저씨 (토론) 2013년 11월 11일 (월) 21:20 (KST)[답변]

-징징대지말고 똑바로 들으시죠. 각 사료마다 다르게 표시하는게아니라, 애초에 8천설 자체가 징비록의 충주에서의 8천 모집만을 가지고 착각한거에서 나온겁니다. 각 사료는 '수만'명입니다. 그러니까 8천이 허구라는겁니다.

프로이드 수사와 조경남은 풍문으로 들은 것을 바탕으로 적은 것이기에 자세한 수를 알리가 없습니다. 게다가 10만이라는게 진짜 10만인지 아니면 단순한 형용사인지 이를 알아봐야 합니다.

문서는 잘 정리됐고 한국,일본,유럽 기록으로 세분화되어 정리되었는데. 문서가 정리안된다고 징징대는 한국인[편집]

제 말이 잘 전달이 안되는 모양인데, 저는 그 망할놈의 신립군이 8천이든 100만이든 관심 없습니다. 오로지 문서가 정리 안되는게 짜증나는 겁니다. --팝저씨 (토론) 2013년 11월 11일 (월) 21:25 (KST)[답변]

자꾸 백과사전을 반달시키는 한국인[편집]

위키백과는 책의 내용을 전부 싣는 장소가 아닙니다. 최대한 간추리세요. --팝저씨 (토론) 2013년 11월 11일 (월) 18:39 (KST)[답변]

'한국,일본 탄금대 전투 기록'으로 항목 이름 수정했습니다. 책의 내용을 전부 싣으려는게아니라 정확한 팩트를 위해서 한,일 탄금대 전투 기록을 실어두는 것이니 반달 테러 자제좀 하세요.
탄금대 전투문서는 지금 백과사전 수준의 문서가 아닙니다. 좋은 내용을 기여해주시려는 점은 정말 감사하나, 정말 제대로 기여해주시고 싶으면 백:아님을 제발 읽어주세요. 일단 대폭 정리합니다. --팝저씨 (토론) 2013년 11월 11일 (월) 18:56 (KST)[답변]
반달 테러 하지좀마세요.
문서 정리가 반달이라는 건 듣느니 처음입니다. 저 문서 한번 읽어보십시오. 저게 지금 독자들 읽으라고 써놓은 겁니까? --팝저씨 (토론) 2013년 11월 11일 (월) 19:11 (KST)[답변]
제발 문서 정리좀 합시다. 역사학자나 역사에 매우 관심있는 역덕후는 저 문서 읽고 이해가 가겠지만, 지금 그런사람들만 읽으라고 문서 만드는게 아닙니다. 누구나 읽고 이해가 가능하도록 만들어야지, 소수만이 읽을 수 있는 문서를 만들자고 위키백과가 있는게 아닙니다. 제발 호소하니, 정리좀 합시다. --팝저씨 (토론) 2013년 11월 11일 (월) 19:22 (KST)[답변]

-제발 호소하니 반달 좀 하지 맙시다. 출처 다 표기해서 문서 정리했으니까 반달 테러 하지마세요.

귀하의 출처가 근거 없다는 것도 아니고,그냥 단순히 정리좀 하자는데 그걸 반달이라고 하시니 정말 유감입니다. 저렇게 지저분하게 쓰지 않아도 내용 전달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리고, 고니시에 대한 설명은 고니시유키나가 문서를 보면 될 일을 굳이 주석에 기입할 이유도 없습니다. --팝저씨 (토론) 2013년 11월 11일 (월) 20:15 (KST)[답변]

-정리가 아니라 반달인데. 반달을 반달이 아니라하니 정말 유감입니다. 지저분하다는건 당신 주관적인 생각인데. 내용전달이 충분하긴 뭐가 충분이요. 한,일 전투 기록을 실어놓아서 잘 모르는 사람들도 객관적 팩트를 알수있게 하려는데.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막는거요. 당신이 신립이나 고니시 유키나가인가.


디시인사이드 역사갤러리에서의 동원[편집]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history&no=1064710&page=1

사용자 관리 요청, 문서 관리요청에 남겼듯이, 지속한 처리가 필요합니다. --팝저씨 (토론) 2013년 11월 11일 (월) 23:26 (KST)[답변]

저작권 침해[편집]

계속적으로 추가되는 내용이 타 저작물의 문단을 그대로 복사해놓은 것이라 일단 무기한 보호 처리했습니다. 분쟁이 해소되면 특정판 삭제로 문제되는 판들은 제거하겠습니다. -- ChongDae (토론) 2013년 11월 29일 (금) 14:02 (KST)[답변]

뭔 저작권 침해를 했는지. 무슨 타 저작물인지 정확한 링크를 제시해야할거아닙니까? -- -- 이 의견을 작성한 사용자는 81.17.28.26 (토론)이나, 서명을 남기지 않아 다른 사용자가 추가하였습니다.
"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 등 타 서적의 내용을 인용의 수준이 넘게 복사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 ChongDae (토론) 2013년 11월 29일 (금) 14:21 (KST)[답변]
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를 포함해 인용된 서적들은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나 저작권이 만료된겁니다. 무슨 말을 하시는겁니까.
포르투갈어 원전을 직접 번역하신건가요? 번역된 문서라면 2차 저작권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진주박물관의 번역이라 하셨는데, 진주박물관에서 번역된 자료를 CC-BY-SA에 준하는 라이선스로 배포하지 않는 이상, 자유로운 이용은 불가능합니다. 최소한의 인용 원칙은 지켜주세요. 그리고 루이스 프로이스의 책을 100% 신뢰하시는데, 사학계의 주류 이론인지요? -- ChongDae (토론) 2013년 11월 29일 (금) 16:02 (KST)[답변]
탄금대전투 문서에서 토론하는데 당신이 자꾸 무시해서 여기서 하는거아닙니까. 객관적인 공정성을 위해서 사료를 싣는게 뭐가 잘못됐다는겁니까.-- 이 의견을 작성한 사용자는 31.7.58.66(토론IP 정보)이나, 서명을 남기지 않아 다른 사용자가 나중에 추가하였습니다.
어디까지나 프로이스 일본사는 사료이고 저자가 400년전의 유럽인이잖아. 그런데 뭐가 저작권이란겁니까. 번역본에도 저작권 명시나 금지 조항이 없어.

그리고 여기서 100% 신뢰가 왜 나옵니까. 백과에 프로이스 일본사만 사료로 나옵니까.-- 이 의견을 작성한 사용자는 31.7.58.66(토론IP 정보)이나, 서명을 남기지 않아 다른 사용자가 나중에 추가하였습니다.

백:아님#책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편집]

본문보다 주석이 더 길어질 판국입니다. --팝저씨 (토론) 2013년 11월 29일 (금) 16:21 (KST)[답변]

이보세요. 경응순 ,4월 28일 충주 회담 부분은 왜 삭제한거야? 탄금대 전투에서 빠져선 안되는 내용인데. 그걸 무턱대고 삭제하는 이유가 뭐야.

기여자의 기여를 당신 멋대로 삭제하면됩니까? 경응순,충주회담 부분,신립군 8천설의 허구,신립,이일의 병력모집사항,전투준비,조령을 안막은 이유,단월역 도착 모두 탄금대 전투에서 빠져서는 안되는 내용들이다. 문서를 정리해주는건 고마운데. 멋대로 기여자들의 기여사항을 마구마구 삭제하지말라고.-- 이 의견을 작성한 사용자는 31.7.58.66(토론IP 정보)이나, 서명을 남기지 않아 다른 사용자가 나중에 추가하였습니다.


탄금대의 소위 말하는 '대규모 회전'에 대한 의문[편집]

탄금대에 조선군이 8만명이었다라는 사실은 둘째치고 탄금대가 과연 8만명이나 달하는 대군이 기동하기에 좋은 곳이었습니까? 212.71.191.244 (토론) 2013년 11월 30일 (토) 19:24 (KST)[답변]

탄금대가 전투지가 아니라 탄금대 앞의 달천평야가 전투지입니다. 기록에도 논밭에서 싸워서 패했다나오며 신립이 전투하자한 곳도 드넓은 들판입니다. 구글어스로 보면 알거아닙니까.

백과에도 전투 장면과 배치 모습이 제대로 복원되어있는데 보고서 말하는겁니까. 어 사진이 삭제되었잖아? http://gall.dcinside.com/history/1082487 이거나 보세요.

... 디시인사이드는 신뢰할 수 없는 출처입니다. 최소한 언론이나 논문을 가져오셔야죠. --팝저씨 (토론) 2013년 12월 2일 (월) 11:08 (KST)[답변]
구글어스로 올려줬잖아요 ; 구글어스로 자로 재서 정확하게 측정한겁니다. 언론이나 논문이 이 문제에 관심없는데 어쩌란 말입니까. 논리가 없나요? -- 이 의견을 작성한 사용자는 81.17.28.58 (토론)이나, 서명을 남기지 않아 Neoalpha 님이 추가하였습니다.
나꼼수 콘서트에 10만이 왔다는 것 만큼이나 논리가 없습니다. 거기서는 언론사에 보도된 사진을 그리드로 나눠서 측정한 것이지만, 그것 역시 독자연구일 뿐입니다. --팝저씨 (토론) 2013년 12월 5일 (목) 17:46 (KST)[답변]

2013년 12월 14일의 편집 요청[편집]

프로이스 일본사의 내용이 신빙성이 있다고 서술되어있지만 일반 학계에선 거의 믿지 않는 내용입니다. 프로이스 일본사의 저지 프로이스 루이즈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일본인들을 통해 들은걸을 토대로 탄금대전투를 기록했기때문에 그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124.53.53.33 (토론) 2013년 12월 15일 (일) 03:21 (KST)[답변]

출처의 탄핵을 좀 더 뒷받침 할 수 있는 자료를 제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팝저씨 (토론) 2013년 12월 17일 (화) 15:40 (KST)[답변]
프로이스 일본사의 내용을 바탕으로 편집하는 다른 IP 사용자 때문에 장기간 보호 상태에 있습니다. 수정할 내용을 정리해주시면 반영하겠습니다. -- ChongDae (토론) 2014년 1월 8일 (수) 10:23 (KST)[답변]
작성자입니다. 자료에 대한 사전조사가 부족해 제가 큰오류를 범한듯 싶습니다. 루이스 프로이스가 임진왜란당시 마카오에 체류하고 있었다는 근거는 위키백과에밖에 없으며 그에대한 출처도 불분명한것같습니다. 죄송합니다.--124.53.53.33 (토론) 2014년 2월 10일 (월) 05:25 (KST)
완료 우선 출처가 없는 두 문단을 삭제 처리했습니다. --관인생략 토론·기여 2014년 2월 13일 (목) 18:34 (KST)[답변]

무슨 조선군이 8만이라는 건가요>?[편집]

흉악한 왜적이 조령을 넘어 달천으로 달려 들어오니 신립은 패전하여 죽었다. 당초 적병은 두 재[嶺]의 넘기 어려움을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그곳에 당도하자 산길은 고요하고 사람의 발자취도 전연 없는지라 마침내 크게 기뻐하여 날뛰면서 곧장 충주를 범했다. 한편 신립은 여러 도의 정병(精兵)과 무관 2천 명, 종족(宗族) 1백여 명, 내시위(內侍衛)의 군졸 등 도합 6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조령으로부터 다시 충주로 후퇴하였는데, 종사 김여물(金汝岉)이 이일(李鎰)의 말에 따라 산길을 굳게 지키자고 요청하였으나, 신립은 듣지 않고, “바다를 건너온 왜적은 빨리 걷지 못한다.” 하고는, 마침내 달천을 등지고 탄금대(彈琴臺)에 진을 쳤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 후 척후장(斥候將) 김효원(金孝元)ㆍ안민(安敏) 등이 달려와서, “왜적의 선봉이 이미 다가왔습니다.” 하고 고하자, 신립은 그들이 군중을 놀라게 한 일에 노하여 당장 그 두 사람을 목 베고 이어 영을 내려 진의 대오를 바꾸게 하였다. 그러나 적병이 이미 아군의 뒤로 나와 천 겹으로 포위하자 장병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모두 달천의 물로 뛰어들었다. 왜적이 풀을 쳐내듯 칼을 휘둘러 마구 찍어대니 흘린 피가 들판에 가득 찼고 물에 뜬 시체가 강을 메웠으며, 신립과 김여물도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정병은 충주와 상주 두 전투에서 다 섬멸되었다고 한다.

이게 난중잡록의 기사입니다. 6만이라고 기재되어 있죠? 그런데 중요한 건, 조경남은 당시 탄금대 근처에도 있지 않았단 것입니다. 난중잡록은 어디까지나 조경남이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고, 그것을 글로 옮긴 것입니다. 즉 자기가 직접 본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통한 증언이라는 면에서 정확도가 떨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29일. 전라감사 이광(李洸)이 여러 고을로 하여금 근왕병(勤王兵)을 징발하게 한 것이 10여만 명이 되었고, 경상 감사 김수(金睟) 역시 타고 남은 병력을 수습하여 양호(兩湖)의 군사와 함께 가고자 거창(居昌)에서 함양(咸陽)으로 가다. 그때 영남 60여 고을은 깡그리 함락되었고, 오직 우도의 6, 7읍만이 겨우 병화를 모면했으나 군졸들은 이미 흩어져 없었다.

이것 또한 난중잡록의 기록입니다. 전라도와 경상도 충청도가 다 합쳐져서 벌인 용인 전투의 군대가 5만 명 정도였다는 걸 알고 있는 우리로써는 이 10만명이 엉터리 소리라는 것을 잘 알수 있습니다. 난중잡록은 이렇게 많은 부분에서 정확도가 떨어지는 부분이 있기에, 당연히 가려서 봐야 하는 사료입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직접 겪은 내용이라기보다는 기본적으로 여러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서 써내려간 사료이기 때문이죠.


충주 근처에는 수량이 풍부한 강이 흐르고 있다. 아고스띠뇨가 군대를 거느리고 그 마을에 도착하자, 역관(경응순)이 약속대로 와서 기다리기는커녕 조선 국왕의 회답 대신 최후의 운명을 걸고서 서울로부터 온 8만 명의 군대가 그들을 목표로 출진(出陣)해 왔던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기마병으로서 일본군과의 야전을 치르기 위해 선발된 왕궁의 신분 있는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병력 수에서도 훨씬 우세하였고, 아고스띠뇨의 군대가 도중에 피로를 무릅쓰면서 무리해서 진격해 오기 떄문에 승리는 자신들에게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사실 일본인들도 피아의 병력 차가 너무 크고 불균형한 것을 보고 적잖게 당황하고 주저하였다. 그러나 아고스띠뇨는 용감한 지휘관으로서 매우 설득력 있는 근거를 들어 병사들을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우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후퇴는 비겁하다. 적들에게 사기를 올려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도망가는 것으로 이는 명백한 패배의 표시이다. 이미 우리는 커다란 명예와 위신을 걸고 조선인으로부터 많은 땅을 탈취하였고, 국왕의 도시인 서울을 얼마 후에 함락시키려고 하는 지금에 이으러 이때까지 승리해서 얻은 것을 모두 잃는 일은 용서할 수 없다. 이제까지의 싸움과 마찬가지로 승리의 행운은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가 이 같은 도리를 간결하게 말하자 병사 일동은 그의 설득으로 용기가 북돋았다. 그곳에서 아고스띠뇨는 병사들에게 전투 대열을 갖추도록 명령했다. 게다가 "막상 부딪쳐서는 조선인들을 놀라게 하지 않고록 아무 깃발도 올리지 말고 의기(意氣)를 잃은 것처럼 보이게 하면서 진격시켜라. 추후에 깃발을 일제히 펄럭이라는 명령을 내릴 것이다."라고 명했다. 조선군도 진을 정비하고 달 모양으로 전투 대형을 펼쳤다. 그들은 적군이 소수인 것을 보자 적진의 중앙을 공격하면서 한 명이라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려고 포위하기 시작하였다. 양쪽 군대가 이미 접근하였을 때 조선군의 예상은 어긋났다. 깃발들이 펄럭이고 다수의 일본인 병사들이 모습을 나타내고서 조선군의 양쪽 끝을 노리고서 맹렬한 포화를 퍼부었다. 조선군은 그러한 공격에 견딜 수 없게 되어 조금 후퇴하였다가 이내 태세를 가다듬어 한두 번 다시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매우 계획적으로 진격하면서 총포에 더하여 대도의 위력으로써 맹렬하게 공격하였기 때문에, 조선군은 싸움터를 버리고서 발을 날개처럼 하여 앞다투어 도망쳤다. 그들은 그곳을 흐르는 수량이 풍부한 강을 작은 배로 건너가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강에는 얕은 여울이 없었기 때문에 대다수의 조선 병사들은 익사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이 전투에서 8000명에 가까운 적병을 살육하였다. 아고스띠뇨의 동생 루이스는 20살도 채 되지 않은 젊은이였는데 적군의 목을 벤 것은 그가 최초였다. 전투에 참가했던 몇몇 병사들의 이야기로는 조선군의 하급자 중에는 약간 비겁한 자들이 눈에 띄었으나 상급자들은 매우 용감무쌍하였다고 한다. 앞서의 젊은이 루이스는 기마병으로 참가했던 조선군 지휘관 중 가장 중요한 한 사람을 생포하였다. 그리고는 그를 살려주겠다고 하자, 그는 이것이 명예가 걸린 문제이므로 자신은 풀려나 목숨을 부지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일본인들이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 장수는 자신의 목을 앞으로 내보이면서 머리를 자르라는 손짓만 하여 일본인들은 마침내 그의 뜻대로 머리를 베었다.

이게 8만설의 가장 중요한 근거인 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인 모양이죠. 그러나 중요한 건, 루이스 프로이스는 한국에 온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공식적으로 조선 땅을 밟은 첫 번째 서양인은 그레고리오 세스페데스 신부입니다. 이 사람은 웅천왜성에서 몇 달간 머무르면서 고니시의 대접을 받고 또 고니시군의 천주교 신자들에게 세례도 주는 중 여러 활동을 하고 떠났는데요, 프로이스는 당시 발리그니아누의 비서로써 1592년 10월부터 3년간 마카오에 있었습니다. 즉 프로이스의 기록은 이 사람이 고니시군의 장병을 통해 들은 것을 그대로 옮겨적은 것일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이고요, 프로이스가 모종의 정보통을 통해서 탄금대전투의 소식을 들었을수도 있지만, 분명한것은

프로이스는 절대로 이 탄금대전투에 참여하지도 않았고 두 눈으로 보지도 않았단 겁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예수회 선교사도 이것을 보지 않았습니다. 1593년 크리스마스에 온 세스페데스 신부가 처음이기 때문이죠.

또한 저 프로이스 일본사에서 중요한 문제점은 바로 병력손실률이 고작 10%밖에 안된다는 점입니다. 당시 일본군이 3면포위를 했고 뒤에는 달래강이 막고있어 4면포위가 이루어졌단 걸 고려하면 10%에 달하는 손실률은 말도 안되는 것입니다. 조선군이 죄다 박태환도 아니고 달래강으로 무려 90%나 되는 인원이 도망치는데 성공했다는 걸까요?

4월28일 맑음,  인각에 문경 출발, 진각에 안보 통과, 오각에 충주 도착. 충주부 북쪽 반리 지점 송산에 신입석 장군이 수만의 병력을 이끌고 결진. 대주(종의지)와 섭주(소서행장) 병력이 공격하여 전과 참수 3000급, 포로 수백명. 적 대장 신입석 전사. (일본 서정일기 4월27일자)

이건 서정일기입니다. 수만 명의 병력이라고 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6만이나 8만을 뒷받침해준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후술하겠지만, 1만 6천 설에 따른다 해도 충분히 수만명이라고 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서정일기에는 3000급으로 프로이스 일본사의 8000급과 머리통 숫자도 차이가 납니다. 프로이스 일본사가 정확하지 않다는 것을 뒷받침해주는 근거가 될 수 있겠군요.


"변란이 있을 처음에 신립(申砬)이 도순찰사(都巡察使)가 되어 대군(大軍)을 거느리고 조령(鳥嶺)에서 적을 방어하였는데, 신립이 험조한 곳에서 대항할 생각을 하지 않고 평원 광야(平原廣野)로 영입(迎入 :적군을 유인)함으로써 좌우에 적이 가득 차서 미처 교전도 못하고 10만의 정병(精兵:정예병)이 모두 패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끝내는 경성(京城)을 지키지 못하고 임금이 파천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變初, 以申砬爲都巡察使, 領大軍, 禦賊于鳥嶺。 砬不爲據險把截之計, 迎入於平原廣野, 左右彌滿, 曾未交鋒, 而十萬精兵, 一敗塗地。 遂使京城不守, 乘輿播越, 痛哉! -선조실록 71권, 29년(1596 병신 / 명 만력(萬曆) 24년) 1월 24일(신묘) 3번째기사 선조실록에서 10만 이야기가 나온 건 이걸 말하는 것이겠죠. 그러나 선조수정실록에는 이런 말도 있습니다.

신입은 시정의 건달 수백 명을 거느리고 행장(行長)의 10만 대군을 막다가 단번에 여지없이 패하여 나라가 뒤집어졌었다. 이제 이와 같이 하지 않는다면 매우 다행이겠다.”-34년(1601 신축 / 명 만력(萬曆) 29년) 2월 1일(경오) 1번째기사

실록의 말이라고 다 믿는다면 신립은 수백명이 되버리고, 고니시는 10만명이 되버립니다. 그리고 동양에서 보통 10만 하면, 그냥 많다는 뜻입니다.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안됩니다. 게다가 실록의 기사는 그 맥락속에서 파악해야 합니다. 선조실록의 저 기사는 많은 병력을 데리고 갔음에도 험지방어전을 펼치지 않아서 신립이 패했다. 고 신립을 까는 이야기이고, 선조수정실록의 저 기사는 변방 방비에 힘을 기울일 것을 말하면서 신립의 숫자는 줄이고 고니시의 숫자는 많게 해서 경각심을 느끼게 하려는 내용이기 때문이죠.

신이 일찍이 서로(西路)의 진영을 맡았을 적에 여물을 알았는데 재능과 용맹뿐만이 아니라 충의(忠義)의 인사였습니다. 신에게 소속시켜 먼저 가게 했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또 따랐다. 신립이 거느린 무리는 도성의 무사(武士)ㆍ재관(材官)과 외사(外司)의 서류(庶流)ㆍ한량인(閑良人)으로 활을 잘 쏘는 자 수십 명이었다. 조정의 관원으로 하여금 각기 전마(戰馬) 한 필씩을 내어 돕도록 하였다. 이들이 인근 고을을 순행하며 군사를 수합 하였는데 겨우 80명이었다. 그러자 여물은 틀림없이 패할 것을 알고 종을 보내어 아들 김류(金瑬)에게 편지를 부치기를,“삼도(三道)의 군사를 징집하였으나 한 사람도 오지 않았다. 남아(男兒)가 나라를 위하여 죽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나라의 수치를 씻지 못하고 웅대한 뜻이 재가 되고 마니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할 뿐이다.”하였다. 신립이 군사를 인솔하여 탄금대(彈琴臺)에 나가 주둔하여 배수진을 쳤는데, 이 달 27일에 적이 이미 조령을 넘어 단월역에 이르렀다.

이것은 기재사초의 기록입니다. 만약 8만설대로 그렇게나 많이 병력이 모였다면 '삼도의 군사를 징집하였으나 한 사람도 오지 않았다' 라거나, '인근 고을을 순행하며 군사를 수합하였는데 고작 80명' 이런 소리가 나올까요?

대간이 대신(大臣)을 체찰사(體察使)로 삼아 여러 장수들을 검독(檢督)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계청하였다. 이산해(李山海)가 유성룡(柳成龍)을 보낼 것을 청하니 따랐고 김응남을 부사(副使)로 삼았다. 성룡이 신입(申砬)에게 계책을 물으니, 신입이 말하기를, “이일이 외로운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갔으나 후속 병력이 없다. 체찰사가 내려간다 하더라도 전투하는 장수가 아니니 무장(武將)을 급히 먼저 보내 이일을 지원하도록 하여야 한다.”하였다. 이에 성룡이 김응남과 청대(請對)하여 신입을 먼저 보내기를 청하자, 상이 신입을 불러 하문하니 신입도 사양하지 않으므로 마침내 도순변사(都巡邊使)로 삼았다. 성룡이 즉시 모집한 장사(壯士) 8천 명을 신입에게 소속시켜 떠나게 하였다. 장차 떠나려 할 때에 상이 신입을 인견(引見)하고 보검(寶劒)을 내리면서 이르기를,“이일 이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모두 참(斬)하라.”하였다. 당시에 상이 김여물(金汝岉)의 재능과 용맹을 아까와하여 방어해야 할 긴요한 곳에 정배(定配)시켜 공을 세워 보답하도록 명하였다. 여물이 출옥(出獄)하자 성룡이 불러 계책을 의논해 보고 크게 기특하게 여겼다. 성룡이 아뢰기를,“신이 이번에 여물을 처음 보고 병사(兵事)를 의논해 보니, 무용(武勇)과 재략(才略)이 남보다 뛰어날 뿐만이 아닙니다. 막중(幕中)에 두고 계책을 세우는 데 자문하도록 하였으면 합니다.”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신입이 또 청하기를,“신이 일찍이 서로(西路)의 진영을 맡았을 적에 여물을 알았는데 재능과 용맹 뿐만이 아니라 충의(忠義)의 인사였습니다. 신에게 소속시켜 먼저 가게 했으면 합니다.”하니, 상이 또 따랐다. 신입이 거느린 것은 도성의 무사(武士)·재관(材官)과 외사(外司)의 서류(庶流)·한량인(閑良人)으로 활을 잘 쏘는 자 수천 명이었다. 조관(朝官)으로 하여금 각기 전마(戰馬) 한 필씩 내어 돕도록 하여 떠나 보냈는데, 인근 고을에서 거둔 군사는 겨우 8천 명이었다.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입니다. 인근 고을-즉 경기도나 서울 주변에서 모은 군사가 고작 8천여 명이라 하고 있습니다. 8만을 모으려면 충청도에서 7만 2천을 모아야 하나요?

또 이일과 변기(邊璣)를 불러 같이 충주에 이르니 도내 군사로 모인 자가 8천여 명이었다. 《조야기문》

조야기문에서는 충청도 군사가 8천이 모였다고 하는데, 이는 징비록의 기록과 일치합니다. 여기서 이미 8만설은 말이 안 됩니다. 충청도에서 8천이 모였다면 경기도에서 7만 2천을 모아야 하나요? 그런데 경기도나 서울쪽에서는 이미 8천 정도가 모였다고 선조수정실록이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신립이 새재[鳥嶺]를 막고 방어하려다가 길이 험해서 말달리고 활쏘기 불편하다고 물러와 충주에 진을 쳤다. 이일은 신립이 충주에 있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새재를 버리고 충주로 갔다. 신립이 적세(賊勢)를 물으니 이일은, “이번 왜적은 경오ㆍ을묘년과는 비교가 안 되며 또 북쪽 오랑캐 같이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소. 이미 험한 곳에 주둔하지 못하여 넓은 들판에서 싸움을 하게 되어 당해 낼 도리가 만무하니 차라리 물러가 서울을 지킵시다.” 하였다. 신립이 화를 내어 말하기를, “네가 패군(敗軍)하고 또 다시 군중을 놀라게 하여 요동시키니 군법에 의하여 마땅히 목을 벨 것이지만, 적이 이르거던 공을 세워 속죄하도록 하라.” 하고 또, “바다를 건너온 적은 능히 달리지 못한다.” 하였다. 드디어 달래강[㺚川]을 뒤에 두고 탄금대(彈琴臺) 대는 달래강 두 물길 사이, 충주부에서 5리쯤 되는데 있다. 에 배수진(背水陣)을 쳤다. 군사가 겨우 수천 명이었다. 《일월록》

일월록에서도 신립의 군사는 겨우 수천 명이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4월 26일 충주(忠州)에 도착했을 때 병력이 겨우 수천 명밖에 안 되었는데 이 군사로 단월역(丹月驛) 근방의 언덕에 진을 쳤다. 이때 이일을 만났는데 이일로 선봉을 삼아 그로 하여금 공적을 세워 보답하게 하였다. 혹 말하기를 “적의 세력이 지극히 성대하니 그 예봉에 직접 맞서기는 어렵다. 조령에 나아가 협곡 안에 군사를 매복하고 적이 골짜기 입구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우리가 양 쪽 언덕에 의거하여 높은 곳에서 활을 쏘면 승리를 거둘 수 있다.” 하였으나, 신립은 말하기를 “그들은 보병이고 우리는 기병이니 넓은 들판으로 끌어들여 철기(鐵騎)로 짓밟아버리면 성공하지 못할 리가 없다.” 하였다. 그러나 적은 이미 조령의 길을 거쳐 몰래 군사를 잠입시켜 충주 성중에 이르렀는데도 신립은 이를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28일에 적이 민가를 불태운 뒤에야 적이 이미 조령을 넘어왔다는 것을 우리 군사가 알고는 간담이 떨어지도록 모두 경악하며 두려워하였다. 이윽고 바라보니 왜적들이 조령의 큰 길을 통해 산을 뒤덮으며 내려오는데 칼빛이 번쩍번쩍하였다. 신립이 군사들을 지휘하여 차례로 진격시켰으나 마을 길이 비좁은데다 논밭이 많아 말을 치달리기에 불편하여 머뭇거릴 즈음에 적이 우리 군사의 좌측으로 돌아 나와 동쪽과 서쪽에서 끼고 공격해 오는 바람에 우리 군대가 크게 어지러워지면서 적에게 난도질을 당한 결과 시체가 산처럼 쌓였고 군자(軍資)와 군기(軍器)가 일시에 모두 결딴나고 말았다. 신립이 단신으로 말을 타고 강 언덕에 이르렀는데 적이 군대를 풀어 추격하자 신립이 물에 몸을 던져 죽었으며 김여물(金汝岉)도 물 속으로 투신하였다. <상촌집 56권 諸將士難初陷敗志>

신흠의 문집은 상촌집에서도 탄금대 전투의 병력이 수천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건, 신흠은 양재도찰방으로써 신립을 따라서 종군한 사람입니다. 즉 신립의 군세를 직접 눈으로 본 사람이란 말이죠.


간단히 평하자면, 8만 설은 말도 안 되는 설입니다. 이미 교차검증에서 아웃이며, 6만, 8만, 10만 등 애초에 기록도 전혀 맞지 않게 어긋나고(2만 차이가 작은 거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없을 겁니다.) 게다가 10만이란 근거로 댄 선조실록의 기사는 사실 근거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선조실록에 저런식의 평가가 얼마나 많은데요.

즉 탄금대전투의 병력수는 경군 8천+충청도군 8천으로 1만 6천이던가, 아니면 기타 조선 사료들의 말대로 약 수천 정도가 됩니다. 수천이라면 8천 정도겠지요.

2014년 8월 7일의 편집 요청[편집]

탄금대 전투에 대한 조선군 항목을 재수정 할것을 부탁드립니다.

먼저 난중잡록의 탄금대 전투 기사의 경우 출전이 명확하지 않은 데다가, 야사여서 신뢰도가 떨어집니다. 프로이스 일본사 8만 운운 역시 일본군이 3면 포위한 상황에서 불과 8천명 밖에 조선군 사망자가 나지 않았으니 실제 숫자로 파악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선조실록의 10만 역시 실제 병력에 대한 기록이라기에는 호왈 십만이라는, 그만한 병력이라는 의미 이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고구려 대무신왕 대 요동태수 군대를 100만이라고 한 것과 소손녕 80만 운운(실제로는 6만 이하로 추정)과 별 다를 바 없기 때문이죠. 따라서 <선조수정실록>에 나타난 신립이 도성에서 뽑은 군사 8천과 징비록, 연려실기술이 인용한 조야기문에서 합류한 8천명이니 1만 6천명 선으로 최대치로 볼 수 있는데, 해당 문서의 조선군은 8만-10만으로 과장된게 그대로 나타나 있기 때문에 해당 문서는 수정이 필요합니다.

미완료 직접 수정해주세요.--콩가루 · 토론 2014년 12월 28일 (일) 19:23 (KST)[답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