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만리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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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반도까지 만리장성이 이르렀다?[편집]

이 문장은 동북공정의 영향이 아닌가요? 예전에 MBC에서 방송되었던 위대한 유산 74434에서 나왔던 왜곡된 문장입니다. --61.99.167.104 2007년 12월 8일 (토) 20:24 (KST)[답변]

만리장성 범위 표시지도에 대해[편집]

만리장성의 범위를 선으로 표시한 지도를 보니 북한의 평양시까지 들어가 있습니다. 이는 만리장성의 범위인 산하이관에서 간쑤성 자위관까지라 했는데 평양시로 들어가있는 지도를 제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빠른시일 내에 수정을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Toby0920 (토론) 2010년 7월 13일 (화) 21:18 (KST)[답변]

만리장성의 범위에 대한 역사학계의 견해[편집]

만리장성의 범위에 대한 최근 언론 보도를 계기로 만리장성 문서를 확인해 본 결과 잘못된 내용이 추가되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문서에 인용된 지도 및 캡션이 역사학계의 견해와 달리 비중립적이고 부정확하게 표시된 것이 있어 수정합니다.

파일:Great Wall of China ~2009.PNG
2009년까지 공인받았던 시대의 만리장성
중국측에서 2009년부터 주장하는 시대의 만리장성
중국측이 2009년부터 주장하는 만리장성의 공사 과정
  1. 첫번째 사진으로 제시된 좌측 지도는 기본적으로 한국을 비롯한 각국의 역사학계의 견해와 매우 다릅니다. 일단 기본적으로 출처가 없습니다. 네이버 카페는 지도의 출처가 될 수 없으며, 적어도 역사학계의 검토를 받은 출판물이나 사이트가 아닌 이상 적합한 출처로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해당 지도의 장성은 현재 남아 있는 장성 유적의 표시 지도입니다. 당연히 명나라 때 만들어진 장성 유적이며, 진나라 시대의 만리장성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사계절 출판사에서 나온 《아틀라스 중국사》 참조) 이렇게 부정확한 지도를 마치 사실인양 올려 놓는 것은 용납되기 어렵습니다.
  2. 두번째 사진의 정보를 보시면 알 수 있겠습니다만, 업로드된 연도가 2007년입니다. 2009년부터 주장했다는 지도가 시간을 거슬러 2007년에 업로드되는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근본적으로 팩트 자체가 틀렸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3. 세번째 사진 역시 마찬가지로, 업로드 된 것이 2008년입니다. 게다가 해당 지도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지도, 그리고 2000년에 출판된 것으로 나타나는 책(Jan, Michel / Michaud, Roland / Michaud, Sabrina: Die Chinesische Mauer, München 2000 (Hirmer))을 출처로 하고 있습니다. 역시 근본적으로 팩트가 잘못되었습니다.
  • 종합하여 서술하겠습니다. 해당 지도들에 나타난 중국 측의 주장은 일부 이견은 있지만 대부분의 한국의 역사학계에서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 언론 보도에서 학술적으로 ''진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위 지도들에서 나타나는 랴오닝 성 일대의 만리장성이 아니라 지린 성, 헤이룽장 성까지 점을 찍어 놓은 중국의 기막힌 행태였습니다. 언론에서는 랴오닝 성의 고구려 성들을 거론하면서 해당 내용을 설명하고 있는데, 분명 해당 문제들이 존재하기는 하겠지만, 대체로 학술적으로는 가치가 없는 선동에 가까운 보도이며, 선동적인 부분을 제외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위 지도들과는 무관합니다.
  • 애초에 랴오닝 성 일대의 만리장성은 수십 년 전부터 고고학적으로도 공인되어 있던 것으로, 학술적으로 거의 문제가 없습니다. 물론 일부 이견이 있긴 합니다만, 그것도 대부분은 압록강 이남까지 뻗어 있는 장성을 인정하느냐 마느냐에 국한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천산산맥 일대를 그 동쪽 한계로 보고 있습니다. 아래 첨부한 링크 상의 지도에서 대략 영릉, 신빈 일대가 그곳입니다.

※ 위 논의들은 기본적으로 송호정 교수가 저술한 《한국 고대사 속의 고조선사》의 〈연 장성의 수축과 그 동단〉 및 연관 챕터, 《아틀라스 중국사》 등을 기반으로 하였습니다. 관련 지도는 아래 링크를 통해 확인 가능합니다. 《한국 고대사 속의 고조선사》 중 장성 동단 지도 《아틀라스 중국사》 명나라 만리장성 관련 지도--Xakyntos (토론) 2012년 6월 8일 (금) 00:10 (KST)[답변]

  • 해당 link를 제대로 보신 것인지 궁금하네요. 해당 link에서는 '중국 학계'의 주장이라고만 되어있지, 그게 '수십년 전부터 공인' 되어 있다는 얘기는 없습니다만, 무엇을 근거로 2010년도에 만들어진 file이 들어갔는지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만리장성의 동쪽 경계에 대하여[편집]

  1. 대한민국의 역사학계에서는 대체로 압록강 이남의 만리장성에 대해서 회의적인 입장입니다. 바로 위의 토론문에 인용된 책을 참조하여 주십시오.
  2. 한편, 압록강 이남의 만리장성을 인정한다고 해도, 중국에서 일반적으로 공인되어 있는 견해는, 물론 이 문서에 링크되어 있는 지도도 마찬가지로 청천강 일대까지로 보고 있습니다. 이른바 청천강의 대령강장성이 주로 논란이 됩니다. 이 역시 위에 인용된 책에서 언급되는 사항입니다.
  3. 저도 평양 일대까지 만리장성을 비정하는 견해가 존재함은 알고 있으나, 정확한 출처는 모릅니다. 그러므로 평양까지 연결되었다는 편집은 출처가 불명확하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적어도 신뢰할만한 출처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으니까요.
  4. 청천강까지 비정하는 견해 역시 논란의 여지가 있으므로, 편집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확실하게 기술할 수 있는 것은 요동(랴오닝 성)까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는 또한 1차 사료인 《사기》에 기록된 사실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이 사실 자체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원사료의 내용입니다. 적어도 조심스럽게 추가해야 할 내용이 아닌 이상 요동이라는 것이 확실하게 서술할 수 있는 마지노선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Xakyntos (토론) 2012년 6월 12일 (화) 01:18 (KST)[답변]

*참고자료 - 《사기》의 해당 기록
因邊山險巉谿穀可繕者治之,起臨洮至遼東萬餘裏。
산과 구릉, 계곡을 따라 보수하여 성을 쌓으니 임조에서 출발하여 요동까지 만여 리에 이르렀다.

  1. 중국에서 제작하여 위키피디아에 탑재한 'Construction of the Great Wall during Chinese history'에는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평양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명백한 동북공정식 역사인식의 산물입니다.
  2. '장성'이라 함은 북방의 흉노 등 유목민족들의 침략에 오랫동안 시달림을 받던 한족 중심의 중국이 수많은 고통을 감내하며 자구책으로 쌓은 방어성입니다.
  3. 만리장성이 오늘날과 같은 모양을 갖춘 것은 명(明)나라 영락제 때였으며, 그 때 동쪽 끝에 산해관도 세웠습니다.
  4. 중국은 수당시절의 고구려성과 요금시절의 북방민족들이 세웠던 방어성들마저도 만리장성으로 둔갑시켜 그 연장선을 확장시키면서 자국사는 물론이고 주변 국가들의 역사를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5. 분명한 것은 만리장성의 동단이 평양이 아니라 산해관이며,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中国地图全集』(大舆出版社股份有限公司),『中国史稿地图集』(中国地图出版社),『国际关系がわかる世界地图』(朝日新闻社),『标准 世界史地图』(吉川弘文馆),『2008 THE WORLD ALMANAC』(Presenting the World), 『Atlas of China』(中国地图出版社)등입니다.
  6. 물론 이 가운데는 중국이 제작, 출판한 것도 있고, 일본이나 영미권에서 제작된 것들고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지도들 속에는 만리장성이 산해관 또는 요하를 넘지 않는 것으로 분영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7. 따라서 중국에서 탑재한 지도 'Construction of the Great Wall during Chinese history'는 한국의 고대사를 왜곡한 또 하나의 실례입니다..--Granato12 (토론) 2015년 3월 11일 (수) 16:00 (KST)[답변]

*중국의 만리장성 동단 관련 지도 목록
『中国地图全集』(大舆出版社股份有限公司),『中国史稿地图集』(中国地图出版社),『国际关系がわかる世界地图』(朝日新闻社),『标准 世界史地图』(吉川弘文馆),『2008 THE WORLD ALMANAC』(Presenting the World), 『Atlas of China』(中国地图出版社)등

중국이 장성에 대해 하는 왜곡 사항과 이 토론은 무관합니다. 왜곡에 대해서는 왜곡이라는 학계의 반박을 실으면 될 일이지 아예 없는 것으로 삭제하는 것이 아닙니다.--Xakyntos (토론) 2015년 3월 13일 (금) 15:30 (KST)[답변]

만리장성 에 관련한 중국 사료[편집]

1[편집]

[史記] 夏本紀 의 우왕의 치수사업에 관한 내용에 갈석산이 등장한다. 鳥夷皮服 夾右碣石 入于海。이 구절에 대한 주석으로 太康地 理志云「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 이 나온다. 즉," 태강지리지왈 낙랑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는데 장성의 기점이다" 라는 것이다. 중국역사지도집에는 낙랑군을 한반도 북부로 비정해놓았지만 갈석산은 현재의 하북성 창려현 북쪽에 그려놓고 대갈석산이라고 표시해놓았다. 동북공정의 논란이 되고 있다. 갈석산에 비석을 세운 사람은 진시황이다. 진시황은 천하를 평정후 서기전 220년부터 215년까지 자신이 차지한 영토를 순시했는데 동쪽 끝으로 갈석산까지 왔다. [史記] 秦始皇本紀 에는 이런 기사가 있다. 三十二年,始皇之碣石,使燕人盧生求羨門高誓。刻碣石門。 32년조 진시황이 갈석산에 가서 연나라 사람 노생에게 선문과 고서란 인물을 찾게 하고 석문에 비를 새기게 했다. 현재 갈석산에는 비문이 전해진다. --Eunnorae (토론) 2012년 10월 15일 (월) 17:01 (KST)[답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만, 해당 구절을 포함해서 낙랑군의 위치를 요서로 재단하려는 해석에 대해서는 이미 조선시대에도 비판을 받던 문제 있는 해석입니다. 안정복은 그런 자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위(元魏) 때에 이르러서는 낙랑, 대방 등의 군현을 요서(遼西) 지역에 설치하였는데, 이것은 우리나라와는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중략)...중국의 서책에서 혹 요동의 여러 현을 한나라 때의 낙랑 지역이라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원위는 북위를 말합니다. 원래 낙랑군은 한반도에 있었으나 고구려가 낙랑군을 축출하자 그 유민들이 요동 및 요서에 있던 모용씨에게 흘러들어갑니다. 모용씨는 낙랑 유민들을 받아들여 요서 지역에 낙랑군을 설치했으며, 이후 오호십육국시대 동안 낙랑군은 요서에서 계속 존재했습니다. 이후 북연을 멸망시킨 북위는 북연의 유민들을 지금의 북경 일대로 이주시켰는데, 이때 이주된 유민들 중에는 낙랑군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북위나 바로 갈석산이 위치한 그 지역에 낙랑군을 설치한 것은 서기 525년 경의 일로, 그보다 앞서 낙랑군을 같은 위치에 설치했던 적이 있지만 철폐했다가 이때 확실하게 설치된 것입니다. 이것이 갈석산 낙랑군설의 실체입니다. 게다가 실제 만리장성의 시점은 갈석산도 아니었습니다. 진시황이 만든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바로 위에 서술된 것처럼 요동까지이며, 갈석산은 요서군의 서쪽 끝에 위치한 만리장성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하지만 북위 때에는 갈석산 동쪽의 만리장성이 완전히 유실되었고, 그 당시 남아있던 만리장성의 시점은 갈석산이었으니 그렇게 적은 것 뿐입니다. 이런 것도 모르고 요서 낙랑군 운운하는 것은 학문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의 행동입니다. 자중해 주시기 바랍니다.--Xakyntos (토론) 2012년 10월 15일 (월) 17:14 (KST)[답변]


그러니까 요동까지 설치되었다는 근거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이고 귀하께서 말씀하시는 낙랑군설의 실체라는 것은 무엇에 근거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고구려를 친 유주자사 관구검이 현도에서 나--Eunnorae (토론) 2012년 10월 17일 (수) 08:59 (KST)와 낙랑으로 도망하였다는 삼국사기 기록을 들어 낙랑 현도는 요동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의문나는 사항이 있으면 말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자중하라니요..--Eunnorae (토론) 2012년 10월 15일 (월) 17:23 (KST)[답변]

이 포스팅이나 참조하십시오.--Xakyntos (토론) 2012년 10월 15일 (월) 17:28 (KST)[답변]


  • 국사편찬위의 망언
  • 동북아역사재단 에 대한 비판
  • 역사학 밖에 있는 사람으로 역사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가져야 합니다. 역사학계의 태두라는 이병도 는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로 시작했죠. 조선사편수회는 조선총독부 직속기구로 식민사학을 집대성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병도는 해방후 서울대학교 교수, 대학원장 과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도 했던 인물로 우리 역사학계에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친일인명사전'에도 올려져있습니다. 식민사학자 이병도가 비정한 지명들이 지금까지 이어져 온다는 사실들이 안타깝습니다. --Eunnorae (토론) 2012년 10월 17일 (수) 08:59 (KST)[답변]
이 글이나 읽어 보십시오. 국편위의 지적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는, 황색 언론의 일방적인 비난일 뿐입니다. 물론 이병도에 대한 모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귀하께서 이병도를 식민사학자라고 주장하시려면 그가 어떤 부분에서 식민사학적인 주장을 했는지를 먼저 밝혀 주셔야 할 일입니다. 그가 조선사편수회에서 일했다는 것은 그의 경력에 있어서 극히 짧은 시기의 일일 뿐입니다. 게다가 수사관보라는 직책이 뭔지 아시고 하는 말씀이십니까? 그가 수사관보로서 무슨 일을 했고 그것이 어떻게 식민사학에 이바지했는지 알고 계십니까? 알고 계시다면 설명해 보십시오. 저는 지금까지 이병도가 식민사학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서 그의 연구 가운데 어느 부분인 식민사학인지 말해줄 수 있는 사람, 아니 이병도가 한 연구 중에서 단 한 토막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은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귀하께서 말씀해 주신다면 저도 이병도에 대한 평가를 바꿀 기회가 되겠지요. 어디 한 번 말씀해 보십시오.--Xakyntos (토론) 2012년 10월 17일 (수) 15:12 (KST)[답변]

2[편집]

이병도를 친일인명사전에서 검색해 그 일부를 발췌해봅니다. 1896년 8월 14일 태어났다. 경기도 용인 출신이다. 본관은 우봉, 호는 두계(斗溪)다. 1909년 3월 한성 보광학교(普光學校)에서 수학한 후 1910년 3월 사립 중동학교(中東學校)를 졸업했다. 1912년 3월 일본인이 세운 불교고등학원(佛敎高等學院) 예비과를 수료했고, 다음 달 보성전문학교 법률학과에 입학해 1915년 3월 졸업했다. 졸업하던 해 4월 일본으로 건너가 다음 해 7월까지 와세다(早稻田)대학 고등예과 문과를 수료했고, 두 달 후인 9월 와세다대학 문학부 사학급사회학과(史學及社會學科)에 들어가 1919년 7월 졸업했다. 처음에는 서양사를 전공하고자 했으나, 당시 일본사의 권위자였던 요시다 도오고(吉田東伍)와 쓰다 소우기치(津田左右吉)의 영향을 받아 조선사연구로 방향을 전환했다. 이후 귀국해 1919년 10월부터 1925년 8월까지 경성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원을 지냈다. 1920년 7월 김억(金億)·나혜석(羅蕙錫)·염상섭(廉想涉) 등과 잡지 《폐허》를 창간한 후 동인으로 활동했고, 1922년 12월에는 염상섭·오상순(吳相淳) 등과 문인회(文人會)를 발기해 창립했다. 1925년 8월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修史官補)에 임명되었다. 1927년 5월 수사관보를 그만두고 촉탁을 맡아 1938년 6월경까지 활동했다. 조선사편수회는 1925년 6월 조선 사료의 수집, 편찬 및 조선사의 편수를 담당하기 위해 조선사편찬위원회를 확대 개편한 조선총독부 직속기구로, 《조선사(朝鮮史)》 편찬 등을 통해 식민사학을 집대성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조선사편수회 촉탁으로 활동하면서 이마니시(今西龍)와 함께 《조선사》 제1편 〈신라통일 이전〉, 제2편 〈신라통일시대〉, 제3편 〈고려시대〉의 편찬을 담당했다. 수사관보로 재직하던 1926년 1월 조선사편수회 소속 학자들의 공동 연구기관인 조선사학동고회(朝鮮史學同攷會)의 편찬원을 맡았다. 1930년 8월부터 1939년 10월까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교수와 조선총독부·조선사편수회 간부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청구학회(靑丘學會) 위원을 지냈다. 청구학회는 조선과 만주를 중심으로 한 극동문화 연구를 표방하며 조직한 학술연구단체로, 최남선(崔南善)·이능화(李能和)·신석호(申奭鎬) 등이 참여했으며, 《청구학총(靑丘學叢)》을 발간했다. 1933년 4월부터 1943년까지 중앙불교전문학교 강사로서 조선유학사(朝鮮儒學史)를 강의했다. 1934년 5월 진단학회(震檀學會)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해 학회 창립과 함께 상무위원에 선임되었고, 학회지 《진단학보(震檀學報)》의 편집위원(편집인) 겸 발행인을 맡았다. 1936년 6월에는 진단학회 위원을 맡았다. 1939년 11월 조선총독부의 지원으로 전국 유림단체를 연합하여 총후봉공(銃後奉公)을 위한 정신운동에 나서도록 촉구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유도연합회(朝鮮儒道聯合會) 평의원에 선임되었다. 1941년 4월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를 맡아 1943년까지 사학강좌(史學講座)를 담당했다.

그러니까 여기서 어떤 부분이 식민사학이냐구요. 제가 언제 이병도가 친일 행각이 없다고 했어요? 조편회에서 일하고 일제하에서 일한 적 없다고 언제 말한 적이나 있습니까? 그거랑 이거랑은 다른 이야깁니다. 어디가, 어떤 부분인 식민사학인지 말씀해 보십쇼. 하다못해 조편회에서 만든 《조선사》하고 이병도의 다른 연구하고 비교라도 해서 여기 이 부분이 식민사학이다 뭐 이렇게 말씀해 보시지요. 아니, 그 전에 이병도의 연구가 어떤 건지 알고는 계십니까? 이병도가 무슨 책을 썼는지는 아세요? 그 책의 어느 부분이 식민사학인지 말씀해 보십시오.--Xakyntos (토론) 2012년 10월 17일 (수) 15:52 (KST)[답변]
그리고 논점 이탈은 하지 마시죠? 이병도가 친일파였는지, 식민사학자였는지 뭐든지간에 그게 만리장성하고 무슨 상관입니까? 이병도 때문에 중국이 만리장성을 한반도에다가 쌓았대요? 이병도가 낙랑군을 평양이라고 해서 낙랑군이 평양에 있는 겁니까? 정반대의 문제입니다. 2천 년 전에 만리장성이 세워졌기 때문에 학자들이 여기에 만리장성이 있다고 하는 것이고, 낙랑군이 평양에 있기 때문에 이병도가 그렇게 주장한 겁니다. 이병도가 친일파인 것하고 낙랑군이 평양에 있는 문제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이병도가 무슨 초능력자입니까? 평양에 없는 낙랑군을 있게 만드는 초능력자요? 지금 학자들은 무슨 조폭입니까? 실제로는 없는데 오야붕 이병도가 있다고 하니까 있다고 믿어야 하는 조폭입니까? 조폭도 그런 식으로는 안삽니다. 대답해 보십시오. 이병도하고 만리장성이 무슨 상관입니까?--Xakyntos (토론) 2012년 10월 17일 (수) 15:59 (KST)[답변]

중요한 것은 평양 일대가 낙랑군 지역으로 결정된 시기가 일제강점기라는 점입니다.그리고 이런 일제 식민사학들의 주장이 현재 한국 주류 사학계의 정설이 된것입니다.2천여년전에 설치된 낙랑군 지역을 현재의 대동강 유역이라고 확정한 세력은 조선총독부 이기때문입니다. 한국사를 식민지에서 시작된 것으로 만들면 일제식민지배를 정당화할수 있기때문에 조선총독부는 한국사의 시작을 한사군으로하고 그 위치를 한반도 내로 비정하는 작업에 조직적으로 나서게 됩니다. 이는 만리장성 위치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이러한 총독부의 방침에 따라 훗날 조선사편수회와 조선사편찬위원회의 중심인물이 되는 이마니시 류가 가세하여 대동강변 일대의 유적을 고구려유적에서 한사군유적으로 재탄생시키게 되는 겁니다. 이마니시 류의 수제자 !! 이병도는 이들과 함께하게되는 거죠. 친일 행각이 있는 사람이. 그것도 역사관련하여 친일행각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올려져 있는 사람이. 이 나라 역사학계의 태두라는데..역사학계가 정상적일 수 있을까요?

이병도는 식민사학을 집대성한 조선사편수회에서 함께 일했으며 이병도의 시작은 식민사학과 함께이고 끝도 식민사학과 같다는 말입니다. 일제 식민사학자와 똑같다는 말입니다.--Eunnorae (토론) 2012년 10월 18일 (목) 00:06 (KST)[답변]

고(구)려는 본래 부여의 별종이다. 그 나라는 평양성에 도읍하였으니, 곧 한 낙랑군의 옛 땅이다.

高麗者, 出自扶餘之別種也. 其國都於平壤城, 卽漢樂浪郡之故地,
《구당서》 〈동이열전〉 고구려조

1. 저 인용문을 보여드린 것은 벌써 잊으셨습니까? 애초에 낙랑군이 평양 일대라는 것은 고구려 시대에도 인정되고 있던 사실입니다. 대체 어떤 방식으로 역사를 읽어야 천 년도 더 전부터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고 웬만한 학자들이라면 다 알고 있던 사실이 갑자기 일제강점기 때 결정될 수가 있습니까? 정약용의 《아방강역고》 읽어 보셨어요? 안정복의 《동사강목》은요? 《동국통감》에는 뭐라 써 있는지 아십니까? 말은 똑바로 하십시오. 일제가 아무런 근거도 없이 평양이라고 정한 것이 아니라, 평양이라고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평양을 파고 발굴한 겁니다. 애초에 선후 관계부터가 틀려먹었어요.
2. 마찬가지로, 이병도가 친일파인지, 식민사학자인지랑 만리장성이 무슨 상관인지부터 말씀해 보십시오. 이병도가 낙랑군의 위치를 결정했나요? 이병도가 원래는 없던 만리장성을 만들었어요? 이병도가 지금 학자들한테 낙랑군하고 만리장성은 여기니까 딴 소리 하지 말라고 했어요? 대체 이병도랑 만리장성이 무슨 상관입니까? 이병도를 아무리 욕해봤자 만리장성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역사적 사실을 주장하려면 그 사실이 맞는지를 논해야지 왜 역사학계가 이병도 일파니 하는 것을 말하는 겁니까? 역사학계가 이병도 일파니까 엄연히 존재하는 만리장성도 이병도 일파가 다 만든거에요? 만리장성이 여기에 있는지 없는지를 증명하라니까 왜 아무 상관도 없는 이병도를 말씀하시는 건가요?--Xakyntos (토론) 2012년 10월 18일 (목) 00:59 (KST)[답변]

3[편집]

발췌한 구문입니다.

  • 『史記』「蒙恬列傳」
始皇二十六年:築長城,因地形,用制險塞,起臨洮① 至遼東②
①集解徐廣曰:「屬隴西.」현 감숙성(甘肅省) 定西市 임조현.
②正義遼東郡在遼水東,始皇築長城東至遼水,西南至海.
  • 『史記』 「匈奴列傳」

起臨洮至遼東萬餘里

  • 『水經注』 「河水注」:“始皇令太子扶蘇與蒙恬築長城起自臨洮至于碣石”(『수경주』 「하수주」 “진시황은 태자 부소와 몽염에게 명을 내려 장성을 쌓게 했는데 임조에서 시작해 갈석까지 이르렀다.”--Eunnorae (토론) 2012년 10월 18일 (목) 12:34 (KST)[답변]

성호사설(星湖僿說)』「천지문(天地門)」조선사군(朝鮮四郡) : 한(漢) 나라가 조선(朝鮮) 땅을 빼앗아 사군(四郡)을 만들었으니, 사군은 본디 우리나라에 속한 것이다. 위(魏) 나라의 관구검(毌丘儉)이 현도(玄菟)에서 나와 고구려를 침범하자 왕이 옥저(沃沮)로 달아났다. 위 나라 장수가 숙신(肅愼) 남쪽 경계까지 추격하여 돌에 공적을 새겨 기록했다. 또 환도(丸都)를 무찌르고, 불내성(不耐城)에다 공적을 새기고서 낙랑으로 물러갔다. 환도는 국내성(國內城)인데, 병란을 겪어서 다시 도읍할 수 없었으므로 마침내 평양성(平壤城)으로 옮겼으니, 평양은 왕검성(王儉城)이다. 환도는 압록강 서쪽에 있는데, 현도로부터 나와 낙랑으로 물러갔으니, 두 군(郡)이 요동(遼東)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통고(通考:문헌통고)》에, “조선은 진번(眞番)을 역속(役屬 복속)시켰다.” 했으며, 또, “우거(右渠)가 들어와 천자(天子)께 뵈오려 하면서도 일찍이 진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했으니 진번이 한(漢) 나라로 들어가는 경계(境界)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수(隋) 나라의 동정(東征)에 있어, 우문술(宇文述)은 부여도(扶餘道)로 나오고, 우중문(于仲文)은 낙랑도(樂浪道)로 나오고, 형원항(荊元恒)은 요동도(遼東道)로 나오고, 설세웅(薛世雄)은 옥저도(沃沮道)로 나오고, 신세웅(辛世雄)은 현도도(玄菟道)로 나오고, 장근(張瑾)은 양평도(襄平道)로 나오고, 조효재(趙孝才)는 갈석도(碣石道)로 나오고, 최홍승(崔弘昇)은 수성도(遂城道)로 나오고, 위문승(衛文昇)은 증지도(增地道)로 나와서 모두 압록수(鴨綠水 압록강) 서쪽에 모였다. 《통고(通考)》에 본다면, 수성 증지는 낙랑군의 속현(屬縣)이고, 양평은 요동군(遼東郡)에 속했으니, 이는 모두 압록 이동(以東)과 상관없다. 다만 임둔(臨屯)은 기록에 보이는 것이 없다.--Eunnorae (토론) 2012년 10월 18일 (목) 12:38 (KST)[답변]

“『郡國志』, 西安平、帶方,縣,並屬遼東郡” (『後漢書』「東夷列傳」 高句麗, 註釋)(『군국지(郡國志)』는 “서안평현과 대방현은 모두 요동군에 속해 있다” “質、桓之閒,復犯遼東西安平,殺帶方令,掠得樂浪太守妻子” (『後漢書』「東夷列傳」(『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조)“질제·환제 연간(서기 146~167)에 (고구려)가 다시 요동 서안평을 공격해 대방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았다.” --Eunnorae (토론) 2012년 10월 18일 (목) 12:44 (KST)[답변]

구당서는 940년대에 쓰여진 역사서로서 장수왕 427년 지금의 평양으로 수도를 이전했습니다. 고조선의 수도위치에 대해 혼동있었습니다.


{遂城縣(수성현)…자세하지 아니하나, 지금 황해도 북단에 있는 수안(遂安)에 비정하고 싶다. 수안에는 승람 산천조에 遼東山(요동산)이란 산명이 보이고, 關防條(관방조)에 후대 所築(소축)의 성이지만 防垣鎭(방원진)의 동서행성의 石城(석성)이 있고, 또 晋志의 이 수성현조에는 -맹랑한 설이지만-「秦代長城之所起」라는 기재도 있다. 이 진장성설은 터무니 없는 말이지만 아마 당시에도 요동산이란 명칭과 어떠한 長城址가 있어서 그러한 부회가 생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릇된 기사에도 어떠한 꼬투리가 있는 까닭이다. (이병도, 「낙랑군고」, 『한국고대사연구}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황해도 수안군 【건치연혁】 원래 고구려의 장새현(獐塞縣)이다 고소어(古所於)라고도 하였다. 신라 때에 서암군(栖巖郡)의 영현(領縣)이 되었으며, 고려 초기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顯宗) 때 곡주(谷州)에 속하였으며 후에 현령(縣令)을 두었다. 충선왕(忠宣王) 때 원(元) 나라 조정의 폐관(嬖官) 이대순(李大順)의 요청으로 승격하여 수주(遂州)가 되었다 고을 사람 이연송(李連松)이 나라에 공로가 있어, 군으로 승격되었다고 한다. 본조에서 수안군으로 고쳤다. 【산천】 요동산(遼東山): 고을 동북쪽 4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아달산(阿達山): 고을 북쪽 60리에 있다. 대청산(大靑山): 고을 북쪽 10리에 있다. 웅산(熊山) 고을 남쪽 5리에 있다. 언진산(彦眞山): 고을 동쪽 45리에 있다. 가라읍산(加羅邑山): 고을 동남쪽 30리에 있다……. 【관방】 방원진(防垣鎭): 고을 북쪽 24리에 있는데 본군 및 우봉(牛峯)ㆍ신계ㆍ서흥 네 고을 군졸이 번갈아 방어한다. 진 동서쪽에 행성(行城)이 있는데 돌로 쌓았으며 주위가 6백 20척, 높이가 8척이다.--Eunnorae (토론) 2012년 10월 18일 (목) 12:56 (KST)[답변]

1. 지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관구검의 침입 당시의 현도군은 제3현도군으로,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을 치기 위해서 최단거리에 해당하는 지역입니다. 그리고 당시 고구려가 도망친 것이 옥저로, 불내성은 바로 옥저에 속해 있는 성읍 중 하나입니다. 지도를 보고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시지요. 현도군에서 출발해서 국내성을 거쳐 옥저에 도착한 다음에 퇴각할 때는 어느 쪽이 빠른지.

일찌기 입조하지 않았다. 진번과 진국이 조공하려 하여도 도 이를 가로막아서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旣未嘗入 眞番辰國欲上書 見不子 又雍閼石通

2. 《통전》의 원문은 이렇습니다. 진번이 조공을 하려는 길을 우거왕이 가로막고 못하게 핬다는 내용이죠. 이것은 《사기》와 《한서》에도 모두 동일하게 적혀 있는 내용이라서 명백하게 성호가 잘못 해석한겁니다.
3. 이미 위에 말씀드렸습니다만, 이미 북위 때 낙랑군을 비롯한 동방변군들이 모조리 다 요서 지역에 재설치된 상태였습니다. 그러니 수나라 군대가 출정하는 시발점인 요서에서 가는 길이 다 낙랑군이나 기타 관련 군의 길인 것은 당연하죠.
4. 낙랑군 문서를 보시지요. 수성현을 수안군에 비정한 이병도의 견해는 현재 학계에서 아무도 지지하지 않고 있습니다만.--Xakyntos (토론) 2012년 10월 18일 (목) 13:10 (KST)[답변]

4[편집]

원위(元魏) 때에 이르러서는 낙랑, 대방 등의 군현을 요서(遼西) 지역에 설치하였는데, 이것은 우리나라와는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중략)...중국의 서책에서 혹 요동의 여러 현을 한나라 때의 낙랑 지역이라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원위는 북위를 말합니다. 원래 낙랑군은 한반도에 있었으나 고구려가 낙랑군을 축출하자 그 유민들이 요동 및 요서에 있던 모용씨에게 흘러들어갑니다. 모용씨는 낙랑 유민들을 받아들여 요서 지역에 낙랑군을 설치했으며, 이후 오호십육국시대 동안 낙랑군은 요서에서 계속 존재했습니다. 이후 북연을 멸망시킨 북위는 북연의 유민들을 지금의 북경 일대로 이주시켰는데, 이때 이주된 유민들 중에는 낙랑군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북위나 바로 갈석산이 위치한 그 지역에 낙랑군을 설치한 것은 서기 525년 경의 일로, 그보다 앞서 낙랑군을 같은 위치에 설치했던 적이 있지만 철폐했다가 이때 확실하게 설치된 것입니다. 이것이 갈석산 낙랑군설의 실체입니다. 게다가 실제 만리장성의 시점은 갈석산도 아니었습니다. 진시황이 만든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바로 위에 서술된 것처럼 요동까지이며, 갈석산은 요서군의 서쪽 끝에 위치한 만리장성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하지만 북위 때에는 갈석산 동쪽의 만리장성이 완전히 유실되었고, 그 당시 남아있던 만리장성의 시점은 갈석산이었으니 그렇게 적은 것 뿐입니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어떤 고서의 기사에 근거한것입니까? 북연이 "한반도 내" 낙랑군 유민을 이주시켰다든가 만리장성의 끝이 갈석산이 아니라는 근거말입니다. 그리고 현재 역사학계는 낙랑군 수성현을 어디로 보십니까? 그리고 자꾸 한사군의 지리를 나타내는 기사를 말씀해주세요. 이미 한반도에 있다고 기정사실화 하지마시고 이를 뒷바침할 지리서 고서를 보여주세요.

  • 『史記』 「匈奴列傳」

起臨洮至遼東萬餘里

  • 『水經注』 「河水注」:“始皇令太子扶蘇與蒙恬築長城起自臨洮至于碣石”(『수경주』 「하수주」 “진시황은 태자 부소와 몽염에게 명을 내려 장성을 쌓게 했는데 임조에서 시작해 갈석까지 이르렀다."--Eunnorae (토론) 2012년 10월 19일 (금) 15:29 (KST)[답변]

위키에서 낙랑군을 보니까 "신(新)의 왕망(王莽) 시기에는 태수의 관직을 태윤(太尹)으로 바꾸었는데, 평양 인근에서‘낙랑태윤장(樂浪太尹章)’이라 찍힌 봉니(捧泥)가 발굴되었다. 신나라 말기의 혼란기에 낙랑군에는 반란이 일어나 낙랑사람 왕조(王調)가 스스로 대장군 낙랑태수(大將軍 樂浪太守)라고 칭하였다. 후한 광무제(光武帝)는 서기 30년에 왕준(王遵)을 보내서 낙랑군을 다시 정복하고 패수 이남을 영토로 확정하였다." 라고 되어 있는데 제가 알고있기로 왕망은 태수의 관직을 태윤을 바꾸었고 또한 낙랑을 낙선으로 바꾼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낙랑유물조작설, 블로그 점제현 신사비에 대한 조작설도 있습니다 sbs 스페셜에 반영되었죠.

  1. 낙랑유물 조작의 증거
  2. SBS 스페셜, 금지된 장난, 일제 낙랑군 유물 조작

--Eunnorae (토론) 2012년 10월 19일 (금) 15:48 (KST)[답변]

* 건흥 원년 (313년) 요동의 장통이 낙랑, 대방 2군에 웅거하여 고구려왕 을불리(미천왕)와 서로 공격하여 오랫동안 풀리지 않았다. 이에 낙랑의 왕준이 장통에게 권고하여 백성 천여 가를 이끌고 모용외에게 귀부하게 하였다. 모용외가 이들을 위하여 낙랑군을 두고 장통을 낙랑군 태수에, 왕준을 낙랑군참군사로 삼았다. ― 《자치통감》

  • 연화 원년(432년), 영구, 성조, 요동, 낙랑, 대방, 현도 6군의 백성 3만 가구를 유주로 옮겼다. ― 《위서》 〈세조기〉
  • 낙양군은 전한 무제가 두었다. 양한과 진에서 낙랑이라 불렀는데 후에 고쳤다가 파하였다. 정광(520-525) 말년에 복구했다. 치소는 연성이다. 현을 둘 가지고 있다. 호는 219, 인구는 1천 8이다. 영락현은 정광말에 두었으며 조산(鳥山)이 있다. 대방현은 양한과 진에 속했는데, 후에 파하였다. 정광말에 다시 속하게 했다. ― 《위서》 〈지형지〉
  • 북위 임금 도(세조)가 연화 초에 조선민(朝鮮民)을 비여(肥如)로 사민하여 조선현을 두고, 아울러 북평군을 두어 이를 다스리게 하였고, 북제가 북평군 치소인 신창(新昌)을 옮기고 조선현을 병합하여 이에 들게하였다. ―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 또 [수경]에 전하기를 “(갈석산은) 요서 임유현 남쪽 물에 있다.” 대개 갈석산은 둘이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갈석의 오른쪽을 끼고 바다로 들어간다”는 당연히 북평의 갈석을 가리키는 것이다. ― 《사기색은》, 태강지리지 운운하는 바로 다음 부분
  • 노룡은 한나라 비여현이다. 갈석산이 있으니 해안가에 우뚝 선 모양을 보고 그 이름을 삼은 것이다. 진나라 태강지지에 진나라가 쌓은 장성이 갈석에서 시작한다했는데, 갈석은 지금 고려의 옛 강역에 있으니 이 갈석산이 아니다. ― 《통전》
1. 위에 귀하께서 원하시는 고서를 잔뜩 드렸으니 보시던가요.
2. 《사기》이라던가 《통전》을 인용해서 낙랑평양설을 부정하는 사람 치고 그 원본을 제대로 인용하는 사람은 못봤지요. 위에 가장 하단에 두 고서를 보시지요. 태강지리지를 인용해서 수성현에 갈석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바로 다음줄에 나오는 근데 여기서 나오는 갈석은 수성에 있는 게 아니고 북평에 있는 거다라는 것은 쏙 빼놓는 낯뜨거운 날조의 현장이죠. 《통전》의 내용은 또 어떻구요? 갈석이 2개 있는데, 태강지리지에 나온 갈석은 고려에 있는 거고 여기 있는 건 다른 갈석이다라는 내용인데 말이죠. 뭐 굳이 더 할 말은 없습니다.
3. 귀하께서 친절하게 링크까지 걸어주신 이 블로그의 주인장하고 저는 좀 아는 사이인데 말입니다, 저 포스팅도 제대로 읽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왕망이 태윤으로 바꾼 것은 시건국 원년(서기 9년)의 일이고, 군의 이름을 낙선으로 바꾼 것은 천봉 원년(서기 14년)의 일입니다. 고로 정확히 5년 동안은 낙랑대윤이라는 관직이 있었어요. 이건 낙랑봉니조작설을 증명하는 자료가 아니라 오히려 조작설을 격파하는 자료에요. 이것을 증거로 내미는 것은 스스로의 멍청함을 증명하는 꼴밖에는 안됩니다.--Xakyntos (토론) 2012년 10월 19일 (금) 16:14 (KST)[답변]

5[편집]

중국 하북성(河北省) 창려현(昌黎縣) 갈석산(碣石山)에 올랐다. 이 일대에서는 가장 높은 해발 695m의 바위 많은 양산(陽山)이다. 여러 차례 이 산에 오른 것은 동북공정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한(漢)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웠다는 낙랑군 수성현에 있었다는 산이다. 『사기(史記)』 『하본기(夏本紀)』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에는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는데 (만리)장성의 기점이다(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라는 기록이 있다. 갈석산이 있는 낙랑군 수성현이 만리장성의 동쪽 기점이란 뜻이다. 낙랑군 수성현의 위치를 현재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주류 사학은 물론 한국의 주류 사학까지 황해도 수안(遂安)으로 비정한다. 식민사학자인 이나바 이와기치(稻葉岩吉)가 일제시대 『사학잡지(史學雜誌)』에 『진나라 장성의 동쪽 끝 및 왕험성 고(秦長城東端及王險城考)』라는 논고에서 “낙랑군 수성현은 곧 지금의 수안”이라며 “진나라 장성의 동쪽 끝은 지금의 조선 황해도 수안의 경계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한 것이 지금껏 정설(定說)로 행세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황해도 수안에 갈석산이 없자 『동국여지승람』 수안군 산천(山川)조에 나오는 ‘요동산(遼東山)’을 갈석산이라고 우겼다. 중국의 공식 견해를 대변하는 『중국역사지도집』(사회과학원)은 이에 따라 낙랑군 수성현을 평양 부근에 표기했다. 중국 동북공정과 일제 식민사학은 ‘침략주의’라는 한 란(卵)에서 나온 쌍둥이라고 보면 된다. 그러나 『중국역사지도집』은 갈석산은 황해도가 아니라 하북성 창려현 부근에 표기해 놓았다. 이 한 가지 사실로 ‘한강 이북이 중국의 역사 강역이었다’는 중국 동북공정의 핵심 논리는 파탄났다.

중국은 왜 갈석산을 황해도에 그려놓지 못했을까. 갈석산은 우리로 치면 설악산 정도 되는 유명한 산이어서 일반인도 그 허구성을 쉽게 눈치 채기 때문이다. 아홉 명의 황제가 올라서 구등황제산(九登皇帝山)으로도 불린다. 고조선을 침략하기 전 한무제(漢武帝), 고구려를 침략하기 전 수양제(隋煬帝)·당태종(唐太宗)이 모두 이 산에 올라 전의를 불태웠다. 갈석산이 황해도 수안이라면 이들은 고조선과 고구려를 공격하기 전에 남쪽 황해도를 먼저 방문해 올랐다는 이야기가 된다. 어찌 허망하지 않겠는가. 역사왜곡이란 이렇게 허망한 것이다. 더 허망한 것은 이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아직껏 정설로 떠받드는 우리 학계 일부의 역사 의식 빈곤이다. 한사군(漢四郡) 중 낙랑군의 위치에 대해 『사기(史記)』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는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樂浪遂城縣,有碣石山)”고 전하고 있다. 그 갈석산은 현재 하북성(河北省) 창려현(昌黎縣)에 있다. 일제 식민사학자들과 그 후예들은 아직도 황해도 수안에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서기 207년 위(魏)나라 조조(曹操)는 유성(柳城)을 정벌하고 돌아가는 길에 갈석산에 올라 “동쪽 갈석산에 임해, 푸른 바다를 바라보노라(東臨碣石 以觀滄海)”라는 시를 남겼다. 조조를 ‘뛰어난 정치가·군사가·시인’으로 재평가했던 모택동(毛澤東)이 좋아했던 시인데, 현재도 갈석산 중턱에 음각되어 있다. 시 중의 ‘동(東)’자는 동쪽 끝이란 의미였다.

『사기(史記)』는 진시황의 통일 제국에 대해 “그 땅이 동쪽으로는 바다와 고조선까지 이르렀다(地東至海暨朝鮮)”고 말했다. 이때의 고조선은 어디쯤인가? 한(漢)나라 유안(劉安)이 지은 『회남자(淮南子)』 ‘시측훈(時則訓)’에는 “동방의 끝 갈석산으로부터 고조선을 지난다(東方之極,自碣石山過朝鮮)”고 설명한다. 진시황을 비롯해 아홉 명의 중국 황제가 갈석산에 올랐던 이유가 고조선과 국경 부근이기 때문임을 말해준다.

 조조가 바라본 창해가 지금 원유 유출로 시끄러운 발해(渤海)다. 근래 중국 쪽 사람들을 만나보면 갈석산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음을 느낄 수 있다. 필자 등이 쓴 책을 보고 하북성 창려현에 있는 갈석산 때문에 ‘한강 이북은 중국의 역사영토였다’는 동북공정 핵심 논리가 무너지는 것은 물론 갈석산 서쪽의 광대한 영토가 되레 ‘한국 역사영토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선비족이 세운 북위(北魏)의 정사인 『북사(北史)』 ‘고종 문성제(高宗文成帝)’ 태안(太安) 4년(458)조는 문성제 탁발준(拓拔濬)이 동쪽으로 순행해 요서(遼西) 황산궁(黃山宮)에서 연회하고 다시 “갈석산에 올라 창해를 바라보고 산 위에서 군신들과 큰 연회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다.

  • 1980년 중국 고고학자들이 진황도시 산해관 구내에서 맹강녀의 무덤과 유물을 발견 한 뒤 창려현 북쪽이 갈석산이라는 설이 더 확고해졌습니다.
  •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조에서

質、桓之閒,復犯遼東西安平,殺帶方令,(郡國志西安平、帶方,縣,並屬遼東郡)掠得樂浪太守妻子 : 질제, 환제 연간 (서기 146~167)에 (고구려가) 다시 요동 서안평을 공격해 대방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았다 ->여기에서 요동의 서안평을 공격하고 대방령을 죽였다고했으니 대방은 황해도 일수 없습니다. 대방군은 낙랑군 소속인 둔유현 남쪽 황무지를 대방군으로 삼았으므로 대방군은 낙랑군 아래에 있습니다. 위키에서 대방군을 찾으면 역시나 낙랑군 밑으로 되어있습니다. 군국지도 서안평현과 대방현 모두 요동군에 속해있다고 합니다. 낙랑군, 대방군 모두 한반도가 아닙디다. --Eunnorae (토론) 2012년 10월 19일 (금) 20:45 (KST)[답변]

  •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이셨던 석주 이상룡 선생은 망명일기『西徙錄』, 1911년 2월 24일에서 [수사(隋史:수서)에 이르기를, “좌우 20군이 현토·낙랑 등의 길에서 나와 압록강 서쪽에 모였다.”라고 하였는데, 이에 근거하면 사군(四郡:한사군)의 땅은 압록강 이서를 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隋書』 「煬帝 本紀」,大業八年 (621: 고구려 영양왕21년) “左第一軍可鏤方道,第二軍可長岑道,第三軍可海冥道,第四軍可蓋馬道,第五軍可建安道,第六軍可南蘇道,第七軍可遼東道,第八軍可玄菟道,第九軍可扶餘道,第十軍可朝鮮道,第十一軍可沃沮道,第十二軍可樂浪道。右第一軍可黏蟬道,第二軍可含資道,第三軍可渾彌道,第四軍可臨屯道,第五軍可候城道,第六軍可提奚道,第七軍可踏頓道,第八軍可肅慎道,第九軍可碣石道,第十軍可東暆道,第十一軍可帶方道,第十二軍可襄平道。凡此衆軍,先奉廟略,駱 驛引途,總集平壤

수나라가 고구려와 의 전쟁을 위해 수나라 병사 좌 12군, 우 12군이으로 총집합하는 경로 (선봉묘량, 총집 펴양) 를 나타내는 기사입니다. 그 경로에 누방, 장잠, 요동, 현도, 부여, 조선, 옥저, 낙랑, 임둔, 숙신, 갈석, 동이, 대방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수나라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고구려를 공격했겠지요. --Eunnorae (토론) 2012년 10월 19일 (금) 22:00 (KST)[답변]

  • 봉니는 문서가 수신자에게 안전하게 전해질 수있도록 봉함하는 장치입니다. (봉니는 수신지에서 떠어보는 것)
문제는 이런 속현의 것들만 출토되어야 하는데 낙랑태수장을 비롯하여 낙랑대윤장, 낙랑수승, 낙랑장사,낙랑우위, 낙랑대윤오관연을 비롯해 낙랑군 중앙의 여러 관직 이름이 눌려 있는 봉니까지 출도된 점이다. 수성이란 관인이 찍힌 봉니가 평양 지역에서 출토된 것은 수신 지역에서 발견된 것이니 합당하지만 '낙랑'이란 관인이 찍히 봉니가 발견된 것은 수신지에서 출토되어야 할것이 발신지에서 나온 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제강점기때 이미 민족주의 역사학자 정인보는 여러의문점을 제기했다. 봉니의 보존상태가 너무 좋고 서체가 비슷하고 발견 사례가 너무 많다는 점 등을 들어가며 조직적인 조작의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것이다. 정인보는 또 수신처에서 발견되어야 할 낙랑 봉니가 펴양 지역에서 출토된 거슨 평양 지역이 낙랑군 지역이 아님을 뜻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 이덕일의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에서 발췌했습니다.

  • 말씀하신 기사에 도대체 어느 부분이 낙랑군이 한반도에 있다는 사실이 기술되어있습니까? 설명 좀 부탁드립니다. 낙랑군은 그자리 '그 당시 요하'의 동쪽 에 요동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A지역의ㅣ 유민을 끌고 B로 가면 B 지역명이 A로 바뀝니까?

  • 점제현 신사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들판에 2000여년동안 서있었다는 , 고산자 김정호도 찾지못한 그 점제현 신사비말입니다. 북한에서 시행한 흑운모를 시료로 하여 ‘핵분렬 흔적법’으로 측정한데 의하면 점제비 화강암의 생성년대는 온천과 룡강일대의 화강암 생성년대보다 2천 8백만 년~2천 2백만 년이다 더 오래다.

이것은점제비 화강암이 그 근방의 화강암과는 돌 나이에서 완전히 구별되는 다른 지방의 화강암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남한 학자 손보기 교수는 1990년 '한배달'과의 대담에서 점제현 신사비가 있는 곳은 2천년전에 물이 들어왔던 곳이다. 갈석산에 보면 신시비 크기의 바위를 쪼아낸 자국이 있으며 신사비의 돌을 조금 떼어내고 갈석산의 돌을떼어서 맞추어보면 딱 맞다. 일본인들이 배로 실어다가 10리밖에 못 와서 그 곳에 뉘어두고 어린이들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한배달과의 인터뷰 내용, 손보기 교수가 증언하는 점제현 신사비 --Eunnorae (토론) 2012년 10월 19일 (금) 22:14 (KST)[답변]

  • 사기색은에서 태강지리지 와 수경 을 인용한 부분이고 귀하께서 말한 부분은 주석자가 주석을 단 부분입니다. 북평은 요서군 서북쪽에 있던 군으로 한반도 내에 있다는 말은 없습니다.
  • 역사학계는 수성현을 어디로 보고 있습니까?
  • 『水經注』 「河水注」:“始皇令太子扶蘇與蒙恬築長城起自臨洮至于碣石 이 기사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역사학자 이덕일 선생에 따르면 “사기 -몽염열전에서 장성의 길이를 언급하며 "임조에서 시작해 요동까지 길이가 만리에 이르렀다"는 구절의 '요동'은 수경주의 "진시황이 태자 부소와 몽염에게 명하여 장성을 쌓게 하였는데 임조에서 시작해 갈석에 이르렀다고 기록했다. 고대의 요동은 곧 갈석을 뜻함을 알수 있다. 사기-진시황본기에는 진나라의 이세황제때 신하들이 시황제의 송덕비를 세우기 위해 갈석산에 다녀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을 요동에서 돌아왔다고 표현했다. 당시, 곧 한나라와 고조선이 전쟁을 벌인 요동은 갈석산이 있던 현재의 창려 지역이다.”--Eunnorae (토론) 2012년 10월 19일 (금) 20:53 (KST)[답변]

  • 요하의 위치

블로그 원본 강학에서 일제의 식민사학계로부터 엄청난 비하.매도를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단군조선사를 반도식민사관으로부터 식민 사학에 탈피하여 철저히 지나문헌기록들에 의거하여 난하지역까지 전개시킨 윤내현 교수(전남 해남출신.단국대 사학과 교수.부총장)가 요동.요서를 구분하는 기준에 따르면,

"[후한서’(後漢書)]동이열전(東夷列傳)과 [삼국지(三國志)]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의 ‘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 고구려는 요동으로부터 동쪽으로 1,000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는 지금의 요동에 있었으므로 고대의 요동은 지금의 요동으로부터 서쪽으로 1,000리 떨어진 곳에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곳이 고조선과 진의 국경이었던 것이다. ‘사기’ 진시황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고대의 요동은 갈석산(碣石山) 지역이었다. ‘사기’의 진시황본기·효무본기(孝武本紀) 등에 등장하는 갈석산의 위치는 난하 하류 동부 유역에 있는 지금의 갈석산과 일치한다. 난하 하류 유역이 고대의 요동이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고대의 요동은 지금보다 1,000리 서쪽-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이 고대의 요동이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기록은 여러 곳에서 보인다. ‘사기’ 몽념열전(蒙恬列傳)에는 ‘국경에 쌓은 만리장성이 임조(臨조)에서 시작되어 요동에 이르렀다’고 하였고 ‘진서’(晉書) 당빈전(唐彬傳)에는 ‘만리장성을 복구했는데 갈석산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들은 만리장성의 끝 부분이 요동의 갈석산 지역이었음을 알게 해 주는 것이다. ‘십구사략통고’의 지도에는 발해의 서북부에 요수(遼水)가 그려져 있고 만리장성이 서쪽으로부터 이를 관통하여 요동에 이른 것으로 되어 있다. [회남자(淮南子)]추형훈(墜形訓)에는 요수는 갈석산에서 나와 요동의 서남에서 바다로 들어간다고 설명하였다. 갈석산을 끼고 흐르는 큰 강은 난하밖에 없다. 그러므로 고대의 요수는 지금의 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라는 동북아 역사재단은 무얼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Eunnorae (토론) 2012년 10월 20일 (토) 11:43 (KST)[답변]

전체적으로 별로 언급할 가치가 없는 음모론들만 가져오신 터라 굳이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귀하가 가져오신 것들은 모두 현대 한국사학계에서 조금도 인정되지 않고 있는 사실로서 반박할 가치조차 없는 것들입니다. 게다가 여기다 이렇게 아무리 나열해봤자 위키백과의 원칙상 아무런 영향력도 없으니 쓸데 없이 힘만 빼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놀아주는 기분으로 응대해 드렸습니다만 이제는 더 이상 귀하와 놀아드릴 여력은 없으니 혼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물론 귀하의 주장이 대한민국 한국사학계 및 고고학계의 확고한 지지를 받고 있음을 증명하지 않는 이상 위키백과 항목의 본문에 실리는 일은 절대 없을테니 그 점은 유념하시기 바랍니다.--Xakyntos (토론) 2012년 10월 20일 (토) 20:18 (KST)[답변]

6[편집]

언급할 가치가 아니라 논거가 부족하신거겠지요.

귀하의 태도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을 알려주는 사진에서 김구 선생을 빼도록 권고한' 국사편찬위원회와 단군조선은 신화일뿐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동북아역사재단 과 너무도 일치하여 소름끼칩니다. 근거를 대셔야지 음모론이라고 치부하는 것이 학자의 자세입니까? 흐르지 않는 물은 썩습니다. 4대강에서 생기는 녹조라떼를 보시면 아시겠지요? 놀아주셨습니까? 놀고난 저의 기분은 주류 역사학계의 그들만의 세상을 본것같아 그곳에 들어가는 저의 세금이 아까울 뿐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번에 위키 백과사전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네요. 근거를 찾으시면 다시한번 놀아주시기 바랍니다. 놀고 서로 토론하고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발 놀아주십시요--Eunnorae (토론) 2012년 10월 20일 (토) 20:38 (KST)[답변]

뭐, 원하신다면 놀아드릴 수도 있겠지요. 귀하께서 추켜세우기 바쁘신 윤내현 교수는 실제 학계에서는 이런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Xakyntos (토론) 2012년 10월 20일 (토) 20:46 (KST)[답변]

제가 올려놓은 사진에 대한 설명을 독단적으로 또 바꾸어 놓으셨네요. 명나라의 대명여지도에서 보여지는 산해관 이라는 곳에서 끝나는 장성은 만리장성이 아니다. 놀아주신다면 고맙습니다. 그러면 제가 앞에서 물어본 내용부터 대답부탁드립니다. 낙랑수성현의 위치, 갈석산의 위치, 봉니와 점제현신사비의 조작설에 대한 증거말입니다. 인신공격말고 논거부탁드립니다.--Eunnorae (토론) 2012년 10월 20일 (토) 20:52 (KST)[답변]

윤내현의 고조선 관련 연구 및 그의 대표적인 저서 《고조선 연구》는 북한의 역사학자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1963)를 표절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3] 하지만 윤내현은 표절시비에 대해 "나의 주장은 신채호(申采浩) ・ 정인보(鄭寅普) ・ 장도빈(張道斌) 등 ‘민족사학자’들이 주장해왔던 기존 학설과 궤를 같이하고 있을 뿐 표절과는 거리가 먼 주장"임을 밝혔다. 윤내현은 《고조선 연구》를 펴내기 전인 1984년 학술세미나에서 자신의 논문과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가 유사하다는 학계의 지적을 받고 좀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자 직접 자신이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등 북한 자료를 미국의 대학도서관 등에서 입수했음을 시인하였으며, 1985년 11월에는 논문에 "주(注)를 달면 자신의 학설이 무너진다"고 해명하며 연구비를 반납하고 자신의 글을 거두어 갔다. 이 비판말입니까? 민족사학자들과 같은 내용을 주장하고 북한자료를 미국 도서관에서 입수하고?? 모르겠습니다. 이병도에 대해 다시 언급해볼까요?--Eunnorae (토론) 2012년 10월 20일 (토) 20:55 (KST)[답변]

1. 낙랑 수성현에 대해 현재 학계는 위치 미상으로 되어 있는데 말입니다. 위치를 알 수 없는 곳에 대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2. 갈석산에 대해서 이미 위에 《사기집해》와 《통전》을 통해 반박해 드렸는데 말입니다. 고대에 갈석산이라는 지명은 여러 곳에 있었으며, 낙랑군 수성현에 있다는 갈석산은 실제 한반도 내부에 있는 곳으로 요서에 있는 갈석산과 다른 곳입니다.
3. 봉니가 편지에만 쓰인다고 생각하시는 귀하의 주장부터가 에러입니다. 실제 중국에서 출토되는 봉니는 공문서의 봉인에 사용된 것이 대부분입니다. 물론 공문서 가운데 일부는 통신 목적으로 쓰여서 다른 곳으로 간 것도 있겠지요. 하지만 대부분의 봉니는 현지에서 문서를 보관하기 위한 봉인으로 사용되었습니다.
4. 북한의 주장은 학계에서 인정되지 않고 있는 사안입니다. 조작되었다는 주장이 있을 뿐이죠.--Xakyntos (토론) 2012년 10월 20일 (토) 20:59 (KST)[답변]

7[편집]

이 지도는 귀하께서 올리신 대명여지도의 다른 한 조각입니다. 멀쩡하게 요동 지역에 만리장성이 있네요? 피식.--Xakyntos (토론) 2012년 10월 20일 (토) 21:05 (KST)[답변]

장성이 그러져있다고 그것이 다 만리장성이라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대명여지도에 산해관으로 끝나는 장성이 있고, 현재 중국사람들이 동북공정이 이루어지기 전에 산해관에서 끝나는 장성이 만리장성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한반도에 남한산성만 있습니까? 부산에 금정산성도 있습니다. 대명여지도 설명 블로그 대명여지도 설명 블로그 2
갈석산은 실제 한반도 내부에 있는 곳. 어디 있습니까? 그곳에 진시황때 만들었다는 비문이 있습니까? 이병도의 수성현이 아니라고 반박한 논문이 역사학계에 있습니까? 북한의 주장은 학계에서 인정되고 있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조작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역사학계 역사학계 하시는데 이번 국사편찬위원회와 동북아 역사재단의 망언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Eunnorae (토론) 2012년 10월 20일 (토) 21:11 (KST)[답변]

중국의 조사는 만리장성으로 대표되는 진나라 및 한나라, 명나라의 장성 유적뿐만 아니라 그외 다른 역대 왕조에서 건설된 다양한 장성을 조사하여 그것을 모두 합산하여 만리장성의 길이가 연장되었다고 발표한 바 있다.

중국에서는 그걸 다 퉁쳐서 장성이라고 부릅니다. 만리장성과 동의어죠. 엄밀한 의미에서 만리장성은 진나라가 세운 진장성명나라가 세운 명장성입니다. 그리고 위에 지도에 그려져 있는 것이 바로 명나라가 세운 명장성입니다만. 그러므로 위 지도는 만리장성 맞는뎁쇼?--Xakyntos (토론) 2012년 10월 20일 (토) 21:15 (KST)[답변]
ps. “중국사람들이 동북공정이 이루어지기 전에 산해관에서 끝나는 장성이 만리장성이라고 알고 있었다”는 건 어떻게 증명하시려우? 참고로 명장성 지도는 서양에서도 17~18세기에도 알고 있던 사실이라니까?--Xakyntos (토론) 2012년 10월 20일 (토) 21:17 (KST)[답변]
1. 갈석산이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 그걸 알면 댁 같은 사람들이 과연 설칠 수나 있었겠습니까?
2. 오영찬의 《낙랑군연구》를 읽어 보십시오. 이병도의 수안군 주장에 대해 설득력이 없다고 평하고 있습니다.
3. 북한의 주장은 자신들의 주체사상을 옹호하기 위해 유물유적을 조작한 흔적이 많아 현 학계에서는 전혀 참고대상으로 삼고 있지 않습니다.
4. 국편위 왜곡 보도에 대한 비판--Xakyntos (토론) 2012년 10월 20일 (토) 21:22 (KST)[답변]

인용하신 지도의 장성이 명나라 시대때 지어진 명장성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산해관근처의 장성은 언제 만들어진 장성입니까? 혹시 진나라 입니까? 그러면 산해관 부근 창려현의 갈석산이 혹시 낙랑군 수성현의 갈석산 입니까? 그러면 낙랑군은 한반도가 아니라 창려현 부근입니까?--Eunnorae (토론) 2012년 10월 20일 (토) 22:00 (KST)[답변]

1. 명장성 건설의 연혁은 만리장성#연혁에 모두 나와 있습니다. 모두 명나라 때 지어진 것입니다.
2. 산해관 부근의 갈석산과 낙랑군 수성현의 갈석산은 서로 다른 산입니다. 이미 위에서 말했을텐데요? 애초에 《사기》를 비롯해서 고대 기록에서 지금의 산해관은 만리장성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곳으로 나타납니다. 진시황이 갈석산에 비석을 세운 것은 하나라 우임금이 치수를 하고 9주를 정하면서 갈석산까지 영역을 정했기 때문에, 그때의 9주를 기리기 위해서 세운 것입니다. 애초에 만리장성의 끝이라서 세운 것이 아닙니다. --Xakyntos (토론) 2012년 10월 20일 (토) 22:05 (KST)[답변]

《사기》의 해당 기록
因邊山險巉谿穀可繕者治之,起臨洮至遼東萬餘裏。
산과 구릉, 계곡을 따라 보수하여 성을 쌓으니 임조에서 출발하여 요동까지 만여 리에 이르렀다 . 은 귀하께서 처음 동쪽 끝 관련하여 근거로 말씀하신 기사입니다. 수경주 「河水注」:“始皇令太子扶蘇與蒙恬築長城起自臨洮至于碣石”(『수경주』 「하수주」 “진시황은 태자 부소와 몽염에게 명을 내려 장성을 쌓게 했는데 임조에서 시작해 갈석까지 이르렀다. 太康地 理志云「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태강지리지왈 낙랑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는데 장성의 기점이다)

  • 그런데 낙랑군은 대동강일대이고 수성현은 어디인지 모른다.
  • 산해관의 장성과 요동지역 장성은 모두 명나라 시대때 지은 중국의 장성이다
  • ->그러면 한반도까지 이어진 진장성을 명나라때 다시 지은 겁니까?

그 말씀이시지요?

* 진시황이 비석을 세운 갈석산은 요서 지역에 있습니다. 당연히 요동보다 서쪽이고 당연히 만리장성은 그곳에 없습니다만.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을 당시 요동군의 관할 지역은 지금의 압록강 하구 지역까지이며 현재 학계에서 추산하는 진나라에서 세운 만리장성의 위치 역시 동일합니다.

또 [수경]에 전하기를 “(갈석산은) 요서 임유현 남쪽 물에 있다.” 대개 갈석산은 둘이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갈석의 오른쪽을 끼고 바다로 들어간다”는 당연히 북평의 갈석을 가리키는 것이다.
又水經云「在遼西臨渝縣南水中」. 蓋碣石山有二,此云「夾右碣石入于海」,當是北平之碣石.

* 귀하께서 인용하신 바로 그 《사기집해》의 주석 바로 뒤에는 이 구절이 더 있습니다. 하본기에 나오는 갈석산은 낙랑군 수성현에 있는 갈석산이 아니라 북평에 있는 갈석산이다라는 의미죠. 갈석산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 바로 저 구절을 알고 있는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말씀해 보십시오. 어떤 책에 A이다. 그런데 B라고도 한다. AB를 종합해 볼 때, A는 틀리고 B가 맞다는 내용이 있는데 그 중에서 A이다라는 내용만 쏙 빼오는 것은 올바른 행동입니까? 제가 보기에는 사기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요?
* 이 지도를 보십시오. 진나라 때의 만리장성명나라 때의 만리장성은 명확하게 구분됩니다. 물론 명나라 때의 만리장성은 한반도까지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진나라 때의 만리장성은 한반도까지 이어졌다는 견해가 현재 존재하고 있습니다.
* 역사스페셜의 그 부분 역시 진나라 때의 장성과 명나라 때의 장성을 구분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고구려의 박작성으로 추측되는 단둥의 성을 만리장성이라 둔갑시킨 것이 아닙니다. 고구려의 박작성을 명나라 때 만리장성의 일부로 개축해서 사용한 것이고, 중국은 다만 고구려의 박작성에 대한 흔적을 지우고 있기에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일 뿐, 그곳이 만리장성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애초에 역사스페셜 같은 프로그램은 시청률을 위해서 자극적인 소재로 만들기를 즐겨하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전혀 참고할 대상이 못됩니다. 진장성과 명장성도 구분하지 못하는 프로그램을 대체 왜 믿어야 겠습니까?--Xakyntos (토론) 2012년 10월 20일 (토) 22:44 (KST)[답변]
  • 북평의 갈석산이 어디입니까? 한반도 입니까? 그리고 저는 앞에서 지리지 인용부분과 주석자 의견에 대해 말했습니다. 이덕일의 '한국사 그들의 숨긴 질실'에 보면 님이 말씀하신 구절도 인용되어 있습니다.
  • 방송에는 근거가 되는 책들과 전문가의 말이 나옵니다 소설이 아닙니다. 물론 방송에 나왔다고 절대진리는 아니지만 거기에 나온 것들에 대한 체계적인 비판이 필요하지 무조건 매도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앞에서 북한의 것은 무조건 못믿는다가 아니라 이러한 것들이 무슨 근거로 오류다 이렇게 비판하셔야 하고요.
  • 산해관 인근 산 정상에 맹강녀를 기리는 묘와 사당을 아십니까? 맹강녀 이야기 설명 블로그--Eunnorae (토론) 2012년 10월 21일 (일) 00:25 (KST)[답변]
1. 북평은 지금의 북경(베이징)의 옛 지명입니다. 당연히 북평의 갈석산은 귀하께서 알고 계시는 그 갈석산이 맞습니다.
2. 말했다시피, A와 B라는 두 사실을 모두 설명하고 있는 주석에서 B는 빼놓고 A만 보여주는 행동은 염연히 사기꾼의 행동에 해당합니다.
3. 북한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고조선이 요동지방을 중심으로 존속했던 국가라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970년대 이후 소위 대동강 문명설을 주장하기 시작하면서 고조선의 중심지가 평양으로 싹 바뀌어 버립니다. 이런 수준의 학계가 하는 말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기 어려운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요?
4. 맹강녀의 사당이 진나라 때부터 그곳에 있었다는 것부터 증명하셔야 그나마 믿을 수 있겠지요. 제가 보기에는 명나라 이후 산해관에 지어진 사당으로 보입니다만. 명장성은 본격적인 장성은 산해관에서 끝이 나고 산해관 동쪽의 장성은 목책과 보루 등으로 이루어진 한단계 낮은 등급의 장성입니다. 그러므로 당대에도 산해관은 만리장성의 시작점으로 일컬어지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맹강녀 사당이 있는 것은 논리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습니다. --Xakyntos (토론) 2012년 10월 21일 (일) 00:16 (KST)[답변]

<한서>의 ‘설선(薛宣)열전’은 “낙랑은 유주(幽州)에 속해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한나라 유주는 지금의 베이징 일대였다.

1. 유주는 우리나라로 치면 도(道)에 해당하는 광역행정기관입니다. 이덕일의 저 말은 이런 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강릉은 강원도에 속해 있다고 하는데, 강원도는 춘천 일대이므로 강릉도 춘천 일대이다 하지만 강원도는 그것보다 훨씬 크지요. 마찬가지로, 유주 역시 중심지는 베이징 일대지만, 그 범위는 지금의 하북성 북부, 요령성, 평안도와 황해도에 이르는 커다란 지역입니다. 이덕일이 어떤 식으로 독자들에게 사기를 치는지를 잘 보여주는 부분이군요.

<후한서> ‘광무제 본기’는 “낙랑군은 옛 조선국인데, 요동에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현재는 만주를 가로지르는 요하(遼河)를 기점으로 요동과 요서(遼西)로 나누지만 과거의 요하는 현재보다 훨씬 서쪽이었다. 현재의 요하를 기준으로 삼더라도 만주 요동이 평안남도나 황해도가 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2. 요동은 행정구역으로서 요동군도 있지만, 요하 동쪽 지역을 통칭해서 부르는 지리적 범위로서의 요동도 있습니다. 이덕일의 저 말은 이런 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잠실은 강남에 있다고 하므로 잠실은 강남구에 있다 우리가 강남이라는 말을 강남구에만 한정해서 쓰지 않듯이, 요동이라는 말은 요동군만이 아니라 만주, 한반도 일대를 통칭하는 지리적 개념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낙랑군이나 낙랑군 소속현들이 요동에 있다在遼東라고 써 있어도 아무런 논리적 하자가 없습니다.
3. 낙랑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고서로는 이미 《구당서》를 보여 드렸습니다만?--Xakyntos (토론) 2012년 10월 21일 (일) 00:58
4. 갈석산에 대해서 아무리 왈가왈부해봤자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실제 만리장성은 최소한으로 잡아도 압록강 인근까지, 최대 청천강까지 연결되어 있으며, 현재 산해관은 진나라 시대에는 만리장성하고 아무런 관련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인식하고 나면 갈석이 만리장성의 시작이다는 기록이 있으면 그 갈석이 압록강이나 청천강 어딘가에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당연한 결론입니다. 애초에 만리장성이 있지도 않은 곳에서 갈석을 찾아봤자 뭐가 나올까요?--Xakyntos (토론) 2012년 10월 21일 (일) 01:04 (KST)[답변]
  • 요동이 만주 한반도 일대를 통칭한다고요?? 그러면 중국 중원은 요서 이군요. 강릉은 춘천일대이지 부산일대는 아닐테지요. 적어도 붙어져 있는 행정구역내에 존재하겠지요. 갈석이 만리장성이 시작이다라고 하면 갈석이라 부르는 산명의 위치보다는 압록강이나 청천강에서 갈석산을 찾아야 한다고요? 혹시 중국 현지에 창려현 갈석산에 가보신적이 있으신지요? 그러면 일반 중국인들에게 진시황제가 오른 갈석산이 어디인지 물어보신적 있으신지요? 역사학계에 일하시는 분중에 직접 갈석산을 찾아 다니면서 보고서를 작성하신게 있으신지요? 국민세금으로 말입니다. --Eunnorae (토론) 2012년 10월 21일 (일) 01:11 (KST)[답변]
1. 명백하게 한반도에 위치해 있는 신라를 요동에 있다고 서술한 경우도 있는데 말입니다. 요동이라는 말 자체가 먼 동쪽이라는 의미입니다. 요하 역시 먼 강이라는 의미구요. 물론 행정구역으로서의 요동군은 따로 있었지만, 광의의 지리적 개념으로도 요동은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고구려나 발해를 요동이라 서술한 기록도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유주 지도를 참조하십시오. 유주의 범위 안에 분명 낙랑군이 있지요.
2. 애초에 지금 귀하가 알고 있는 갈석산에는 진나라가 세운 만리장성이 없었다구요. 없는 곳에 뭐하러 갑니까? 거기에 가봤자 진시황의 만리장성은 없었어요. 진시황이 갈석산에 올라간 것은 맞지요. 하지만 진시황이 거기에 가서 제사를 지내고 비석을 세운 것은 거기가 [하나라] 때 정한 9주의 동쪽 끝이었기 때문입니다. 만리장성 때문에 간 게 아닙니다.
3. 《통전(通典)》에도“평양성(平壤城)은 곧 한(漢)의 낙랑군 왕검성(王儉城)이다.”라고 써 있는데요? 《삼국사기》에도 “대무신왕 27년 한(漢)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쳐서 그 땅을 취하여 군현(郡縣)을 삼았으니, 살수(薩水) 이남은 한(漢)에 속했다.”라는데요? 살수가 어딘지는 아시죠? --Xakyntos (토론) 2012년 10월 21일 (일) 01:21 (KST)[답변]
  • 인용하신 지도는 언제 누구에 의해 작성된 것인가요?
  • 갈석산에 진나라가 세운 만리장성이 없다구요? 그러면 수경주의 始皇令太子扶蘇與蒙恬築長城起自臨洮至于碣石”(『수경주』 「하수주」 “진시황은 태자 부소와 몽염에게 명을 내려 장성을 쌓게 했는데 임조에서 시작해 갈석까지 이르렀다)은 날조군요.
  • 대무신왕때 건넌 바다는 발해는 절대아닌가요? 그리고 살수는 청천강이라고 주장하시는 것인가요? 삼국사기에는 薩水가 여러번 나오고 그 강은 모두 같은 강이 아니며 이는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로 하는 말은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 가요?薩水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 고구려가 평양성으로 수도 이전하기 전에 쓰여진 고서의 기사는 없는 지요?--Eunnorae (토론) 2012년 10월 21일 (일) 02:16 (KST)[답변]
  • '을지문덕의 지략과 장고보의 의용(義勇)이 있어도 중국의 서적이 아니었던들 민멸하여 전문(傳聞)할 수 없었다' 라고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이 말했습니다. 즉, 김부식은 살수가 어딘지 위치를 모르고 있습니다. 살수대첩의 살수가 청천강이라고 단정지어진게 혹시 언제인지 아십니까? ‘압록수(鴨綠水)-도하(渡河)-동진(東進)-살수(薩水)-도하(渡河)-동진(東進)하여 30 리 앞-평양성(平壤城)’이 된다라고 했는데 현 청천강은 현 압록강 남쪽아닙니까?
  1. 1. 살수의 위치
  2. 2. 살수대첩에서 살수의 위치
  3. 3. 살수대첩의 살수는 청천강이 아니다. 2012년 10월 21일 (일) 02:59 (KST)
1. 중국 담기양의 역사지도집이 출처입니다.
2. 그러니까 그 갈석은 산해관 근처에 있는 갈석이 아니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던 갈석이라구요. “갈석은 지금 고려의 옛 강역에 있으니 이 갈석산이 아니다. ― 《통전》” 이거에요. 몇 번을 말해야 알겠습니까?
3. 살수가 청천강임은 이미 고증이 끝난 문제입니다. 살수를 청천강으로 고증한 것은 조선시대입니다만? 정약용의 《아방강역고》나 안정복의 《동사강목》을 읽어보시지요.
4. 게다가 대무신왕 때 건넌 바다는 발해가 아니라 황해입니다. 《후한서》 〈왕경열전〉에서 왕경의 선조는 낭야에서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낙랑의 산속으로 들어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낭야는 지금의 산동반도 남쪽에 위치한 지명입니다. 낭야에서 요동 지방으로 항해하는 것은 절대로 동쪽이 될 수가 없습니다. 낭야는 산동반도의 남쪽에 있으므로 요동으로 가려면 산동반도를 통째로 돌아서 가야하니까요. 낭야에서 동쪽으로 항해했을 때 도착할 수 있는 곳은 한반도 밖에 없습니다.
5. 논리적으로 생각을 해보십시오. 낙랑군이 있던 지역이 평양이 된 것이 고구려 때의 일입니다. 그럼 그 전에는 대체 그곳이 어디였을까요? 평양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이 고구려 미천왕 이후의 일인데 그 이전에 대체 어떻게 낙랑군이 지금의 평양이다는 기록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애초에 그 이름이 없던 시대인데요? 상식적으로 생각이라는 것을 좀 해보세요. 지금의 평양 지역은 고구려 미천왕 이전에는 그 이름 자체가 낙랑군 조선현이었습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하면 그곳을 평양이라고 설명하는 기록이 그 이전 시대에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상식적으로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Xakyntos (토론) 2012년 10월 21일 (일) 03:26 (KST)[답변]

8[편집]

제가 계속 고구려의 평양 천도 이전에 기사를 보여달라고 하는 것은 조한전쟁에서 한나라가 한사군을 설치했다하며, 고조선의 수도와 고구려의 평양천도 후 고구려 수도 평양성과 혼돈하고 있으므로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고서의 기사는 다 평양 천도 후 지어진 책들입니다 지리지식적 혼돈을 염려할수 있는 부분입니다. --Eunnorae (토론) 2012년 10월 21일 (일) 04:21 (KST)[답변]

  • 고산자 김정호의 견해

“생각하건대 낙랑·현도·임둔·진번이 이른바 사군이다. 그러나 임둔·진번은 『한서』 「지리지」에 실려 있지 않아 상고할 수 없다. 요동·요서 지역과 낙랑·현도 등은 서로 착오가 있거나 혹은 연혁이 있어도 어느 곳인지 지칭할 수 없다. 혹 명호(名號)가 있다고 하더라도 증명할 수가 없으니 지금 억지로 단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대개 진(秦)·한(漢)나라는 요하(遼河)를 경계로 요외(徼外:국경 밖)를 삼았고 또 이맥(夷貊)이 서로 섞여 거처하게 하면서 기미(羈縻)정책을 썼을 뿐이다……『한서』 주석에 임둔·진번이 장안(長安)에서 몇 리 떨어졌다고 말하지만 『청회전(淸會典)』에 기재된 이정표를 가지고 고증해 보니 길림(吉林)· 영고탑(寧古塔)을 넘지 않는다는 것이다.(김정호, 「방여총지」, 『대동지지』)”

이나바 이와기치(稻葉岩吉)의 「진나라 만리장성 동쪽 끝 및 고조선 왕검성에 관한 고찰(秦長城東端及王險城考)」

“遂城, 즉 지금의 遂安은 고려사지리지(高麗史地理志)에, 수안본고구려장새현일운(遂安本高句麗獐塞縣一云)이라고 본다. 西南에 자비령(慈悲嶺)있고, 東北에 요동산(遼東山) 있어,……秦나라의 長城의 東端은 지금의 조선황해도수안(朝鮮黃海道遂安)의 경계에서 시작하여 대동강의 上源으로 나와, 청천강을 거쳐 西北을 지나 압록강 및 동가강(鴨綠江及佟家江)의 上源을 둘러서 개원동북(開原東北) 지역으로 나왔음은 한지(漢志)에 의하여 의심할 것이 없다.”(稻葉岩吉, 秦長城東端及王險城考) --Eunnorae (토론) 2012년 10월 21일 (일) 04:21 (KST)[답변]

“(乙)은 四郡이니, 衛滿의 東渡한 浿水가 「魏略」의 滿藩汗-『漢書』 지리지의 遼東郡의 汶·番汗-今 海城·蓋平 등 地인즉 금 蓒芋濼(한우락)임이 可하며, 한 武帝의 점령한 조선이 浿水 부근 衛滿의 故地인즉, 그 建置한 四郡만 三朝鮮()의 國名·地名을 가져다가 遼東郡內에 加設한 者어늘, 先儒들은 매양 사군의 위치를 今 平安·江原·咸慶 등 各道와 고구려의 都城인 今 桓仁 등 地에서 찾았으며, (丙)은, 「樂浪國」이니, 낙랑국은 漢의 樂浪郡과 各別한 今 平壤에 國한 자어늘, 先儒들은 이를 혼동하였고,(신채호,『조선상고사』)”--Eunnorae (토론) 2012년 10월 21일 (일) 04:21 (KST)[답변]

전혀 염려할 필요 없습니다. 혼동을 논하려면 애초에 귀하가 내놓는 고서들도 얼마든지 똑 같은 혼동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인들도 평양성이 낙랑군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음은 수많은 사료를 통해서 증명되고 있습니다. 고구려는 자기들이 정복한 땅이 어딘지도 몰랐을까요? 고구려는 자기들의 수도가 어딘지도 몰랐을까요? 그리고 애초에 고서니 뭐니 씨름을 해봤자 평양에서 발굴된 낙랑군 유물·유적이면 끝나는 문제입니다. 유물·유적 조작설일랑 말씀을 꺼내실 필요도 없습니다. 조작되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것은 귀하이지 제가 아니니까요.--Xakyntos (토론) 2012년 10월 21일 (일) 04:38 (KST)[답변]
  • 낙랑군 조작에 대한 근거를 그렇게 나열해는데도 아예 읽어보지도 않으셨습니가? 다행입니다. 조잘설만 널리 알려지면 한사군 한반도설도 무너지겠네요.
  • 고조선과 한나라의 조한전쟁에서 패수는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패수는 한나라와 고조선의 경계이니까요? 수경에서 패수는 동남쪽으로 흐른다고했는데 수경주에서 역도원은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수경에서 패수가 동쪽으로 흐른다고 한것은 어떻게 보십니까? 패수가 대동강일까?--Eunnorae (토론) 2012년 10월 21일 (일) 04:43 (KST)[답변]
역도원이 《수경》의 기록에 의문을 표하고 동쪽이 아니라 서쪽이라 고증한 것은 당연한 문제입니다. 요동에서 한반도에 이르기까지 동남쪽으로 흐르는 강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죠. 그렇다고 요서나 하북 같은 지역에 있는 강을 패수라고 하면 해결 될까요? 《수경》에는 난하를 비롯해서 하북에서 요서를 지나 요동, 한반도까지 흐르는 강이 순서대로 차례로 나오기 때문에, 패수를 옮긴다는 건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 꼴이 됩니다. 예를 들어 난하는 “濡水從塞外來,東南過遼西令支縣北,又東南過海陽縣西,南入于海。”라고 당당하게 기록에 나오고 있죠. 상식이란 걸 좀 가지고 보십시오.--Xakyntos (토론) 2012년 10월 21일 (일) 05:02 (KST)[답변]
참고로 패수는 정약용이 《조선수경》에서 고증한 이래 고조선 시대의 패수와 고구려 때의 패수가 서로 다른 강이라는 것이 밝혀진지 오래입니다. 위만조선이 망할 무렵의 패수는 압록강 또는 청천강으로 추측되며, 고구려 때의 패수는 대동강을 말하고 있습니다. --Xakyntos (토론) 2012년 10월 21일 (일) 05:17 (KST)[답변]
  • 상식이라고요?.. 濡水=난하란 말씀이지지요? 유수 블로그 1 유수 블로그 2 학문 권력이라는 것을 지닌 학계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지적들을 무조건 거부하고 만들고 그것을 상식이라는 것에 가두어 놓았기때문에 문제인것이지요. 패수가 압록강, 청천강으로 또는 대동강으로 그어놓고 다른 고서적이 나오면 무시한채 말이죠.
  • 정약용은 위인으로 존경하는 분이시니다. 그러나 그분의 지리지식과 고산자 김정호의 지리지식 중 어느것을 더 신뢰하시는 지요?--Eunnorae (토론) 2012년 10월 22일 (월) 13:35 (KST)[답변]
1. 역시나 뻔하게도 《요사》를 들고 나오는군요. 중국 24사를 통틀어 가장 형편없는 예사로 유명한 《요사》는 아무리 들고 와 봤자 쓸모가 없습니다. 《요사》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자면 낙랑군과 요동군을 비롯한 동방의 군현들은 제대로 영역도 가지지 못한채 잡탕으로 뒤섞이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나 계십니까? 예를 들어, 《요사》〈지리지〉동경도조를 따르자면 진(晉)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켰고(晉陷高麗), 동경 요양부의 치소는 무려 평양성(元魏太武遣使至其所居平壤城,遼東京本此。)이 되는가 하면, 발해의 수도 중경현덕부도 평양성(忽汗州即故平壤城也,號中京顯德府。)이라네요?. 이딴 것을 믿겠다는 건가요?
1-1. 게다가 《요사》까지 가기도 전에, 귀하께서 링크하신 블로그는 귀하의 주장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습니다만? 요수(要水)는 《수경》의 본문에 나오는 게 아니고 역도원의 주석에 나오는뎁쇼? 역도원의 주석에서 패수는 동쪽이 아니라 서쪽으로 흐른다는 건 못 믿겠다면서요? 근데 같은 역도원이 쓴 요수에 대한 내용은 믿겠다구요? 대체 뭘 믿고 뭘 안믿겠다는 건가요? 내 마음에 들면 믿고 내 마음에 안들면 안믿겠다는 건가요?
1-2. 그리고 역도원을 믿고 안믿고를 따지기 전에, 저 블로그는 명백한 사기를 치고 있는데요? 저 단주 항목 다음에는 어떻게 써 있는지 아시긴 하세요? “密雲縣。本漢白檀縣”밀운현이 백단현이라는데요? 어양군의 땅이라 적혀 있는 주, 현이 《요사》〈지리지〉에 몇 개인지는 아세요? 어양군이 얼마나 넓은지 아세요? 정작 중국에서 고증한 어양군 백단현의 위치는 이렇습니다만(어양군 경계 너머에 백단이라고 써 있음, 후한 때는 백단현이 폐지되어서 경계 밖에 있음). 명백하게 난하로 흘러드는 강 바로 옆에 있는뎁쇼?
2. 정약용의 지리지식을 더 신뢰합니다. 당연하죠. 고산자가 만든 것은 당대의 지도였지 고증을 거친 고대의 역사 지도가 아니니까요. 반면 정약용은 고대의 기록을 토대로 고증을 통해 고대의 지리 정보를 복원하려 했으니 당연히 정약용의 정보를 신뢰할 수밖에요.
ps. 바로 그 고산자조차도 낙랑군 조선현의 이치에 대해서는 똑바로 인식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조선현 (중략) 《위서》의 정화 원년, 도망쳐온 조선현의 백성을 비여로 옮겨 다시 설치하고 요서군의 영현으로 삼았다. 魏書之廷和元年徒朝鮮民於肥如復置爲遼西郡領縣”--Xakyntos (토론) 2012년 10월 22일 (월) 14:34 (KST)[답변]
ps2. 또한 고산자는 정작 《대동지지》 평안도조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본래 조선 부여의 남쪽 경계이다. 동으로는 예와 옥저, 남으로는 마한의 땅과 서로 경계하였다. 한 무제 때 낙랑군에 속했으며 고구려 대무신왕 27년에 살수의 남쪽이 한에 속했다. 本朝鮮夫餘南界東與濊沃沮南與馬韓地界相錯漢武帝時爲樂浪郡所管高句麗大武神王二十七年薩水以南屬漢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고산자의 역사지리 지식이 생각보다 낮다는 것이죠. 부여와 평안도는 크게 관련이 없으니까요. 그 외에도 고산자의 역사지리 지식이 틀린 부분은 수도없이 들어 줄 수 있습니다만.--Xakyntos (토론) 2012년 10월 22일 (월) 16:17 (KST)[답변]
어떻게 된 것이 귀하의 주장은 어떻게 하나 같이 정식으로 학계의 검토를 거친 공인된 논문이나 출판물이 하나도 없고 모조리 다 일개 블로그일까요? 귀하의 그 블로그가 자기들의 주장에 맞춰 기록을 선택하기 때문이죠. 학문적으로 가장 해서는 안되는 행동 말입니다. 99%의 기록이 이쪽을 가르키고 1%의 기록이 다른 쪽을 가르킨다면, 정상적인 학자라면 1%의 기록이 왜 다른지를 연구하지 99%의 기록이 틀렸다고 하지 않습니다. 귀하가 좋아라하는 블로그가 학계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일개 블로그로 남아 있는 이유가 그들이 99%를 틀렸다고, 심지어 왜 틀렸는지도 증명하지 못한채 틀렸다고 하기 때문입니다.--Xakyntos (토론) 2012년 10월 22일 (월) 16:44 (KST)[답변]

檀州,武威軍,下,刺史。本燕漁陽郡地,漢為白檀縣。《魏書》:曹公歷白檀,破烏丸於柳城。《續漢書》:白檀在右北平。元魏創密雲郡,兼置安州。後周改為元州。隋開皇十八年割燕樂、密雲二縣置檀州。唐天寶元年改密雲郡,乾元元年復為檀州。遼加今軍號。有桑溪、鮑丘山、桃花山、螺山。統縣二:

하는 김에 《요사》〈지리지〉 단주 부분을 한 번 해부해 봅시다. 단주가 걸어온 연혁을 길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단주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할 때겠죠. 수나라 개황 18년 연악과 밀운 2개 현을 나눠 단주를 설치했다. 당나라 천보 원년에 밀운군으로 바꿨고, 건원 원년에 단주로 다시 바꿨다.라고 하네요. 그럼 《구당서》〈지리지〉를 한 번 볼까요?

檀州後漢傂奚縣,屬漁陽郡。隋置安樂郡,分幽州燕樂、密雲二縣隸之。武德元年,改為檀州。天寶元年,改為密雲郡。乾元元年,複為檀州。舊領縣二,戶一千七百三十七,口六千四百六十八。天寶,戶六千六十四,口三萬二百四十六。在京師東北二千六百五十七裏,至東都一千八百四十四裏。

첫머리부터 골때리는데요? “단주는 후한의 치해현으로 어양군에 속했다.” 어랍쇼? 백단현이 아니네요? “수나라가 유주의 연악, 밀운 2개 현을 나눠 안락군을 설치했다. 무덕 원년에 단주로 개칭했다.” 단주로 이름이 바뀐 건 개황 18년(598년)이 아니라 무덕 원년(618년)이라는뎁쇼? 그럼 과연 《구당서》에서 백단현은 어디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을까요?

燕樂,隋縣。後魏于縣置廣陽郡。後廢。舊治白檀故城,長壽二年,移治新城。即今治也。

“연악현은 수나라의 현이다. 후위(북위)때까지 현이 설치되어 광양군에 속했으나 후에 폐지되었다. 옛 치소는 백단의 옛 성이다. 장수 2년에 새로운 성으로 옮겼으니 그곳이 지금의 치소이다.

연악현은 단주에 소속된 현입니다. 하지만 이전 지리지의 기록에 따르면 백단현과 광양군은 무관합니다. 심지어 백단현 말고 안악현(단주의 원래 명칭인 안악군)도 광양군과 관련 없고 어양군 소속입니다. 게다가 단주의 옛 명칭인 후한대 치해현조차도 현대에서 고증된 단주의 위치와 다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앞서 말했다시피 백단현은 후한 때 이미 폐지되어서 국경 너머에 버려졌기 때문이죠. 그 덕분에 백단현의 위치에 대한 기록이 혼동되기 시작했고, 결국 수-당나라 때가 되면 원래 백단현과 아무런 관련이 없던 지역이 단주로 변하게 되는 겁니다.
지리 고증이란 건 지금 제가 한 유치한 추적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려운 일입니다. 귀하가 가져온 블로그의 주인장은 《요사》, 그것도 딱 한 부분만 볼 줄 알았지 다른 〈지리지〉를 찾아보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다른 모든 지리지를 하나하나 찾아가면서 맞춰보면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을텐데 왜 다른 거 안보고 《요사》만 봤을까요? 결론을 정해 놓고 그 결론에 맞는 것만 찾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귀하가 추종하시는 그 사이비 역사가들처럼 결론을 정해 놓고 그 결론에 맞는 것만 찾는 방식으로는 절대 진실을 밝힐 수 없습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Xakyntos (토론) 2012년 10월 22일 (월) 18:05 (KST)[답변]

9[편집]

  • 2000년도 더 된 지리적 위치를 현 주류 역사학계, 그리고 일명 재야학계 사이에서 논란이 일고있습니다. 상식적으로 보기에 한사군 위치는 그 설치한 연대와 가장 가까운 사료가 제일 신빙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고조선 지리지식이야 그 즈음 나온 책이 제일 정확하겟지요? 정치적인 것도 아니구요. 낙랑군이 나오는 가장 오래된 고서는 어떤 것인가요? 저보다 오래 공부하신 선생님께서 아실꺼라고 생각합니다.
  1. 역사학계의 태두가 '이병두'라는 것은 부정하시지는 못하시겠지요? 처음에 제가 모함한다고 두둔하셨습니다. 그가 말한 이론과 그의 스승인 일본식민학자들의 이론이 너무나도 유사한것들이 많습니다.
  2. 이번에 동북아역사재단 김학준 을 알아봤더니 이런 기사가 또 있네요. 뉴라이트 계열이라고 합니다.
  3. 이번에 경기도교육청 자료도 실제 역사학을 전공한 국사 선생님들이 만든거라고 들었습니다. 사이비는 아니겠지요.
  4. 일반들이 보기에 SBS"금지된 장난, 낙랑유물 조작설"은 타당해 보이며, 물살이 쎄지 않는 청천강에서의 수백만대군의 전쟁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5. 국립문화재 연구소는 2000년에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유물 13점에 대한 탄소연대 측정을 해 그 중심 연대가 빠른 것은 서기전 199년에서 늦은 것은 서기 231년이라고 발표했다. 풍납토성이 이미 서기전 2세기부터 축조되기 시작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2000년에 이미 이런 조사 결과가 발표되었으나 2005년에 국민의 세금으로 발간된 <보고서>는 ‘3세기 후반에 축조되었다’고 억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풍납토성, BC 2세기 축조’ 탄소 연대 측정도 무시 - 한겨례 기사 를 보면서 어떻게 현 역사학계를 신뢰할수 있겠습니까? 상식을 얘기 하셨습니까?
  • 사료 비판이란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쓰여진 배경을 감안하고, 오류가 있다면 그것이 고의 였는지 아닌지에 따라 사료로서 취사여부를 판단해야 겠지요. 조선시대 특기, 후기에는 오직 주자학만 정학이라는 의식과 중국에 대한 사대로 기자조선에만 집착한 걸로 알고 잇습니다. 일제식민사학. 흠.
  • 인문학에서 정학과 사이비라는 것이 따로 있습니까? 그 구별이라는게 명확한것입니까? 그렇게 되면 "그래도 지구는 돈다(Eppur si muove)"고 당시 교황청 종교재판에서 말한 갈릴레오 갈릴레이도 그당시에는 사이비였고, 천주교도 조선에서는 사이비였습니다. 단지 한 부류가 오랫동안 권력을 가지고 존속하였고 그 이외 것이 사이비라고 매도하시지 마시고 수정 보완이 지속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문학이지 숫자 놀음, 수학이 아니지 않습니까? 재야쪽에서 말하는 것들도 현존하는 사료를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 그리고 블로그.. 누가 그러더라구요. 달을 가르키면 달을 보라고, 손가락보고 이러쿵 저러쿵 하지 말라고.
  • 덕분에 공부 잘했습니다. 문제점이 뭔지도 잘 느끼게 되었구요. 감사합니다.
  • 아 그리고 님께서 올리신 우 측 상단 두 그림. 제가 계속 삭제했던 그림 제목을 "중국에서 주장하는" 을 쫌 붙여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Eunnorae (토론) 2012년 10월 22일 (월) 21:30 (KST)[답변]
1. 논란이라고 생각하는 건 귀하와 같은 자칭 재야사학자라는 사이비들 뿐입니다. 주류 사학계에서는 낙랑군의 위치가 평양이라는 것은 너무 확실해서 신경조차 안쓰는데요? 대체 제가 지금까지 말한 건 어디로 다 날려먹으신 겁니까?
2. 또 말씀드렸다시피, 고조선이나 낙랑군이 있던 당시의 고서에는 하늘이 두쪽나도 낙랑군은 지금의 어디이다라는 기록이 존재 자체가 할 수 없습니다. 그 당시 낙랑군의 이름은 그냥 낙랑군이었으니까요. 그 당시 사람들이 무슨 타임머신이 있어서 그때는 존재하지도 않던 평양이라는 이름을 써 놔야 하는 겁니까? 애초에 존재할 수도 없는 기록을 왜 내놓으라는 겁니까. 《사기》를 보십시오. 《한서》를 보십시오. 《후한서》를 보십시오. 거기에는 낙랑군이 옛날 조선이다는 것 외에 다른 지리 정보는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해서도 안됩니다. 그시대 사람들한테 타임머신이라도 있지 않는 한.
3. 이병도 이병도 하시는데, 그 이병도가 주장한 것 중에 현대 역사학계에서 인정 안하는게 수두룩하다니까요? 몇 번을 말해야 알겠어요? 수성현=수안군 설도 아무도 인정 안합니다. 대체 누가 믿냐구요. 어느 학자가 그런 주장 하는지 좀 보여라도 주세요. 누가 그럽디까?
4. 청천강에서 수백만 대군이 뭐가 어떻다구요? 스탈린그라드에서 200만 명이 싸운 건 알고 있으려나? 솜 전투에서 100만 명이 죽은 건 알아요? 솜 전투에서 전투 정면이 30km밖에 안되는데 거기서 죽은 사람만 100만이 넘어요. 혹시 살수대첩에서 가죽부대로 물줄기 막았다가 터뜨린 전설을 말하는 건 아니겠죠? 그거 그냥 전설이에요. 그런 거 없어도 한 전투에서 30만 명쯤 말아먹는 건 일도 아니에요. 생각보다 상상력이 소심하시네. 근데 살수에서 싸운 병력은 30만 명인데 웬 수백만?
5. 풍납토성 논란은 학계에서 알아서 잘 하고 있으니 언론의 선동적인 기사는 언급하실 필요 없습니다. 발굴한지 10여 년 밖에 안되고 지금도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는 사안입니다. 학계의 연구라는 게 그렇게 손바닥 뒤집듯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설사 역사학계가 억지 주장을 하고 있다손 쳐도 귀하께서 가져온 블로그 같은 이들의 사기극에 비하면 훨씬 더 나으니 걱정 마십시오.
6. 그래요. 사료비판. 좋지요. 역사학자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게 사료비판이죠. 그래서 귀하의 그 블로그는 《요사》 딱 한 줄만 가지고 그걸 하고 있네요. 그게 사료비판입니까? 제가 보기에는 사료 왜곡인데요?
7.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으면 뭐해요? 정작 가리키는 곳은 벽인데? 벽에다 대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달이라고 하면 그렇게 믿어야 돼요? 말은 바로하세요. 마음에 드는 사료만 골라서 결과에 끼워 맞추는 행동은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이 아니라 벽을 가리키면서 달이라 하는 사기 행각이에요.
8. 결과를 정해 놓고 증거를 취사선택하는 행위는 그냥 사기에요. 그런 건 세상이 두쪽나도 주류가 될 수 없을걸요? 아니, 그런 것이 주류가 된 적이 있죠. 전 세계를 지배하는 악독한 유대인에 맞서 위대한 아리아인의 부활을 부르짖은 나치 독일. 3차대전이 일어나게 된다면 아마도 그 시초는 귀하와 같은 사람들일 겁니다.
9. 그 지도는 중국 일방의 주장이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하겠습니까? 그 지도 중에 하나는 무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만든 지도를 저본으로 하고 있는데 말이죠. NGS도 중국 소유인가요? 아니죠? 그럼 그런 얼토당토 않는 말씀 마세요. --Xakyntos (토론) 2012년 10월 22일 (월) 22:46 (KST)[답변]

만리장성 문서의 자료 사진 첨부 문제[편집]

위키백과:사랑방/2012년 제42주에서 진행되었던 토론을 옮깁니다. -- ChongDae (토론) 2012년 11월 14일 (수) 11:06 (KST)[답변]

1[편집]

고(구)려는 본래 부여의 별종이다. 그 나라는 평양성에 도읍하였으니, 곧 한 낙랑군의 옛 땅이다. 高麗者, 出自扶餘之別種也. 其國都於平壤城, 卽漢樂浪郡之故地, 《구당서》 〈동이열전〉 고구려조 《통전(通典)》에도“평양성(平壤城)은 곧 한(漢)의 낙랑군 왕검성(王儉城)이다.”라고 써 있는데요? 《삼국사기》에도 “대무신왕 27년 한(漢)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쳐서 그 땅을 취하여 군현(郡縣)을 삼았으니, 살수(薩水) 이남은 한(漢)에 속했다.”라는데요? → 낙랑군, 왕검성의 위치를 어디로 보느냐에 따라 해석하는 관점이 달라집니다. 보시다시피 낙랑군과 왕검성의 위치를 한반도로 비정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주류 역사학계의 공식 견해이고, 주류사학계가 낙랑군이라 말하는 평양을 소유하고 있는 북한에서 북한 역사학계는 "문헌과 고고학적인 연구를 거친 결과 낙랑군은 현재 북한의 수도 평양에 없었다"라고 발표합니다. 현재 재야사학계의 주장이 이와 같습니다. 또 평양은 여러 개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고구려가 천도를 3번을 하였다고 가르치지만, 사실은 그보다 많습니다. 그리고 광개토태왕릉비에서는 하(下)평양이라는 용어가 등장합니다. 이는 평양이 여러 개임을 암시하는데요? 그리고 요사에서도 고구려 수도 평양성의 위치를 한반도로 비정하지는 않지요. 또 연남생 묘지명에서는 요동군 평양성 출생이라고 적혀있지요. 따라서 Xakyntos 사용자가 제시한 구당서 내용은 매우 쉽게 논파됩니다.

2[편집]

만리장성이 한반도 북부에 있다는 사실은 틀렸죠. 따라서 만리장성의 끝을 한반도 북부로 표기한 지도는 사라져야 합니다.

  • 《사기》에 의하면 진시황대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요동의 양평(襄平)이라고 하였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일반적으로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천산산맥 일대를 그 동쪽 한계로 보고 있습니다라 말씀하셔놓고 한반도 북부에 만리장성이 축조되어있었다는 사진을 사용한 것은 백:비주류 이론을 위반한 것입니다. 물론 한국사와 관련된 내용이라면 그렇겠지만 중국사 문서니까 제 생각에는 한국과 중국이 주장하는 '만리장성의 끝'을 모두 올리거나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또한 문서의 질을 높이는 방법이 될테니까요.

또 내셔널 지오그래픽은 그저 중국의 입장을 수용한 것일 뿐이지, 그들이 공정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중국과 관련된 내용인데 왜 한국에 가서 견해를 묻나요?

3[편집]

정약용의 《아방강역고》안정복의 《동사강목》과 《동국통감》의 내용이 무조건 틀리다고는 말 할수 없습니다만, 고조선과 고구려에 대한 내용은 동시대에 존재하였던 중국 사서보다는 신뢰도가 떨어진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천 년이 지났으니까요. 그리고 Xakyntos 사용자는 북한에서 실제로 고고학적 증거를 확인하여 보셨습니까? 바로 낙랑군이 있다고 주장되는 북한에서 이를 아니라고 발표하였습니다만.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학계의 주장을 무조건 맞다고 언급하다가도 고고학적인 검증을 거친 북한에서 나온 결과를 무시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4[편집]

Xakyntos 사용자 토론 태도의 문제점

  • 멀쩡하게 요동 지역에 만리장성이 있네요? 피식.
  • ps. “중국사람들이 동북공정이 이루어지기 전에 산해관에서 끝나는 장성이 만리장성이라고 알고 있었다”는 건 어떻게 증명하시려우? 참고로 명장성 지도는 서양에서도 17~18세기에도 알고 있던 사실이라니까?
  • 몇 번을 말해야 알겠어요?
  • 생각보다 상상력이 소심하시네. 근데 살수에서 싸운 병력은 30만 명인데 웬 수백만?

문제점은 너무나도 자명합니다. 현재 사용자:Xakyntos협업 정신에 어긋난 태도1개월 간 차단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차후에는 개선되기를 바라며, 협업 정신에 부합하는 태도를 보여주시기를 기대합니다. --182.212.6.95 (토론) 2014년 6월 29일 (일) 22:59 (KST)[답변]

시대별 만리장성의 축조도에 관한 논란[편집]

해당 축조도에 대한 만리장성 문서 수록 여부에 대한 논란이 여기에서 있었습니다. 참조바랍니다.--Lhrdrth (토론) 2014년 7월 2일 (수) 18:46 (KST)[답변]

외부 링크 수정됨 (2019년 4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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