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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X-1 서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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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X-1 서해(誓海)
일반 정보
종류비행정, 정찰기
원산국대한민국
제조사대한민국 해군 진해공창 항공반
현황복원기: 1대 (국립항공박물관 전시 중)
주요 사용자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해군
생산 정보
생산 시기1954
생산 대수1대
개발 역사
도입 시기1954년

서해(誓海)는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개발한 비행정으로서 대한민국 해군 공창 항공반 조경연(趙敬衍) 대위의 주도로 개발이 시작되었으며 1954년 5월에 개발이 완료되었다. 서해라는 이름은 이승만 대통령이 친필로 하사한 것이다. 서해호는 해상 감시 및 정찰용으로 사용되었으나 부식 등의 문제로 인해 1955년 해군이 자체적으로 폐기처분하였다. 2024년 국립항공박물관에 의해 1대의 복원기가 제작되어 전시 중에 있다.

개발

[편집]

해군의 항공기 연구개발은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당시 PF-62 압록함의 전기관으로 복무 중이던 조경연 중위가 목포 인근 해안에 불시착하여 방치되고 있던 미군 소속의 T-6를 인수하여 수상기로 개조하자는 의견을 올린 것이 시초였다. 이러한 의견은 압록함 박옥규 함장을 통해 손원일 해군총참모장에게 전달되었으며 이에 따라 해당 항공기는 미군으로부터 인수되어 수리 및 개조를 거친 뒤 1951년 8월 25일에 완성되었다. 해당 항공기에는 K.N.-1 해취(海鷲)라는 명칭이 부여되었으며 취역 이후 해상경비, 작전지원, 업무연락, 인원이송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해취호는 1951년 11월 22일 해군사관학교 앞바다에 추락하였고 이후 항공반도 해체되었다.[1][2] 하지만 해취호 개발을 주도했던 조경연은 이후에도 항공기 연구개발에 대한 꿈을 접지 않았으며 1953년에는 신형 수상정찰기 SX-1 제작계획 보고서를 해군 지휘부에 상신하기까지 한다. 이후 해군 지휘부는 SX-1의 개발을 승인하고 1953년 9월 해체된 항공반을 재조직한 뒤 조경연 대위를 초대 항공반장 및 개발책임자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이에 더불어 일제강점기 항공산업 분야에서 활약했던 기술자들이 소집되어 비행정 개발 임무에 투입되었다.[3] 특히 일본 야마나시항공기술학교(山梨航空技術学校), 오카야마지방항공기승원양성소(岡山地方航空機乗員養成所) 출신인 정학윤(鄭學允) 문관이 SX-1의 제작과정을 보고 비행기 구조와 날개 각도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한 것이 계기가 되어 개발에 참여하게 되었다.[4][5] 개발에 필요한 엔진은 공군에서 근무하고 있던 조경연 대위의 친구 배덕찬(裵德讚) 중령으로부터 제공받았으며 자재는 해군본부 병기감인 박병태 대령의 자금지원을 통해 일본에서 구입하였다고 전해진다.[6] 기체 제작은 먼저 설계대로 목제 비행정을 만들고 고치기를 반복하다 목제 비행정을 표본으로 삼아 본격적인 철제 비행정 제작에 착수하였다.[7] 기체 제작이 완료된 것은 1954년 5월 25일의 일이었다. 그리고 5월 28일에는 1차 활주시험이, 29일에는 2차 활주시험이 이루어졌으며 6월 3일에는 2차 비행시험이 이루어져 진해와 부산 사이를 왕복 비행하였다.[8]이 시험비행은 정학윤 문관이 수행하였다.[9]

개발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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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X-1의 개발 성공 이후 해군본부에서는 이 비행정에 붙여질 통상명칭에 대한 현상공모를 해군 장병 및 문관을 대상으로 실시하였다. 1954년 5월 31일 마감된 공모 결과 비행정의 명칭은 충해(忠海)로 정해졌다. 그리고 6월 10일에는 SX-1이 진해공창에서 한국함대로 소속이 이관되어 작전임무에 투입될 수 있었다. 그러나 비행정 명명식에 참석하기 위해 진해로 온 이승만 대통령에게 박옥규 해군총참모장이 '충해'와 '서해' 중 어떤 이름이 더 좋은지 묻는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서해를 선택함에 따라 서해호로 명칭이 변경되었다.[10] 서해(誓海)라는 이름은 "바다에 맹세한다"라는 뜻으로 임진왜란 도중 이순신 장군이 지은 오언율시인 진중음(陣中吟) 중 "서해어룡동 맹산초목지"(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에서 따온 것이다.[11] 1954년 6월 14일 진해에서 이루어진 명명식에는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하여 손원일 국방부장관, 박옥규 해군총참모장, 주한미항공대사령관, 반공아세아민족대회에 참석한 각국 및 지역 대표자 31명이 참석하였다.[12] 한국함대 이관 이후 서해호는 일본 어선의 평화선 침범을 감시하는 데 활용되었다. 한 번은 서해호가 공군사천기지에 과시목적의 시위비행에 나섰다가 통영 인근에서 부주(float)가 전선에 걸려 파손되는 바람에 비행장 앞 강에 불시착하여 임시로 수리하고 무사히 진해로 복귀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서해호는 이후 부주 부분의 철과 듀랄루민(duralumin) 사이 용접부가 심하게 부식되는 바람에 1955년 5월에 해체 처리되었다.[13] 이후 해군공창 항공반은 함대사령부 건공반, 해군과학연구소 제1연구부 항공과에 이어 함대항공대로 개편되면서 SX-2, SX-3 제해호, SX-5 통해호 등을 개발하였고 이외에도 3대의 L-19을 재생하였으나 1963년 함대항공대가 해체되면서 초대 함대항공대장인 조경연 중령은 전역하였고 항공기 및 지원인력들은 해양경찰로 넘겨지면서 명맥이 끊기고 말았다.

최초 국산항공기 부활호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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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호의 개발 책임자였던 이원복 예비역 대령은 당시 해군이 이미 항공기 개발을 수행중이었다는 것을 공군측에서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해군보다 먼저 비행기를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부활호 개발을 서둘러 진행하였다고 증언하였다.[14]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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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국립항공박물관이 주관한 '역사적 항공기 복원'사업에 따라 1기가 복원되어 현재 국립항공박물관에서 전시 중이다.

국립항공박물관에서 전시중인 서해호 복원기
  1. 장학근, 방수일 (2017년). 《해양개척의 선구자 박옥규》. 해군역사기록관리단. 177~181쪽. 
  2. 정인재 (2018년). “초기 해군 항공기 개발 역사 (우리 항공의 선구자 조경연 선생님 업적 중심으로)”. 《한국항공우주학회지》 (한국항공우주학회) 제46권 (제3호): 271~272. doi:10.5139/JKSAS.2018.46.3.269. ISSN 1225-1348. 
  3. 정인재 (2018년). “초기 해군 항공기 개발 역사 (우리 항공의 선구자 조경연 선생님 업적 중심으로)”. 《한국항공우주학회지》 (한국항공우주학회) 제46권 (제3호): 272. doi:10.5139/JKSAS.2018.46.3.269. ISSN 1225-1348. 
  4. 김일상 (1998년 9월). “한국 해군 비사”. 《해양전략》 (해군대학) (제100호): 18. 
  5. 장학근, 방수일 (2017년). 《해양개척의 선구자 박옥규》. 해군역사기록관리단. 187쪽. 
  6. 김일상 (1998년 9월). “한국 해군 비사”. 《해양전략》 (해군대학) (제100호): 18. 
  7. 장학근, 방수일 (2017년). 《해양개척의 선구자 박옥규》. 해군역사기록관리단. 181쪽. 
  8. 장학근, 방수일 (2017년). 《해양개척의 선구자 박옥규》. 해군역사기록관리단. 175쪽. 
  9. 김일상 (1998년 9월). “한국 해군 비사”. 《해양전략》 (해군대학) (제100호): 19. 
  10. 장학근, 방수일 (2017년). 《해양개척의 선구자 박옥규》. 해군역사기록관리단. 181~183쪽. 
  11. 안태현 (2024년 12월 18일). “서해호(誓海號), 바다에 맹세하다”. 《헤럴드뉴스》. 2025년 8월 24일에 확인함. 
  12. 장학근, 방수일 (2017년). 《해양개척의 선구자 박옥규》. 해군역사기록관리단. 184쪽. 
  13. 김일상 (1998년 9월). “한국 해군 비사”. 《해양전략》 (해군대학) (제100호): 19. 
  14. 이동건 (2021년 11월 17일). 《최초 국산 경비행기 부활호》. 공군역사기록관리단. 563~56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