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기간 벨기에의 군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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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국기

한국전쟁 참전국 벨기에군은 1950년 벌어진 6.25전쟁에서 유엔군의 일부로 파견되어 대한민국을 지원한 군을 말한다. 룩셈부르크와 통합된 부대를 편성하여 1951년 1월 31일 부산항에 도착해 임진강 전투, 학당리 전투 등에서 맹활약을 펼쳤다.

벨기에 참전 배경[편집]

1950년 6월 27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결의된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에 16개국이 전투부대를 파견했으며, 그 가운데 벨기에가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벨기에는 제 1,2차 세계대전을 겪고난 뒤 1949년 중립을 포기하고 NATO에 에 가입하였다. 6·25전쟁이 발발했을때도 자국의 방위를 미국에 의지하고 군대가 창설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1950년 7월 14일, 벨기에는 유엔과 미국으로부터 재차 참전 종용을 받아 7월 22일 지원병을 모집한 후 상황이 비슷하던 룩셈부르크와 통합된 부대를 편성하여 파병을 결정하였다.[1]

현역은 물론 예비역과 레지스탕스 출신 등 여러계층에서 2000여명이 지원하였고 그 중 700명을 선발하여 벨기에대대를 창설하였다. 장교와 부사관들은 9월 18일부터 데임(Marche-les-Dames) 병영에서, 사병들은 10월 2일부터 레오폴드 병영에서 선발했다. 이들 가운데는 전 상원의원이자 국방부장관인 믈랑(Moreau de Melon)예비역 소령도 끼어있었다.[2]

영국수송선 카미나호

편성을 완료한 벨기에대대는 한국의 산악지형과 유사한 곳에서 1개월간 훈련을 실시한 후 포병학교에서 포병전술과 전기를 익혔다. 1950년 12월 18일 영국 수송선 카미나(Kamina)호에 승선하여 한국을 향해 앙베르(Anvers)항을 출발하였다. 1951년 1월 31일 부산항에 도착하고 유엔군수용대에서 6주간 현지적응훈련과 병참선 경계임무를 수행한 후 3월 6일 미 제3사단에 배속되었다.[3]

벨기에의 지원병력 편성[편집]

벨기에대대는 3개 소총중대, 1개 화기중대, 대대본부 및 본부중대 등 삼각편제로 편성되었다. 화기중대는 1개 기관총소대(30미리, 1/4톤 정찰대 포함), 1개 박격포소대(3인치 박격포), 1개 대전차소대(3.5인치 로켓) 및 1개 공병소대로 편성되었다.[4]

참전기간 동안 벨기에의 병력 파견은 약 600~900명 선을 유지하였다. 기간 중 장교 199명과 부사관 516명, 병사 2873명 등 연인원 3498명을 한국전선에 파견하였다.[5]

을지무공훈장

벨기에대대는 여러 전투 및 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99명이 전사하고 336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4명이 실종되고 1명이 포로가 되는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 대대는 한국과 미국대통령의 부대표창을 비롯해 태극 및 을지무공훈장 등 56개의 대한민국 무공훈장과 미국 동성 십자훈장 24개 등을 수여받았다.[5]

벨기에의 지원병력 참전 및 인명피해 현황[5]
참전연인원 전사/사망 부상 실종 포로
3,498명 99명 336명 4명 1명

벨기에대대의 주요지휘관은 초대 대대장인 크라하이(B. E. M. Crahay) 중령을 비롯하여 비바리오(Vivario G.)중령과 보다르(Bodart) 중령, 그리고 룩셈부르크 소대장 와그너(Josep Wagner) 중위 등이었다.[6]

유엔군소속 벨기에의 지원병력 및 지휘관[7]
계급 성명 참전기간
중령 B. E. M. Crahay 1950. 9.~1951. 4.
소령 Vivario, G 1951. 4.~1951. 7.
중령 B. E. M. Crahay 1951. 7.~1951. 9.
소령 Vivario, G 1951. 9~1951. 10.
중령 B. E. M. Crahay 1951. 10.~1951. 11.
중령 Cools 1951. 11.~1952. 2.
중령 Vivario, G 1952. 2.~1952. 12.
중령 Gathy 1952. 12.~1953. 1.
중령 Vivario, G 1953. 1.~1953. 2.
중령 Gathy 1953. 2.~1953. 7.
소령 Bodart 1953. 7.~1953. 8.
소령 Brichant 1953. 8.~1953. 9.
중령 Bodart 1953. 9.~1953. 12.
소령 Brichant 1953. 12.~1954. 2.
소령 Pirlot 1954. 2.~1955. 8.

주요 전투[편집]

한강선 진출[편집]

개요[편집]

한강선 일대에서 일어난 전투에서 1951년 3월 6일부터 3월 21일까지 미 제3사단 제15연대에 배속되어 노량진-천호동 일대에서 한국군 제1사단과 양동작전을 펼쳐 미 제25사단의 도하 작전을 지원토록 했다.[8]

왜관지구에서 대유격작전과 부대 훈련을 끝마친 벨기에대대는 3월 6일 소총중대는 열차편으로, 화기중대와 본부는 차량 편으로 왜관을 출발하여 3월 7일 정오에 수원에 도착하였고, 3월 9일 미 제15연대의 우일선인 제1대대의 진지를 인수하여 한강을 사이에 두고 적과 대치하였다. 대대의 우측은 미 제7연대의 필리핀군 대대, 좌측은 미 제15연대의 중앙인 제2대대가 각각 진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주방어선은 말죽거리 북단을 연하는 선이었으며 각종 장애물을 설치하고 미 제15연대로부터 전차중대를 지원받아 방어를 보강했다.[9]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중공중앙군사위원회(CCP Central Military Committee)는 3교대 작전이라는 새로운 작전교대주기를 마련하였다. 크게 3개의 지원군으로 나누어 임무를 교대하는 형식이었다. 제2번 지원군은 3월 중순부터 4월 상순까지 38도선 부근에 도착해 임무를 교대했다. 1951년 4월 중순에 이르러 한반도에 배치된 중공군은 총병력이 95만 명에 달했다. 중공군은 이 병력으로 마지막 총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10]

경과[편집]

3월 13일 23:30분 부대대장 비바리오(Vivario) 소령이 정찰대 100명과 함께 한강을 건너 정찰한 결과 적의 철수를 확인하였다.[11]

3월 14일 주공부대가 공격을 시작해 벨기에대대의 A중대 2소대가 뚝섬 북쪽 1.2km까지 진출하여 적의 퇴각을 재확인하고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이날 낮에 한국군 제1사단 수색대가 중앙청으로 들어가 태극기를 계양하였다.[11]

미국 해병대가 서울에서 북한군 수색 작전중인 사진이다.

3월 15일 11:45분 대대장이 직접 한강을 도하하여 정찰하고 대대의 우측 미 제7연대 수색중대가 광진교쪽으로 도하하여 워커힐 북쪽 용마산까지 수색하였으나 적이 철수한 흔적만 발견하였다. 당시 서울을 점령한 중공군 제50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어 전투 능력을 상실하였고, 부대의 재펴녀성을 위해 의정부-포천 방향으로 철수했다. 인민군 제1군단 또한 중공군 제50군과 함께 개성 방향으로 철수하였다. 그러나 중공 지도부는 38도선이 가지는 정치적 · 군사적 중요성 때문에 그 이상의 철수는 불가하다고 보고 이 선을 마지노선으로 정하고 고수를 지시했다.[11]

3월 16일 00:00시, 미 제1군단장은 예하 전 부대에게 "각 사단은 3월 16일 08:0시부로 공격을 개시하여 서울 북쪽의 링컨선을 점령하고, 버팔로선으로 진출하는 우 인접 미 제9군단과 금곡에서 연결하라"고 명령했다. 이로써 유엔군은 두 번째로 서울을 탈환하는데 성공했다.[10]

3월 17일, 미 제65연대가 제2대대 뒤를 이어 도하해 벨기에대대를 비롯한 한강 남안을 방어하던 미 제15연대는 제2선부대가 되었다.[12]

3월 18일, 미군 정찰대가 뚝섬 지역을 수색하자 C중대장 뷰프레즈(Beauprez) 중위를 미군과 함께 뚝섬지역을 수색하도록 했다. 선두가 한강 북안에 도착하자 말자 큰 폭음이 일어나며 목함지뢰가 폭발하였다. 이 폭발로 뷰프레즈 중위가 즉사하였다. 대대가 참전한 이래 첫 전투 손실이었다.[13]

3월 19일, 미 제1군단장은 38도선으로 진격하는 커리지어스작전 명령을 하달하였고 3월 21일 한강 도하 후 3월 22일 08:00시 불암산-수락산을 경유, 의정부를 공격하게 되었다.[13]

결과[편집]

서울을 두번째로 탈환하는데 성공하였고 처음으로 전투 손실이 일어났던 작전이다. 적과의 직접적인 전투가 일어나진 않았지만 이후 38도선으로 진격하는 커리지어스작전과 연결할 수 있었다.

임진강 전투[편집]

개요[편집]

임진강 전투에 참여한 영국군

임진강 전투는 영연방 제29여단에 배속되어 임진강 북방 금굴산을 방어하던 벨기에 · 룩셈부르크대대가 1951년 4월 22일부터 25일까지 중공군 제188사단의 공격을 격퇴하고 고지를 고수한 방어전투이다.[7]

영국군 제29여단에 배속된 대대는 4월 19일 얼스터대대의 임진강 북쪽 금굴산 지역을 인수하여 여단의 전초부대가 되었다. 당시 대대가 인수한 금굴산 지역은 임진강변을 따라 배치된 영군국 제29여단 지역을 감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인접에서 임진강 동쪽의 진상리 일대에 배치된 미 제3사단의 좌측방을 엄후할 수 있어 전술적으로 중요한 감제고지였다. 그럼에도 유일한 통로가 임진강과 한탄강에 설치된 교량을 통과해야 함으로 적의 공격에 고립될 위험도 안고 있었다.[14]

4월 22일부터 중공군의 춘계공세가 시작될 것이라는 첩보가 있어 여단장이 각 대대에게 전투정찰대를 적진 깊숙이 파견토록 명령했고, 미 제3사단장은 주간에는 은폐하고 야간에 수색활동을 강화하라 지시했다.[15]

경과[편집]

4월 22일 지방 민간인으로부터 중공군이 이미 여러 곳으로 진출하여 위장한 채 잠복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였다. 일몰 직전 A중대의 정찰대가 마전리 부근으로 진출하였을 때 적으로부터 총격을 받았다. 21:30분, 레이딩(Leyding) 중사 청음초는 중공군 20~30명이 대대진지를 향하여 접근하는 것을 발견 후 대대에 보고하였고 거의 동시에 대대진지 북단에 배치된 B중대 주진지에서도 적과 교전이 시작하였다. 적성 지역에 위치한 영 제29여단의 글로스터대대에서도 이날 밤 적 2개 연대 규모가 공격했다. 벨기에 대대 정면에는 중공군 제188사단, 영 글로스터대대 정면에는 중공군 제187사단이 각각 공격했던 것으로 밝혀졌다.[16]

벨기에대대는 적의 첫 공격을 탄막사격으로 저지했다. 그러나 우군의 관측기는 대대정면 북쪽 12km되는 지점에 전조등을 킨 100여 대의 트럭이 남하 중인 것을 관측했다. 최초 대대는 이것을 중공군의 주력으로 판단하였으나 그들은 후속증원부대이고 주력은 이미 아군진지 공격거리에 육박해 있었다. 아군은 적의 야간 침투와 위장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여단장은 22:30분에 예비 울스터대대의 1개 중대를 유일한 철수로인 도감포 교량을 방어하도록 지시했다. 자정 직전 조명 지뢰와 함께 적은 C중대 전면을 공격했고 중대는 최후저지사격으로 저지하였다. 적은 퇴각하고 부상자 3명을 포로로 획득했다.[17]

4월 23일 01:30분경 도감포 교량 쪽에서 적색 신호탄이 오르고 2분간 총성이 울리더니 바로 조용해졌다. 대대장은 전방 사정이 급박해 교량으로 병력을 빼내지 못하였다. 이때 영 제29여단의 다른 대대들은 중공군의 파상공격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02:30분, C중대 진지를 돌파하기 위해 적은 파상공격을 펼쳤으나 대대는 적의 돌파를 간신히 차단할 수 있었다. 03:00시 적은 B중대 진지에도 파상공격을 하였으나 영 제 170미리 박격포 탄막사격으로 일시 격퇴하였다. 이때 적은 일부 병력으로 우회하여 C중대 배후를 공격하였다. C중대는 완전 포위된 상태가 되었고 전반적으로 대대의 전황은 악화일로에 있었다. 벨기에대대는 날이 밝아 공중지원을 받을 때까지 진지를 고수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었다.[18]

대대장은 보스위크 대위에게 2개 소대를 이끌고 도감포교량을 정찰토록 지시하였고, 그 후 대대본부지역에 적의 포탄이 떨어지고 C중대 좌측 제1소대는 적에 돌파되기 시작하였다. 포병관측장교를 비롯한 10여 명이 전사 또는 부상하여 포병화력지원도 감소했다. 보스위크정찰대가 정찰 중 그곳에 매복하고 있던 적으로부터 기습사격을 받고 대대장에게 대대의 철수로가 완전히 차단되었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대대장은 여단장에게 지원을 부탁하였으나 병력이 부족하단 이유로 거절되었고 현진지를 고수하여 우인접부대의 좌측방을 엄호한 후 철수하라고 명령받았다.[19]

영 제29여단 지휘소에서 여단이 미 제3사단장에게 직접 지원을 요청하였고 사단장은 미 제7연대의 전차 1개 소대를 지원하였다. 전차소대는 적의 사격을 뚫고 벨기에대대 진지에 도착했다. 고립된 C중대를 구출하기 위해 대대장은 보스위크 대위에게 미 전차소대로 C중대의 좌단진지를 재탈환하도록 명령했고 적의 포위망을 뚫고 정오 직전에 목표를 재탈환하는데 성공한다. 영 제29여단의 우측 인접부대들도 09:00시부로 와이오밍선에서 켄사스서으로 철수하기 시작했고 여단장은 일몰 전에 철수할 것으로 벨기에대대에 명령하였다. 대대장의 정확한 판단과 공중포격, 미 전차소대의 엄호를 받아 철수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다른 부대들의 전황은 매우 위태로웠고 그 중 영 글로세스터대대는 설마리고지를 사수하다 고립되었다.[20]

4월 24일 06:00시, 여단장 보디(Bordie) 준장은 봉암리서 2km 북방에 있는 340고지를 점령하고 전방 부대의 철수를 엄호할 것을 지시하였다.[21]

4월 25일, 05:30분 중대 규모의 적이 대대진지 좌측 A중대에 침투하였으나 편제화기로 격퇴하였다. 08:00시에 영 푸질리대대의 대대장이 전사하고, 울스터대대는 동두천으로 철수하였다. 10:30분 영 제45야포대가 적의 소화기 사정거리 내로 들어가자 여단장은 글로스터대대장 케너(Carne) 중령에게 자력으로 포위망을 탈출 할 것을 명령하였고, 결국 영 글로스터대대는 전원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14:00시에 벨기에대대도 철수하였고 철수과정 중 대대장이 적의 자동화기와 박격포탄에 의해 부상당했으나 덕정까지 철수하는데 성공했다. 이 철수에서 여단은 전 병력의 1/3의 손실을 보았다.

결과[편집]

벨기에 대대는 일사불란한 지휘체계와 강인한 군인정신으로 중공군의 4월 공세를 저지하는데 일조하고, 중공군 차단선을 돌파하는데 성공하여 유엔군의 귀감이 되었다.[22]

많은 병력을 소실하고 후퇴했지만, 후에 노곡리 수색전(1951. 6. 1), 슬램(Slam) 작전(1951. 8. 3~7) 등을 통해 임진강에 재진출 하는데 성공한다.

학당리 전투[편집]

개요[편집]

학당리 전투는 미 제3사단에 배속되어 철원과 평강 사이의 학당리 388고지에서 전초임무를 수행하던 벨기에 · 룩셈부르크대대가 1951년 10월 11일부터 13일까지 중공군 제78사단의 2차에 걸친 야간공격을 격퇴한 방어전투이다.

벨룩스대대는 미 제1군단으로부터 미식 장비를 보급 받고 미 제3사단의 지원 하에 미식 교육훈련을 받아 새로운 대대로 변모하였다. 10월 7일 대대는 미 제3사단 제15연대에 배속되어 율지리(학당저수지 서북쪽 3km)로 이동하였다. 이 무렵 제15연대는 제임스타운(Jamestown)선으로 진출하기 위해 철원 서쪽 324고지(악어고지)를 공격하고 있었다. 대대는 10월 10일 11:40분 388고지에 도착해 배치를 완료하고 전방 기슭에 청음초를 설치, 고지 주변을 수색했다. 이때 388고지는 각종 지뢰와 전술 철조망이 설치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고지 주변에는 강력한 탄막지대도 계획되어 있었다. 하지만 북쪽의 발이봉과 동쪽 서방산의 중공군으로부터 감제되고 있어 방어에는 불리한 지형이었다.[23]

경과[편집]

11일 05:00시 분대규모의 적이 1차 침투하였으나 격퇴되었다. 12일로 접어들며 적은 82미리 박격포와 76.2미리 곡사포 사격을 가한 뒤 01:50분경 중대 규모로 2차 공격을 시작했다. 제1차 공격은 탄막사격을 받고 저지되었으며, 제2차 공격은 진지 전면의 철조망까지 접근하였으나 아군의 최후 저지사격을 받고 격퇴되었다. 동이 틀 무렵 대대 정찰대는 적 사체 10구를 확인한 후 발이봉까지 진출하여 적의 관측소를 파괴하고 복귀하였다.

12일 밤 자정무렵, 적 1개 중대가 전방의 C중대를 조공으로 3차 공격하고 주공인 1개 중대규모는 우측방으로 우회하여 중앙의 B중대를 4차 포위 공격하였다. 대대의 청음초가 조기에 발견하고 저지한데 이어 외곽경계지역에서도 소화기와 수류탄이 난무하는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그 중 일부가 B중대 진지로 돌입했으나 B중대 병사들이 백병전으로 격퇴하였다. 04:30분 적은 전원 패주하였고, 벨룩스대대는 미 제65연대 제2대대와 진지를 교대하고 정오에 율지리 예비진지로 돌아갔다.[24]

결과[편집]

이 전투에서 벨기에 대대는 전초진지인 388고지에서 3일 동안 4차에 걸친 중공군의 집요한 파상공격을 격퇴하여 미 제1군단의 제임스타운선 유지에 크게 공헌하였다. 하지만 좌측 부대인 미 제1기병사단이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해 10월 16일 임진강 동안의 346고지 및 역곡천 남쪽의 347고지를 탈취하기 위한 폴 챠지(Pole Charge)작전을 감행하게 되었다. 벨기에군은 이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미 제5기병연대에 배속되어 예비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지난 9월부터 12월까지 4개월 간 전사 14명, 부상 58명 등 전체 72명의 병력 손실을 보았고, 250명을 새로 보충 받아 전체 병력은 700명 선으로 늘어났다.[25]

잣골지구 전투[편집]

개요[편집]

잣골지구 전투는 미 제3사단에 배속되어 김화 서북방 5km 지점 잣골에서 주저항선 방어임무를 수행하던 벨기에 · 룩셈부르크대대가 1953년 2월 26일부터 4월 21일까지 중공군 제70사단의 공격을 격퇴한 방어전투이다.[26]

대대가 배치된 잣골은 중공군의 강력한 방어거점인 오성산에서 남서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 하단에 위치하고 있어 대대도 강력한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중공군도 C중대 전초인 카롤(Carol) 진지에서 350m 떨어진 400고지에 소대규모의 전초를 설치하고 중대 활동을 감제하고 있었다.[26]

경과[편집]

3월 8일 밤, 벨기에대대는 오성산 전면에서 대대진지에 직사탄과 120미리 박격포탄 50여발을 공격받았다. 케롤전초 좌측 B중대의 라루엘러(Laruelle) 중사가 인솔하는 분대 규모의 정찰대가 419고지까지 전출했으나 적과 접촉이 없었다. 케롤전초에는 1개 분대가 잠복근무하고 있었고, 그 전방으로 청음초가 나가 있었다.[27]

3월 9일 01:00시 B중대 전면에 소대 규모의 적이 접근했다. 얼마 안 있어 적의 박격포가 산발적으로 바바라와 케롤전초를 공격하였다. 바바라전초에는 조공, 앨리스와 케롤전초에 주공을 지향했다. 치열한 적의 포격으로인해 부상자가 많이 발생하였고 설상가상으로 케롤전초와 대대 사이에는 유선이 절단되었다. 05:20분 부상당한 초병이 C중대장 더 그리프(De Greef) 대위앞에 나타나 케롤전초의 대부분 초병들이 그 자리에서 전사 및 부상을 입었고 자신은 언덕은 굴러 내려 복귀한 것이라 보고했다. C중대장은 2개 소대를 동원하여 즉각 역습에 나섰다. 하지만 이미 날이 밝아 역습은 실패하였지만 연막차장을 요청한 다음 재 반격에 나서 케롤전초 탈환에 성공하였다. 적은 최소 40여 명이 전사한 것으로 판단되었고, C중대는 초병 2명 전사, 1명 실종과 역습 소대에서 1명 전사, 전투지역 전단에서 2명 전사, 17명 부상을 당했다.[28]

3월 13일 00:15분, 적 1개 소대 규모가 앨리스전초 전면의 철조망까지 접근해 기습공격했다. 초병들은 60미리와 81미리 박격포의 엄호를 받으며 바로 철수하였다.[29]

4월 8일 01:30분, 적은 잠깐 B중대 전면에 양공작전을 편 후 1시간 뒤에 1개 소대 규모로 케롤전초에 기습공격을 가하였다. 케롤전초는 신속히 전투 지역 전단으로 철수하였지만 박격포탄에 2명이 전사하였다. 04:10분 역습을 개시한 C중대는 10분 만에 케롤전초를 재탈환하였다. 여기서 적 4명을 사살하고 1명을 포로로 획득하였다. 이날 적의 공격으로 케롤전초를 복구하는데 1개월이 소요되었다.[30]

4월 18~19일, 4월 18일에도 적의 포격이 계속되었다. 자정이 되면서 A중대 전면에 25명, 케롤전초에 25명, B중대 전면에 75명의 적이 각각 공격해 왔다. A중대 전면에서 4개 포대가 탄막사격을 실시하여 위기를 넘겼으나, B중대는 위급해져 한국군 제9사단 포병의 지원을 받아 위급한 불을 껐다. 절대 우세의 화력 덕분에 철조망 25m 부근까지 접근하였던 적은 거의 궤멸되고 교통호 내의 적도 백병전으로 사살되었다.[31]

결과[편집]

대대는 55일 동안 전초진지를 고수하기 위해 포격전과 공방전을 펼치면서 사투한 잣골 지역을 미 제7연대에 인계하였다. 이로써 대대기에는 '임진', '학당리'에 이어 세 번째로 '잣골'이라고 쓰여진 전투리본이 추가되었다.[32]

잣골지구 전투의 적 포탄 낙하 수와 전사자 수[30]
적 포탄 낙하 수 전사자
3월 8~9일 1,150 5
3월 24~25일 50 3
4월 7~8일 700 11
4월 17~18일 700 4
4월 18~19일 3,100 1

참전 이후 한국과의 관계[편집]

1901년 3월 23일 대한제국과 벨기에는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는 것을 시작으로 양국 간의 수교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1948년 8월 15일 한국정부 수립 당시 벨기에가 한국을 승인하며 지속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왔다. 전후 폐허가 된 한국에 벨기에는 헌신적인 사회사업을 펼쳤고, 그 대표적인 사례들은 다음과 같다.

  • 벨기에의 사회산업[33]
    • 종군 간호사 떼레즈 깡비에(Therese Cambier)가 나환자 전용 다미엥(Damien)병원과 나환자 자녀들을 위한 직업학교를 설립했다.
    • 1965년 나병 전문의 2명과 간호사 2명으로 구성된 벨기에 의료진이 소록도 병원에서 진료 활동을 하였다.
    • 마리 엘렌 브라쉐르(Marie Helene Brasseur)는 최초 간호사 신분으로 한국에 와서 빈민들에 대한 의료봉사를 실시했으나 한계를 느끼고 한국의 중앙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1985년 전문의가 되었다. 그리고 1990년 시흥동에 빈민을 위한 병원을 설립했다.
    • 신부 스르스테벤스(t' Serstevens)는 1983년부터 장애자를 위해나 사회산업을 실시했고, 1989년에는 신부 자신이 장애자임에도 불구하고 몸소 건축공이 되어 중증 장애인을 위한 복지원을 건립했다.

경제 및 통상 관계를 살펴보면 한국과 벨기에 간의 교역량은 꾸준히 증가해 왔으며 2008년 세계 금융 위기로 주춤했으나 2021년 한국 벨기에 수교 120주년을 맞이하게 된다.[34] 한국에 경제 위기가 닥쳤을 당시 벨기에는 즉각 다른 주요 무역국들과 함께 제2방어선의 일환으로 1억 3천만 달러 기금 지원을 약속하고 1998년 5월 벨기에 투자조사단이 유럽 국가중 최초로 한국을 방문하여 3건의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35]

기념 행사[편집]

한국 · 벨기에 수교 100주년과 벨기에 군대 6 · 25 전쟁 참전 50주년 기념행사 (2001년)

한국전쟁 참전기념비 건립 50주년 기념행사[36] (2016년)

6 · 25 전쟁 70주년 기념 벨기에 한국전 참전부대 헌화식[37] (2020년)

같이 보기[편집]

참고 문헌[편집]

  • 《벨기에 · 룩셈부르크군 6·25전쟁 참전사》. 국가보훈처. 2011년 6월. 



각주[편집]

  1. 벨기에·룩셈부르크 2011, 65쪽.
  2. 벨기에·룩셈부르크군 2011, 65쪽.
  3. 6·25전쟁과 유엔군 2015, 239쪽.
  4. 벨기에·룩셈부르크군 2011, 66쪽.
  5. 6·25전쟁과 유엔군 2015, 250쪽.
  6. 6·25전쟁과 유엔군 2015, 240쪽.
  7. 6·25전쟁과 유엔군 2015, 241쪽.
  8. 벨기에·룩셈부르크군 2011, 72~73쪽.
  9. 벨기에·룩셈부르크군 2011, 73~75쪽.
  10. 벨기에·룩셈부르크군 2011, 77쪽.
  11. 벨기에·룩셈부르크군 2011, 76쪽.
  12. 벨기에·룩셈부르크군 2011, 78쪽.
  13. 벨기에·룩셈부르크군 2011, 79쪽.
  14. 6·25전쟁과 유엔군 2015, 242쪽.
  15. 벨기에·룩셈부르크군 2011, 95쪽.
  16. 벨기에·룩셈부르크군 2011, 96쪽.
  17. 벨기에·룩셈부르크군 2011, 97쪽.
  18. 벨기에·룩셈부르크군 2011, 97~98쪽.
  19. 벨기에·룩셈부르크군 2011, 98~99쪽.
  20. 벨기에·룩셈부르크군 2011, 99~103쪽.
  21. 벨기에·룩셈부르크군 2011, 103쪽.
  22. 6·25전쟁과 유엔군 2015, 244쪽.
  23. 6·25전쟁과 유엔군 2015, 245쪽.
  24. 벨기에·룩셈부르크군 2011, 115쪽.
  25. 벨기에·룩셈부르크군 2011, 116쪽.
  26. 6·25전쟁과 유엔군 2015, 247쪽.
  27. 벨기에·룩셈부르크군 2011, 127쪽.
  28. 벨기에·룩셈부르크군 2011, 127~128쪽.
  29. 벨기에·룩셈부르크군 2011, 128쪽.
  30. 벨기에·룩셈부르크군 2011, 129쪽.
  31. 벨기에·룩셈부르크군 2011, 130쪽.
  32. 6·25전쟁과 유엔군 2015, 249쪽.
  33. 벨기에·룩셈부르크군 2011, 147쪽.
  34. “한-벨 수교 120주년 기념의 해”. 
  35. 벨기에·룩셈부르크군 2011, 150쪽.
  36. “벨기에 한국전쟁 참전기념비 건립 50주년...전사자 추모”. 《연합뉴스》. 2016년 6월 16일. 
  37. 주벨기에대사관 (2020년 6월 26일). “6.25 전쟁 70주년 기념 벨기에 한국전 참전부대 헌화식”. 《주 벨기에 유럽연합 대한민국 대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