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휘호 판 데르 후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휘호 판 데르 후스
Hugo van der Goes
판 데르 후스의 <남자의 초상> (자화상 아님)
판 데르 후스의 <남자의 초상> (자화상 아님)
신상정보
출생  1430/1440c.
아마 헨트
사망 1482 (42세 ~ 52세)
오데르겜
국적 플랑드르
분야 회화
사조 플랑드르파, 북방 르네상스
주요 작품
포르티나리 삼면화
몬포르테 제단화
인간의 타락과 구원
영향

휘호 판 데르 후스(Hugo van der Goes; 1430/1440 경 출생 – 1482년 사망)는 15세기 후반의 가장 중요하고 독창적인 플랑드르파 화가 중 한 명이었다. 판 데르 후스는 제단화뿐만 아니라 중요한 초상화 화가였다. 그는 기념비적인 스타일, 특정 색조의 사용, 개성적인 초상화 방식을 통해 회화 분야에 중요한 혁신을 도입했다. 1483년부터 그의 걸작인 포르티나리 삼면화피렌체에 전시되면서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의 사실주의와 색채 사용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1]

생애

[편집]

휘호 판 데르 후스는 대략 1440년경 헨트 또는 헨트 근처에서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1] 1467년, 헨트의 화가 길드에서 거장이 되기 전까지 그의 삶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길드 회원 가입을 위한 후원자는 1464년부터 헨트의 거장 화가였던 요스 판 바센호버와 다니엘 루타르트였다.[2] 헨트에서 거장이 되기 전에 다른 곳에서 훈련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일부 역사가들은 디르크 바오츠가 판 데르 후스의 스승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이에 대한 별도의 증거는 없다.[3]

몬포르테 제단화 (동방 박사의 경배)

1468년, 헨트 시는 가톨릭의 대사 수여와 관련하여 판 데르 후스에게 일부 작품을 의뢰했다. 이후 몇 년 동안 시에서 더 많은 의뢰가 들어왔고, 판 데르 후스는 교황의 문장과 같은 장식을 제작해야 했다. 1468년, 그는 브뤼허에서 머물며 용담공 샤를요크 공녀 마거릿 (1446년)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한 장식을 만들었다. 휘호 판 데르 후스는 1468년 10월 18일 다시 기록에 등장하는데, 이때 그는 헨트의 화가 길드 회원들과 함께 헨트 길드 회의에서 인근 투르네의 화가들을 초청하여 성 루가의 날을 함께 축하했다. 성 루가는 화가들의 수호 성인이었다.

1469년, 휘호 판 데르 후스와 요스 판 바센호버는 알렉산더 베닝이 헨트 화가 길드에 가입하는 것을 보증했다. 알렉산더 베닝은 1480년 휘호 판 데르 후스의 사촌 또는 누이인 카테리나 판 데르 후스와 결혼한 사이였다. 이후 1469년과 1472년에는 헨트 시의 의뢰를 받아 용담공 샤를이 도시에 입성하는 환희의 입장을 위한 문장 장식을 제작했다.

1470년, 요스 판 바센호버가 이탈리아로 떠나 우르비노 공국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공작의 궁정 화가가 되자, 판 데르 후스는 헨트의 대표 화가가 되었다. 1467년, 부르고뉴 궁정은 선량공 필리프의 장례식에 사용될 문장을 제작한 대가로 판 데르 후스에게 비용을 지불했다. 화가는 헨트 화가 길드의 부제장으로 여러 번 선출되었고 1474년부터 1476년까지 부제장으로 재직했다.

성모의 죽음

이 시기에 휘호 판 데르 후스는 몬포르테 제단화 (동방 박사의 경배로도 알려짐, 베를린 회화관)를 그렸고, 톰마소 포르티나리의 의뢰를 받아 포르티나리 제단화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작업을 시작했는데, 이 작품은 그가 이미 사망한 1483년에야 피렌체에 도착했다.

판 데르 후스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으며 부르고뉴 궁정, 교회 기관, 부유한 플랑드르 부르주아지, 부르고뉴령 네덜란드에 기반을 둔 이탈리아 사업가 협회로부터 중요한 의뢰를 확보했다.[1] 1477년, 경력의 정점에 달했을 때 판 데르 후스는 갑자기 헨트의 작업장을 닫고 오데르겜 (현재 브뤼셀에 있음) 근처의 루주클루아르 수도원 (또는 루크루스테르)의 수도 공동체에 평수사(frater conversus)가 되기로 결정했다.[4] 루크루스테르는 디보티오 모데르나 운동의 중심 수도원이었으며, 빈데스하임 공동체 소속이었다. 수도원에서 그는 특정 특권을 누렸다. 그는 회화 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고 와인을 마실 수 있었다. 루크루스테르의 동료 수도사인 가스파르 오프하위스가 1509년에서 1513년 사이에 라틴어로 작성한 연대기에 따르면, 판 데르 후스는 막시밀리안 1세 (신성 로마 황제)를 비롯한 저명한 인물들의 방문을 받았다.[4]

수도원에 머무는 동안 1482년 루뱅 시의회로부터 디르크 바오츠가 사망 당시 미완성으로 남겨둔 루뱅 시청 작품들을 평가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 봉사에 대한 보상으로 판 데르 후스는 시 당국으로부터 라인산 와인 한 병을 받았다. 바오츠의 미완성 히폴리투스 베르토츠 삼면화를 완성한 사람이 판 데르 후스로 추정된다(그는 삼면화를 의뢰한 부부의 초상화를 왼쪽 패널에 그렸다). 1482년, 수도원은 판 데르 후스를 그의 이복형제 니콜라에스(그 또한 수도 서약을 했음)와 또 다른 수도원 형제와 함께 쾰른으로 보냈다.[4] 이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화가는 심각한 우울증을 겪었고 자신이 저주받았다고 선언했다.[5] 그는 자살을 시도했다. 그의 동료들은 그를 브뤼셀로, 그리고 루크루스테르로 데려왔다.[1] 그는 얼마간 회복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루크루스테르에서 사망했다.[4]

그의 예술적 성취에 대한 불안이 그의 광기를 초래했을 수 있다는 추측이 있다. '그는 자신이 그려야 할 예술 작품을 어떻게 완성할 수 있을지 깊이 고민했으며, 그때는 9년도 채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2] 독일 의사 히에로니무스 뮌처가 1495년에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헨트의 한 화가가 헨트 제단화와 동등한 작품을 만들려다가 우울증에 빠졌다고 썼는데, 이 사람이 휘호 판 데르 후스일 수 있다.[6]

인간의 타락과 구원

1863년, 벨기에 역사가 알퐁스 워터스는 새로 발견된 오프하위스의 연대기에서 휘호 판 데르 후스의 정신 붕괴 증거에 대해 저술하였다. 워터스의 출판물은 후기 낭만주의 화가 에밀 워터스 (알퐁스 워터스의 조카)에게 영감을 주었고, 그는 1872년 휘호 판 데르 후스의 초상 (1872년, 벨기에 왕립미술관)을 창작했다. 이 그림은 휘호 판 데르 후스가 광기에 시달린 시기를 묘사한 것으로, 파리 살롱에서 대상을 받을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1873년,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자신의 형제인 테오 반 고흐 (미술상)에게 보낸 편지에서 워터스의 그림을 언급했다. 그 후로도 두 번 더, 반 고흐는 자신의 외모를 워터스가 재창조한 판 데르 후스의 모습과 비교하며, 감정적으로 동일시한다고 말했다.[7]

작품

[편집]

개요

[편집]

미술사학자들은 휘호 판 데르 후스의 작품을 귀속시키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20세기 초중반에 그의 작품으로 여겨졌던 많은 작품들은, 현재 그의 작업장 구성원이나 추종자들의 복제품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문서 증거가 없는 상황이므로, 판 데르 후스의 작품이라는 것이 명확히 확인된 포르티나리 제단화 (1470년,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와 비교하여 귀속 여부를 판단하였다.[8]

판 데르 후스 작품중 상당 부분은 원본이 소실되었다. 이러한 작품들은 원본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사본을 통해서만 전해진다. 많은 수의 사본은 그가 당대에 얼마나 높은 평가를 받았는지를 증명하며, 초기 플랑드르 예술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데 기여했다. 마르틴 숀가우어가 판 데르 후스 작품을 기반으로 제작한 판화는, 플랑드르 국경을 넘어 독일의 예술가에게 까지 영향을 미쳤다. 저명한 브뤼허 화가 헤라르트 다비트와 그의 작업실 조수들은 판 데르 후스에게서 영감을 받았음이 확실하다.[1]

휘호 판 데르 후스는 제단화뿐만 아니라 중요한 초상화 화가였다. 그의 주요 종교 작품으로는 포르티나리 삼면화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몬포르테 제단화 (일명 '동방 박사의 경배')와 목자들의 경배 (두 작품 모두 베를린 회화관), 인간의 타락과 구원 (빈 미술사 박물관), 성모의 죽음 (흐루닝어 미술관, 브뤼허) 등이 있다.[9]

1460년대, 판 데르 후스는 에든버러의 성삼위일체 교회의 초대 교구장 에드워드 본킬로부터 제단화를 의뢰받았다. 이 교회는 스코틀랜드의 왕비 마리 드 헬데르에 의해 설립되었다.[10] 이 교회의 트리니티 제단화중 현존하는 네 패널은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3세 (스코틀랜드)를 묘사하고 있으며, 성 안드레아와 그의 아들인 미래의 제임스 4세와 그의 아내 덴마크의 마르그레테가 양쪽에 서 있다. 후원자인 에드워드 본킬도 등장한다.[11]

포르티나리 삼면화

[편집]

판 데르 후스의 가장 유명한 현존 작품은 포르티나리 삼면화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이다. 이 삼면화는 메디치 은행 브뤼헤 지점의 지배인인 톰마소 포르티나리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누오바 병원 내 산 에지디오 교회를 위해 의뢰한 제단화이다.[12]

포르티나리 삼면화

1483년, 판 데르 후스에 의해 완성된 지 몇 년 후 포르티나리 제단화는 피사에 도착했으며, 운하를 통해 피렌체의 포르타 산 프리아노로 운송되어 산타 마리아 누오바 병원 교회에 걸렸다.

포르티나리 삼면화의 정물

판 데르 후스 작품 속 목자들의 거친 특징은 피렌체에서 활동하는 화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도메니코 기를란다요는 포르티나리 삼면화에서 영감을 얻어 사세티 예배당의 <동방박사 경배>를 그렸을 가능성이 높다.[1] 이 작품은 피렌체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큰 네덜란드 작품으로, 매우 찬사를 받았다. 1550년에 조르조 바사리는 그의 미술가 열전에서 이를 "안트베르펜의 우고"(Ugo d'Anversa)의 작품이라고 언급했다. 이것이 휘호 판 데르 후스의 저작권을 입증하는 유일한 문서이다. 다른 모든 작품들은 이 제단화와 양식이나 기법을 비교하여 판 데르 후스의 작품으로 귀속시킨다.[12]

휘호 판 데르 후스가 사망한 후, 이 삼면화는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도메니코 베네치아노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에게 잘못 귀속되었다(이 두 예술가는 제단화 주변의 프레스코화만 제작했다).[5] 1824년에야 카를 프리드리히 싱켈이 이 작품을 휘호 판 데르 후스의 작품으로 식별했는데, 이 이론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한참 후였다.[5]

포르티나리 삼면화의 목자들

포르티나리 삼면화의 중앙 패널은, 기독교 구원자인 예수의 탄생에 관한 핵심 기독교 신화인, 예수의 탄생, 목자들의 경배, 목자들에게 알림 (맨 오른쪽 배경)을 묘사한다. 이 제단화의 도상학에 대해서는 많은 해석이 제시되었다. 이 구성은 성찬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헌신을 강조한다. 성찬은 밀 묶음과 그리스도의 몸의 시각적 유사성, 그리고 전례복을 입은 천사들을 통해 표현된다. 수난은 인물들의 침울한 표정과 전경에 눈에 띄게 놓인 꽃 정물화를 통해 표현되는데, 여기에는 주홍 백합, 흰색과 보라색 붓꽃, 카네이션과 같은 꽃들이 묘사되어 있다. 꽃병중 하나는 알바렐로 유형이다. 알바렐로는 약사의 연고와 건조 의약품을 담는 약품용기로 사용되었으며, 이 그림에서는 제단화가 전시될 환경(즉, 산타 마리아 누오바 병원)을 암시한다. 꽃 정물화에 있는 일부 꽃은 르네상스 시대에도 약용으로 사용되었으며, 따라서 꽃 자체도 병원을 암시하기도 한다. 약용 능력에 대한 이러한 표현은, 기독교 문헌에 따르면 일반적인 출산의 고통 없이 일어났던 예수의 기적적인 탄생을 암시한다. 예수의 탄생 자체도 소위 원죄로부터 인류를 구원함으로써 치유력을 지닌다고 여겨지며,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인류의 죄의 상태에 대한 기독교 교리의 일부이다.[13]

측면 패널에는 제단화를 의뢰하고 기증한 포르티나리 후원자 가족의 남성 (왼쪽 날개) 및 여성 (오른쪽 날개) 구성원이 묘사되어 있다. 오른쪽 날개에는 동방박사에게 알림 장면도 포함되어 있으며, 왼쪽 날개에는 마리아 (예수의 어머니)나자렛의 요셉이 베들레헴으로 여행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초상화

[편집]

휘호 판 데르 후스는 15세기 유럽의 가장 중요한 초상화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당시 인문주의가 부흥하고 개인의 중요성이 부상하자, 미술에서 초상화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었다.[14]

기도하는 남자와 세례자 성 요한의 초상

휘호 판 데르 후스의 독립적인 초상화는 현존하지 않는다. 이 장르에서의 그의 업적은 그의 종교적 이면화삼면화에 포함된 봉헌자 초상화를 통해서만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성 히폴리투스 제단화(1475년 경, 흐루닝어 미술관, 브뤼허. 중앙 및 오른쪽 패널은 디르크 바오츠의 작품이다.)의 왼쪽 날개, 포르티나리 제단화, 삼위일체 제단화 (1473년~1478년,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 에든버러), 그리고 제단화 조각들인 기도하는 남자와 세례자 성 요한의 초상 (월터스 미술관)과 남자의 초상이 있다.[9][14] 이러한 종교적 작품에 포함된 초상화는 일반적으로 기도하는 남성 또는 여성을 묘사하며, 종종 성모의 환상을 경험하는 것처럼 표현한다.[14]

남자의 초상(1475년 경,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은 그의 초상화 작품의 좋은 예이다. 이 작은 패널은 원래 직사각형 형태였는데 타원형으로 잘렸다. 이 작품은 아마 두 개의 패널로만 구성된 이면 제단화의 오른쪽 날개를 형성했을 것이다. 혹은, 기독교 장면을 묘사하는 중앙 패널의 오른쪽에 아내의 초상화가 있는, 전체적으로 전통적인 삼면 제단화를 형성했을 수도 있다. 중앙의 기독교 장면은 아마 성모와 아기 예수를 묘사했을 것이다. 남자의 초상에서 판 데르 후스는 모델의 결단력 있는 자세와 강한 성격을 드러냄으로써, 초상화가로서의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모델을 보는 사람보다 높은 곳에 배치하고, 외부에서 빛을 받는 얼굴과 그 뒤의 어두운 벽 사이에 대비를 만들어 이러한 효과를 강조하였다.

판 데르 후스는 키아로스쿠로 효과를 사용하여 돌로 만들어진 듯한 얼굴 특징을 더욱 강조했다. 이러한 특징과 손과 배경의 모습은 나중에 복원가들이 덧칠을 했고, 이 때문에 학자들이 이 남성 초상화를 이탈리아 화가 안토넬로 다 메시나의 작품으로 잘못 귀속시키게 되었었다. 휘호 판 데르 후스의 뚜렷한 사실주의는 남자의 얼굴의 어두운 색조, 턱의 거친 수염, 기도하는 거친 손을 세심하게 표현함으로써 초상화의 주인공이 깊은 신앙심에 사로잡힌 듯한 인상을 준다.

성 히폴리투스 제단화의 왼쪽 날개에 있는 기증자 이폴리트 드 베르토호즈의 초상화와, <트리니티 제단화> 오른쪽 날개에 그려진 에드워드 본킬의 머리 그림도 이와 유사한 사실주의를 보여준다.[9] <기도하는 남자와 세례자 성 요한의 초상>(월터스 미술관)도 유사한 특징이 드러난다. 당시 공개적인 강한 감정 표현은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휘호 판 데르 후스는 이 작품에서 가장 미묘한 표정을 사용하여 인물들의 정신 상태를 표현했다. <기도하는 남자와 세례자 성 요한의 초상>에서는 치켜 올라간 눈썹과 입 주변의 긴장된 근육으로 인물의 깊은 집중력을 미묘하게 암시한다.[14]

양식적 발전

[편집]

판 데르 후스는 가장 독창적이고 혁신적인 초기 네덜란드 예술가 중 한 명으로 간주된다. 판 데르 후스의 많은 작품이 소실되었고, 현존하는 대부분의 작품은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양식적 발전을 확실히 알기는 어렵다. 포르티나리 제단화는 예술가에게 확실하게 귀속시킬 수 있는 유일한 작품이다.

목자들의 경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사학자들은 판 데르 후스가 처음에는 반 에이크의 환영주의에 가까운 스타일로 시작하였다고 생각한다. 이 초기 스타일은 몬포르테 제단화와 포르티나리 중앙 패널에서 관찰할 수 있듯이 풍부한 색채와 단일 소실점 원근법을 통한 상세한 묘사를 특징으로 한다. 판 데르 후스는 이 스타일을 페트뤼스 크리스투스나 디르크 바오츠에게서 배웠을 수 있다.

이후의 작품들은 환영주의를 점차 포기하고 현실과 동떨어진 그림으로서의 인위성을 더욱 강조하였다. 이러한 효과는 사용하는 색상 범위를 제한하고 인물 및 공간의 표현을 왜곡함으로써 달성하였다.[2] 이 후기 스타일의 작품으로는 성모의 죽음 (흐루닝어 미술관, 브뤼헤)과 목자들의 경배 (1480 년경, 베를린 회화관)가 있다. 이 후기 작품들에 나타나는 다른 특징들로는 공간의 붕괴, 주제와 직접 관련되지 않은 정물 요소의 포기, 인물들의 과장된 격정과 과도한 표현 등이다. 초기 학자들은 이러한 진화를 예술가의 정신적 불안정성 증가와 관련 있다고 보았다. 후대의 해석에서는 예술가가 "디보티오 모데르나(현대 신앙)" 운동을 지지하는 것이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견해가 크게 힘을 얻었다.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판 데르 후스의 후기 그림들은 이 운동 사상을 시각 매체로 보여주려는 시도의 결과이다. 특히 이 운동에서는 명상을 강조했는데, 이것이 환영주의를 포기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15]

성 게오르기우스와 용

후기 작품인 목자들의 경배의 은은한 색채는 환영주의에서 벗어나는 양식적 진화의 증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근 복원된 '목자들의 경배'는 은은한 색채가 아니라 밝고 강하게 환영적이었다는 사실을 드러내어 이전의 해석과 모순된다.[16]

모든 학자들이 판 데르 후스 작품에 양식적 발전이 있었다는 데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일부는 그의 경력이 15년에 불과하여 발전을 구분하기에는 너무 짧다고 주장한다. 다른 학자들은 판 데르 후스를 같은 시기에, 심지어 단일한 작품 내에서도 매우 다른 유형과 스타일을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예술가로 간주한다. 이들은 또 판 데르 후스가 자신의 목적에 맞는 기술을 언제든지 사용하거나 버릴 수 있는 유연성과 범위를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한다.[2]

드로잉

[편집]

휘호 판 데르 후스는 수많은 드로잉을 남겼다. 추종자들은 이러한 드로잉이나 그림 자체를 사용해 수많은 사본을 제작하였다.[12] 판 데르 후스의 사망 후, 그의 조카딸과 결혼한 책 삽화가 알렉산더 베닝은 판 데르 후스의 드로잉과 패턴을 소유하게 되었을 것이다. 알렉산더 베닝의 아들인 시몬 베닝은 이 드로잉들을 나중에 브뤼허에 소개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판 데르 후스의 작품들이 헨트-브뤼허 화파가 제작한 시도서에 나타나기 때문이다.[1]

옥스포드의 크라이스트 처치 미술관에 보존된 야곱과 라헬 드로잉은 판 데르 후스의 희귀한 자필 드로잉으로 추정된다. 이 작품은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위한 예비 연구로 보인다.[17]

작품 목록

[편집]

내용주

[편집]
  1. Till-Holger Borchert, Hugo van der Goes at Flemish Primitives
  2. Catherine Reynolds. "Goes, Hugo van der." Grove Art Online. Oxford Art Online. Oxford University Press. Web. 19 May 2016
  3. J. Koldeweij, A. Hermesdorf, P. Huvenne, De schilderkunst der Lage Landen: De Middeleeuwen en de zestiende eeuw, Amsterdam University Press, 2006, p. 106-110 (네덜란드어)
  4. Stechow, Wolfgang (1989) [1966]. 《Northern Renaissance art, 1400-1600 : sources and documents》. Evanston, Ill.: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5–18쪽. ISBN 0-8101-0849-6. OCLC 20595214. 
  5. Koster, Margaret (1999). 《Hugo van der Goes's "Portinari Altarpiece": Northern invention and Florentine reception》. Columbia University. 
  6. Colin Thompson, Lorne Campbell, Hugo van der Goes and the Trinity panels in Edinburgh, Trustees of the National Galleries of Scotland; London : distributed by A. Zwemmer, 1974, p. 5
  7. Susan Koslow, "The Impact of Hugo van der Goes's Mental Illness and Late-Medieval Religious Attitudes on the Death of the Virgin", 보관됨 24 5월 2021 - 웨이백 머신 in Healing and History, Essays for George Rosen, ed. Charles E. Rosenberg (New York: Neale Watson Academic Publications, 1979), p. 27-50
  8. Campbell, Lorne. The Fifteenth-Century Netherlandish Paintings. London, National Gallery.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98. ISBN 0-300-07701-7, p. 240.
  9. Portrait of a Man at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10. Fleming, Alexander & Mason, Roger, eds., Scotland and the Flemish People (Birlinn: Edinburgh, 2019), p. 93
  11. Jill Harrison, 'Fresh Perspectives on Hugo van der Goes' Portrait of Margaret of Denmark and the Trinity Altarpiece', The Court Historian, 24:2 (2019), pp. 120-138
  12. Lorne Campbell, The Fifteenth Century Netherlandish Paintings National Gallery Company, p. 240
  13. Julia I. Miller, Miraculous Childbirth and the Portinari Altarpiece, The Art Bulletin, Vol. 77, No. 2 (June 1995), College Art Association, pp. 249–261
  14. Portrait of a Man at Prayer with Saint John the Baptist at the Walters Art Museum
  15. Bernhard Ridderbos, Hugo van der Goes's "Death of the Virgin" and the Modern Devotion: an analysis of a creative process, in: Oud Holland Vol. 120, No. 1/2 (2007), pp. 1–30, Published by: Brill
  16. Jessica Buskirk, "Hugo van der Goes's Adoration of the Shepherds: Between Ascetic Idealism and Urban Networks in Late Medieval Flanders", JHNA 6:1 (Winter 2014), DOI: 10.5092/jhna.2014.6.1.1
  17. Werner Schade, "The Meeting of Jacob and Rachel" by Hugo van der Goes: A Reappraisal, in: Master Drawings Vol. 29, No. 2 (Summer, 1991), pp. 187–193

외부 링크

[편집]
외부 동영상
Van der Goes's The Adoration of the Kings, 칸 아카데미스마트히스토리

틀:플랑드르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