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룬 구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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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룬 구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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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1619년
수도 개원
정치
공용어 여진어
정부 형태 군주제
만한
 ? ~ 1582년
1582년
1582년 ~ 1599년
1601년

왕타이
후르한
멍거불루
우르구다이

후룬 구룬(만주어: ᡥᡡᠯᡠ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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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ūlun Gurun, 한국 한자扈倫; 忽剌國 호륜국)은 하다, 우라, 예허, 호이파의 4 부족이 연맹의 가맹 부족이었다.

우라의 마지막 버이러(貝勒, Beile)인 부잔타이(布占泰, 만주어: ᠪᡠᠵᠠᠨᡨᠠᡳ Bujantai)의 후손 가문이 소장하고 있던《오랍합살호패륵후배당책(烏拉哈薩虎貝勒後輩檔冊)》에 따르면, 금나라 완안씨의 후손인 나치불우(納奇卜祿, 만주어: ᠨᠠᠴᡳᠪᡠᠯᡠ Nacibulu)는 조부 때부터 시버족에 의지하며 살았는데, 대대로 시버의 수완 구왈갸 씨족(蘇完瓜爾佳氏, 만주어: ᡤ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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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wan Gūwalgiya Hala)과 혼인관계를 형성했고, 나치불우는 시버로 부터 독립하여 후룬강(忽喇溫江, 만주어: ᡥᡡᠯᡠ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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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ūlun Ula)[1] 일대에 상당히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고, 그 초기국가를 후룬이라고 칭했다. 나치부루를 계승하여 후룬의 수장이 된 그의 아들 도르호치(多爾和齊, 만주어: Dorhoci)는 주인(主人)을 의미하는 여진어 샹얀(Šanggiyan, 商堅)을 호칭으로 사용했으며, 1,000여 리에 달하는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며 후룬을 경영했고, 그 영역 내의 올자위(兀者衛), 구한하위(嘔罕河衛), 비하위(肥河衛), 불제위(弗提衛), 탑로목위(塔魯木衛) 등을 포괄하는 연맹의 수장이자 호륜국왕이라 기록되어 있다. 그렇게 강력한 국가가 명이나 조선 측의 기록에 부재한 것으로 보아, 이 가전기록은 과장이 섞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만주실록》 등의 청대 기록에서 이 시기의 '후룬 구룬'이라고 표현했고, 그가 주위의 많은 해서여진 부족들에 영향력을 미칠 정도로 상당한 세력을 구축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도르호치가 사망한 후에는 그의 장남 갸마카(嘉瑪喀, 만주어: Giyamaka)가 지위를 계승했다.[2] 1444년 명에 의해 올자전위(兀者前衛)의 지휘(指揮)에 임명되었다. 갸마카가 사망한 후에는 그의 아들 둘기(都爾機,만주어: Dulgi)가 훨운의 수장 지위를 계승했다.[3] 둘기는 성화연간(1464-1487)에 명나라에 의해 올자전위도독(兀者前衛都督)에 임명되었다. 갸마카와 그의 아들 둘기 시대에 후룬은 급속히 쇠퇴했다. 그 가장 큰 원인은 몽골의 침입 때문이었다.

15세기 초기부터 눈강 유역에서 거주하던 몽골 우량카이로부터 지속적인 공격을 받았다. 이후 1430년대 초기에 서몽골에서 오이라트가 급팽창하면서 동몽골의 아수트부의 아루타이(?-1434)를 공격했고, 아수트부는 동쪽으로 훨운강 유역의 해서여진을 공격했다.

아루타이의 침입 이후에도 해서여진에 대한 몽골의 침략은 지속되었다. 1430년대 중기부터 1440년대 중기까지 오지예트, 옹리우드, 우랑카이로 구성된 산천의 6천 오지예트(Ölge-in jirγuγan mingγan Üjiyed)[4][5]는 지속적으로 해서여진을 공격했다. 이들은 1447년, 오이라트에게 참패를 당하고 세력이 위축되었지만, 그 후에도 몽골의 다른 집단들이 해서여진을 공격했다. 1450년부터 1451년까지 오이라트 에센 타이시가 세운 허수아비 대칸 타이손 칸은 해서여진을 공격했고, 이때 해서여진은 물론, 야인여진의 니미차인의 추장들까지 수많은 추장들이 피살되었다. 해서여진은 여러 부류의 몽골에 의해 공격을 당할 때마 부족 연맹을 강화해서 방어했고, 한편으로는 공격을 피하기 위해 서남쪽으로 이동했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며, 15세기 후기부터 둘기가 이끄는 훨운은 세력이 위축되었고, 거주지역도 훨운강 유역을 떠나 송화강 만곡부 지역으로 이동했다.

16세기 초기부터는 둘기의 동생인 수허터(速黑忒, 만주어: Suhete)가 이끄는 탑산전위의 세력이 강성해졌다. 1502년, 타이손 칸의 공격으로 붕괴된 불랄출의 탑산좌위 잔여세력을 흡수하여 새로운 강력한 세력을 현성하던 수허터는 명에 입조하여 탑산전위도독에 임명되었고, 후룬의 적통인 둘기의 세력을 압도했다.

수허터는 송화강 북부와 그 상류역의 부족들과 명나라의 교역로를 장악했다. 흑룡강 유역과 훠르하강(만주어: Hūrha Ula) 유역에 거주하는 부족들은 명의 개원에서 열리는 시장에 가기 의해사는 반드시 수허터의 영역을 지나야 했고, 수허터는 교역로를 통제하여 이익을 획득했다. 명나라는 교역로의 통제권자에게 여진족의 변경 침입 및 가축 약탈 행위를 통제해줄 것을 요구했고, 수허터는 그 요구에 부흥함으로서 명의 신뢰와 교역로 통제권자 자격을 획득한 것이었다.

1493년, 둘기가 사망한 후 후룬의 명목상 수장 지위는 그의 3남 구터이 주얀(만주어: Gutei Juyan)에게 계승되었다. 그러나 둘기와 마찬가지로 구터이 주얀의 세력은 삼촌인 수허터의 세력에 미치지 못했다. 이런 상황은 수허터가 사망한 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수허터가 사망한 후에 탑산전위의 수장 지위는 수허터의 동생 수이툰(綏屯, 만주어: Suitun)의 아들인 커시너(克錫納, 만주어: Kesine)에게로 이어졌다.[6] 1531년 커시너는 개원(開原)의 변외에서 준동하던 산적 맹극(猛克)의 세력을 진압했다. 맹극은 개원 동쪽에서 명과 여진 부족민의 교역을 차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문제를 해결한 커시너에게 명나라는 하사품을 내리고 그를 우대했다. 구터이 주얀은 사촌 커시너의 명성과 세력의 하위에 있었다.

1533년, 후룬에 일대 격변이 발생했다. 커시너의 독주에 불만을 품은 그의 당숙 바다이 다르한(巴岱達爾漢, 만주어: Badai Darhan)이 커시너와 그의 장남 처처무(徹徹木, 만주어: Cecemu)를 살해한 것이다. 정변에 성공한 바다이 다르한은 탑산전위의 도독을 자임했으나, 내부적으로 사람들이 그를 따르지 않았고, 외부의 명나라는 교역을 중단시켰다. 1534년 구터이 주얀은 군사를 동원하여 바다이 다르한을 공격했고, 다르한은 1년만에 몰락한 뒤 피살되었다. 이런 혼란은 후룬의 상층 인물들의 다수가 피살되거나 외부로 도주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정권 지형이 바뀌고 하다를 설립하는 원인이 되었다. 구터이 주얀의 세력은 길림성 우라갸(烏拉街) 일대로 이동했다.[7]

왕타이(王台, ? ~ 1582년)가 요동에서 개원 동부에 이르는 지역에 살던 해서여진인들을 통합하여 하다를 설립했다. [8]

후룬인들은 인종적으로는 여진 계통이지만 문화와 언어 면에서 몽골의 영향을 적잖이 받았는데, 예허의 시조 싱건 다르한은 몽골 튀메드(Tümed, 만주어: ᡨ᠋ᡠ᠋ᠮᡝᡨ Tumet)의 귀족이었고, 서쪽 옆에 접하는 몽골의 코르친하르친부와 통혼하여, 혼혈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르가치의 건주여진은 후룬을 몽골과 가까운 계통으로 보기도하였다.[9]

후룬의 왕타이는 만한(萬汗)을 칭했으며 여진과 몽골의 지도자들은 물론 명나라요동총병 이성량과도 밀접한 정치적 경제적 관계를 맺었다.[8]

건주여진의 추장 누르가치는 왕타이의 사위이다(몽골와 여진의 부족들은 서로 통환이 많았기 때문에 지도자들이 서로 사돈관계인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8] 파멜라 카일 크로슬리는 왕타이와 그의 훨운국이 누르기치가 후금을 세우는 데 롤모델로 작용했을 것이라 본다.[8] 누르가치는 나중에 해서여진을 멸망시키고 여진을 만주라 개칭하였다. 왕타이와 누르가치가 모두 죽은 뒤인 먼 미래 청 제국의 역사가들은 왕타이를 "만주"의 초기 지도자들 중 하나로 취급했다.[8]

16세기가 흐르면서 누르가치는 점차 패권적 팽창을 시작했다. 때로는 누르가치가 임명한 추장이 반기를 들고 독립하는 경우도 있었다. 우라의 부잔타이가 그러한 예이다. 결국 후룬 연맹은 모두 누르가치의 건주여진에 흡수되었다. 복속된 시기는 하다가 1601년[10], 호이파가 1607년, 우라가 1613년, 예허가 1619년이었다.[11][12]

[편집]

  1. 흑룡강성에 흐르고 있는 호란강(呼蘭河, 만주어: ᡥᡡᠯᠠ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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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ūlan Ula)의 고명이다.
  2. 갸마카는《대명영종예황제실록(大明英宗睿皇帝實錄)》 정통 8년 정월 계미조에 기록에 가목합(加木哈)이라고 기록된 인물이다.
  3. 《대명헌종순황제(大明憲宗純皇帝實錄)》성화 16년 2월 갑술조에 도리길(都里吉)이라고 기록된 인물이다.
  4. 이훈,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2018, 우량카이 3위란 복여위(福餘衛: Ojiyed, 烏齊葉特), 태녕위(泰寧衛: Onglighud, 翁牛特]), 타안위(朵顏衛: Uriyangkhan, 兀良哈])를 가리킨다. 명에서는 명과 가장 가까운 남쪽의 우량칸의 이름을 따라 3위를 ‘우량카이 3위’(兀良哈三衛)라고 불렀지만, 몽골에서는 자신들에 가장 가까운 북쪽 오지예트의 이름을 따라 山前의 6천 오지예트(Ölge-in jirγuγan mingγan Üjiyed)라고 불렀다.
  5. 阿勒坦汗傳 68절, 內蒙古人民出版社, 1990, 몽골 사료에서는 이들을 대흥안령의 남쪽에 있는 만호(萬戶)라는 의미인 위르 투멘(Ölu : Ölge, Tümën, 山陽萬戶)이라고 불렀다.
  6. 커시너는 수허터에게 발급된 명의 칙서(勅書)를 가지고 명나라에 입조했기 때문에 명의 기록에서 커시너를 수허터로 기록했고, 이런 원인으로 현재 많은 연구에서 수허터를 커시너와 동일인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류이다. 커시너는 수허터의 조카였다.
  7.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2018, 68~79쪽, ISBN 9788994606514 
  8. Crossley, Pamela Kyle (2002), 《A Translucent Mirror: History and Identity in Qing Imperial Ideolog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39–40쪽, ISBN 0-520-23424-3 
  9. Crossley, Pamela Kyle; Siu, Helen F.; Sutton, Donald S. (2006), 《Empire at the margins: culture, ethnicity, and frontier in early modern China》, Studies on China 28,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65쪽, ISBN 0-520-23015-9 
  10. 《태조무황제실록(太祖武皇帝實錄)》2 권에 따르면, 기해년(己亥年, 1599년), 하다국(哈達國)의 멍거부루(孟革卜鹵)가 예허(夜黑國)의 나림부루(納林卜祿)와 적대관계가 되자 태조에게 아들 셋을 인질로 주고 지원군을 요청하였다. 이에 태조는 피옹돈(非英凍)과 까까이(剛蓋)에게 병력 2천을 주어 구원하게 한다. 이 소식을 들은 나림부루(納林卜祿)는 명의 중재하에 하다국에 혼인동맹을 요구하며, 만주의 구원군을 몰살하고 그 장수를 사로잡아 만주에 있는 인질과 교환하라고 제안한다. 결국 하다국과 예허국이 동맹을 맺자 분노한 태조는 슈르가치(黍兒哈奇) 버이러(貝勒)을 선봉으로 세워 9월 7일에 하다국을 멸망시켰다고 한다.
  11. Crossley, Pamela Kyle (2002), 《The Manchus》, Peoples of Asia 14 3판, Wiley-Blackwell, 62, 64쪽, ISBN 0-631-23591-4 
  12. Fairbank, John K.; Twitchett, Denis Crispin (2002), 〈Part 1〉,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9, Cambridge University Press, 30쪽, ISBN 0-521-2433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