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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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재만
(黃在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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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정보
로마자 표기 Hwang Jae-Man
출생일 1953년 1월 24일(1953-01-24)
출생지 대한민국 경기도 화성군
사망일 2010년 5월 28일(2010-05-28) (57세)
사망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172cm
포지션 감독 (과거 수비수 / 미드필더)
청소년 클럽 기록



1971-1974
수원북중학교
중동중학교
중동고등학교
고려대학교
클럽 기록*
연도 클럽 출전 ()
1975-1976
1977-1979
1980-1984
서울신탁은행 축구단
공군 축구단
할렐루야 축구단


001 00(0)
국가대표팀 기록
1971-1972
1972-1979
대한민국 U-20
대한민국

098 00(2)
지도자 기록


1993
할렐루야 축구단 (코치)
할렐루야 축구단
한국실업축구연맹 (이사)
* 클럽의 출장수와 골은 정규 리그 기록만 센다. 또한 출장수와 골은 2003년 1월 1일 기준이다.
‡ 국가대표팀의 출장수와 골은 2003년 1월 1일 기준이다.

황재만(黃在萬, 1953년 1월 24일 ~ 2010년 5월 28일)은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이자 축구 감독이며, 포지션은 왼쪽 풀백미드필더였다. 선수 시절 롱스로인의 대명사로 알려져있으며,[1] 강력한 킥을 바탕으로 한 중거리슛으로 여러 차례 득점을 만들기도 했다.[2] 또한 강력한 대인마크를 이용한 단단한 수비력을 선보였으며, 황혼기 이후로는 클럽과 국가대표팀의 주장을 맡으며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선수 경력[편집]

클럽[편집]

경기도 화성군 안룡면 오목천리(현재의 경기도 수원시 오목천동) 출신으로[3][4] 수원북중학교, 중동중학교, 중동고등학교를 거쳤으며,[5] 1971년 고려대학교에 입학하였다.[6] 이후 1974년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서 여러 차례 공격 포인트를 기록해 팀의 대회 우승에 크게 기여하였고,[7][8][9] 활약을 인정받아 대회 감투상을 수상하였다.[10] 그 뒤 1975년 한국신탁은행 축구단에 입단하였고,[11] 1976년 팀이 서울은행 축구단과 합병해 서울신탁은행 축구단으로 개편된 이후 팀의 원년 멤버가 되었다.[12] 또한 당초에는 1975년 육군 축구단에 입대할 예정이었으나,[13] 예정이 변경되어 1976년 공군 축구단에 입대하게 되었다.[14]

이후 1978년 세미프로 팀으로 창단 준비 중이던 현대 축구단으로의 이적설이 나왔으나 무산되었으며,[15] 1979년 군실업 올스타의 일원으로 올스타전에 출전하였다.[16] 또한 같은 해 열린 고연 OB 올스타전에 출전했으며,[17][18] 그 해 공군에서 제대해 서울신탁은행으로 복귀하였다. 그 뒤 1980년 새로 창단 준비중인 할렐루야 축구단에 입단하기로 합의했으며,[19] 1979년 9월 23일 할렐루야의 일원으로 브라질비토리아 FC와의 자선 경기에 출전해 팀의 3-0 승리에 일조하였다.[20] 이후 1980년 할렐루야와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와의 자선경기에 나섰고, 패널티킥 기회를 얻었으나 실축해 팀의 0-2 패배를 막지 못했다.[21]

그 뒤 북미 사커 리그로의 이적설이 제기되었으나 실제 이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으며,[22] 1980년 12월 20일 할렐루야 축구단이 정식으로 창단하자 원년 멤버로 합류하였다.[23][24] 이후 1981년 3월 28일 아메리카누 FC와 창단 첫 데뷔전에서 활약하며 팀의 2-1 승리에 기여했으며,[25] 1982년 4월 22일 대한민국 국가대표팀과의 경기에 뛰었으나 팀은 1-2로 패배했다.[26][27] 그 뒤 팀의 주장이던 이영무가 팀을 무단으로 이탈하자 그 뒤를 이어서 주장을 이어받았으며,[28] 6월 6일 오페라리우 FC와의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경기에서 후반 종료 직전 롱스로인으로 오석재의 동점골을 어시스트하며 극적인 무승부를 이루었다.[29] 대회 4강에서 다시 한 번 대한민국 국가대표팀과 맞붙었으나 또다시 1-2로 패해 결승 진출에는 실패했으며,[30][31] 그 해 11월 4일 팀의 트레이너로 보직을 변경하였다.[32]

이후 1983년 수퍼리그가 창설되자 할렐루야도 참가하였으나 선수 부족 문제로 인해 당시 코치였던 황재만이 후보 선수로 등록되었고,[33] 그 해 11월 열린 올스타전에서 프로팀 코치를 맡았다.[34] 1984년에도 마찬가지로 팀의 부상자가 늘어남에 따라 코치 신분임에도 후보 선수로 등록되었고,[35] 시즌 도중 1경기 출장 기록을 세웠다.[36]

국가대표팀[편집]

1971년 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대한민국 U-20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참가했으며,[37] 일본과의 준결승전에서 팀의 마지막 승부차기 키커로 나서 성공시키며 팀의 준우승을 이끌었다.[38] 이후 1972년 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 다시 출전했으며, 좋은 모습을 보이며 팀의 2회 연속 준우승에 기여하였다.[39][40]

그 뒤 1972년 AFC 아시안컵에도 선발되었으며,[41] 5월 7일 이라크와의 그룹 결정전에 출전하여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정식으로 데뷔했으나, 황재만은 승부차기에서 실축하였고 팀은 승부차기 결과 2-4로 패배하였다.[42] 하지만 결승까지 주전 선수로 활약해 팀의 준우승에 일조했으며, 같은 해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에도 선발되어 핵심 선수로 좋은 모습을 보이며 팀의 우승에 공헌하였다.[43] 또한 같은 해 열린 제1회 한일 정기전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에도 참가했으나,[44][45] 두 대회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였고 국가대표팀 또한 좋은 성과를 내지 못했다.[46][47] 하지만 오스트레일리아와의 친선경기에서 다시 기회를 얻었으며,[48] 킹스컵에도 출전해 대표팀의 부진에도 불구하고 좋은 평가를 받았다.[49][50] 이러한 활약으로 1972년 대한축구협회 시상식에서 베스트 11에 선정되었다.[51]

이후 1973년 6월 개최된 자카르타 창립 기념대회 당시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었으나,[52] 좋지 못한 활약을 보였고 국가대표팀 또한 우승에 실패하였다.[53] 결국 그 해 7월 국가대표팀 선수단 개편으로 국가대표팀 선발 명단에서 제외되었고,[54] 한동안 국가대표팀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그 뒤 1974년 아시안 게임 및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을 대비해 소집된 상비군 명단에 포함되었으며,[55] 자체 평가전에서 결승골을 득점하는 등 좋은 활약을 선보이며 최종 명단에 합류해 국가대표팀에 복귀하였다.[56][57] 같은 해 열린 미들섹스 원더러스 AFC와의 평가전에서 차범근의 동점골을 어시스트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였으나,[58] 쿠웨이트와의 아시안 게임 조별 라운드 3차전에 출전해 부진한 활약으로 팀의 대패에 일부분을 담당하며 추가적인 기회를 얻지 못했다.[59] 얼마 뒤 열린 제3회 한일 정기전에는 고연전 출전으로 불참하였다.[60] 같은 해 개최된 킹스컵에 참가하였고,[61] 말레이시아와의 준결승전에서 승부차기 키커로 나서 성공시키고 태국과의 결승전에서 롱스로인으로 팀의 결승골에 관여해 팀의 2연속 우승에 기여하였다.[62][63] 국가대표팀 및 소속팀에서의 활약으로 1974년 대한축구협회 시상식에서 베스트 11에 재차 선정되었다.[64]

이후 1975년에는 1976년 AFC 아시안컵 예선에 출전할 상비군 명단에 포함되었으며,[65] 베트남 공화국과의 경기에서 결승골을 성공시키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66] 같은 해 열린 테니스 보루시아 베를린과의 2차 평가전에서 팀의 동점골에 관여하는 등 인상적인 활약을 보였고,[67] 3번에 걸친 평가전 이후 좋은 평가를 받았다.[68] 그 해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에 연달아 참가하며 국가대표팀의 2개 대회 우승을 견인했으며,[69][70]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 우승 이후 다른 대표팀 선수들과 함께 체육훈장 기린장을 수여받았다.[71] 또한 킹스컵 및 1976년 하계 올림픽 예선에도 출전했으며,[72] 킹스컵에서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 팀의 우승에 일조했다.[73] 이러한 활약으로 1975년 대한축구협회 시상식에서 통산 3회 베스트 11에 선정되었다.[74]

그 뒤 1976년 호마 FC와의 평가전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였으며,[75] 이어 개최된 육군 축구단과의 평가전에서도 선제골을 득점하며 좋은 활약을 펼쳤다.[76] 하지만 이 경기에서 코뼈가 부러지는 큰 부상을 입었고,[77] 직후 열린 중화 타이베이와의 1976년 하계 올림픽 예선 경기에 불참하였다.[78] 같은 해 있었던 맨체스터 시티 FC와의 2차 평가전에 출전했으며,[79] 직후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에 참가하였다.[80] 또한 박대통령컵 쟁탈 국제축구대회에 화랑팀 소속으로 포함되었고,[81] 인도와의 경기에서 이영무의 선제골을 어시스트하는 등 대회 우승에 공헌하였다.[82] 그 해 열린 제5회 한일 정기전에 나와 결승골을 득점하며 팀의 승리를 이끌었으며,[83][84] 킹스컵에도 출전해 싱가포르와의 경기에서 팀의 결승골에 관여하는 등 좋은 활약을 보였으나 국가대표팀은 결승 진출에 실패하였다.[85] 이러한 활약으로 1976년 대한축구협회 시상식에서 통산 4회 베스트 11에 선정되었다.[86]

이후 1977년에는 1978년 FIFA 월드컵 예선 명단에 포함되었으며,[87] 이스라엘과의 홈 & 원정 1라운드 경기에서 안정적인 활약을 선보였다.[88][89] 또한 일본과의 홈 & 원정 1라운드 경기 및 이란과의 최종 예선 홈 경기 등에 출전했으나, 오스트레일리아와의 원정 경기를 앞두고 허벅지 부상으로 인해 출전하지 못했고 팀도 패했다.[90][91] 곧이어 열린 쿠웨이트와의 홈 경기에서도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했으며,[92] 부상이 완치된 뒤 이란과의 원정 경기에 출전했으나 수비 상황에서 오심 논란에 휘말리며 팀의 패배를 막지 못했다.[93]

그 뒤 1978년에는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에 참가해 국가대표팀의 우승에 기여했으며,[94] 박대통령컵 쟁탈 국제축구대회에도 출전했으나 부상으로 인해 준결승 이후부터는 출전하지 못했다.[95] 또한 스포르팅 크리스탈과의 평가전에 나와 패널티킥 선제골을 득점하며 팀의 승리를 이끌었으며,[96] 1978년 아시안 게임 최종 명단에 포함되어 국가대표팀의 우승을 이끌었다.[97] 이러한 활약으로 1978년 대한축구협회 시상식에서 통산 5회 베스트 11에 선정되었다.[98]

이후 1979년 제7회 한일 정기전에 출전했으나, 팀은 1-2로 패했다.[99] 얼마 뒤 발표된 국가대표팀 예비명단에 포함되었으나,[100] 스포르팅 크리스탈과의 평가전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며 국가대표 B팀으로 이동하였다.[101][102] 이후에는 국가대표 B팀에서 활동하며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에 주장으로 참가하였고,[103][104] 대표팀의 공동 우승에 일조하였다.[105] 또한 멕시코에서 열린 유니버시아드에 나섰고,[106][107] 쿠웨이트와의 경기에서 김익형의 추가골을 어시스트하는 등의 활약을 펼쳤으나 팀은 결선 진출에 실패하였다.[108]

지도자 경력[편집]

1984년을 마지막으로 선수 생활을 정리하고 본격적으로 할렐루야 축구단의 코치로 활동했으며, 1988년 팀의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우승을 견인하였다.[109] 이후 팀의 감독이 되어 1991년 팀의 전국체육대회군-실업 축구대회 2관왕을 달성했으며, 군-실업 축구대회 지도자 감독상을 수상하였다.[110] 그 뒤 1992년 팀의 군-실업 축구대회 2연패를 이끌었으며, 다시 한 번 지도자 감독상을 수상하였다.[111] 이후 1993년 한국실업축구연맹의 이사로 선임되었고,[112] 같은 해 팀에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춘계대회 우승을 안겼으며, 지도자 감독상을 수상하였다.[113]

그 뒤 1993년 신현호에게 감독 자리를 넘겨주었으며, 황재만 본인은 총감독이 되었다.[114] 이후 1998년 외환 위기로 인해 팀이 해체되자 축구계를 떠났으며, 2004년부터 한국 휠체어 럭비 협회의 회장을 맡았다.[115]

투병 및 사망[편집]

1986년 멕시코에 다녀온 이후 신경계통 질환인 척수염을 앓았으며,[116] 이후에는 지도자 생활과 병행하며 서울특별시 신촌동세브란스병원에서 재활에 매진하였다. 2000년 고려대학교 고우체육회 주최로 열린 '2000 고대 체육인의 날'에서 황재만을 위해 모금 운동을 벌였으며,[117] 2006년 중동중학교중동고등학교 개교 100주년을 맞이해 총동문회에서 황재만에게 '의지의 중동인상'을 수여하였다.[118] 또한 2008년에는 조동현, 박병철 등 1971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축구 선수들의 모임인 '71 동심회'에서 회비를 모아 성금을 전달하였다.[119]

2010년 7월 28일 척수신경마비가 악화되어 세상을 떠났으며, 유해는 경기도 화성시 병점의 선영에 안장되었다.[120]

기타[편집]

1976년 3월 27일 일본과의 1976년 하계 올림픽 축구 예선 경기에서 만 23세 65일의 나이로 A매치 50회를 달성해 역대 2위를 기록하였다.[121]

1983년 3월 30일 재일교포 출신의 배우자와 결혼식을 올렸으며,[122] 차남인 황대균 또한 축구 선수이다.

2003년 베스트일레븐 창간 33주년을 기념해 선정한 '한국축구 100년을 빛낸 55인' 중 '70년대 베스트11'에 포함되었다.[123]

차범근과는 고향이 인접하고 연령이 비슷하며 고려대학교, 서울신탁은행 축구단, 공군 축구단,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한솥밥을 먹으며 인연을 쌓았으며, 차범근이 아이스 버킷 챌린지를 수행할 당시 당시 황재만을 떠올렸다고 밝히기도 했다.[124]

선수 기록[편집]

클럽[편집]

국가대표팀[편집]

국가대표팀 득점 기록[편집]

# 일시 장소 상대 국가 득점 결과 경기 형식
1 1975년 3월 19일 태국 태국, 방콕 베트남 공화국 베트남 공화국 1-0 1-0 1976년 AFC 아시안컵 예선
2 1976년 12월 4일 일본의 기 일본, 도쿄도 일본 일본 2-1 2-1 제5회 한일 정기전

수상 경력[편집]

클럽[편집]

국가대표팀[편집]

감독[편집]

개인[편집]

각주[편집]

  1. “大統領杯(대통령배)축구 二次戰(이차전)첫날 大學(대학)팀,軍(군)팀 모두完破(완파)”. 동아일보. 1973년 7월 11일. 
  2. “高大(고대),海軍(해군)꺾고 決勝(결승)토너 진출”. 경향신문. 1974년 3월 6일. 
  3. “차붐의 신화 ⑤”. 조이뉴스24. 2005년 9월 15일. 
  4. ““휠체어 위 작아진 몸, 희망을 키워가요””. 문화일보. 2005년 11월 12일. 
  5. “頂上(정상) 을향한 21強豪(강호)의 격돌 대통령 金盃(김배)는 어디로 (上(상))”. 경향신문. 1970년 5월 21일. 
  6. “高(고)·延大(연대)체육 特技者(특기자)각각30명씩 스카웃”. 동아일보. 1971년 2월 2일. 
  7. “전국蹴球(축구)선수권 高大(고대),自保(자보) 꺾어 3대0”. 동아일보. 1974년 11월 14일. 
  8. “전국蹴球(축구) 準決(준결)리그 大學勢(대학세) 단연頭角(두각)”. 경향신문. 1974년 11월 27일. 
  9. “全國(전국)축구選手權(선수권) 高(고)·延大(연대) 決勝(결승)서 숙명의 再對決(재대결)”. 동아일보. 1974년 11월 29일. 
  10. “핸들링PK宣言(선언)에 不服退場(불복퇴장) 延世棄權敗高大(연세기권패고대)우승”. 동아일보. 1974년 12월 2일. 
  11. “올蹴球界(축구계) 스카우트現況(현황) 高校(고교)노른자위는 大學(대학)에 實業(실업)은 大學卒業(대학졸업)선수를”. 동아일보. 1974년 12월 5일. 
  12. “「서울託銀蹴球(탁은축구)」發足(발족)”. 동아일보. 1976년 8월 31일. 
  13. “陸軍(육군)축구팀,選手(선수) 크게交朁(교체) 黄在萬(황재만)등 스카웃”. 경향신문. 1975년 11월 25일. 
  14. “黃在萬選手(황재만선수) 空軍(공군)에入隊(입대)”. 동아일보. 1976년 11월 8일. 
  15. "1億(억)들여 車範根(차범근)을 잡아라". 경향신문. 1976년 11월 16일. 
  16. “軍實業(군실업)·金融團(금융단) 올스타蹴球(축구) 選手(선수)32명을 선발”. 경향신문. 1979년 4월 25일. 
  17. “延(연)·高(고)OB올스타戰(전) 앞으로 3일 永遠(영원)한맞수 축구半世紀(반세기) 결산”. 경향신문. 1979년 6월 14일. 
  18. “친선축구 고대올스타 연세꺾어”. 동아일보. 1979년 6월 18일. 
  19. “국내 최초의「축구宣教(선교)」”. 동아일보. 1979년 9월 15일. 
  20. “할렐루야 축구팀 브라질 자선競技(경기)”. 경향신문. 1979년 9월 22일. 
  21. “韓獨(한독)축구 告別戰(고별전) 프랑크푸르트 4戰全勝(전전승) 할렐루야도 敗北(패배)2대0”. 경향신문. 1980년 6월 18일. 
  22. “朴商寅(박상인),北美(북미)축구 진출교섭”. 동아일보. 1980년 6월 21일. 
  23. “創團(창단)앞둔 프로蹴球(축구)「할렐루야」猛訓(맹훈)”. 경향신문. 1980년 12월 18일. 
  24. “할렐루야팀 創團(창단)”. 동아일보. 1980년 12월 20일. 
  25. “할렐루야,創團(창단)1百餘日(백여일)만에 데뷔戰(전)”. 경향신문. 1981년 3월 26일. 
  26. “아마축구頂上(정상)과 프로의 첫對決(대결) 國家(국가)재표·할렐루야 내일한판”. 동아일보. 1982년 4월 21일. 
  27. “킹스컵蹴球(축구)파견 환송評價戰(평가전) 「代表(대표)」는 역시 강했다”. 경향신문. 1982년 4월 23일. 
  28. “할렐루야 프로축구 陣痛(진통)계속 올競技(경기) 모두취소”. 경향신문. 1982년 5월 4일. 
  29. “치열한 攻防戰(공방전)…극적 無勝負(무승부)”. 경향신문. 1982년 6월 7일. 
  30. “한국축구 最强者(최강자)는 누구냐 代表(대표)팀·할렐루야 必死(필사)의 한판”. 동아일보. 1982년 6월 15일. 
  31. “대통령杯(배) 국제축구”. 동아일보. 1982년 6월 17일. 
  32. “吳錫載(오석재)등 6명補强(보강) 프로蹴球(축구) 할렐루야”. 경향신문. 1982년 11월 4일. 
  33. “축구슈퍼리그 돛폭에 바람이 실렸다 競技(경기)도 관중도 수준급”. 동아일보. 1983년 7월 4일. 
  34. “축구 슈퍼 올스타전 來(내)4,5일 서울運(운)서”. 동아일보. 1983년 10월 25일. 
  35. “할렐루야「구원의 使徒(사도)」는 어디에…치욕에 몸서리 친 90分(분)”. 동아일보. 1984년 6월 18일. 
  36. “출범 2년 슈퍼리그 선수가 없다”. 매일경제. 1984년 10월 2일. 
  37. “아시아青少年(청소년) 蹴球(축구)출전 代表選手(대표선수) 18명선발”. 동아일보. 1971년 3월 12일. 
  38. “韓國(한국),日本(일본)꺾어 決勝(결승)진출亞州(아주)청소년蹴球(축구)”. 동아일보. 1971년 5월 4일. 
  39. “14회 亞州青少年(아주청소년)축구 파견 代表(대표)선수 18명選抜(선발)”. 동아일보. 1972년 3월 9일. 
  40. “아시아 靑少年蹴球(청소년축구)대회 韓國(한국),이스라엘과 決勝(결승)”. 경향신문. 1972년 4월 29일. 
  41. “亞州蹴球(아주축구)대표팀 방콕으로”. 동아일보. 1972년 5월 5일. 
  42. “亞州(아주)축구組編成戰(조편성전) 韓國(한국),이락에 惜敗(석패) 4對(대)2”. 동아일보. 1972년 5월 8일. 
  43. “「自信(자신)」을 되찾게한「설욕」메르데카蹴球覇權(축구패권)의 意味(의미)”. 동아일보. 1972년 8월 1일. 
  44. “제一(일)회 韓日(한일)축구 定期戰(정기전) 韓國代表(한국대표)팀日(일)과비겨”. 동아일보. 1972년 9월 15일. 
  45. “朴大統領(박대통령)컵 蹴球(축구)출전 韓國(한국)대표팀 結團(결단)”. 동아일보. 1972년 9월 20일. 
  46. “各國戦力(각국전력) 평가”. 경향신문. 1972년 9월 19일. 
  47. “2회 朴(박)컵蹴球(축구) 決算(결산)”. 동아일보. 1972년 10월 2일. 
  48. “韓國蹴球(한국축구),豪(호)에 零敗(영패)”. 동아일보. 1972년 10월 25일. 
  49. “常備軍(상비군)주축 青少年(청소년)팀 6명뽑아 킹스컵蹴球(축구) 참가選手團(선수단) 구성”. 동아일보. 1972년 10월 28일. 
  50. “韓國蹴球(한국축구) 어디까지 왔나 (下(하))”. 경향신문. 1972년 11월 30일. 
  51. “體育記者團(체육기자단)「베스트11」뽑아 朴利天(박이천) 올해 蹴球最優秀(축구최우수)선수”. 동아일보. 1972년 12월 28일. 
  52. “자카르타蹴球(축구)대표確定(확정)”. 동아일보. 1973년 5월 21일. 
  53. “韓國(한국),말聯(연)과비겨 ○대○ 자카르타蹴球(축구) 우승권서脫落(탈락)”. 동아일보. 1973년 6월 18일. 
  54. “월드컵蹴球(축구)팀 一部(일부)개편”. 동아일보. 1973년 7월 24일. 
  55. “李會澤(이회택)포함·高在旭(고재욱)보류 축구常備軍(상비군) 후보 選抜(선발)”. 동아일보. 1974년 3월 21일. 
  56. “축구常備軍(상비군)평가전 黃在萬(황재만) 결승㸃(점)”. 동아일보. 1974년 3월 25일. 
  57. “蹴球(축구)대표선수 17명確定(확정)”. 동아일보. 1974년 3월 28일. 
  58. “車範根(차범근) 통쾌한 롱슛 代表(대표)팀·미들섹스 2次戰(차전)선 1對(대)1”. 경향신문. 1974년 6월 18일. 
  59. “어처구니없는韓國(한국)축구”. 경향신문. 1974년 9월 7일. 
  60. “치욕의 韓國蹴球(한국축구)”. 경향신문. 1974년 9월 30일. 
  61. “蹴協(축협) 韓國(한국),킹스컵蹴球(축구) 참가”. 동아일보. 1974년 11월 9일. 
  62. “韓國(한국),勝負(승부)킥勝(승)으로 決勝(결승)올라 말聯(연)과 일대白兵戰(백병전)”. 동아일보. 1974년 12월 19일. 
  63. “킹스컵蹴球(축구) 韓國(한국),泰國(태국)꺾어 2連霸(연패)”. 동아일보. 1974년 12월 21일. 
  64. “최우수 卞鎬瑛(변호영)선정 大韓(대한)체육記者團(기자단)”. 동아일보. 1974년 12월 24일. 
  65. “大學選手(대학선수)대폭起用(기용)”. 동아일보. 1975년 2월 27일. 
  66. “아시언컵蹴球(축구)예선 越南(월남) 1對(대)0격파”. 동아일보. 1975년 3월 20일. 
  67. “代表(대표)팀, 新人(신인)들 큰活躍(활약)”. 경향신문. 1975년 4월 28일. 
  68. “韓國蹴球(한국축구)앞날 어둡지 않다”. 동아일보. 1975년 4월 30일. 
  69. “박스컵蹴球(축구) 대표단 亞洲(아주)컵選手(선수) 그대로”. 동아일보. 1975년 4월 3일. 
  70. “車範根(차범근)등 17명확정”. 동아일보. 1975년 7월 5일. 
  71. “高台鎭(고태진) 前蹴協會長(전축협회장)등 25名(명)에勲章授與(훈장수여)”. 동아일보. 1975년 11월 18일. 
  72. “올림픽예선·킹스컵축구 出戰(출전) 選手團(선수단) 25명出發(출발)”. 경향신문. 1975년 12월 12일. 
  73. “버어마制壓(제압) 3連覇(연패) 킹스컵蹴球(축구)”. 동아일보. 1976년 1월 5일. 
  74. “최우수 축구선수 金鎬坤(김호곤) 선정 體育記者團(체육기자단)”. 경향신문. 1976년 1월 28일. 
  75. “韓(한)·이란축구 水中戰(수중전)서 불뿜은鬪志(투지)”. 경향신문. 1976년 2월 16일. 
  76. “蹴球評價戰(축구평가전) 兩(양)날개活用(활용)…불붙은 슈우팅 4-0”. 동아일보. 1976년 3월 2일. 
  77. “黃在萬(황재만) 選手重傷(선수중상)”. 동아일보. 1976년 3월 2일. 
  78. “黃在萬(황재만) 출전못해 對中國(대중국) 2次戰(차전)에”. 경향신문. 1976년 3월 6일. 
  79. “代表(대표)1陣(진), 맨체스터에完敗(완패)”. 동아일보. 1976년 6월 2일. 
  80. “蹴球代表選手(축구대표선수)보강”. 동아일보. 1976년 7월 1일. 
  81. “「朴大統領(박대통령)컵」蹴球(축구) 花郎(화랑)·忠武(충무)티임結團(결단)”. 동아일보. 1976년 9월 6일. 
  82. “제6회 朴大統領(박대통령)컵 蹴球(축구)<3일>”. 동아일보. 1976년 9월 14일. 
  83. “韓日蹴球(한일축구)등 對備(대비) 常備軍(상비군)18名選拔(명선발)”. 동아일보. 1976년 11월 10일. 
  84. “車範根(차범근)·朴商寅(박상인) 決定的(결정적)어시스트 許丁茂(허정무)·黃在萬(황재만) 殊勲(수훈)”. 동아일보. 1976년 12월 6일. 
  85. “韓國(한국)티임,決選進出確實(결선진출확실) 킹스컵 蹴球(축구)”. 동아일보. 1976년 12월 18일. 
  86. “76年最優秀選手(연최우수선수)에 蹴球崔鍾德(축구최종덕)을選定(선정) 體育記者團(체육기자단)”. 동아일보. 1977년 2월 8일. 
  87. “워얼드컵蹴球(축구) 代表(대표)티임結團(결단) 12日海外訓鍊(일해외훈련)떠나”. 동아일보. 1977년 2월 22일. 
  88. “個人技(개인기)·體力劣勢(체력렬세)를鬪志(투지)로 메워…「無勝負作戰(무승부작전)」성공”. 동아일보. 1977년 2월 28일. 
  89. “월드컵蹴球(축구) 韓(한)·이戰(전) 詳報(상보) 終了(종료) 3분전 총알슛 2골炸裂(작렬)”. 경향신문. 1977년 3월 21일. 
  90. “워얼드컵蹴球(축구) 本選進出(본선진출)의 最大關門(최대관문) 韓(한)·濠(호)1次戰(차전) 내일開幕(개막)”. 동아일보. 1977년 8월 26일. 
  91. “體力(체력)달려 濠(호)에 졌다”. 동아일보. 1977년 8월 30일. 
  92. “내일월드컵 鬪志(투지)·個人技(개인기)의 대결”. 경향신문. 1977년 10월 8일. 
  93. “편파 심판으로「韓國(한국)의 勝利(승리)」무너뜨린 英主審(영주심) 後半(후반) 이란의2得點(득점) 모두 審判(심판)이 만들어준 祭物(제물)”. 경향신문. 1977년 11월 12일. 
  94. “메盃(배) 蹴球(축구)선수단 오늘 壯途(장도)에”. 경향신문. 1978년 7월 8일. 
  95. “花郎(화랑)은 모로코가 두렵다 朴(박)대통령컵蹴球(축구)대회 준결승 展望(전망)”. 경향신문. 1978년 9월 19일. 
  96. “3차전 화랑,페루 3대1격파”. 동아일보. 1978년 10월 27일. 
  97. “아시안게임 韓國選手團(한국선수단) 명단”. 경향신문. 1978년 11월 17일. 
  98. “최우수선수 金在漢(김재한) 蹴球(축구)베스트11 선정 體育記者團(체육기자단)”. 경향신문. 1979년 1월 16일. 
  99. “韓(한)·日(일)축구 花郎(화랑),日代表(일대표)에 2대1敗北(패배)”. 경향신문. 1979년 3월 5일. 
  100. “축구대표 30명선발”. 동아일보. 1979년 4월 11일. 
  101. “친선축구 고별전서 1대0 한국,페루에 고배”. 동아일보. 1979년 5월 14일. 
  102. “축구 화랑팀 18명확정”. 동아일보. 1979년 5월 15일. 
  103. “메르데카대회 출전 축구대표팀 확정”. 동아일보. 1979년 6월 19일. 
  104. “화랑과 큰차없는 한국2진 정현복 4골넣어 최다득점”. 동아일보. 1979년 7월 9일. 
  105. “韓國(한국),메盃(배)축구 3連覇(연패)”. 경향신문. 1979년 7월 16일. 
  106. “멕시코U大會(대회) 선수단名單(명단)”. 경향신문. 1979년 7월 12일. 
  107. “멕시코U大會(대회) 韓國(한국)선수단 戰力(전력) 蹴球(축구)에 가장 큰 기대”. 경향신문. 1979년 8월 20일. 
  108. “U대회축구 한국,쿠웨이트대파 5대1”. 동아일보. 1979년 8월 31일. 
  109. “할렐루야 아마축구 覇權(패권)”. 동아일보. 1988년 3월 22일. 
  110. “할렐루야 올 2관왕”. 동아일보. 1991년 11월 3일. 
  111. “군실업 축구 朴(박)세영 결승골 할렐루야 우승”. 동아일보. 1992년 11월 3일. 
  112. “申正燮씨 실업축구聯 부회장에”. 연합뉴스. 1992년 12월 4일. 
  113. “축구 頂上(정상)오른 할렐루야「감사 기도」”. 동아일보. 1993년 4월 23일. 
  114. “조병득 할렐루야 감독에”. 동아일보. 1996년 10월 20일. 
  115. “휠체어 럭비로 '재활 질주'. 중앙일보. 2005년 9월 26일. 
  116. “‘휠체어 럭비’ 전도사 된 롱 스로인 명수”. 경향신문. 2005년 8월 14일. 
  117. “2000 고대 체육인의 날 행사”. 동아일보. 2000년 12월 26일. 
  118. “박정원등 ‘자랑스런 중동인상’ 수상”. 경향신문. 2006년 1월 17일. 
  119. “황재만과 좋은 친구들”. 중앙일보. 2008년 3월 18일. 
  120. “70년대 대표팀 활동 황재만 씨' 지병으로 별세”. 대한축구협회. 2010년 7월 28일. 
  121. “A매치 50경기 앞둔 손흥민, 80년대 이후 세 번째 어린 나이”. 스포탈코리아. 2016년 10월 5일. 
  122. “축구선수 黃在萬(황재만)씨 30일 유선경양과結婚(결혼)”. 경향신문. 1983년 3월 29일. 
  123. “축구팬 "설기현 가장 먼저 빅리그간다". 연합뉴스. 2003년 2월 28일. 
  124. “`아이스버킷챌린지` 차범근 "원하면 끼얹어드려" 정몽규 축협회장 지목”. 이데일리. 2014년 8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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