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동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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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洪吉同, 1440년? ~ 1510년?)은 조선 연산군 때의 도적이다.[1] 조선왕조실록과 몇몇 문헌에 행적이 간략히 적혀 있다. 허균(許筠)의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의 모델이 되는 실제 인물로 알려져 있다.[2]

생애[편집]

홍길동(洪吉同)은 1440년경 전라도 장성현 아곡리 아치실 마을에서 홍상직(洪尙直)의 얼자(孼子)로 태어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1] 그는 홍징(洪徵)의 얼손(孼孫)이며, 이복 형은 홍귀동(洪貴童), 홍일동(洪逸童)이라 한다.

홍길동(洪吉同)의 출생을 살피면

  • 조선왕조실록의 홍길동(洪吉同):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홍길동(洪吉同)은 1440년(세종 25년)경에 출생해 1510년(중종 5년)경에 죽은 것으로 추정되고 이러한 과정에 처단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 한자명은 홍길동(洪吉同): 1500년(연산군 6년) 10월 22일 삼정승이 연산군에게 홍길동(洪吉同)이 잡혔다고 보고하는 기사이다.
영의정 한치형(韓致亨)·좌의정 성준(成俊)·우의정 이극균(李克均)이 아뢰기를, "듣건대, 강도 홍길동(洪吉同)을 잡았다 하니 기쁨을 견딜 수 없습니다. 백성을 위하여 해독을 제거하는 일이 이보다 큰 것이 없으니, 청컨대 이 시기에 그 무리들을 다 잡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좇았다. [조선왕조실록 태백산사고본, 연산 6년, 명 홍치 13년]
  • 《홍길동전》의 홍길동(洪吉童): 장성 아곡리 출신 박종현(朴鐘鉉. 1935-2009) [3]은 <실존 홍길동(洪吉童) 연구 (1986년)〉에서 《홍길동전》에 나오는 홍길동(洪吉童)은 남양 홍씨(南陽 洪氏)로, 아버지는 경성 절제사(鏡城 節制使) 홍상직(洪尙直)이며, 어머니는 관기(官妓) 옥영향(玉英香)으로 얼자(孼子)라 한다.[4] 홍상직(洪尙直)은 슬하에 귀동(貴童), 일동(逸童), 길동(吉童) 세 아들을 두었는데, 귀동(貴童)과 일동(逸童)은 정처(正妻) 남평 문씨(南平 文氏) 소생이다.[5]
  • 조선왕조실록에 홍길동(洪吉同) 출생 전 아버지 홍상직(洪尙直)은 이미 유명을 달리한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살펴보면 홍길동(洪吉同)이 태어나기 20여년 전에 아버지 홍상직(洪尙直)은 이미 유명幽冥))을 달리한다. 홍길동(洪吉同)의 출생을 1443년경(세종 25년)으로 보는데, 아버지 홍상직(洪尙直)은 1424년경(세종 6년)에 이미 유명(幽冥)을 달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6]
1420년(세종 2)10월 24일: 홍상직(洪尙直)을 경성 절제사(鏡城 節制使)에 제수하다. 이때 데리고 살던 기녀(妓女) 옥영향(玉英香)이 등장한다. [세종실록 10권]
1422년(세종 4) 12월 1일: 경성 절제사(鏡城節制使) 홍상직(洪尙直)은 역모죄에 연루되어 사형 언도를 받았으나, 이후 사헌부 재심을 거쳐 〈무고죄〉로 사형을 감하고 경상도 동래로 유배 되었다.[세종실록 18권]
1423년(세종 5) 12월 9일: 경상도 동래로 유배한 홍상직(洪尙直)은 석방되어 돌려보내진다.[세종실록 22권]
1424년(세종 6): 홍상직(洪尙直)은 추국과 장독의 후유증으로 향리인 경기도 파주군 적성에서 요양하다 유명(幽冥)을 달리하였다.
1428년(세종 10) 10월 28일: 적모(嫡母) 남평 문씨(南平 文氏)에 대한 기록 - 예조에서 경외(京外)의 효자(孝子)·순손(順孫)·절부(節婦)를 찾아내어 아뢴다. 경기도 적성(積城. 현재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사람 절제사(節制使) 홍상직(洪尙直)의 아내 문(文)씨는 남편이 죽으매, 분묘 곁에 여막을 세우고 조석(朝夕)으로 상식(上食)을 올리면서 대상(大祥)에 이르기까지 잠시도 분묘 곁을 떠나지 않았고, 상제(喪制. 3년상)를 마치고서도 차마 멀리 떠나지 못하여 가까운 동리에 살면서 매양 삭망(朔望)과 속절(俗節)에 반드시 제사하였다.[세종실록 42권]

관련 문헌[편집]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홍길동(洪吉同)'이 아닌 소설책 속의 '홍길동(洪吉童)'이 등장하는 문헌은 아래와 같다.

  • 조선조 제16대 왕 인조(仁祖. 1595-1649)때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1647)의 《택당선생 별집(澤堂先生 別集)》 제15권 〈잡저(雜著)〉 ‘산록(散錄)’이다. 기록에 “허균은 또 〈수호전(水滸傳)〉을 본떠서 〈홍길동전(洪吉同傳)〉을 짓기까지 하였는데 그 사람의 무리인 서양갑(徐羊甲)과 심우영(沈友英) 등이 소설 속의 행동을 행동으로 직접 옮기다가 한 마을이 쑥밭으로 변하였고 허균 자신도 반란을 도모하다가 형벌받아 죽었으니 이것은 농아(聾啞)보다도 심히 응보받은 것이라고 하겠다.” 이후 허균(許筠. 1569~1618)이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지었다 함은 이 문헌을 근거로 한다.
  • 여기서 우선 한 가지 짚어야 할 것은 소설책 속의 '홍길동(洪吉童)'에 대해 《조선왕조실록》·《택당선생 별집》 공히 '홍길동(洪吉同)'으로 적고 있다는 점이다.
  •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조선조 제21대 왕 영조(英祖. 1694-1776) 때 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이 최초로 ‘홍길동(洪吉同)’을 ‘홍길동(洪吉童)’으로 한자를 변경하여 기록한다. 이익이 쓴 《성호사설(星湖僿說)》 제14권 인사문(人事門) 〈임거정(林居正)〉에서 “옛날부터 서도(西道, 현재의 황해도와 평안도)에는 큰 도둑이 많았는데 그중에 ‘홍길동(洪吉童)’이라는 자가 있었다. 세대가 멀어서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까지 장사꾼들이 맹서하는 구호에까지 들어 있다”며 활동 지역도 서도(西道)를 근거지로 했다고 하나 이미 1백 년이 넘은 일이기에 가물가물한 옛일이었던 듯하다"고 기록한다.
  • 이후 조선조 제19대 왕 숙종(肅宗. 1661-1720)때 홍만종(洪萬宗, 1643-1725)이 쓴 《해동이적(海東異蹟)》을 완역하고 주석한 순양자(純陽子) 황윤석(黃胤錫. 1741-1791)은 《증보 해동이적 해중서생(增補 海東異蹟 海中書生)》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舊聞 國朝中宗以前有 洪吉童者, 相臣 逸童 孼弟也, 居 長成 亞次谷 負才氣自豪 而抱國典 不許科宦淸顯一朝忽去後」(옛적에 듣자니 국조 중종 이전에 홍길동(洪吉童)이란 자가 있었는데 이는 상신 일동의 얼제로, 장성(長成) 아차곡(亞次谷)에서 살았다. 재기를 믿고 스스로 뽐내고 있었는데 국법이 벼슬이나 청현직에 나아갈 수 없도록 함에 억매어 하루 아침에 갑자기 도망하였다.)

출생지 의문[편집]

《 전라도 장성현 아곡리 아치실 출신》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이 서로 다른 관계로 반드시 조금 더 연구해야 한다.

  •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홍길동(洪吉同)은 아버지 홍상직(洪尙直)이 세상을 떠난 지 20년 후인 1443년에 출생한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홍길동(洪吉同)의 아버지 홍상직(洪尙直)은 1424년경(세종 6년)에 유명(幽冥)을 달리했고 홍길동(洪吉同)은 20년 후인 1443년(세종 25)경에 출생하였다.
  • 《조선왕조실록》에 홍상직(洪尙直)의 고향은 경기도 적성(積城. 현재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으로 기록되어 있고 그 사람의 아버지는 홍징(洪徵. ?-1388년)[7]이다.
  • 《조선왕조실록》 〈연산군 일기〉에 등장하는 '홍길동(洪吉同)'과 《성호사설(星湖僿說)》에 등장하는 '홍길동(洪吉童)'의 한글 표기는 같으나 한자가 다르다.
  • 그 사람이 살았다고 기록된 《증보 해동이적 해중서생(增補 海東異蹟 海中書生)》편의 '장성(長成)'과 '장성군(長城郡)'의 한글 표기는 같으나 한자 표기가 다르다.
  • '아차곡(亞次谷)'이 '아치실'이라 하나 '아곡리 아치실'의 조선 시대 지명은 '소곡리(小谷里)'였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아곡(阿谷)'이라 명명하였으며, 조선 시대 '소곡(小谷)'의 한글 표기가 '아치실'이다.
  • 조선조 제10대 왕 연산군(燕山君. 1476-1506) 통치기에 국사범(國事犯)으로 나라의 큰 골치거리였던 도적 홍길동(洪吉同. 1443-1510)이 장성군 아곡리 아치실 출신이라면, 같은 시대에 살았던 마을 후배 청백리(淸白吏) 박수량(朴守良. 1491-1554) 선생 및 앞마을 맥동 출신으로 문묘(文廟)에 배향되신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 선생의 저술(著述)이나 잡록(雜錄) 어디에도 홍길동(洪吉同)이나 홍길동의 아버지 홍상직(洪尙直)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활동[편집]

역사 기록에 전하는 홍길동(洪吉同)이 주로 활동한 지역은 처음 충청도 충주(忠州) 일대였고 산중에 들어가 근거지를 두고 활동한 흔적은 없다. 홍길동(洪吉同)은 정3품 당상관첨지중추부사를 자칭하면서 무리를 이끌고 관가에 들어가 기탄없이 행동했다고 한다.

이러한 그 사람들의 기세에 눌린 지방의 권농, 이정, 유향소좌수, 별감등도 알아볼 정도였고 일반 백성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8] 이로 인하여 조정은 홍길동(洪吉同)에게 강상죄를 적용하였다.[9]

또 조정에서는 홍길동(洪吉同)의 이러한 행동이 지방 관리와 유향소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해를 넘긴 1501년까지 관련자를 잡아 국문하였다. 홍길동(洪吉同)을 도운 죄로 잡힌 지방 관리 엄귀순(嚴貴孫)은 끝까지 국문에 승복하지 않다가 옥사당했다.[2] 또한 이에 연루된 권농(勸農)·이정(里正) 같은 지방 관리들을 변방으로 유배했다.[10]

조선 시대 얼자(孼子)였던 홍길동(洪吉同)은 당연히 양반의 갓을 쓸 수 없었다. 홍길동(洪吉同)과 같은 도당으로 여겨져 옥사한 엄귀손(嚴貴孫)은 당상무관(堂上武官)으로 본래는 노복(奴僕)과 재산이 없었는데, 한양과 지방에 집을 사두고 곡식을 3천 석에서 4천 석이나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홍길동과 서로 내통하였던 듯합니다.

따라서 당상무관(堂上武官) 신분이었던 엄귀순의 행적이 실록에 꽤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11] 소설에서와 같이 당상관 가문이었으면 기록이 있었겠으나 그 정도 고위층과 관련이 있지는 않았을 듯하다.[2]

체포 이후[편집]

실록에는 홍길동(洪吉同)을 잡았다는 기사 이외에 어떻게 처벌했다는 기사는 없다. 『연산군 일기』가 시대 상황 탓에 약간 누락된 부분이 많다고는 하나 다른 기록이 상세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점이다. 다만 훗날 조선 선조(宣祖. 1552-1608)때 홍길동(洪吉同)과 같은 강상죄(綱常罪)로 잡힌 이연수(李連壽)의 처리를 논하면서 홍길동(洪吉同)의 예를 들어 도당을 나누어 가두고 심문하기를 청하는 것으로 보아 옥중에서 서로 말을 맞추었거나 일부는 탈옥했을 수도 있다.[2]

홍길동전(洪吉童傳)[편집]

홍길동(洪吉同)은 조선 시대 지배층과 세간에 널리 알려진 사건으로 100년이 지나도 여전히 거론될 정도였다. 이에 허균(許筠. 1569-1618)은 조선 시대의 불합리한 서얼(庶孼) 차별과 백성에 대한 가혹한 수취, 국방에 대한 부실 등의 개혁을 주장하였고, 국왕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로지 백성이라 역설하였다. 허균(許筠)은 백성을 현실에 순응하는 항민, 불만이 쌓인 원민, 사회를 바꾸기 위해 직접 나서는 호민으로 나누었으며 홍길동(洪吉同)을 호민의 대표로 형상화하여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지었다.[12]

한편,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은 《성호사설》에서 조선 시대의 3대 도둑으로 장길산, 임꺽정과 함께 홍길동(洪吉童)을 논하면서 이들의 이름이 장사꾼들이 맹서하는 구호에까지 들어와 있다고 적고 있다.[9]

평가[편집]

홍길동전(洪吉童傳)에 등장하는 홍길동(洪吉童)은 흔히 의적(義賊)으로 평가받는데 이와 관련해 영남대학교 기초교육대학 교양학부 교수 박홍규는 자신의 저서 《의적 정의를 훔치다》에서 이 사람들이 설사 실제로는 의롭지 않았을지라도 백성은 이 사람들을 이용해 부정한 체제를 향한 저항을 꿈꾸었기에 의적(義賊)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생명력을 얻을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13]

관련 작품[편집]

드라마[편집]

영화[편집]

애니메이션[편집]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문학]</nowiki>홍길동은 정말 일본으로 건너갔나”. 동아닷컴. 2001년 5월 2일. 2006년 1월 1일에 확인함. 
  2. 임형택, 〈역사 속의 홍길동(洪吉同)과 소설 속의 홍길동(洪吉童)〉, 역사문제연구소,《우리 역사의 7가지 풍경》, 역사비평사, 2006.
  3. 전남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일명 아치실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고 24대를 한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체신부·한국통신에 재직했고 1965년 내 고장 전설이라는 이름으로 "홍길동(洪吉童)의 유지"를 발표한바 있다.
  4. 전설에는 어머니 이름이 춘섬이라는 별칭도 있다.
  5. 실존 홍길동 연구, 과학기술학회마을
  6. 이에 대해 홍길동을 연구한 연세대학교 교수 설성경은 이렇게 설명한다. 〈韓國日報〉 1997년 6월 25일자, "홍상직(洪尙直)은 모함으로 체포됐다 풀려난 적이 있다. 따라서 그는 1426년께 사망한 것이 아니라 불안한 정세를 감안 지방으로 낙향하였고, 이후 1450년께 만득자(晩得子)로 길동(吉同)을 얻었으며, 실록(實錄)의 기록은 홍씨 집안의 체면 등을 감안해 모호하게 기록한 게 아닌가 한다고 주장한다."
  7. 홍징(洪徵)[[1]]
  8.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0: 왕의 길 신하의 길, 한길사, 2007, 112-115 쪽
  9. 박은봉, 〈홍길동은 실존 인물이 아니다?〉,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 책과함께, 2008
  10. 연산군일기 39권, 연산6년 12월 29일 기사, 의금부의 위관(委官) 한치형(韓致亨)이 아뢰기를, "강도 홍길동(洪吉同)이 옥정자(玉頂子)와 홍대(紅帶) 차림으로 첨지(僉知)라 자칭하며 대낮에 떼를 지어 무기를 가지고 관부(官府)에 드나들면서 기탄없는 행동을 자행하였는데 그 권농(勸農)이나 이정(里正)들과 유향소(留鄕所)의 품관(品官)들이 어찌 이를 몰랐겠습니까. 그런데 체포하여 고발하지 아니하였으니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들을 모두 변방으로 옮기는 것이 어떠하리까."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하였다.
  11. 》『연산군 일기』 39권, 연산 6년 11월 28일 기사, 엄귀순은 군공(軍功)이 있어 당상이 되었지 조행(操行)한 것은 아닌 듯하다.
  12. 이욱, 〈조선시대의 의적〉, 《내일을 여는 역사 제11호》, 서해문집
  13. 박홍규, 《의적 정의를 훔치다》, 돌베개, 2006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