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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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규(洪奎, 1242년 ~ 1316년 6월 23일)는 고려 후기의 무신이자 국구(國舅)로, 초명은 홍문계(洪文系), 자는 미루(彌樓)[1],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순화원비(順和院妃)·명덕태후(明德太后)의 아버지이다.

생애[편집]

음서로 관직에 나아가 권무(權務), 산원(散員), 견룡행수(牽龍行首)를 차례로 거쳤고[1], 원종(元宗)조에 장군(將軍)·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었다.

일찍이 임연(林衍)의 사위가 되었으나, 임연 사후인 1270년(원종 11) 5월[2] 이분성(李汾成)을 통해 왕의 밀명을 받고, 직문하성사(直門下省事) 송송례(宋松禮)와 함께 임연의 아들인 임유무(林惟茂)를 주살했다. 이로서 무신정권 시대는 그 막을 내렸다.

8월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원부(元傅), 송송례와 함께, 세자 왕심(王諶)을 호종해 원에 다녀왔으며, 12월 그 공으로 우부승선(右副承宣)으로 승진했으나, 이듬해 아첨꾼들과 함께 조정에 있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 사직했다.[3]

1272년(원종 13) 2월 추밀원부사로 복직되어 재추의 반열에 들었으나, 10월 다시 사직했다.[4][5]

이후 관직 없이 17년 동안을 전원에서 지내다가[1], 1288년(충렬왕 14) 원의 공녀 징발을 피하기 위해 장녀를 비구니로 만든 죄로 인해 섬으로 유배되었고, 장녀는 결국 원 사신 아쿠타이(Aqutai)의 처가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소환되었으며, 1291년(충렬왕 17)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郞贊成事)·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로 한 번[6], 1295년(충렬왕 21) 9월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으로 다시 한 번 치사(致仕)했다.[4]

12월 김광취(金光就)와 함께 원에 하정사(賀正使)로 갔다 왔으며, 이 무렵 홍규로 개명했다.[7]

1297년(충렬왕 23)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수사도(守司徒)·영경령궁사(領景靈宮事)가 더해졌고, 사위인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한 1308년(충선왕 즉위년) 익성군(益城君)에 봉해졌다.[4]

1310년(충선왕 2) 9월 수첨의정승(守僉議政丞)·상호군(上護軍)이 더해지고 행한양부윤(行漢陽府尹)으로 나갔으며, 12월[8] 지익성군사(知益城郡事)로 옮겼다.

1313년(충숙왕 원년) 남양부원군(南陽府院君)으로 고쳐 봉해지고 추성진력안정공신(推誠陳力安定功臣)의 호를 받았으며, 1316년(충숙왕 3) 향년 75세로 졸했다. 시호는 광정(匡定)이다.[1]

가족 관계[편집]

  • 증조 - 홍원중(洪源中)[1] : 성불도감판관(成佛都監判官)
    • 조부 - 홍사윤(洪斯胤)[1] : 추밀원사(樞密院使)·공부상서(工部尙書)

각주[편집]

  1. 『홍규 묘지명』
  2. 본인의 묘지명에는 3월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3. 이 때 홍자번(洪子藩)이 그를 대신해 우부승선이 되었다.
  4. 『고려사』 「홍규전」
  5. 이 때 변윤(邊胤)이 그를 대신해 추밀원부사가 되었다.
  6. 본인의 묘지명에 의하면, 이 때 추충안사공신(推忠安社功臣)의 호도 받았다.
  7. 『고려사』 「충렬왕세가」
  8. 『고려사』 「충렬왕세가」에는 1312년(충선왕 4) 3월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9. 『씨족원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