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취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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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남 호취훈
山南 胡就勳
소련 군정 북조선 평안남도 용강군 태수
(蘇聯 軍政 北朝鮮 平安南道 龍岡郡 太守)
임기 1945년 12월 15일 ~ 1946년 9월 20일
수상 김일성 (북조선 인민위 위원장 직대)
부수상 김두봉 (북조선 인민위 부위원장 직대)
전임 조만식
신상정보
출생일 1894년 5월 29일
출생지 조선 평안도 용강군 귀석면 석찬리 449번지
사망일 1947년 2월 27일(1947-02-27) (52세)
사망지 소련 군정 북조선 평안남도 용강군 귀석면 석찬리 본가 사저에서 병사
거주지 조선 평안도 진남포
조선 평안남도 진남포
조선 평안남도 대동
대한제국 평안남도 대동
대한제국 함경남도 원산
대한제국 한성부
대한제국 평안남도 평양
일제 강점기 평안남도 평양
일제 강점기 평안남도 용강
본관 악양(岳陽)
학력 협성신학교 중퇴
경력 학림학교 설립자
온정리교회 설립자
감리교회 목사
정당 무소속
부모 아버지 호태합(胡泰合)
어머니 덕수 이씨 부인(德水 李氏 夫人)
형제 호도훈(형)
호모훈(남동생)
배우자 오용준(吳龍俊, 본관은 해주.)
자녀 슬하 7남 1녀
(호인수(장남)
호인순(차남)
호인평(3남)
호인영(4남)
호인구(5남)
호인백(6남)
호인만(7남)
호인명(막내딸)
친인척 호경우(친조부)
종교 유교(성리학) → 불교개신교(감리회)
서훈 2009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웹사이트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공훈록 - 001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공훈록 - 002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공훈록 - 003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공훈록 - 004

호취훈(胡就勳, 1894년 5월 29일 ~ 1947년 2월 27일)은 일제 강점기독립운동가 겸 사회운동가였다.

그는 관서 지방 향토를 대표하는 시대의 반일반공(反日反共) 성향 대표 원로로, 조만식(曺晩植)을 보좌하기도 한 그는 요시히토, 히로히토, 스탈린, 김두봉, 붐첸드, 마오, 김원봉, 조일명, 김일성 등에게 항거하였다. 그는 기독교 신자이자 목회자였지만 한학(漢學)과 불경(佛經)에도 통달하였을 뿐 아니라 중국어몽골어러시아어일본어에 모두 능통키도 하였다.

별칭[편집]

(號)는 평안(平安)·산남(山南)·첩선(輒仙)·태건(太建)·화촌(和村·華村)·해남(海南)·소강(召江)·산유(山楡)·산은(汕隱).[1]

주요 이력[편집]

출생, 그리고 어린 시절과 성장[편집]

본관악양(岳陽)인 그는 조선국 평안도 용강에서 아버지 호태합(胡泰合)과 어머니 덕수 이씨 부인(德水 李氏 夫人) 사이에서 슬하 3남 중 차남으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 직계 일가족과 함께 1895년에서 1896년까지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1년간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으며 1896년 황해도 해주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고 1896년에서 1897년까지 황해도 토산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으며 1897년에서 1898년까지 경상남도 하동에서 1년간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고 1898년평안남도 대동에서 석 달 간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으며 1898년에서 1899년까지 함경남도 원산에서 1년간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고 1899년청나라 만저우 지방 지린 성 지린에서 잠시 석 달 간 유년기를 보낸 후 대한제국에 귀국을 하여 1899년에서 1900년까지 1년간 한성부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그 와중이던 1899년 한성부에서 불교 귀의하였으며 1900년한성부에서 평안남도 평양으로 이주하였고 이후 평안남도 평양에서 성장하였으며 1년 후 1901년에 평안남도 평양 종로보통학교 입학하였으며 평양 종로보통학교 2년 재학 시절이던 1902년 종교를 불교에서 개신교로 개종하였다. 1907년에 평안남도 평양 종로보통학교 졸업하였고 같은 해 평안남도 평양고등보통학교 입학하였으며 1908년 친조부 호경우(胡慶祐, 1816년 ~ 1908년)의 상(喪)을 치렀고 1913년에 평양고보 졸업을 하였다. 여담이지만 친조부 호경우(胡慶祐, 1816년 ~ 1908년) 公은 조선 헌종 치세 시절이던 1846년 식년생원진사시에 3등 합격하여 1859년에서 1898년까지 황해도 토산 태수(黃海道 兎山 太守) 직책을 지냈었다.

학력[편집]

독립 운동 투신[편집]

1919년 3월 6일 평안남도 용강군 해운면 온정리(平安南道 龍岡郡 海雲面 溫井里) 장터에서 전개된 대한 독립 만세 시위 운동에 참가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을 때 이에 앞서 2월 27일 평안남도 진남포 신흥리(平安南道 鎭南浦 新興里) 교회에서의 한국기독교선교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모임에 참가하였다가(당시: 평안남도 용강군 감리교 청년회장) 3월 1일 하오 2시 홍기황 君이 독립선언서를 읽은 것을 듣고 대한 독립 만세 운동에 참가 후, 향리로 돌아와 온정리 장날에 만세 운동을 주도 하셨으며, 3월초 시작된 독립운동은 4월 중순까지 진행되다 4월말 일본군의 검거 선풍으로 인하여 지하 운동으로 바뀌었음. 3월 독립 운동때 온정리에 진압 차 출동한 헌병이 100명이고 맞아 죽은 헌병도 2명이었다. 이 사건으로 검거되었으며, 대정 8년 5월 10일 진남포 지청 및 평양 복심 법원이 언도한 판결에 대하여 상고 경성고등법원에서 재판시 검사가 무식함으로 가여이 여기며 ‘잘못했다’고 말하라는 사주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잘못이 없다. 우리나라 대한(大韓)이 독립하였다는데 내 어찌 만세를 부르지 않겠는가..."라고 진술하여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 선고를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당시 관련 재판의 기록이 아직도 대한민국 행정자치부 예하 국가기록원에 남아 전하고 있으며(대정 8년(1920년) 형상 제158호 판결서) 1920년 5월, 만기 출감후 깨달음이 있어 짚풀 새끼와 초신을 팔아 온천교회(평안남도 용강군 귀성면 장찬리)를 설립하고, 과수원을 경영해서는 학림학교를 설립하여 후학 양성을 도모하고 민족 정신 및 근대 계몽 정신을 고취하는데 주력하고 본인의 사업 관련 기반을 근거로써 주변의 어려운 가정를 지원하는 사업을 많이 하였다고 한다. 후일 1940년 축산 양계(畜産 養鷄) 업종에 눈 떠 닭 5,000수를 키워 일본군 제103전투비행장 건설 시에는 일본군에게 계란을 공급하였는데 일군 병사가 닭을 잡아가자 "일본이 망했다."고 외쳤다는 것이다. 일헌(日憲)이 이를 수상히 여겨 반문한즉 "달걀을 낳는 닭을 먹으니 차라리 망하지 않겠는가"고 답변하였다는 일화가 남아 있으며. 민족대표 33인의 한명인 신석구(申錫九) 목사와 같이 독립 운동 관련 자금을 모집하여 해마다 1회씩 중화민국 국민정부 대륙 본토로 조달하는 작전 사업을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조선 광복 후 소련 공산당 지배하에 있었던 관계로 일본군에게 군납을 하였다는 이유와 교회 및 학교가 비행장의 군보급창으로 증발 사용되었다는 것과 당시 과수원을(평남 용강 석찬리 449번지) 기점으로 사방 30리의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부르주아 계급)였던 관계로 투옥되었다가. 악질 지주가 아닌 사회사업가로서 독립운동의 이력이 밝혀지고 교회 및 학교가 연합군의 폭격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이유로 일본이 강제 증발한 것이 증명되어 석방되었지만 투옥시 심한 고문과 정신적 충격의 후유증으로 인하여 1947년 2월 27일 사망(병사)하였다.[2][3]

山南 호취훈 先生이 남긴 기독교 관련 시설[편집]

학림학교(鶴林學校)[편집]

  • 소 재 지: 평안남도 용강군 해운면(海雲面) 당찬리
  • 설 립 자: 호도훈 권사, 호취훈(胡就勳) 권사
  • 설립연도: 1909년
  • 수업연한: 6년제
  • 설립연혁: 1909년 海雲面 당찬리에 설립된 감리교회 부설 교육기관으로 1935년 당시 교장 김태훈(金泰勳)과 교사 3명이 봉직하였으며 학생수는 162명이었으며, 군내에서 역사가 깊고 많은 인재를 배출한 명성이 높은 사립학교이다.[4]

온정리교회(감리교회)[편집]

  • 소재지: 평안남도 용강군 해운면 온정리
  • 설립자: 호취훈(胡就勳) 목사, 호도훈 장로, 호모훈 집사
  • 설립연도: 1933년
  • 목사: 호취훈(胡就勳) 담임목사
  • 교인수: 200명[5]

사후[편집]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고자 2009년 3월 1일을 기하여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외부 링크[편집]

각주[편집]

  1. 그 이외 지난날 한때 1910년대 중반(아직 3.1 만세 운동 이전) 시절 러시아 제국 연해주 지방 우수리스크 도심과 나홋카 도심 각각에서 유리 지체노비치 징(Yurii Zitschenovich Jing), 니콜라이 블라디미로비치 옐리자로프(Nikolai Vladimirovich Yellizaroff)이라는 러시아어 가명을 잠시 사용하였고 몽골 과도정부국 헹티 주 은드르항 지방에서 진 지첸(Dzhin Zitshen)이라는 몽골어 가명을 잠시 사용하였으며 그 후 펑톈창춘지린쓰핑베이핑푸저우항저우충칭상하이광저우포산하이커우카이펑루저우톈진스자좡난퉁쑤저우 등지를 비롯한 국민정부 중화민국 대륙 본토에서 독립 운동을 하던 시절에 후얼진(胡二金)·유한나(庾漢那)·탕나(湯那)·유시원(庾錫文)·후핑안(胡平安)·리광야오(黎廣曜)·류핑안(柳平安)·후산난(胡山南)·후즈밍(胡志銘)·후메이리(胡眉利)·추이잉저(崔英哲)·추룽(秋龍)·류전룽(劉珍龍)·둥팡위(董坊禺)·리펑룽(李奉龍)·장위안룽(江元龍)· 싸이전주(賽鎭朱)· 장치톈(江奇天)이라는 중국어 가명을 사용하였으며 3.1 만세 운동 직전 평안북도 중강, 평안북도 후창, 황해도 장연, 황해도 신천, 황해도 연안, 황해도 재령, 황해도 배천, 경기도 개성, 평안남도 평양, 평안남도 순천, 평안남도 강서, 평안남도 대동, 평안남도 강동, 평안남도 평원, 평안남도 안주, 평안남도 강서, 평안남도 신안주, 평안남도 성천 등지에서 소준렬(蘇準烈)· 이건영(李建榮)· 강명자(康明孜)·강용석(强鎔錫)·이승준(李昇准)·엄유온(嚴維溫)· 최명길(崔皿桔)·강주현(姜周炫)·유영대(柳榮大, 류영대김태창(金太昌)· 구광서(具廣瑞)·유근찬(庾根燦)·조경철(趙經喆)·설민석(偰珉奭)· 강병일(江柄逸)·김현희(金縣禧)· 조국(趙菊)· 양소영(楊素影) 등의 가명(假名)을 사용하였다.
  2. 1945년 8월 15일, 평안남도 용강에서 조선 광복 목도 시절에도 그는 이미 와병 5년차(1940년 2월 29일 이후 와병)로 인하여 거동이 편치는 않았던 시절이었다.
  3. (참고 문헌: 용강군지 1988.10.15. - 제14장 성씨와 인물 4. - 항일애국지사편 中 P527)
  4. (참고 문헌: 감리교요람 32.36. 감리교회사. 기독교백과사전 16-24 참조)
  5. (참고 문헌 자료: 용강군지 1988.10.15. 제8장 교육, 종교, 체육 2.종교-감리교 (P226, 227), 조선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