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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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교회
Seal of korean orthodox church.JPG
정교회 대한민국 관구의 문장
설립자 흐리산프 솃콥스키
독립 2004년 6월 20일
소속 콘스탄티노플 총 대주교청
교구장 암브로시오스 아리스토텔리스 조그라포스
본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관할 지역 대한민국 대한민국
주보 성인 미라의 성 니콜라스 외 23인
언어 한국어
교세 4,000
웹사이트 http://orthodox.or.kr/html/

한국 정교회(韓國正敎會)는 대한민국동방 정교회 자치교구로, 러시아 정교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대한민국기독교인 수가 1천만명을 초과하는 현실에 비추어 정교회의 개별적 교세는 1만명에 채 미치지 않는 상황이다.

역사[편집]

러시아 정교회의 한반도 선교[편집]

19세기 말엽 조선에 들어와 있던 러시아 제국 군인 약 90명과 민간인 30명은 러시아 공사관에 모여 성직자 없이 주일과 축일에 기도와 찬양으로 성사를 대신하면서 생활했으나 사제가 없어 태어나는 자녀들에게 세례할 수가 없었고 성체성혈성사로써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을 받을 수가 없었으며 죽은 사람을 장례할 수가 없어 주조선 러시아 공사관 직원 폴랴놉스키는 1897년 1월 3일 본국에 조선에서 사목할 성직자를 파송해 달라고 요청했다.

1897년 7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있던 러시아 정교회 신성종무회의가 한반도 선교를 결정해서 소규모 선교회가 조직돼 1897년 안에 한반도에 입국할 예정이었으나 당시 한반도를 사이에 두고 열강이 치열하게 각축하던 상황이었기에 입국은 지연되었다.

1900년 2월 17일 제2차 선교회장 대수도사제 흐리산프 솃콥스키 (Хрисанф Щетковский)와 봉독자 이오나 렙첸코 (Иона Левченко)가 입국했으나 한성에는 성찬 예배를 집전할 정교회 성당이 없어서 독실한 정교신도였던 주한 러시아 공사가 제공한 관저를 임시 성당으로 꾸미고 1900년 2월 17일 성 테오도로스 대순교자 축일에 성수축성 (祝聖)되고 한반도에서의 첫 성찬 예배가 봉헌됐다.

초대 선교사 흐리산프 솃콥스키 (Хрисанф Щетковский) 신부는 정교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을 모아 교리 학습을 시작하면서 한국인들에게 한국어로 된 교리서와 예배서가 필요한 사정을 절감했는데 교회 슬라브어를 한국어로 직역하기 어려워 중국 정교회 측에 요청해 중국어 정교서적들을 입수하고 러시아어와 한국어에 러시아 국적 한인들을 통하여 예배서와 니캐아 콘스탄티누폴리스 신경십계명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노력 덕분에 신도수는 점증해 러시아 공사관에 마련된 임시 성당은 신도를 수용하기에 협소해 1903년 4월 17일 대한제국 고종 이희 (李㷗)에게서 매입한 정동 부지에 성당을 건립했다. 이곳 정동에 건립된 정교회 성 니콜라스 대성당은 1967년 현재 서울특별시 마포구 아현동으로 이전하기까지 한국에서 정교회의 센터가 되어 왔다.

한편 조선말기인 19세기에 적잖은 조선인이 궁핍과 기아를 피해 국경을 넘어 러시아의 연해주 일대에 정착해 체류하기 시작했는데 러시아는 이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한 동화정책 일환으로 러시아 정교회에서 영세하게 했다.

일제강점기[편집]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한반도를 점령한 일본은 한국 주재 러시아인들에게 강제 출국을 명령했고 그중에는 선교회도 포함되어 있었다.

러일전쟁 종전후 러시아 정교회의 선교사역은 1906년 한반도에 입국한 대수도사제 파벨 이바놉스키 (Павел Ивановский)에 의해 재시작됐다. 1906년에서 1912년까지 한반도에 체류하던 파벨 이바놉스키 (Павел Ивановский) 신부는 러일전쟁 당시 전몰한 러시아 장병을 추모한다는 명분으로 성당 건립을 추진하려 했지만 일본의 방해로 무산된 데다가 1917년 러시아혁명으로 러시아가 공산화하면서 정교회가 박해에 처하게 돼, 러시아 정교회는 조선에 있는 정교회를 더 이상 지원할 수 없게 되었다. 1922년 2월 26일 러시아 정교회 조선선교회는 일본 정교회의 러시아인 수장 세르기 티호미로프 대주교의 관할에 속하게 되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정교교리를 교습받은 제1기생 중에서 강탁(요한) 신부가 배출되어 최초의 한국인 정교성직자가 되었다. 강탁(요한) 신부는 1912년 일본 정교회의 도쿄 대주교 세르기에 의하여 사제로 서품됐다.

해방과 한국전쟁[편집]

1945년 일본제국이 세계대전에서 패전하고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자 서울의 정교회와 소련의 모스크바 총대주교청과의 관계는 중단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당시 대한민국의 유일한 정교성직자였던 김의한(알렉세이) 사제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군대에 납치돼 생사불명이 됐으며 한국전쟁 중에 떨어진 포탄 탓에 정동성당이 대파되고 얼마 되지 않던 신도는 뿔뿔이 흩어져 피난해 한국정교회는 와해했으나 한국전쟁에 참전한 그리스군에 종군하던 대수도사제인 안드레아스 칼키오풀로스 (Ανδρέας Χαλκιόπουλος)의 도움을 받아 신도는 다시 모였고 성당이 재건됐다. 한국을 떠나기에 앞서 안드레아스 칼키오풀로스 (Ανδρέας Χαλκιόπουλος) 신부는 한국인 신도 중에 새로운 성직자로 천거된 문이춘(보리스)을 1954년 일본정교회로 보내 도쿄 주교 이리네이 베키시에 의하여 서품받을 수 있도록 원조하였다.

문이춘 사제는 대한민국정부가 적산(일제재산)으로 간주해 압수하려 했던 교회재산을 오랫동안 소송을 벌인 끝에 승소하여 되찾은 뒤 정동 정교회 성 니콜라스 대성당을 매각하고 서울 마포구 마포대로 18길 43에 새로운 성당을 건립해 정교회 성 니콜라스 대성당이라 명명했다.

한국관구 승격[편집]

당시 한국의 정교회는 현재 미국정교회(OCA)의 전신인 북미관구의 일본주교좌 산하에 있었으나, 심사숙고 끝에 1956년 성탄절에 소집된 신도총회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청 산하로 편입되기를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청은 이 요청을 수용해 한국의 정교회를 자신들의 담당하에 두고서 한국의 정교회는 오랫동안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청의 산하기관인 뉴질랜드 관구에 속해 있었고 2004년 6월 20일에는 한국교구가 관구로 승격하면서 독자적 자치권을 획득했다. 1982년 5월에는 한국 최초의 정교신학원이 설립됐다.

2008년 7월 20일 서울 아현동의 정교회 성 니콜라스 대성당에서 그리스인 한국관구장주교 암브로시오스 아리스토텔리스 조그라포스의 착좌식이 치러졌다.

역대 관구장[편집]

  1. 소티리오스 트람파스 (2004년 6월 20일 - 2008년 7월 20일: 현재 피시디아 관구장주교(명의))
  2. 암브로시오스 아리스토텔리스 조그라포스 (2008년 7월 20일 - 한국외국어대학교 어문대학 그리스-불가리아어과 교수)

같이 보기[편집]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