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덕천동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풍덕천1동
豊德川1洞
Pungdeokcheon 1(il)-dong
면적3.4 km2
인구 (2020.08)36,565 명
• 인구 밀도11,000 명/km2
• 세대15,506가구
법정동풍덕천동
동주민센터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수지로342번길 3
웹사이트풍덕천1동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풍덕천2동
豊德川2洞
Pungdeokcheon 2(i)-dong
면적3.4 km2
인구 (2020.08)41,726 명
• 인구 밀도12,000 명/km2
• 세대14,904가구
법정동풍덕천동
동주민센터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풍덕천로 51
웹사이트풍덕천2동

풍덕천동(豊德川洞)은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이다. 수지구청이 소재하는 수지구의 중심지로, 좁은 의미로 관습적 명칭 "수지"는 풍덕천동을 가리킨다. 수지(水眞)는 예로부터 풍덕천리와 죽전리풍덕천 물줄기가 합쳐진 풍덕천동죽전동, 수지읍(水枝)이 되어 한강으로 흐르는 탄천을 이룬다. 풍덕천동은 과거 삼남대로에 속했으며 옛 수지면의 중심지였다. 토월초등학교에는 토월정자(吐月亭子)가 있어 옛 지명의 일단을 유추해 볼 수 있으며, 토월공원에는 노거수(老巨樹) 수령 10~100년 된 느티나무 군이 있다. 풍덕천동은 1987년 수지 전원도시 개발을 시작으로 많은 인구가 유입되어 현재는 아파트단지로 변모되었다. 풍덕천 2동은 2003년 11월 20일 주민자치위원회를 결성하였고, 2005년 1월 12일 주민자치센터가 정식으로 출범했다.[1]

역사[편집]

지명 유래[편집]

풍덕천동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수진면(水眞面)의 토월리 · 신리 · 정평리 일부를 통합 풍덕천리로 하여 수지면의 소재지로 삼았다. 『1872년지방지도』에 풍덕천장기(豊德川場基)라 하여 풍덕천이라는 명칭이 처음 확인된다. 풍덕천의 일부를 죽전리(죽전동)로 전환하였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풍덕천의 천(川)자가 본래는 하천의 '내 천(川)'자를 한자화한 것이 아닌 '올래(來)'자였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풍덕래(豊德來)'가 되는데, 그 의미도 '풍덕에서 온다' 또는 '덕이 크신 분이 (풍덕에서) 온다'가 된다. 이러한 지명 해석은 고려 말 충신 포은 정몽주의 유택 안치와 풍덕천이라는 지명을 관련시키는 것인데, 본래 개성의 풍덕(豊德)에 있던 포은의 묘소를 면례하면서 용인현의 풍덕천을 거쳐 현재 43번 국도를 따라 모현면 능원리의 문수산 아래 묘소를 자리 잡게 되는 과정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포은 정몽주는 선죽교(善竹橋) 피살 후 개경 풍덕군과, 용인현에 일시 평장 되었다가 후에 그의 고향인 경북 영천으로 천묘(遷墓) 되었다. 그 면례행렬이 수지읍 풍덕래(풍덕천동)에 이르자 면례행렬 앞에 세웠던 면정이 바람에 날려 수지읍 죽전(죽전동) 대지고개로 날아가 용인현의 묘소자리에 떨어졌는데 남쪽으로 길을 떠나고자 하면 포은 정몽주의 행여가 움직이질 않아서 할 수 없이 명정이 떨어진 곳으로 가자는 뜻이라 하여 그쪽으로 발길을 돌리자 행여가 움직였고 그래서 용인에 포은 정몽주의 유택이 마련되었다. 당시 포은 정몽주의 행여길은 포은대로로 재현되었다. 하지만『1872년지방지도』에 이미 풍덕천이라는 명칭이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속설로 전해진다. 오히려 '풍덕'이라는 명칭이 이러한 역사적 사건과 관련해 마을 하천이나 마을명으로 자리 잡았다. 『호구총수』에 보면 수진면에는 수상동(水上洞)과 수하동(水下洞), 즉 하천 윗마을과 아랫마을이 등장하는데, 이때의 하천이 풍덕천으로 짐작되고 다른 일설에는 풍덕천의 깊이가 명주 한 필이 들어갈 정도로 깊었는데, 임진왜란 때 왜군이 그 깊은 물에 많이 빠져죽어 '풍덩내'라고 하던 것이 풍덕천이 되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2]

연혁[편집]

  • 1413년 : 용인현 수진면
  • 1895년 : 용인군 수진면 토월리, 신리, 정평리, 풍덕내(풍덕)
  • 1914년 : 용인군 수지면 풍덕천리
  • 2001년 12월 24일 : 수지읍이 수지출장소로 승격함에 따라 풍덕천리를 풍덕천 1, 2동으로 전환함.
  • 2005년 10월 31일 : 행정기구설치조례 의거 풍덕천 2동에서 신봉동이 분동됨.

주요 시설[편집]

교육[편집]

대학교[편집]

고등학교[편집]

중학교[편집]

초등학교[편집]

유적[편집]

  • 현재 진산마을 삼성5차아파트 단지내로 바뀐 임진산에 임진산성(壬辰山城)이 발굴되었고, 풍덕천리성(豊德川里城),예진산성(芮陳山城)으로 불렀다. 유물이 임진산성 유적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진산마을은 임진산이라는 산이름에서 나온 것으로 그 산터에 생긴 마을이라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 최초 기록은 일제강점기의 조선총독부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 “구상(丘上)의 땅을 고른 것으로 주위(周圍) 약 50간 풍덕천진지(豊德川陣址)라 칭한다. 임진역(壬辰役) 일본군이 쌓은 것이라 한다”고 처음 기록되었고 『전국유적목록(全國遺蹟目錄)』과 『문화유적총람(文化遺蹟總攬)』에서도 같은 기록이 존재한다. 임진왜란 당시 용인 광교산 전투에서 조선군이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총통을 비롯한 무기류, 청동기시대의 무문 토기류, 백제시대의 타날문 토기류, 조선시대의 중국제 명문 도자기와 기와류 등이 출토된 복합 유적이다.

교통[편집]

도로[편집]

사진[편집]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2005-08-26 풍덕천 2동 이창우 위원장 화합과 사랑을 앞장서 전달하는 지역의 선봉장”. 2007년 3월 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9월 25일에 확인함. 
  2.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편집부, 국토지리정보원(2008년)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