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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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훈(鮑勛 또는 鮑勳, ?~226년)은 자가 숙업이고, 태산군 평양현 사람이다. 한의 사예교위를 지낸 포선(鮑宣)의 8대손이며, 포신(鮑信)의 차남이다.

생애[편집]

포신은 어려서부터 절개가 있었고, 관대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침착, 강인 하며 지모가 있었다. 대장군 하진(何進)은 포훈을 불러 기도위로 임명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 병사를 모집하도록 했다. 포신은 천여명을 모집하여 성고로 돌아갔지만, 하진은 이미 해를 입은 후였다. 포신은 중앙으로 왔고, 동탁(董卓)도 막 도착했다. 포신은 동탁이 반드시 난을 일으킬 것을 알고, 원소에게 동탁을 습격할 것을 권했지만, 원소(袁紹)는 두려워하며 행동을 일으킬 생각을 못했다.

포신은 다시 군대를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와 병사 2만명과 기병 7백 명,군수물자 5천여 수레를 모았다. 이 해, 조조(曹操)는 처음으로 기오에서 병사를 일으켰고, 포신의 동생 포도(鮑韜)와 모은 병사를 이끌고 조조에 호응했다. 조조는 원소와 함께 표를 올려 포신에게 파로장군을 대행하도록 하게 했고, 한도를 비장군에 임명했다. 당시 원소의 군세가 가장 강성하였으므로 대부분의 호걸들은 그에게로 갔다. 포신은 조조에게 "불세출의 지략으로 영웅들을 통솔하여 난을 진압하고 바르게 할 수 있는 자는 바로 당신입니다. 이런 사람이 아니라면 강할지라도 반드시 망할것입니다. 그대는 하늘이 이끌고 있는 사람입니다." 라고 했다. 면수에서의 패배로 포신은 부상을 입었고, 포도는 전사했다. 포신은 조조에게 "간신이 일어나 왕실을 전복시키므로 영웅들이 충절을 다하여 떨쳐 일어나고 천하 사람들이 호응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바로 정의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원소는 맹수가 되어 권력을 이용하고 이익을 챙기고 있으니 장차 난을 일으키면 또 한 명의 동탁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그를 누르려고 해도 힘으로는 할 수 없고 재난을 구하는 일 또한 성공할 수 없습니다. 황하 남쪽을 살펴 그에게 일이 일어날 것을 기다리십시오." 조조는 그의 말을 들었다.

건안 17년 212년에 조조는 포신의 공적을 기록하고, 표를 올려 포훈의 형 포소를 신도정후로 임명했다. 그리고 포훈을 불러 승상의 연으로 삼았다.

건안 22년 217년에 태자를 세우도 포훈을 중서자로 임명했다. 황문시랑으로 전임되었으며 지방으로 나가서 위군서부도위가 되었다. 태자 곽 부인의 동생은 곡주현의 관리가 되었는데, 관의 베를 훔쳤으므로 법률에 따라 참수하여 시장에 버렸다. 조조는 당시 초현에 있었고, 태자만이 업성에 남아 있었다. 태자는 그를 위해 여러 차례 친히 편지를 써서 죄를 사면해 줄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포훈은 감히 독단적으로 석방시키지 않고 사실대로 상세하게 보고했다. 포훈이 이전에 동궁에 있을 때, 공정한 태도를 고수하며 굽히지 않았으므로 태자는 당연히 좋아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 일이 겹쳤으므로 미워하고 원망하는 것이 더욱 심해졌다. 마침 군의 경계지역에 배치했던 휴가중인 병사로 기한을 어긴 자가 있어 은밀히 중위에게 명하여 상주하도록 하여 포훈을 면식시켰으나 오랜 시간이 지나자, 다시 시어사로 임명했다.

연강 원년 220년에 조조는 세상을 떠났고, 태자가 왕의 자리에 즉위하였으며, 포훈은 부마도위의 신분으로 시중을 겸임했다. 문제가 선양을 받아 즉위하였다.

죽음[편집]

황초 6년 225년 가을에 문제는 오나라를 정벌하려고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크게 논의하도록 했는데, 포훈이 정면을 향하고 간언하였다가 조비의 화를사 즉시 포훈을 치서진법으로 좌천시키고 말았다 하지만, 여러 신하들은 표를 올려서 포훈의 죄를 사면해 줄 것을 청했지만 조비는 받아들이지 않고 결국 사적인 감정으로 처형시켜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