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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5월 7일 (목) 14:29 판

존 칼빈
Jean Calvin
신성 로마 제국 스위스 중앙행정부 외교특사
임기 1544년 12월 29일 ~ 1545년 2월 15일
군주 카를 5세

신상정보
출생일 1509년 7월 10일(1509-07-10)
출생지 프랑스 피카르디
사망일 1564년 5월 27일(1564-05-27)(54세)
사망지 스위스 제네바
경력 개신교 목사 출신 신학자외교관
정당 무소속

존 칼빈(프랑스어: Jean Calvin, [ʒɑ̃ kalvɛ̃], John Calvin, 1509년 7월 10일 - 1564년 5월 27일), 또는 장 칼뱅종교 개혁을 이끈 프랑스 출신의 개혁교회 신학자이며 종교개혁가이다. 기독교 사상 중 하나인 칼빈주의(개혁주의)를 개창함으로써 마르틴 루터·울리히 츠빙글리가 시작한 종교 개혁을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시는데,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라는 독력주의가 핵심이다. 현재 칼빈주의를 따르는 회중 교회, 개혁 교회, 장로교회가 전 세계에 퍼져나가 있다.

논객이자 기독교 변증가로서 많은 논쟁을 벌였고, 필리프 멜란히톤하인리히 불링거 등 많은 종교개혁가들과 긍정적인 내용의 서신들을 교환했다. 저술가로서 《기독교 강요 (1536)》를 썼는데, 이 책은 이후 기독교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역사와 문학등 여러 분야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외에도 다양한 성경 주석이나 신학 논문을 저술했다.

인문주의 변호사로 교육받았으며, 1530년경 로마 가톨릭교회를 저버렸다. 프랑스에서 개신교도에 대한 광범위한 폭력사태로 긴장이 고조된 후, 스위스의 바젤로 피난하여 1536년에 《기독교 강요》 초판을 출판했다. 같은 해에 제네바의 프랑스인 기욤 파렐에 의해 등용되어 제네바로 이동한 뒤, 도착한 한 주 내내 설교하였다. 그러나 시의회는 그들의 주장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거부하였고, 이 둘은 모두 추방되었다. 이후 마르틴 부서의 초청으로 스트라스부르로 나아가 그곳에서 프랑스 난민 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이런 와중에도 제네바에서 벌어지는 개혁 운동을 계속 지지하였고, 결국 1541년에 다시 초대받아 제네바의 교회를 이끌었다.

칼빈은 복귀 후에 몇몇 도시 권력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형태의 교회 정부와 예전을 도입했다. 이 기간 동안 스페인 사람 미카엘 세르베투스가 제네바에 도착했는데, 그는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양측 모두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된 삼위일체론을 주장했다. 따라서 칼빈은 그를 고발했고, 시의회는 그를 화형에 처했다.

그를 지지하는 개신교도 난민들이 도시에 유입되고 새로운 시의회가 구성됨으로써 칼빈의 반대자들은 도시에서 쫓겨났다. 칼빈은 제네바와 유럽 양쪽에서 종교개혁을 추진하는데 말년을 보냈다.

생애

출생과 학창시절(1509년-1536년)

유년과 마르슈 재학시절

장로회신학대학교에 있는 존 칼빈의 동상. 프랑스의 조각가 다니엘 르클레르(Daniel Leclercq)가 제작하였다.

칼빈은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Picardy) 지방의 누아용(Noyon)에서 잔느 르프랑(Jeanne Le Franc)과 제라르 코뱅(Gérard Cauvin) 부부의 네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1] 본명은 주앙 코뱅(Jehan Cauvin)이다. 캉브레의 여관 주인의 딸이었던 모친은 네 아이를 낳고 칼빈이 어릴 때 사망했는데,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칼빈의 부친은 대성당의 공증인과 교회법정의 등록사무관으로 일했으며, 고환암으로 1531년에 사망하였다. 제라르과 잔느 르프랑 사이에는 5명의 아들이 있었다. 첫째 샤를르(Charles)는 로마 가톨릭사제가 되었지만 1537년 이단으로 고발되어 파문된 채 사망했다. 둘째가 칼빈이었고, 셋째인 앙뚜완느(Antoine)는 제네바에서 칼빈과 합류하여 칼빈의 신실한 협력자로 일했다. 그리고 다른 두 명의 동생인 앙뚜완느와 프랑수와(François)는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2]

칼빈이 처음으로 다녔던 학교는 누아용의 소년학교 카페트(Collège des Cappettes a Noyon)였다. 12살에는 성직자의 서기관으로 임명되었고, 가톨릭교회에 헌신하겠다는 의미의 삭발례를 받았다. 그 당시 몽모르(Montmors)가의 후원을 받았다.[3]

1523년 8월, 14세의 칼빈은 몽모르가의 소년들과 함께 학업을 위해 파리로 이주한다. 칼빈은 파리에서 처음에는 리샤르 삼촌의 집에 머물렀으나, 두 달 후에 라 마르슈 학교(College de la Marche)에 정착한다.[4] 거기에서는 마뚜랭 꼬르디에르(Mathurin Cordier)에게 라틴어 문법을 배운다.[5] 꼬르디에르는 아이들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를 사랑해야한다고 가르쳤고, 칼빈은 비록 몇 달밖에 다니지 않았지만 꼬르디에르에게 깊은 인상을 받는다. 그는 이후 1562년에 칼빈의 요청으로 제네바에서 가르침을 이어갔다.[6]

몽떼귀 컬리지

칼빈은 마르슈에서 라틴어 과정을 마친 뒤, 1523년 말 파리 대학교몽떼귀 컬리지로 옮겨와 철학과 수사학 등을 배우며 학업을 이어갔다.[7] 파리에 머무르는 동안 칼빈은 요안네스 칼비누스(라틴어: Ioannes Calvinus)로 개명하여, 이후 사람들에게 존 칼빈(프랑스어: Jean Calvin)으로 알려지게 된다. 몽떼귀에서 칼빈은 인문학자이자 종교개혁에 많은 영향을 준 에라스무스라블레 등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8]

이 기간 동안 칼빈은 프랑수아 1세의 왕실 의사였던 기욤 콥(Guillaume Cop)의 네 아들들과 친분을 쌓는데, 이후 니콜라스 콥이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1528년 파리에서 학업을 시작한 로욜라도 역시 존 칼빈과 비슷한 시기에 이 몽떼귀 학교에 다녔는데, 두 사람이 만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9]

법학 공부

젊은 시절의 존 칼빈

1527년 칼빈의 아버지는 누와용의 교회 참사회와 직무상의 일로 인해 마찰을 빚게 되었다. 그는 교회와의 마찰로 장학금이 취소될 지 모른다는 우려와 아들의 출세를 바라는 마음 때문에 칼빈에게 신학보다는 법학을 공부하라고 권유했다.[11]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칼빈은 1528년 초 무렵 유명한 법학자 피에르 드 레스뚜왈(Pierre Taisan de l'Estoile)이 강의하는 오를레앙 대학교로 옮겼다.[12] 이 기간에 사귄 다른 친구들로는 프랑수아 다니엘, 프랑수아 드 코낭, 니콜라 뒤쉐멩 등이 있다.[13] 1528년에는 사촌인 피에르 로베르 올리베탕에 의해 종교개혁을 접하게 된다.[14] 이후 1529년 여름, 칼빈은 친구 프랑수아 다니엘(François Daniel), 니꼴라 뒤쉐맹(Nicolas Duchemin)과 함께 부르주 대학교로 옮겨가 안드레아 알치아티의 강의를 들었다.[15] 칼빈은 부르주에서 8개월간 머무르며 신약성경 연구에 필수적인 코이네 그리스어를 배웠다.[15]

칼빈은 1531년 3월 니꼴라 뒤쉐맹의 《반박문Antapologia》을 가지고 파리로 돌아갔다. 그는 1531년 3월 6일에 이 책의 서문을 썼는데, 이는 칼빈의 첫 출판물이 되었다.[16] 칼빈은 파리에 머무는 동안 아버지가 매우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누와용으로 달려가나, 제라르는 1531년 5월 26일에 사망한다. 사망하기 2년 전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제라르가 파문되었기 때문에, 칼빈의 형 샤를르는 아버지를 교회 묘지에 매장하기 위해 교회의 참사회와 협상해야 했다. 파리로 돌아간 칼빈은 포르떼 대학(Collège Fortet)에 정착하여 히브리어를 공부하였다. 여기서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을 알게된다.[17] 이후 1532년, 법률 자격(licencié ès lois)을 취득한 뒤 4월 4일에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의 《관용에 관하여De Clementia》를 주석하여 출판한다.[18] 오를레앙에는 5월에 되돌아와 법률 공부를 마친 뒤 1533년 10월에 파리로 돌아간다.

개종

칼빈은 법학 공부를 하던 1529년 말에서 1530년 초에 개종의 기미를 보이다, 이후 1533년의 연설문에서 직접적인 증거를 보인다.[19] 칼빈은 자신의 개종에 대해 상반된 묘사를 두어번 했는데, 그중 첫 번째는 시편 주석에서 나타난다. 여기서는 신이 불러온 갑작스러운 마음의 변화로 개종하게 되었다고 기록한다.

하나님은 갑작스런 개종으로 나를 복종시키시고 내 마음을 온순한 틀로 이끌어 주셨는데, 이는 내 생애 초기에 기대했던 것 보다 그런 부분에서는 더욱 단단한 것이었다. 진정한 경건함에 대한 미각과 지식을 어느 정도 받은 고로, 나는 즉시 진보하고자 하는 열망에 불타올라 비록 다른 학문을 완전히 중단하지는 않았지만 이전보다는 덜 열정적으로 그것들을 추구했다.[20]

두 번째 증언에서는 내면의 혼란의 긴 과정을 묘사했는데, 정신적, 심리적 고뇌도 엿보인다.

괴로움 속에 빠져들어 몹시 불안해했고, 영원한 죽음의 비참함에 대해선 더욱 불안해했습니다. 의무감에 묶여 지난 삶을 비난하며, 저를 당신의 길로 가게 해달라고 처음으로 신음과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오 주여, 이 가련한 자에게 남아있는 것은 방어막이 아니라, 무서운 말씀으로 저를 심판하여 황야로 버리지 말아달라고 간곡히 비는 것 뿐이온데, 마침내 당신은 놀라운 선하심으로 나를 인도해내셨사옵니다.[21]

학자들은 이러한 상반된 증언들의 정확한 해석에 대해 논쟁한 결과, 대부분의 사람들은 로마 가톨릭교회를 떠난 것과 개종 시점이 대체로 일치한다는 것에 동의한다.[22][23] 이 두 증언은 상반된 것이 아니라 기억의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24]

기독교 강요

존 칼빈의 석판화, 추정 1830년

1533년 11월 1일, 니콜라스 콥파리 대학교 학장 취임식에서 기독교 철학, 법과 복음의 관계 등을 들어 로마 가톨릭교회의 개혁의 필요성에 대한 취임사를 펼친다. 루터의 사상이 드러나는 이 연설문은 곧 프랑스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되었는데, 바로 이 연설문을 칼빈이 작성했다.[25] 교직원들은 이를 이단적이라고 비난했고, 파리 국회는 연설 내용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이후 니콜라스 콥은 소환당하기 전에 바젤로 도망친다. 프랑수아 1세는 “저주받은 루터 이단”을 박해하기로 결심했다. 콥의 연설문을 쓴 칼빈도 이듬해 책과 편지들을 남겨 둔 채 체포되기 전에 도시를 몰래 빠져나가 1533년 말 혹은 1534년 초 즈음에 파리 남부의 생통쥬 지방으로 이동한다. 칼빈은 샤를르 데스뻬비여(Charles d'Espeville)라는 가명을 사용하면서 1533년 12월부터 1534년 4월까지 클레교구 목사이자 앙굴렘에 있는 개신교 교회의 참사회원이었던 루이 뒤 티에(Louis du Tillet)의 집에 머무르며 《기독교 강요》 초판을 구상하였다.[17][26] 또한 당시에는 25세가 됐을 때 교역자가 되지 않으면 교회의 봉급을 받지 못하는 것이 관례였으므로 이를 포기한다.[27]

칼빈은 위험을 무릅쓰고 파리에 있는 에띠엔느 드 라 포르쥬(Étienne de la Forge)의 집에서 하숙을 한다. 플람스의 설교자이자 유명한 재세례파 지도자인 깡뗑 티프리(Quintin Thieffry)도 여기서 만난 것으로 보인다. 파리에서 약학을 공부하고 있었던 미카엘 세르베투스는 칼빈을 만나고 싶어 했지만, 세르베투스가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아 만남은 성사되지 못한다. 칼빈은 뒤 티에와 함께 끌레를 경유하여 푸아티에에 있는 지지자들에게 갔다. 그리고 칼빈은 그 곳 도시 외곽 생브누아에서 설교를 하기도 했다. 칼빈은 푸아티에를 떠나 뒤 티에와 함께 오를레앙을 여행하며 《영혼불멸Psychopannychia》을 집필했다.[17]

1534년 10월 17~18일 밤, 벽보 사건이 일어남에 따라 프랑수아 1세가 조치를 취해 11월에는 수백 명이 체포되어 몇 달 동안 많은 사람이 처형되었는데, 그 중에는 칼빈의 후원자이자 절친한 친구인 라 포르쥬도 포함되어 있었다. 파리의 반 개신교 정서는 점점 더 험악해져 갔다. 1535년, 칼빈과 뒤 티에는 개신교에 대한 탄압을 피해 스트라스부르를 거쳐 종교개혁가 요하네스 외콜람파디우스의 보호를 받고 있는 도시인 바젤로 갔다.[28][29][30]

칼빈은 바젤에서 마르티아누스 루카누스(Martianus Lucanus)라는 가명으로 지내며 외콜람파디우스의 후계자 오스발트 미코니우스(Oswald Myconius)와 스트라스부르의 목사인 볼프강 카피토 등과 교제하였다.[31] 칼빈은 이 외에도 학자 세바스티안 뮌스터, 변호사 보니파키우스 아메르바흐, 미래의 제네바 동지인 피에르 비레 등과 친분을 쌓았다. 1535년 6월 4일에는 올리베땅에 의해 불어 성서 번역본이 출판되었는데, 라틴어로 된 추천사는 칼빈이 직접 작성한 것이었으며, 신약성경 첫 페이지 앞에 달린 두 번째 추천 서문은 익명이었지만 1545년 이후부터는 칼빈의 것으로 간주된다. 칼빈은 이 번역본의 개정 작업에도 참여했다. 이 기간에 칼빈은 고대 교회의 교부중 한 명인 크리소스톰 주교의 설교집에 추천 서문을 썼으며 《기독교 강요》의 작업도 계속하여 1535년에는 책을 완성시킨다.[17] 칼빈은 이 책을 프랑스의 국왕 프랑수아 1세에게 헌정하였다. 《기독교 강요》의 라틴어 초판은 1536년 3월 바젤에서 출판되어 빠르게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는데, 이 작품으로 칼빈은 종교개혁을 주도하게 되었다.[32] 1536년 2월에는 하인리히 불링거 와도 사귀게 되었다.[33] 에라스무스는 1535년 6월 바젤에 정착하여 이듬해 7월 12일에 사망하는데, 칼빈이 그를 만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망명

기독교 강요》가 출간되기 바로 직전인 1536년 2월, 칼빈은 이전에 사용했던 샤를르 데스뻬비여라는 가명으로 루이 뒤 티에와 함께 이탈리아로 여행했다. 이 때 국왕 루이 12세의 딸이자 프랑수아 1세의 친척인 레나타(Renata, Renée) 공작 부인의 페라라 궁정에서, 같은 개혁사상을 가진 사람들과 수 주간 머무른다.[34][35][36] 페라라에서 칼빈은 프랑스로부터 피신해 온 개신교도들과 만났는데, 그 중에는 프랑스의 시인 클레망 마로도 포함되어 있었다.[37]

칼빈과 뒤 티에는 아오스타를 거쳐 바젤로 돌아왔다. 망명객의 귀환을 허용하나 6개월 안에 공개적으로 이단과 관계를 단절해야만 한다는 내용의 특별 사면령이 프랑스에서 공포되자 칼빈은 곧장 프랑스로 돌아갔다. 파리에 있는 친구들을 방문한 뒤, 프랑스를 영원히 떠날 것이라는 예감이 들자 물려받은 누아용의 토지를 처분하고, 남동생 앙뚜완느, 여동생 마리와 함께 바젤을 떠난다.[38] 칼빈은 자유제국도시였던 스트라스부르로 가서 조용히 공부를 마칠 계획이었으나, 제6차 이탈리아 전쟁이 발발하자 군대의 이동을 피해 제네바로 우회하기로 결정한다.

첫 번째 제네바 체류 시절(1536~1538년)

칼빈을 제네바에 머울도록 한 기욤 파렐.

제네바는 1526년 사보이아 공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후 베른프라이부르크의 주들과 시민연대라 불리는 상호 방위 동맹을 맺은 뒤, 1536년에는 약 만 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도시로 성장한 상태였다.[39]

그러나 제네바주교인 피에르 들 라 봄(Pierre de La Baume)은 자신을 지원하는 사부이아 공작의 영향력을 제네바에서 회복시키고자 노력하였다. 한편, 1532년 이후 개신교 주가 된 베른을 계기로 삼아 기욤 파렐과 그를 돕던 사람들은 1532년 10월 이래 줄곧 제네바종교개혁운동을 도입하려고 노력하였다. 결국 베른의 도움으로 제네바는 사보이아 공작과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영향에서 완전히 독립하는 데 성공한다. 1536년 5월 21일에 제네바의 모든 시민은 파렐의 지휘 아래 종교개혁을 수용하기로 서약한다.[40]

1534년 공식적으로 제네바의 목사가 된 파렐은 칼빈이 제네바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제네바에 남아서 이 도시의 개신교 부흥을 도와 달라고 간청한다. 칼빈은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결국 승낙하는데, 이후 이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그러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열성적으로 일하고 있던 파렐은 나를 성 안에 가두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내가 변두리에서 개인적인 공부를 계속하려 한다는것을 깨닫고, 간청하여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서는 저주하면서 되돌아갔는데, 그토록 큰 도움이 필요한 때에 내가 돕는것을 망설이면 하나님은 나의 평화를 틀림없이 저주하실 것이라고 말했다.[41] 그의 말에 겁을 먹고, 나 자신의 소심함과 비겁함을 의식한 뒤 나는 여행을 포기하고 내 신앙을 변호하기 위해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재능이라도 사용하고자 하였다.[42]
 
— 칼뱅, 《시편 주석》 서문

칼빈이 파렐의 제안을 받아들일 당시에는 아무런 기반도 없던 상태였다.[43] 칼빈은 바젤로 되돌아가서 몇 가지 일을 처리하고 난 후, 1536년 9월 5일 이전 어느 시점부터 제네바의 생 피에르 성당에서 바울 서신들을 강해하는 성경교사(reader)로서의 임무를 시작한다.[44] 1537년에는 목사 안수를 받은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목사로 활동했다는 기록이 발견된다.[45] 이로써 그는 법률가임에도 불구하고 세례, 결혼, 목회를 수행하게 된다.[46]

칼빈은 그 해 10월, 파렐과 삐에르 비레와 함께 로잔에서 열린 공개 종교 토론에 참석하는데, 교부들에 대한 지식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다. 일설에 의하면 칼빈은 히포의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의 글을 책 페이지와 줄 수까지 정확하게 인용할 정도로 대단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제네바로 돌아가기 전에 베른에서 열린 또 다른 종교회의에 참석했다.[47]

1536년 말, 파렐은 신앙고백의 초안을 작성했고, 칼빈은 제네바 교회 재편에 대한 글을 썼다. 1537년 1월 16일, 칼빈과 파렐은 작성한 글을 갈음하여 《교회의 조직과 제네바 예배에 관한 연구Articles concernant l'organisation de l'église et du culte à Genève》을 시의회에 제출한다.[48] 이 글에서 성찬식의 빈도와 방식, 이유와 방법, 파문, 신앙고백의 요건, 전례에서 회중창의 사용법, 결혼법 개정 등이 기술되어 있었다. 의회는 당일에 그 글을 받아들였다.[49]

그러나 해를 거듭할수록 시의회는 칼빈과 파렐을 멀리하기 시작한다. 시의회는 지금까지 신앙고백을 한 시민들 중 소수만이 요건을 충족했기 때문에, 신앙고백의 요건을 강제하는 것을 꺼렸다. 11월 26일, 칼빈과 파렐, 두 교역자가 이 문제를 놓고 의회에서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는 제네바와 동맹을 맺고자 한데다가 이 둘이 모두 프랑스인이었기 때문에 의원들은 그들의 충성심을 의심한다. 마침내 스위스 교회개혁의 동맹국인 베른시가 교회 의식을 일치시키자고 제안함으로써 갈등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 제안은 무교병으로 성찬을 행하자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두 교역자는 베른의 제안을 거부했고, 결국 취리히 교회회의가 소집되어 최종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 규칙은 적용되지 않았다. 의회는 칼빈과 파렐에게 부활절 성찬을 위해 무교병을 사용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 둘은 이에 항의하여 부활절 예배에서 성찬식을 하지 않았는데, 이로 인해 예배가 진행되는 동안 소요가 일어나 결국 다음날인 1538년 4월 25일, 의회는 칼빈과 파렐에게 제네바를 떠나라고 명령한다.[50]

이 둘은 이후 베른과 취리히에 들려 무죄를 주장한다. 이에 따라 열린 취리히 교회회의에서, 베른으로 하여금 제네바와 이 둘 사이를 중재하도록 한다. 그러나 결국 이 둘은 제네바에게 거부당한 뒤, 바젤로 돌아간다. 몇 주 후 파렐은 뇌샤텔의 교회에 부임했으나, 칼빈은 바젤에 남아서 공부에 전념한다. 이 때 마르틴 부서볼프강 카피토가 스트라스부르로 와 줄 것을 제안하나, 칼빈은 파렐도 함께 가야한다며 처음에는 거절한다. 그러나 1538년 9월에 스트라스부르로 이동하고, 몇 달 뒤 시민권을 획득한다.[51]

스트라스부르 체류 시절(1538~1542년)

칼뱅이 1538년에 부임한 스트라스부르 세인트 니콜라스 교회. 19세기에 재건축되었다.
제네바에서 추방된 칼뱅을 스트라스부르로 초대한 마르틴 부서.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동안 칼빈은 한 교회에 특별히 머물지 않고 세인트 니콜라스 교회와 생마들랭 교회, 구 도미니코 수도회 소속 교회였던 뇌프 사원에 순서대로 임직한다.[52] 이후 4~500명가량 되는 교회의 목사로 부임하여 매 주일 두차례 설교한다. 매달 성찬식을 거행하였으며, 시편의 회중합창을 장려하였다.[53] 그는 또한 《기독교 강요》 2판의 작업을 시작하는데, 기존의 문답체가 마음에 들지 않던 참이었다.[54]

1539년, 칼뱅은 문답식이었던 기존의 책을 핵심교리를 체계적으로 나열하는 식으로 개편한다. 이 때 총 6권이었던 책을 7권으로 확장하는데, 순수 분량은 거의 3배 가량 늘어났다.[55] 또한 같은 시기에 《로마서 주석》도 작업하여 이듬해 3월에 출판한다. 이 책에서 칼빈 후기 주석서의 주석법과 전개법의 전형이 나타난다. 불가타 성경을 가져다 쓰는 대신 헬라어 구절을 직접 번역하였다.[56] 칼빈은 헌정서에서 전임자 필리프 멜란히톤, 하인리히 불링거, 마르틴 부서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자신의 작품과 그들의 작품을 구별하며 비평하였다.[57] 또한 이 기간에 여럿의 부탁으로 평신도들에게 성만찬의 의미를 설명하는 내용의 《성만찬 소고Treatise on the Lord's Supper》도 작성하여 1541년 제네바에서 출판한다.[17][58]

이 때 주변에서 결혼할 것을 제안하는데, 칼빈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장한다.

나는 독신주의를 반대하는데, 아직 결혼하지 않았고 아마 앞으로도 안할지도 모른다. 내가 아내를 맞이한다면, 수많은 염려에서 더 해방되어 주님께 헌신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59]

여러 명의 신부 후보가 나타났는데, 그중에 귀족 영애가 한 명 있었다. 칼빈은 그녀가 프랑스어를 배운다는 조건으로 결혼을 계획한다. 1540년 3월 결혼 날짜가 잡혔지만, 칼빈은 달갑지 않아했기 때문에 결국 결혼식이 열리는 일은 없었다. 그는 나중에 "주께서 나의 지혜를 완전히 가져가지 않으시는 한" 결혼할 생각은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라 쓴다.[60] 대신 그해 8월, 두 아이가 있는 미망인 이델레뜨 드 뷔르와 결혼한다.[61]

제네바는 칼빈에 대한 제명을 재고했다. 베른과 제네바가 땅을 놓고 다투면서 동맹은 무뎌지고, 교인은 줄어들었다. 야코포 사돌레토 추기경은 제네바 시의회에 가톨릭으로 돌아올 것을 간청하는 편지를 썼고, 시의회는 이에 대응하기 위한 교계 고문을 물색한다. 피에르 비레가 처음 자문을 부탁받았으나 거절하자 의회는 칼빈을 찾아간다. 당시 제네바에는 파렐과 칼빈의 후원자인 기에르멩(Guillermin)파가[62] 있었는데, 여기에 속한 마뚜랭 꼬르디에르와 아미 페렝 등은 새로 부임한 목사들을[63] 마음에 들지 않아하던 참이었다.[17] 칼빈은 이를 승낙하여 《사돌레토에게 보내는 편지Responsio ad Sadoletum》로 교회 개혁에 관한 제네바 입장을 강하게 옹호했다.[64]

2월에 아르띠뀔랑(Articulants)[65]파와 기에르멩 파는 서로간의 의견 차이를 극복했고, 칼빈은 제네바에서 자신을 돌아오게 하기 위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17] 1540년 9월 21일, 시의회는 기에르멩 파인 시의원 아미 페랭에게 칼빈을 소환할 방법을 찾도록 명령한다. 한 대사가 칼빈이 보름스에서 종교 대담을 하는 동안 그에게 도착한다. 그러나 칼빈은 이 제안에 대해 하루에도 천 번씩 죽었던 그 십자가(제네바의 1차 체류) 위에 있기보다는 차라리 다른 식으로 백 번 죽는 게 낫다는 식의 공포어린 반응을 보인다.[66] 그러나 10월 24일에 파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그러나 제 자신의 주인이 제가 아님을 알기 때문에 저는 제 심장을 도려내어 희생 제물로 주님께 바칩니다.
 
— 칼뱅, 파렐에게 보낸 1540년 10월 24일자 편지[67]

부서와 칼빈이 다음 단계를 결정하기 위해 제네바를 방문할 계획을 세우는 6개월간, 피에르 비레가 제네바에서 임시로 종교 고문을 맡는다. 시의회는 1541년 5월 1일에 만장일치로 칼빈을 다시 청빙하고, 결국 1541년 초에 스트라스부르는 칼빈을 제네바에 6개월 동안 빌려주기로 결정한다. 칼빈은 1541년 9월 13일 공식 호위와 마차를 가지고 제네바로 귀환한다.[68]

두 번째 제네바 체류 시절(1542년-1564년)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1597

당초 칼빈은 제네바에 임시로 머물 계획이었다. 하지만 제네바 시의회가 자신의 제안대로 교회법 초안을 작성하겠다고 결정하자 최선을 다해 언제나 제네바의 종이 되겠다고 약속해버렸다. 여섯 명으로 구성된 시의회와 칼빈, 그리고 또 다른 네 명의 제네바 목사들은 새로운 교회법을 작성하기 시작했고 9월 26일 새로운 안을 시의회에 제출했다. 비록 칼빈의 생각이 모두 포함된 것은 아니었지만 1541년의 교회법은 제네바 시의회의 승인을 받았다. 이 교회법은 1547년에 증보되었으며 1561년에 상당 부분 수정되었다. 그동안에 칼빈의 부인이 제네바로 오는 일정과 짐을 옮기는 일정이 잡혔다. 그리고 칼빈은 다시 제네바의 목사직을 맡기로 했다. 자신이 돌아온 후 첫 예배 시간에 사람들은 그가 무슨 말을 할지 많은 기대와 관심을 모았지만 칼빈은 과거에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고 단지 직분자로서의 의무에 대해서만 말했다. 그리고 1538년에 중단되었던 성경 본문에서부터 다시 강해 설교를 시작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은 단지 직무상의 중단이었음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1542년 7월 28일 칼빈과 이델레뜨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 이름은 자크(Jacques)였다. 하지만 조산아였던 자크는 오래 살지 못하고 죽었다. 이델레뜨 역시 1549년 3월 29일에 세상을 떠났다.

칼빈은 아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살아생전에 그녀는 나의 직무를 완성시키는 조력자였습니다. 그녀는 아주 사소하게라도 나의 길을 방해한 적이 없습니다.
 
— 칼빈, 삐에르 비레에게 보낸 4월 7일자 편지


교회법이 제네바 시의회에서 승인된 다음날인 1541년 11월 21일에 시민법을 제정하기 위해 시의회는 세 명으로 구성된 소위원회 위원을 임명했다. 칼빈도 이 위원회의 일원이었다. 1543년 1월 28일에 제네바 총회는 재판에 관한 사항을 제외하고는 시민법을 채택하였으며 그 제외된 부분도 1544년 초에 채택되었다. 교회법을 개정하고 시민법을 제정하는 등 칼빈의 귀환은 시의 여러 가지 행정들을 처리하려는 진지한 노력으로 이어지기는 했지만 문제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먼저 시의회와 교회의 역할을 정의해야 하는 문제, 또 그 도시에 새로이 도입된 엄격한 생활방식에 반대하는 사람들과 관련된 문제를 들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구 제네바 시민들인 '제네바 출신들'과 점점 하나가 되어 이 도시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들에 반대하는 당을 형성했다. 제네바에 새로 도입된 더욱 엄격한 생활방식에 대해 저항이 있었음을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다.

카드 제조사의 사장을 역임하고 소의회의 일원이었으며 포병대 대위인 삐에르 아모의 아내가 1545년 1월에 비도덕적인 행동으로 인해 비난을 받게 되었다. 결혼 생활은 끝이 났고 아모는 재혼을 허가 받았다. 1546년 1월 26일 아모는 칼빈이 자신의 최근 이혼 소송에서 반대한다는 확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칼빈의 교리와 생활을 강력하게 비난했다. 아모는 체포되었다. 소의회는 온건한 처벌을 내려야 할지 아니면 강력한 처벌을 내려야 할지 선택을 하지 못해 결국 이 문제를 200인 의회에 상정했다. 1546년에 춤을 금지하는 법을 위반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문제는 칼빈이 제네바에 도착하기 훨씬 전에 제기되었던 것이다. 이 일에 관련된 사람들 중에는 시장관인 앙블라르 꼬르느(Amblard Corne)와 포병대 대장인 아미 페렝이 포함되어 있었다. 교회치리회에서 페렝의 아내는 치리회 회원들을 향해 폭언을 퍼부었는데, 그들이 자기 집안인 파브르 가문(the Favres)에 대해 뭔가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교회치리회 회원들은 그녀 아버지의 간통 문제에 대해서도 일련의 조처를 취하게 되었다. 1546년 8월에는 페렝-파브르 가문과 더 많은 문제들이 발생했다. 아벨 푸팽(Abel Poupin)이 집례한 아미 페렝의 친척 결혼식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질문을 듣고 있지 않던 신랑이 “예”라는 대답 대신 머리를 내저어버렸다. 곁에 서 있던 아미 페렝은 웃어버렸고 이 둘은 시의회로부터 처벌을 받았다. 게다가 페렝 부인의 삼촌은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결혼식 전날에 페렝의 어머니는 싸움을 하던 중에 가족 한 사람을 때려서 문제를 일으켰다. 그녀는 교회치리회 앞에 나타나기로 되어 있었지만 달아나 버렸다.

1547년 9월 20일에 시의회 회의석상에서 아미 페렝은 자기 아내와 장인의 수감과 관련하여 시의회를 신랄하게 공격했다. 페렝 역시 체포되었고 10월 9일에는 그의 의장으로서의 직분이 박탈되었다. 그에 대한 소송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다음과 같은 고발이 접수되었다. 5월에 베른 대표로 파리에서 열린 앙리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한 페렝은 그곳에서 황제 칼 5세의 공격에 대비하여 베른과 제네바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수백의 기마병 지휘권을 페렝에게 주겠다는 추기경 뒤 벨레(Du Bellay)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베른은 페렝을 지지했으며 페렝을 고발했던 로랑 메그레(Laurent Maigret) 역시 페렝이 파리에 있던 바로 그 시기에 프랑스 왕실의 도움을 얻고자 했음을 폭로했다. 메그레도 체포되었다. 시의회 내에서의 토론은 격렬해졌다. 11월 29일에 페렝은 증거 부족으로 석방되었으나 메그레는 감옥에 남겨졌다.

1548년 가을에 칼빈은 또 한 번의 시련을 겪게 되었다. 칼빈은 로잔에서 카인(Cain)이라 불리고 있었고 곧 제네바에서 축출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리고 11월 선거에서 칼빈의 대적들이 승리했다. 이제 그들은 사법부와 관련된 주요 관직을 차지하게 되었다. 칼빈은 다가오는 시 장관 선거가 시 정부 내에서 완전한 개혁을 창출하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 1549년 1월 18일에 시의회는 포고문을 발표하여 시 전체에 복음을 따라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종교법을 지키도록 요구했다[69]. 모든 사람에게 기독교적인 생활을 준수하며 교회 예배에 충실히 출석하라고 간곡히 권고했다. 규정 준수 여부를 감독하던 사람들은 임무를 책임감 있게 수행해야만 했다. 지도자의 위치에 있던 사람들은 모범을 보이도록 요구되었다. 목사들의 직위 해제는 조심스러우면서도 신중히 처리하도록 했다. 포고문은 그 다음 예배 전에 공포되어야 했다. 칼빈이 염려한 대로 1549년 2월에 아미 페렝은 수석 시 장관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1555년 2월에 거행된 선거는 칼빈의 추종자들에게 완전한 승리를 안겨다 주었다. 4명의 시 장관 모두 칼빈을 지지하였으며 페렝의 추종자들인 제네바 출신들은 모든 정치 일선에서 영향력을 잃어 버렸다. 그 다음 달에 다수의 프랑스 망명객들(약 50명)이 제네바 시민권을 취득했다. 페렝 가문을 포함한 오랜 제네바 가문들은 많은 프랑스 망명객들이 자신들의 도시에 정착하는 것을 수용할 수 없음을 차츰 깨닫게 되었다.

1555년 5월 6일 시의회는 시민권을 획득한 프랑스 망명객들에게 10년 동안 선거권을 허락 하지 말고 무기 소지를 금하자는 페렝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 요구안을 지지하기 위해 500명이나 되는 시민들이 5월 16일에 시위 집회를 가졌으며 이 시위를 마칠 때 다수의 시위대가 제네바 출신들의 지도자들로부터 식사를 제공받았다. 그날 밤 거리에서는 폭동이 일어났으며 시 장관 오베르가 누군가를 체포하려 하자 페렝이 자기 수하의 간부를 낚아채 갔다. 다음 날 조사가 진행되어 5월 23일에는 주동자 몇 명이 체포되었다. 다음날 소의회와 대의회는 페렝의 사건에 착수하였지만 그는 체포되기 전에 다른 세 명과 함께 도시를 빠져나갔다. 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 중 12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이들 중 세 명에게는 형이 집행되었으며 나머지는 망명했다. 베른 시의회는 그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나섰으며 부재중에 형을 선고받은 사람들의 안전을 보장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들 중 한 명인 프랑수아-다니엘 베르뗄리에르 제네바로 돌아왔는데,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9월 2일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페렝 파의 종말을 초래했다.

1555년 5월에 페렝 파의 패배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로 칼빈은 편지에 제네바의 상황들을 언급하는 일이 거의 없게 되었다. 이로써 제네바 도시와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 목숨을 건 칼빈의 기나긴 투쟁은 결국 칼빈의 승리로 일단락되었다. 제네바에서의 투쟁이 끝나자 칼빈은 또한 주변국가의 교회 일에 좀 더 깊이 연루되었다.

말년

53세 무렵의 존 칼빈
칼빈의 묘소라 알려진 무덤. 실제 그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1555년 5월 칼빈의 반대파들이 제네바에서 떠나간 후, 종교개혁자들이 그 이전보다 갈등이 훨씬 줄어든 시기에 들어서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1556년부터 그의 건강은 쇠약해져 갔다. 엄청난 노력과 그의 동생 앙뚜완느의 도움으로 《기독교 강요》의 새로운 판을 준비할 수 있게 되기는 했지만 칼빈은 1558년~1559년의 겨울 동안 심하게 앓았다.

1559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칼빈은 제네바 시민권을 얻었다. 1559년 6월 5일 #제네바 아카데미가 개원할 때 그는 어느 정도 회복되어 여러 가지 활동에 참여했지만 1564년 초에 그의 좋지 않은 건강 탓에 그 활동 중 대부분을 포기해야 했다.

1564년 2월 2일에 에스겔서를 인용하며 칼빈은 마지막 강의를 했고 2월 6일 마지막 설교를 했다. 4월 27일에 칼빈은 시 장관들과 소의회의 의원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싶어 했다. 그들은 칼빈이 자신들에게 오는 것을 원치 않았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칼빈의 집으로 찾아 갔다. 칼빈은 그들을 반갑게 맞이하여 담소를 나누었다. 칼빈은 그들의 우정에 감사를 표했으며 비록 자신이 부족한 점이 있기는 했어도 하나님께 봉사하며 이 도시를 위해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하나님이 하신 것처럼 자신의 결점을 참아 준 그들의 인내에 감사한다고 말하고 그가 실패한 일들에 대해 유감을 표했다. 칼빈은 그들에게 공적인 삶에서 하나님의 명예를 추구하라고 당부했다. 그런 후 개인적으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다음날 자신을 대신할 사람으로 선택된 베자를 추천하면서 칼빈은 목사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그 후 칼빈은 다수의 친구들과 주요 인사들의 방문을 받았다. 5월 2일에 마지막 이별의 짧은 편지를 보낸 연로한 파렐도 칼빈을 방문했다. 5월 19일에 목사들이 그의 집에서 정기적인 주간 모임을 가졌을 때 칼빈도 마지막으로 그들과 함께 했다.

1564년 5월 27일에 그는 사망하였고 다음 날 매장되었다. 칼빈은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고 숭배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그의 무덤조차 알기 어렵다.

제네바 아카데미

스위스 제네바 대학

제네바 아카데미는 제네바 대학의 전신이다. 제네바 아카데미는 1559년 6월 5일 칼빈을 의장으로 하여 생 피에르 교회(St. Pierre Cathedral)에서 열린 집회를 통해 개교했다. 이미 칼빈이 스트라스부르에서 돌아온 직후인 1541년에 학교를 세울 계획을 갖고 있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1555년에 제네바에서의 정치적 상황들이 변할 때까지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대학설립을 위해 먼저 새로운 건물이 필요했다. 1558년 초 부르드푸(Bourg-de-Four) 병원 근처에 적당한 장소를 물색했다. 하지만 건축을 할 수 있는 정부의 재정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칼빈은 상당한 액수의 기부금을 모금하는 일을 관장했다.

칼빈과 다른 목사들은 교육 계획안을 만들었고 승인을 받기 위해 시의회에 제출했다. 새로운 대학에서 기존에 있던 라 리브 학교는 7학급의 사립초등학교가 되었다. 처음 두 학급에서는 아이들이 불어와 라틴어 쓰기 읽기를 배웠다. 그리고 다음 학급에서는 라틴어와 그리스 작가들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독해 영역과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말로 표현하는 영역을 특별히 강조하였다. 수요일에는 수업이 없었다. 아침에 학생들은 교회에 갔으며, 오후에는 휴식 시간을 가졌다. 토요일에는 학습했던 내용을 복습했으며, 다가오는 주일을 위해 교리문답을 공부했다. 학습을 시작하는 날이 되면 교리문답에 있는 기도로 (특히 학교를 위해) 시작했다. 기도와 시편 찬송은 학습 시간표에 고정적으로 들어 있었다. 학생들은 또한 주기도문 암송과 사도신경, 그리고 십계명을 배웠다. 교사들은 목사들과 교수들에 지명되었으며, 시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사립초등학교에 출석하던 학생들은 시립중등학교(schola publica, académie)에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는데, 이 학교는 그다지 보편적이지 않은 형태의 기관이었다. 등록한 학생은 제네바 신앙고백서에 서명하고 교사들과 같은 방식으로 임명된 5명의 교수가 가르치는 27개의 강의 과정을 수강하였다. 히브리어 교수는 히브리어 주석을 이용한 구약성경 해석으로 학생들에게 히브리어를 가르쳤다. 그리스어 교수는 그리스 철학자(특별히 윤리학이 주목을 받았다)와 시인의 글을 학생들과 함께 읽었다. 인문학을 담당하던 교수들은 자연과학, 수학, 그리고 웅변술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는데, 특히 마지막 과목은 목사나 변호사를 준비시킨다는 생각을 가지고 가르쳤다. 토요일 오후에는 실제적인 신학 훈련에 중점을 두었다. 몇몇 목사들의 지도 아래 학생들은 설교를 발표하고 평가를 받았다. 이미 언급한 교수들 외에도 성경해석을 위한 두 명의 교수가 있었다. 대학 초창기에는 칼빈과 베자가 이 자리를 채웠다. 교수들은 금요일에 있던 목사회에도 참석했다. 포도 수확 철에는 3주간 방학했다.

1559년 6월 5일 생 피에르 교회에서 이 도시의 비서관 미셸 로제(Michel Roset)가 대학의 규정들을 크게 낭독하고 교사들이 그 법률과 신앙고백서에 동의하기로 맹세한 뒤 목사들이 시의회에서 대학 학장으로 추대한 베자가 개막 연설을 했다. 대학이 자리 잡은 건물은 1564년에 가서야 완공되었다. 이 때에는 약 1,500명의 학생들이 있었으며 그들 대부분은 외국에서 온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신학이나 법률 중 한 과목을 공부할 수 있었다.

칼빈과 세르베투스

세르베투스

칼빈 생애에서 많은 논란을 일으키는 게 세르베투스의 처형에서 칼빈 역할이다. 세르베투스1530년 《De Trinitatis Erroribus》(삼위일체의 오류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하였다. 거기서 그는 삼위일체의 존재 방식은 "머리 셋 달린 Cerberus(신화 속의 동물)이며, 아우구스티누스의 망상이고, 마귀의 착상이다"라고 했다. (삼위일체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교리이다.) 이러한 세르베투스의 주장을 사람들은 알고 있었고, 칼빈 역시 알았다. 세르베투스는 1534년 칼빈과 파리에서 만나 토론하자고 제의했고 칼빈은 수락했지만, 세르베투스는 까닭 없이 나타나지 않았다.[70] 그 당시 이교도들에 대해 무자비했던 로마교회를 두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1533년에 이미 세르베투스는 스페인 종교재판소에서 공석 상태로 사형을 선고받았다.[71]

1546년에 세르베투스가 칼빈에게 편지를 보냄으로써 약 2년간 계속 서신을 교환했었다. 첫 편지에서 세르베투스는 "Michel de Villeneuve"라는 필명을 사용하였다. 논쟁은 뜨거웠고, 세르베투스는 온갖 모독을 하였다. 심지어 세르베투스는 자기 신변을 보장해 준다면 칼빈이 있는 제네바에 가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칼빈은 거절했다. 한 편지에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당신을 미워하지도 경멸하지도 않습니다. 또 탄압 받게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바른 교리를 그토록 후안 무치하게 모욕하는 것 앞에서 저는 강철과 같이 굳세게 맞설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칼빈이 편지를 그만 쓰겠다고 전함으로써 서신 교환은 끝나게 된다.[72]

이 당시 칼빈은 《기독교 강요》를 발표하였다(라틴어 초판은 1536년, 프랑스어 초판은 1541년에 나왔다). 1553년 세르베투스는 이에 대한 반론격인 《기독교 회복》을 출간하였다. 그는 로마교회와 개혁교회를 모두 반대하였다. 거기서 그는 기독교의 여러 가르침을 반대했는데, 몇 가지 예를 들면 사람이 신성모독을 하지 않는 한 지옥에 가지 않는다고 주장했고, 믿음에 의한 구원과 삼위일체론을 공격하였다. 특히, 하나님의 삼위일체적인 존재에 대해 공격한 것을 중심으로 훗날 종교재판을 받게 된다. 세르베투스는 원고를 미리 칼빈에게 보냈다. 그는 책의 출판이 가져올 위험 때문에 자기 이름을 숨기고 책 끝에 M.S.V.라고 자신의 이니셜만 적었다. 그러나 그의 이론을 전에 들었던 사람들은 그 책이 세르베투스의 것임을 알았다.

그 당시에 제네바에는 기욤 드 트리에라는 프랑스인 개신교도가 망명하여 살고 있었는데, 그에게 리용에 사는 아르니라는 사촌이 있었다. 아르니는 로마 가톨릭 교인이었는데 그는 트리에를 다시 로마교회로 돌이키고자 했다. '개혁교회는 불의한 집단이며 리용으로 돌아오라'는 아르니의 편지에 대해 트리에는 다음과 같이 반대의 뜻을 전했다:

이곳보다는 그곳에 더 불의가 횡행하고 있다. 믿음에 관하여서는 그 누구도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어서는 안 된다. 솔직히 내 심정을 말하겠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화형대에서 불살라지는 마당에, 너의 있는 곳 비엔나에서 살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상이라고 하며 신앙의 모든 기초를 파괴하고 있는 세르베투스 같은 사람은 그것에 대해 아무런 제제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그 당시 리용의 감옥에는 개신교도들이 많았다.

빌라노바누스라는 가명으로 활동하던 세르베투스와 그의 책을 인쇄한 업자가 로마교회 종교재판소에서 심문을 받았으나 그들은 《기독교 회복》의 출판을 부인했다. 아르니는 트리에에게 다시 편지를 보내어 그 사실을 증명하라고 했다. 세르베투스의 이설을 증명하기에는 칼빈 보다 더 적합한 증인은 없었다; 그에겐 세르베투스와 오랫동안 주고받은 서신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트리에는 칼빈을 설득하여 세르베투스의 편지 몇 통을 받았다. 트리에는 그것을 아르니에게 보내며 이렇게 적고 있다:

이 편지들을 칼뱅으로부터 얻기는 너무도 어려웠다. 그는 세르베투스의 신성모독이 벌 받아 마땅하지만 정죄의 칼날을 휘두르는 것은 자기 권한이 아니라고 하였다. 오히려 그는 잘못된 사상은 처형하기 보다는 가르침을 통해 징계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그의 도움 없이는 내가 거짓 증언자로 고소당할 것이라는 나의 말에 결국 이 편지들을 주었다.

세르베투스는 결국 체포되었다. 그는 재판장에서 끝까지 자신이 세르베투스라는 사실을 부인하였다. 울면서 자신은 가톨릭 교인으로 살고 죽기를 원한다고 외쳤다. 그러던 가운데 감시의 틈을 타 그는 탈출하게 된다. 결국 그의 공석 상태에서 그의 초상만 놓은 채 재판이 진행되었고, "산 채로, 천천히, 그의 몸이 숯으로 변할 때까지 불사른다"는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그리고 그 날 그의 책들은 불살라졌다.

로마교회로부터 이단자로 낙인 찍힌 세르베투스는 몇 개월 후, 제네바의 성 피에르교회에서 열린 칼빈의 설교회에 참석했고, 칼빈은 그를 체포하게 하였다.

세르베투스가 제네바에 온 이유는 확실하지는 않다. 그는 이탈리아로 가려고 했는데, 그가 원래 숨어 있었을 곳으로 추정되는 또는 툴루즈에서 칼빈이 있던 제네바를 통해 가는 것은 크게 우회하는 것이다. 이것은 위험이 따르는 일인데, 로마교회에 적발될 위험 외에도, 앞서 언급했듯이 세르베투스와의 서신 교환 시기에 그가 제네바에 오더라도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고 전한 칼빈이 바로 제네바에 있었기 때문이다. 또 1946년에 칼빈이 그의 동료 파렐에게 쓴 편지를 보면 이렇게까지 단호한 말을 적고 있다:

세르베투스가 제네바에 온다 하여도 그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제게 그런 권한이 주어진다면 그가 살아서 나가게 하는데 동조하지 않겠습니다.[71]

그런데도 세르베투스가 제네바에 나타난 것은 아마도 그 당시 제네바 시의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것이 자유당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유당은 정치에 신학을 적용하려는 칼빈에 대해 적대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자유당은 세르베투스의 글들을 이용해 칼빈을 반대하기도 했었다.

세르베투스가 체포된 후, 칼빈의 비서 니콜라스 드 라 폰타인(Nicholas de la Fontaine)은 그를 고소했다. 이에 제네바 시의회는 세르베투스에 대한 재판을 다시 열었고, 칼빈은 이번 기회에 세르베투스의 이론을 철저히 논박해야할 필요를 느낀 것으로 보인다. 칼빈에겐 증인의 자격은 있었지만 재판의 자격은 없었다. 왜냐하면 칼빈은 프랑스 국민으로서 스위스 제네바에 거주하는 외국인이었다. 그에게는 시민권이 없었고 그래서 투표권도 없었으며 공무원도 될 수 없었다. 다만 교사나 목사의 경우엔 적격한 시민이 없을 때 비시민이 그 직책은 맡을 수 있었고, 그래서 칼빈은 그곳에서 목회를 하였다. 칼빈이 세르베투스의 판결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것은 종교회의에서 뿐이었고, 세르베투스의 재판은 시의회 주관이었다. 거기서 칼빈은 세르베투스를 정죄할 권리는 없었다.[73]

세르베투스는 재판에 상당한 자신감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단 제네바에서의 재판은 비엔나에서 열렸던 로마교회의 종교재판과는 다른 것이다. 그리고 제네바에는 정부에 대한 교회의 영향을 제거하려는 방종주의자들이 큰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여기서는 세르베투스에게 승산이 있었다. 재판 관련 기록들을 보면 세르베투스의 어조에서 강한 자신감을 볼 수 있다. 그의 종교적 이단성을 증명할 증언자로 선 칼빈에게 던진 그의 공격들 중엔 다음과 같은 것을 볼 수 있다:

"마술사 시몬 같은 자, 범법자, 살인자여 ...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판단하는 불쌍한 자 ... 거짓말쟁이이며 사악한 말다툼꾼 ... 너의 뻔뻔함은 눈이 희다는 사실도 논쟁하려는구나 ... 웃기는 난쟁이 같으니라고 ... 너의 짖음으로 재판장들의 귀를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불쌍하구나, 불쌍해!"[73]

세르베투스의 이런 말을 갖고 그를 쉽게 비난할 수는 없는 것은 그 당시에는 이런 강한 말투로 상대를 공격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칼빈은 특유의 차분함을 보였는데, 때론 반박할 차례가 와도 세르베투스에게 더 말할 기회를 주면서 세르베투스의 이설을 지적해 나갔다. 그러나 세르베투스는 기독교 정통교리인 삼위일체를 계속 부정하였는데, 그 가운데 한 말을 보면 자신이 밟고 있는 '발등상도 하나님을 이루고 있는 물질 중 하나'라고 주장하였다.

세르베투스의 재판은 제네바와 자매관계를 맺은 네 도시(취리히, 베른, 바젤, 샤프하우젠)에 자문을 구하는 등, 두 달이 넘는 시간에 걸쳐 조심스럽게 이루어졌다. 네 도시 모두 세르베투스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편지를 보내왔다. 베른은 자기 도시였다면 세르베투스가 화형에 처해졌을 것이라고 답변했다. 제네바 시의회는 최종 단계에서 삼 일에 걸친 논의 끝에 만장일치로 "가장 고통스런 사형" 곧 화형을 선고하였다. 이때 칼빈은 의회 쪽에 감형을 요청하면서, 적어도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는 참수형으로 바꿔달라고 구한다.[74] 그러나 시의원들은 거절하였다.[70][75] 결국 세르베투스는 칼빈 생전에 제네바에서 종교적인 이유로 사형을 당한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73][76] 세르베투스의 형집행은 1553년 10월 27일에 이루어졌다. 그 전날 칼빈이 파렐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내일 세르베투스는 사형을 당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사형 방식을 바꾸려는 모든 노력을 다 하였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다음에 만나면 왜 우리가 실패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사건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격론이 계속되고 있다. 당시의 이단자에 대한 사형은 종교적 견해가 다른 상대방에 대한 가혹한 처벌이었지만, 루터칼빈 역시 로마 카톨릭교회에 붙잡혔다면 후스나 틴데일처럼 화형을 당하였을 것이다. 이단에 대한 사형은 이처럼 당시의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세르베투스가 사형을 선고 받은 가장 큰 이유는 삼위일체의 부정 때문이었는데, 위에서 언급 되었듯이 삼위일체의 부정은 신성모독으로서 사형에 해당한다는 것이 신성로마제국법(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이었으며, 여전히 유럽 전역의 사법 제도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칼빈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가 완벽한 사람이 아니고 그 시대의 문화와 정서에 영향을 받은 사람이지만, 그가 교회에 미친 훌륭한 영향이 그의 단점을 뛰어 넘는다고 생각한다. 칼빈은 자신의 설교와 논문뿐만 아니라 주석들 안에서도 자신의 신학을 발전시켰다. 그의 신학의 가장 간결한 진술은 그의 대작 기독교 강요에서 발견된다. 그는 이 책이 기독교 신학에 대한 자신의 간결한 요약으로 사용되기를 원했고, 자신의 주석들과 함께 읽어지기를 바랐다. 기독교 강요의 여러판들이 칼빈의 영성을 확대시켰고, 성공적인 개정판들은 그의 신학이 젊어서부터 죽기까지 크게 변화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신학

존 칼빈의 신학(Theology of Calvin)은 종교개혁가칼빈의 작품을 통하여 체계적으로 후대에서 형성한 신학을 말한다. 학자들의 관점에 따라서 칼빈의 신학의 중심주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특징과 강조점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후기 칼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내용이 국가별로 그리고 신정통주의적인 관점의 차이점으로 인하여 다르게 이해되고 있다. 칼빈의 신학의 중요한 점에 대하여 기독교 백과사전은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그의 신학적 중요성이란 기독교 교리의 체계화를 시도한 것이다. 예정론에서, 기독론과 성례전에 근거하여 구원의 현재적 사역과 초월적 영원한 사역 사이에서 단순히 종말론적으로 수립한 구별에서, 중생에서(tertius usus legis, 율법의 3번째 용법) 믿음의 순종을 일으키는 성령의 역사를 강조 한점에서 그는 개혁신학에 지속적 영향을 주었던 정통주의를 세밀하게 만들었던 점이다.[77]

칼빈의 신학을 지배하는 원리는 인간론적이거나 구원론적이거나 또는 교회론적인 것이 아니라, 신학적이다. 칼 홀(Karl holl)이 지적한 대로, “칼빈의 신학적 활동의 중요성은 그가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그 중심에 놓은 데 있다. 칼빈의 모든 개별적인 문제들은 하나님의 개념에서 절정에 이른다.” 기독교 강요와 주석들과 설교들과 논문들을 검토해 보면, 어디든지 칼빈은 하나님 중심 사상, 즉 하나님의 주권사상을 전면에 부각시킨다.[78]

칼빈의 신학은 그가 쓴 성경 주석이나 설교집, 논문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기독교 강요》에서 가장 잘 정리된 형태로 나타난다. 칼빈은 특히 기독교 신학에 관한 그의 주장을 요약하는 목적으로 이 책을 저술했으며, 주석과 함께 비교하며 읽혀지기를 바랬다.[79] 또한 이 책은 약간의 수정을 거치며 여러 판본으로 출판되었는데, 칼빈의 신학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알 수 있다.[80] 1536년도 초판은 6장으로 구성되었지만 1539년 판은 필리프 멜란히톤의 《신학 통론Loci Communes》에 나타난 주제들 위에다가 몇 장을 더했기 때문에 3배로 길어졌다. 1543년 판에서는 사도신경에 관한 장에 새로운 자료를 더하고 확장시켰다. 마지막 개정판은 1559년에 출판된다. 이 판본은 총 네 권, 여든 장으로 구성되는데 1권은 창조주 하나님, 2권은 구속주 그리스도, 3권은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것, 그리고 4권에서는 국가와 교회를 다룬다.[81]

칼빈의 신학을 요약한 《기독교 강요》의 마지막 판본으로부터의 한 페이지

《기독교 강요》의 주제는 첫 문장에서 드러난다. 여기서 그는 인간의 지혜가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우리들에 대한 지식으로 나뉘며,[82]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타고나거나 세계를 관찰해서는 얻을 수 없으며 오직 성경에서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칼빈은 "누구든지 창조주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선 성경을 이정표이자 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83] 그는 성경의 권위가 자증적(autopiston)이며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말하며, 다른 증명을 시도하지는 않는다. 그는 삼위일체 이론을 변호하고, 성상이 우상숭배로 이어졌음을 지적하며 카톨릭교회를 강하게 비판한다.[84] 1권의 마무리에서는 "능력으로 그가 창조하신 세상을 품으시고 보존하시는데 섭리로 세상을 이루는 부분 모두를 다스린다"는 섭리에 대한 견해를 밝힌다.[85]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의 의도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으나,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좋든 나쁘든 항상 하나님의 뜻과 판단 하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86]

2권에서는 원죄타락을 다루며 해당 교리를 발전시킨 아우구스티누스를 인용한다. 이처럼 그는 교부들을 직접 인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종교개혁가들이 새로운 신학을 창작하고 있다는 당대의 비판에 반박하기 위한 것이다.[87] 칼빈의 관점에서 죄는 아담의 타락으로 시작되어 인류 전체에게 퍼진다. 죄의 지배는 완전한 것이어서 사람들은 악에 기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88] 따라서 인류는 구원을 필요로 했고, 이 구원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부터 얻어졌다. 그러나 칼빈은 이 교리를 체계화시키 이전에 구약시대에 살던 유대인에 대해 다르게 언급한 적이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면서 그리스도가 올 것을 약속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옛 언약은 그리스도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칼빈은 그리고 사도신경으로부터 그리스도가 폰티우스 필라투스로부터 고난을 받았고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리라는 내용을 인용하며 새언약을 설명한다. 칼빈은 그리스도가 삶 전체에서 성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함으로써 인류와 하나님 사이의 불화를 제거했다고 주장한다.[89]

3권은 어떻게 그리스도와 인간이 정신적으로 연합할 수 있는지에 대해 다룬다. 칼빈은 믿음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굳고 확실한 지식으로 정의한다. 믿음의 즉각적인 결과는 회개와 죄 사함이다. 이후 영적 거듭남이 이루어져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의 거룩한 상태를 회복한다. 그러나 이를 죽기전에 완성하기는 불가능한 것이어서, 평생동안 죄와의 싸움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 칼빈의 이론이다.[90]

공헌

1834년판 《기독교 강요》 중 칼빈의 서문

개혁 신학의 완성

칼빈은 《기독교 강요》등을 통해 개신교 신학을 집대성했고, 개혁교회장로교를 통해 그의 신학은 많은 부분 계승되고 있을뿐 아니라 개혁교회 및 장로교 교리 대부분이 사실 그가 정립한 사상이다. 개혁 교리를 논할때 같이 언급되는 아르미니우스 주의는 독립된 신학이 아니라 칼빈의 사상에서 예정설과 구원론,은혜론만 수정한 사상이다. 특히 스코틀랜드존 녹스에게 영향을 끼쳐 오늘날 장로교회 교리에 있어 그의 신학이 중요하다. 또한 영국 청교도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는데, 청교도들은 성공회의 온건한 종교개혁에 반대한 칼빈주의 개혁교도들로서, 그리스도의 새언약 아래 순종해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였다. 칼빈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주장하여 신앙의 진정한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있지, 교회에 있지 않음을 선언한 종교 개혁자이기도 하다.

교회의 일치운동

존 칼빈은 각 개신교 종파들을 단결시키고자 하였고, 로마 가톨릭개신교의 대화와 일치를 위해 애썼다.그래서 장로교 신학자인 김영재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한국교회가 신학에 대한 생각차이로 분열한 역사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91] 칼빈은 주로 활동한 제네바에서 시민권이 없었지만, 개신교의 대표적인 신학자로 명성을 떨치면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사회및 경제와 교육

칼빈은 빈곤층 어린이들도 공부할 수 있는 학교병원 그리고 복지시설을 통하여 기독교의 사회적 영향을 주었다. 홍성사에서 출판한 《희년, 한국 사회, 하나님 나라》에 따르면, 존 칼빈은 복지를 개인의 문제가 아닌 국가의 책임이라고 생각했으며,공동작업장에서 일하도록 하는 공공근로로써 가난한 이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야 한다고 대안을 주장했다.[92] 이원복 교수의 먼나라 이웃나라(스위스편)에서도 스위스가 선진공업국가가 되도록 시계공업과 섬유공업을 대안으로 주장한 이야기가 나온다. 고 이종성 전 장로회신학대학교 총장도 《칼빈》(대한기독교출판사 펴냄→현재 대한기독교서회)에서 칼빈이 사회복지예산을 제네바 시 의회에 요구했다는 점, 자본가들이 노동자를 빵 한 덩이 즉 저임금에 고용하는 일은 죄라고 설교했다는 점, 병원을 많이 지어 제네바 시민들의 건강권을 배려했음을 들어 가난한 이들을 편애한 기독교 사회주의자였음을 논증하였다. 신학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에 기독교정신으로써 참여하는 학문이라는 점, 복지국가는 존 칼빈의 종교개혁운동이 사회에 끼친 영향임을 존 칼빈은 복지국가와 선진공업국가를 설계함으로써 보여준 것이다.

평가

  • 칼빈은 장로교의 뿌리다. 그는 목사·교사·장로·집사로 구성된 교회직제의 기초를 세웠다. 칼빈은 “하나님이 구원과 멸망을 이미 예정해 놓았다. 그걸 바꿀 수는 없다. 사람은 단지 신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뿐이다”는 예정설을 주창했다. 그의 예정설을 놓고 개신교 내부에서도 격한 논쟁이 일었다.[93]
  • 제네바 소재 종교개혁박물관의 이사벨 그래슬레 소장은 “칼빈에 대한 평가를 둘러싸고 ‘신화와 폭군’ 사이에서 아직도 투쟁이 진행되고 있다”면서 “역사적 진실은 이들 사이에 놓여 있다”고 말한바 있다.
  • 타임지는 2009년 4월 자본주의는 칼빈의 신학사상으로 새롭게 도전 받아야 한다고 한다.

영국교회에 끼친 영향

영국에서의 종교개혁은 대륙의 영향으로 시작된 것이 아닌 이미 롤라드파를 겨쳐, 존 위클리프, 토마스 빌니, 윌리엄 틴데일등이 순교정신으로 기초를 세웠고, 런던에 있는 프랑스교회가 칼빈을 영국교회와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를 하였다.[94] 칼빈의 생전시 영국에는 에드워드 6세, 메리 1세 (잉글랜드), 엘리자베스 1세가 재임시였다.

에드워드 6세 재임시

에드워드 6세 재임시에는 에드워드를 보좌하고 훈육하였던 서머싯 공작에게 개혁의 중요성을 피력하는 서신을 주고받는다. 이 때 토머스 크랜머 대주교는 이탈리아에서 온 망명자였던 피터 베르미글리와 베르나르디노 오치노를 각각 옥스퍼드 대학교의 담당교수, 캔터베리의 명예 성직자로 임명하였다. 또한 1549년마르틴 부서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신학교수가 되었다.

메리 1세 재임시

로마 가톨릭교회를 따랐던 메리1세는 많은 순교자를 발생시켰고, 리들리, 라티머등은 화형을 당하는 등 칼빈의 개혁에 위기를 가져왔다. 칼빈을 비롯해 개혁신학자들의 저작은 모두 금지되었고, 칼빈은 화형당했던 순교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서신을 보냈다.

엘리자베스 1세 재임시

칼빈은 엘리자베스 1세에게 메리 1세와는 다르게 개혁에 도움을 주도록 권면하였지만, 그녀는 존 녹스의 저작인 《여인의 무서운 통치와 제국에 항거하는 첫 나팔 소리》등에 칼빈의 영향이 있는 것으로 보고 분개하여 칼빈에게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런던의 주교였던 에드먼드 그린달은 칼빈과 친분을 가지고 있었으며, 칼빈이 사망할 때까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칼빈과 한국교회

한국은 초기 한국에 온 장로교 선교사들이 주축이 되어 오늘날 한국 교회의 60% 이상이 장로교 교인일 정도로 칼빈의 영향력이 강한 나라이다. 신학교에 있어서도 장로교 교단 신학교를 비롯한 많은 대학들이 칼빈의 전통에 기초하고 있다. 한국은 학문적 발전을 이루며 대한민국에서의 칼빈 연구가들이 하나둘 씩 배출되기 시작하였다. 한국인 최초로 존 칼빈에 대한 박사논문을 쓴 학자는 신복윤 박사였다. 이후에 여러 학자들이 프랑스(이수영), 네덜란드(최윤배, 안인섭), 미국(김재성), 남아공(안명준) 등 세계 각국에서 칼빈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들은 한국의 장로교회뿐만 아니라 세계칼빈학회세계개혁신학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2009년 그의 탄생을 기념하여 여러 국가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는 요한칼빈탄생500주년기념사업회 주최로 학자들이 대규모 학술대회를 열었다.[95]

더 보기

각주

  1. Robert Dean Linder, The Reformation Era, (Greenwood Press, 2008), 139.
  2. Cottret 2000, 8–12쪽; Parker 2006, 17–20쪽
  3. Cottret 2000, 8–12쪽; Parker 2006, 17–20쪽
  4. 이 학교는 대학교육을 위한 준비과정으로서 인문주의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교육 과정은 처음에 문법, 수사학 그리고 논리학(소위 3학)에 중점을 두었으며, 그 이후에 수학, 기하학, 천문학 그리고 음악(소위 4과)에 중점을 두었다.
  5. Ganoczy 2004, 3–4쪽; Cottret 2000, 12–16쪽; Parker 2006, 21쪽. McGrath 1990, 22–27쪽 states that Nicolas Colladon was the source that he attended Collège de la Marche which McGrath disputes.
  6. E. A. Berthault (1876). 《Mathurin Cordier et l'enseignement chez les premiers Calvinistes》. Bonhoure. 11쪽. 
  7. Cottret 2000, 17–18쪽; Parker 2006, 22–23쪽
  8. Cottret 2000, pp. 17–18; Parker 2006, p. 22–23
  9. 로마 가톨릭예수회 창시자
  10. Parker 1975, 15쪽. According to Cottret 2000, 20쪽, there may have been a family conflict with the clergy in Noyon.
  11. 실제로 테오도르 드 베즈에 의하면 아버지의 이러한 결정은 성직자보다 법률가가 돈을 많이 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고 한다.[10]
  12. Parker 1975, 15쪽. According to Cottret 2000, 20쪽, there may have been a family conflict with the clergy in Noyon.
  13. Parker 1975, p. 15.
  14. 《Encyclopedia of the Reformed faith》 1판. Louisville, Ky.: Westminster/John Knox Press. 1992. 261쪽. ISBN 0-664-21882-2. 
  15. Cottret 2000, 20–24쪽; Parker 1975, 22–25쪽
  16. E.J. Brill (1969). 《Calvin's commentary on Seneca's De Clementia》. Leiden. 385~386쪽. 
  17. Greef, W. de (Wulfert), 1939- (2008). 《The writings of John Calvin : an introductory guide》 Expa판.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ISBN 978-0-664-23230-6. 
  18. François Wendel (1976). “Calvin et l'humanisme”. 《Cahiers de la Revue d'histoire et de philosophie religieuse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45): 37~62. 
  19. Parker, T. H. L, John Calvin: a Biography,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2006), 199–203.
  20. J. Calvin, preface to Commentary on the Book of Psalms, trans. James Anderson, vol. 1 (Grand Rapids: Eerdmans, 1948), pp. xl–xli as quoted in Cottret 2000, 67쪽. The translation by Anderson is available at 〈The Author's Preface〉, 《Commentary on Psalms》 1  See also Parker 2006, 200쪽.
  21. from: Bruce Gordon, Calvin, New Haven; London 2009, p. 34.
  22. Ganoczy 2004, 9–10쪽; Cottret 2000, 65–70쪽; Parker 2006, 199–203쪽; McGrath 1990, 69–72쪽
  23. According to Cottret 2000, 68–70쪽, Ganoczy in his book Le Jeune Calvin. Genèse et evolution de sa vocation réformatrice, Wiesbaden: F. Steiner, 1966 p. 302, argues that Calvin conversion took place over several years and that it was not a biographical or chronological event. Cottret quotes Olivier Millet, Calvin et la dynamique de la Parole. Essai de rhétorique réformée, Paris: H. Champion 1992 p. 522, noting a typological rather than a biographical perspective of the account of his conversion. The biographical argument is promoted by D. Fischer, "Conversion de Calvin", Etudes Theéologiques et Religieuses 58 (1983) pp. 203–220. According to Parker 1975, 192–196쪽 Parker is in sympathy with Ganoczy's view, but in his investigations, he concluded that a certain period for his conversion could be determined.
  24. Bruce Gordon, Calvin, New Haven; London 2009, p. 34.
  25. 오덕교《종교개혁사》(합동신학대학원출판부,P226)
  26. Vigier de la Pile (1846). 《Histoire de l'Angoumois》 2002년판. 라피트. 160쪽. ISBN 2-86276-384-5. 
  27. Barth, Karl, 1886-1968. (1995). 《The theology of John Calvin》. Grand Rapids, Mich.: W.B. Eerdmans Pub. Co. 145쪽. ISBN 0-8028-0696-1. 
  28. Ganoczy 2004, 7–8쪽; Cottret 2000, 63–65, 73–74, 82–88, 101쪽; Parker 2006, 47–51쪽; McGrath 1990, 62–67쪽
  29. D.P Wernle (1909). 《Calvin und Basel bis zum Tode des Myconius 1535-1552》. Tübingen. 
  30. Bainton, Roland H. (1973년 6월). “Chemins de l'hérésie . Eugénie Droz”. 《The Journal of Modern History》 (영어) 45 (2): 299–299. doi:10.1086/240970. ISSN 0022-2801. 
  31. Ganoczy 2004, pp. 7–8; Cottret 2000, pp. 63–65, 73–74, 82–88, 101; Parker 2006, pp. 47–51; McGrath 1990, p. 62–67
  32. Ganoczy 2005
  33. 하인리히 불링거는 츠빙글리의 계승자로서 여러 개신교 도시를 대표하는 사절단들과의 만남을 주선하기도 했다.
  34. 레나타는 1527년에 페라라의 공작 에르콜레 1세 데스테와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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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 McGrath 1990, 76–78쪽; Cottret 2000, 110, 118–120쪽; Parker 2006, 73–75쪽
  44. Cottret 2000, 120쪽
  45. Cottret 2000, 120쪽
  46. Parker 2006, 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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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 De Greef 2004, 50쪽
  49. Cottret 2000, 128–129쪽; Parker 1975, 74–76쪽
  50. McGrath 1990, 98–100쪽; Cottret 2000, 129–131쪽; Parker 2006, 85–90쪽
  51. McGrath 1990, 101–102쪽; Parker 2006, 90–92쪽
  52. Calvin et Strasbourg 보관됨 8 9월 2013 - 웨이백 머신 (프랑스어)
  53. Parker 2006, 92–93쪽
  54. Parker 1995, 4–5쪽
  55. Parker 1995, 4–5쪽
  56. Parker 2006, 97–1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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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9. Cottret 2000, 140쪽
  60. Parker 1975, 87쪽
  61. Cottret 2000, 139–142쪽; Parker 2006, 96–97쪽
  62. 기욤 파렐의 추종자라는 뜻
  63. 앙리 드 라 마레(Henri de la Mared) 외에 자크 베르나르, 장 모랑, 앙투안 마르쿠르 등이 그 목사들이다.
  64. Ganoczy 2004, 12–14쪽; De Greef 2004, 46쪽; Cottret 2000, 152–156쪽
  65. “매국노들”이란 뜻을 가지고 있으며 1539년에 제네바에 상당히 불리한 협약을 베른과 맺은 제네바 시의원들을 가리킴
  66. Parker 2006, 105쪽
  67. ... sed quoniam non esse mei iuris memini, cor meum velut mactatum Domino in sacrificium offero.
     
    — CO 11, 100, Herminjard 4, 339.
  68. Parker 2006, 103–107쪽
  69. CO 13:15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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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8. Niesel 1980, 80–88쪽; Parker 1995, 50–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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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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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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