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 선종: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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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4년]] 몽골은 금으로부터 막대한 금액의 보상금을 받고 철수했다. 그는 1214년 도성을 베이징에서 카이펑으로 옮겼다.
[[1214년]] 몽골은 금으로부터 막대한 금액의 보상금을 받고 철수했다. 그는 1214년 도성을 베이징에서 카이펑으로 옮겼다.
[[1215년]] 몽골은 전쟁을 재개하여 베이징[北京]을 함락시켰다. 그뒤 중국 북부의 완전한 장악은 부장인 무칼리에게 맡겨졌다.
[[1215년]] 몽골은 전쟁을 재개하여 베이징[北京]을 함락시켰다. 그 뒤 중국 북부의 완전한 장악은 부장인 무칼리에게 맡겨졌다.
[[칭기즈 칸]]이 북경을 봉쇄작전으로 공격하려고 했을 때, 금 조정에는 궁정분란이 일어나 영제가 호사호에게 암살을 당하였고, 호사호는 영제의 조카인 오도보 즉 선종을 제위에 앉혔다. 공성전에 자신이 없던 칭기즈 칸은 오도보의 화의를 받아들이고,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받고 철수하였다.
[[칭기즈 칸]]이 북경을 봉쇄작전으로 공격하려고 했을 때, 금 조정에는 궁정분란이 일어나 영제가 호사호에게 암살을 당하였고, 호사호는 영제의 조카인 오도보 즉 선종을 제위에 앉혔다. 공성전에 자신이 없던 칭기즈 칸은 오도보의 화의를 받아들이고,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받고 철수하였다.

2012년 11월 24일 (토) 18:03 판

금 선종 완안순(金 宣宗 完顔珣, 1163년 ~ 1223년)은 금나라 제8대 황제(재위 : 1213년1223년). 장종의 서형에 해당되어, 선효태자 현종 윤공(宣孝太子 顯宗 允恭)의 서장자이다. 여진 이름은 오도보(吾睹補). 시호은 계천흥통술도근인영무성효황제(繼天興統述道勤仁英武聖孝皇帝). 어머니는 소성황후 유씨(昭聖皇后 劉氏).

생애

금 조정에는 궁정분란이 일어나 영제가 호사호(胡沙虎)에게 암살을 당하였고, 호사호는 영제의 조카인 오도보 즉 금 선종을 제위에 앉혔다. 1214년 몽골은 금으로부터 막대한 금액의 보상금을 받고 철수했다. 그는 1214년 도성을 베이징에서 카이펑으로 옮겼다.

1215년 몽골은 전쟁을 재개하여 베이징[北京]을 함락시켰다. 그 뒤 중국 북부의 완전한 장악은 부장인 무칼리에게 맡겨졌다.

칭기즈 칸이 북경을 봉쇄작전으로 공격하려고 했을 때, 금 조정에는 궁정분란이 일어나 영제가 호사호에게 암살을 당하였고, 호사호는 영제의 조카인 오도보 즉 선종을 제위에 앉혔다. 공성전에 자신이 없던 칭기즈 칸은 오도보의 화의를 받아들이고,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받고 철수하였다.

이후 오도보가 바로 개봉으로 천도하자 칭기즈 칸은 그것을 반역으로 생각하고 다시 북경을 쳐서 불사르고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초원의 거주자들이 아무런 과도기적 단계도 없이 찬란한 문명을 가진 거대한 도시를 소유하게 되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더 나은 방법을 알지 못했던 그들은 난감함에 의하여 방화와 살육을 하게 되었다. 개인적인 약탈은 그들의 규범인 야삭에서 금하는 것이 었는데 그들은 북경에 들어가서 한달 동안이나 약탈을 계속 하였다. 이것은 10세기의 거란이나 12세기의 여진 사람들이 살육을 최소화하고 그들의 재산을 파괴하지 않고 이전 왕조를 계승하여 차지한 것과 비교해 볼 때 후진적이었다.

금은 개봉 천도이후 섬서성의 일부와 하남성 지역 정도로 축소되었다. 그러나 몽골이 중앙아시아에서 전쟁을 하고 있어 여력이 없을 때, 금은 잠시나마 북경을 제외한 여러 성을 수복하였다.

칭기즈 칸의 신하 무칼리는 중국의 작전을 일임받고 지속적인 전투를 계속하였으나 이제 전투는 중국식 공성전으로 완전히 변해 버려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야율유가는 몽골의 도움으로 요양을 빼앗고 요나라를 세웠으며 1220년 죽을 때까지 몽골의 가장 충성스러운 신하로서 몽골과 함께 하였다.

1223년 선종은 환갑(還甲)을 지나 사망하였다.

전 대
금 위소왕
제8대 황제
1213년1223년
후 대
금 애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