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조 (왕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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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월 3일 (화) 21:15 판

남조(南詔)는 당나라티베트 버마족이 지금의 윈난(雲南) 지방에 세운 왕국이다. 조(詔)란 왕(王)의 뜻이다.

당시 쓰촨성(四川省)의 서부에서 윈난성에 걸치는 지역에는 몽수(蒙嶲)·월석(越析)·시랑(施浪)·등섬(邆賧)·낭궁(浪穹)·몽사(蒙舍) 등의 6조국(六詔國)이 세력을 다투고 있었는데, 그중 몽사조(蒙舍詔)가 가장 남쪽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남조(南詔)라고 한다.

당(唐)의 정관(貞觀) 연간에는 남조가 대몽국(大蒙國)이라 칭하고, 당나라에 조공(朝貢)하였다. 그 후 대몽(大蒙)은 당과 결속하여 세력을 확장하더니 8세기 중엽 피라각(皮羅閣) 때 다른 5조국(詔國)을 병합하여 738년, 6조(詔)의 통일에 성공한 후 대리(大理)에 도읍하였고 이 지방에 세력을 신장해 오던 티베트 세력을 격퇴시켰다.

그러나 당나라와 불화(不和)가 생겨서 한때는 당나라의 토벌(討伐)을 받았으나, 안사의 난(亂) 이후 당의 운남 경략(經略)이 주춤한 틈을 타서 남조는 도리어 사천(四川)까지도 세력을 뻗쳤다. 특히 8세기 말기에 이모심(異牟尋)이 남조를 다스릴 때는 티베트와 결속해서 당에 침공(侵攻)하기도 하여 남조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모심은 티베트의 고압적인 태도에 불만을 품고 당에 귀순하였다. 이모심의 사후 당과 남조 사이는 여러 해 동안 불화가 계속되어 당말의 혼란기에는 당과의 교통은 완전히 두절되었다.

이리하여 901년 한인(漢人) 정매사(鄭買嗣)의 찬탈(簒奪)로 멸망하였다. 남조에서는 부친(父親) 이름의 끝 자(字)를 아들 이름의 첫 자에 붙이는 독특한 부자연명(父子連名)의 형식이 있었다.

역대 군주

아래는 남조 왕조의 군주들이다. 괄호 안의 연수는 재위 기간을 의미한다.

  1. 세노라(細奴羅, 653년~674년)
  2. 라성염(羅盛炎, 674년~712년)
  3. 염각(炎閣, 712년)
  4. 성라피(盛羅皮, 712년~728년)
  5. 피라각(皮羅閤, 728년~748년)
  6. 각라봉(閣羅鳳, 748년~779년)
  7. 이모심(異牟尋, 779년~808년)
  8. 심합권(尋閤勸, 809년)
  9. 권룡성(勸龍晟, 810년~816년)
  10. 권리성(勸利晟, 816년~823년)
  11. 권풍우(勸豊祐, 824년~859년)
  12. 세륭(世隆, 860년~877년)
  13. 융순(隆舜, 878년~897년)
  14. 순화정(舜化貞, 897년~902년)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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