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세계 박람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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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8월 13일 (토) 02:04 판

엑스포 과학 공원에서 이어지는 다리

대전 세계 박람회(大田世界博覽會)는 1993년 8월 7일에서 11월 7일까지 대한민국 대전직할시 대덕테크노밸리 내에서 열린 세계 박람회로, 대전엑스포(Daejeon Expo '93)라고도 한다. 대한민국이 처음 국제 박람회 기구의 공인을 받아 개최한 박람회이며 주제는 ‘새로운 도약에의 길’, 부제는 ‘전통기술과 현대과학의 조화’와 ‘자원의 효율적 이용과 재활용’이었다. 태극을 변형한 엠블럼과 마스코트 ‘꿈돌이’가 상징이었다. 꿈돌이는 후에 대전광역시의 공식 마스코트가 되었다.

세계 108개국과 33개 국제 기구, 대한민국의 200여 개 기업이 참가했다. 정부와 민간을 합쳐 1조 8천억 원을 들였고 1450만 명이 관람했다.[1] 박람회가 끝난 이후 박람회 시설은 엑스포 과학공원이라는 이름으로 새로 개장했다.

개최

파일:Hanbit Tower in Expo Science Park.jpg
한빛탑

대한민국은 제24회 하계 올림픽을 개최한 1988년 말에 박람회 준비를 시작했고, 1989년에 대통령 노태우가 개최 의지를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국제 박람회 기구의 공인을 받기 위한 교섭 활동도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개최 신청 기간(5년)이 촉박하고, 비용 문제 때문에 국제 사회의 여론도 부정적이어서 1992년부터 1995년까지는 세계 박람회를 개최하지 말자는 말도 있었다. 대한민국 법률 자문들의 의견도 비관적이었다.

대한민국은 부유한 선진국 위주의 축제였던 세계 박람회에 이제는 개발도상국의 참여도 이끌어 내야 한다는 점을 일깨우고, 대한민국이 당시 경제 협력 개발 기구에 가입하기 위해 교섭하고 있었던 점을 내세워 선진국과 개도국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방식으로 국제 박람회 기구의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박람회의 주제로 채택된 ‘새로운 도약에의 길’(The Challenge of a New Road to Development) 역시 이를 염두에 둔 것이다. 마침내 1989년 12월에 열린 제106차 국제 박람회 기구 총회에서 대한민국에 조사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조사단의 보고서를 토대로 1990년 8월 총회에서 대전 세계박람회를 공인한다는 결정이 만장일치로 내려졌다.

당시 급속한 산업화가 이루어진 대한민국은 전통 문화가 상당 부분 파괴되고 지역간·계층간의 불균형이 심화되었으며 환경이 오염되는 등 축차적으로 발생하는 문제들에 직면해 있었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조화로운 발전을 강조하는 대전 세계박람회는 자연스럽게 전통 기술과 현대 과학의 조화, 자연과 인간의 조화 등도 목표로 삼게 되었다. 그래서 부제로 ‘전통기술과 현대과학의 조화’와 ‘자원의 효율적 이용과 재활용’이 채택되었다.

마스코트 캐릭터

대전 세계 박람회의 마스코트는 외계인을 도안으로 한 꿈돌이, 꿈순이이다.

주요 전시관

대전 세계 박람회의 전시관은 크게 상설전시구역과 국제전시구역으로 나누어졌다. 상설전시구역의 전시관은 대한민국 국내 기업에 의해 건립되어 박람회 폐막 후에도 과학교육의 장으로 이용될 영구적인 시설물로 계획되었으며, 국제전시구역의 전시관은 박람회 폐막 이후 철거되고 그 부지는 컨벤션센터 등으로 이용될 계획이었다.

  • 정보통신관
  • 우주탐험관
  • 자동차관
  • 자원활용관
  • 자연생명관
  • 인간과 과학관
  • 자기부상열차관
  • 이매지네이션관
  • 테크노피아관
  • 한국 IBM관
  • 한국후지쯔관
  • 롯데 환타지월드관
  • 정부관
  • 한빛탑

기타

  • 대전 세계 박람회 기간 중 대전조차장역 구내에 엑스포역이라는 임시승강장을 설치하여 여객을 취급했다.
  • 탤런트 채시라가 세계 박람회 명예 도우미로서 활동했다.

그 이후

엑스포 후 엑스포 부지는 엑스포과학공원으로 한동안 운영되어 왔으나 극심한 경영난으로 2006년 이후 동부 쪽은 대전광역시와 기업의 컨소시엄으로 주상복합건물 및 호텔이 건설 중이며, 서부 쪽은 기존의 엑스포 건물을 이용하여 과학 테마파크엑스포과학공원으로 여전히 활용하고 있다.

문제점

개최 기간 동안 아무 사고 없이 성공적으로 치러졌지만 상세한 면에서는 숱한 문제점이 드러나기도 했다. 개최 1일만에 태풍 '로빈' 의 영향과 대전충남 등에 내려졌던 폭우로 인해 엑스포 전시관과 사무실 일부가 침수되는 피해를 입기도 했었으며 전시장 곳곳마다 침수사태가 벌어져 관람객들이 침수피해를 입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또 엑스포 회장 안을 운행하던 모노레일이 도중에 고장사태로 운행이 중단되어 관람객들이 고립되는 사고도 벌어졌다. 이후에는 엑스포 도우미 및 자원봉사자들이 집단 식중독을 겪기도 하여 회장 공백사태가 우려되기도 했고 엑스포 회장 내 전산시스템 등도 고장사태를 일으켜 관람객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심지어 국제관 중 콜롬비아루마니아관 등은 개장 이후에도 공사가 계속되었다가 뒤늦게 개관하는 등 준비가 미흡했다는 지적을 받았으며 독일관에서는 한 독일인이 독일관 관장과 일부 관람객 및 도우미를 인질삼아 인질극을 벌이기도 하는 등 비상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2].

관람객들의 인기 전시관 편견 및 편향 문제도 제기되어 특히 인기 전시관의 경우 암표상의 극성 및 잦은 사고와 고장 등으로 일부 전시관이 임시휴장을 하거나 도중에 중단을 하는 등 소동이 끊이지 않기도 하여 인기관과 비인기관의 불균형적인 현상은 엑스포의 단점을 남기기도 했다. 또 당시 일부 관람객들의 지나친 무질서와 얌체 관람 등도 문제거리로 제기되어 엑스포 분위기를 찌푸리게 했다는 평을 받기도 했으며 주차상에 있어서도 한때 영수증 발급 등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주차장에 주차를 할 수 없도록 조치하였다가 오히려 관람객들의 잦은 원성과 항의를 받은 끝에 결국 현금징수로 급변경한 끝에 주차를 할 수 있었다[2].

참조

  1. 대전광역시, '93 대전엑스포
  2. MBC 뉴스 '20년 뉴스' 1993년 대전엑스포 소식 인용

바깥 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