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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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협회 활동과 사회 활동 ====
==== 독립협회 활동과 사회 활동 ====
===== 독립협회와 계몽운동 =====
===== 독립협회와 계몽운동 =====
[[파일:LWY.jpg|thumb|right|150px|[[이완용]]<br>(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참여하였으나 위험한 단체로 여겨 탈퇴한다. 그는 이후 [[친러파]]와 [[친일파]]로 변신한 [[이완용]]을 경멸했다.)]]
[[파일:Young Philip Jaisohn.jpg|thumb|right|180px|동지 [[서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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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토론회에 내빈으로 참석, 참관하던 윤치호에게도 영향을 주었다.<ref name="황293" /> 협성회 공개 토론회의 성공은 그날 하객으로 참석했던 [[독립협회]] 회원들에게도 큰 자극이 되었다. [[러시아]]에 다녀온 뒤 의기소침했던 윤치호에게 남다른 감격이었다.<ref name="황293" /> 윤치호는 청년들의 역량을 믿고 신분제도 철폐, 적서 차별 철폐, 남녀 차별 철폐, 민중의 참정권 획득을 위한 설득, 홍보작업을 추진해야 된다고 확신한다.
이는 토론회에 내빈으로 참석, 참관하던 윤치호에게도 영향을 주었다.<ref name="황293" /> 협성회 공개 토론회의 성공은 그날 하객으로 참석했던 [[독립협회]] 회원들에게도 큰 자극이 되었다. [[러시아]]에 다녀온 뒤 의기소침했던 윤치호에게 남다른 감격이었다.<ref name="황293" /> 윤치호는 청년들의 역량을 믿고 신분제도 철폐, 적서 차별 철폐, 남녀 차별 철폐, 민중의 참정권 획득을 위한 설득, 홍보작업을 추진해야 된다고 확신한다.

[[파일:Young Philip Jaisohn.jpg|thumb|left|180px|동지 [[서재필]]]]


[[1893년]] 에모리대학 졸업 직후 윤치호는 [[미국]]에서 [[서재필]]을 만났을때 혹시나 조선의 정국이 변한다고 해도 서재필이 아픈 기억을 되살리고 싶지 않아 귀국하지는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그런데 뜻밖에도 2년 후 한성 정동에서 재회하게 되자 윤치호는 놀라워했다. 그리고 윤치호와 서재필은 독립협회에서 의기투합하여 활동했다.<ref name="황2100"/> 1897년 [[8월 28일]] 윤치호는 [[독립협회]]의 제2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10월]] 원산항재판소 판사로 부임했으며, [[10월 28일]]에는 [[만민공동회]] 회장에 선출됐다. [[독립협회]] 참가 이후에는 [[서재필]](徐載弼)·[[이승만]]·[[이상재]](李商在)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이끌면서, 토론회 개최와 강연 활동을 계속하였다. [[1898년]] [[3월]]에 열린 [[만민공동회]]를 주관할 때는, [[러시아]]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의 철수 등 반(反) [[러시아]] 운동을 전개하여 부분적인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1893년]] 에모리대학 졸업 직후 윤치호는 [[미국]]에서 [[서재필]]을 만났을때 혹시나 조선의 정국이 변한다고 해도 서재필이 아픈 기억을 되살리고 싶지 않아 귀국하지는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그런데 뜻밖에도 2년 후 한성 정동에서 재회하게 되자 윤치호는 놀라워했다. 그리고 윤치호와 서재필은 독립협회에서 의기투합하여 활동했다.<ref name="황2100"/> 1897년 [[8월 28일]] 윤치호는 [[독립협회]]의 제2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10월]] 원산항재판소 판사로 부임했으며, [[10월 28일]]에는 [[만민공동회]] 회장에 선출됐다. [[독립협회]] 참가 이후에는 [[서재필]](徐載弼)·[[이승만]]·[[이상재]](李商在)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이끌면서, 토론회 개최와 강연 활동을 계속하였다. [[1898년]] [[3월]]에 열린 [[만민공동회]]를 주관할 때는, [[러시아]]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의 철수 등 반(反) [[러시아]] 운동을 전개하여 부분적인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2011년 5월 29일 (일) 19:46 판

윤치호
출생1864년 음력 12월 26일
대한제국 조선 충청도 아산군 둔포면 신항리 신촌
사망1945년 12월 9일(1945-12-09) (향년 80세)
대한민국 한국 경기도 개성부 송도면 고려정 오전 9시경
사인자살
거주지대한제국 충청남도 아산군 둔포면→일제 강점기 경성부 종로→중국 상하이미국일제 강점기 경성부 종로→미군정 서울특별자유시개성부 송도면
성별남성
국적대한제국 조선, 대한제국의 기 대한제국, 일제강점기의 기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별칭호 좌옹(佐翁), 창씨명 이토 지코(伊東致昊)
학력미국 에모리 대학교 신학학사
직업정치인, 사상가, 시민사회운동가, 종교가
종교유교(성리학)→개신교(감리교)
부모아버지 윤웅렬, 어머니 전주이씨,서모 김정순(金貞淳)
배우자진주 강씨, 마애방, 백매려, 2명의 첩
자녀아들 윤영선, 윤광선, 윤장선, 윤기선, 윤정선, 딸 윤봉희, 윤용희, 윤문희, 윤은희, 윤명희, 윤보희(음악가), 윤영희, 윤정희
친척윤영렬(숙부), 윤치왕(이복 동생), 윤치창(이복 동생), 윤치소(사촌), 윤치오(사촌), 윤치영(사촌), 윤보선(종질), 윤원선(종질), 윤연선(이복 조카), 윤영구(손자)
웹사이트해평윤씨 홈페이지

윤치호(尹致昊, 일본식 이름: 이토 지코(伊東致昊), 1864년 음력 12월 26일 ~ 1945년 양력 12월 9일)는 조선의 문신이자 대한제국의 개혁운동가·언론인·교육자, 한국의 정치가·교육자·사상가·언론인·종교가이며 기독교운동가였다. 구한말에는 갑신정변으로 피신했다가 귀국, 독립협회 활동, 독립신문 발행인과 제2대 독립신문사(獨立新聞社) 사장 등으로 활동했으며 만민공동회의 최고 지도자로서 강연, 계몽활동과 민권운동과 민중의 참정권 요구 운동·개혁운동을 정력적으로 참여했고, 서재필이 강제추방된 이후 독립협회와 애국계몽운동 활동을 지도했다.

그러나 민중의 호응 미진, 정부와 황국협회 등의 탄압으로 독립협회의 실패 이후, 민중 역시 그를 황제에게 불충하는 인물로 보면서 실망, 그는 민중을 계몽의 대상에서 개조, 훈련의 대상으로 시각을 바꾸고, 실력 양성론을 주장한다. 이후 관직에 투신하여 덕원감리사부윤, 삼화감리, 외무부협판, 한성부 판윤 등을 지냈고, 러시아의 차르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관하고 귀국하면서 서구 문물을 통한 계몽, 변화를 확신한다.

이후 한영서원, 대성학교의 교장으로 활동하다 경술국치 뒤에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에 의해 투옥되었다. 석방 후 신교육운동과 기독교운동을 전개하였다. 교육활동으로는 한영서원을 창설하여 지도하고, 송도고보로 바꾸어 재단 이사장과 초대 교장을 역임하고 사립학교의 재단이사로도 참여, 연희전문학교·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이화여자전문학교의 재단 이사로 활동했다. 노동을 경시하는 사회분위기를 지적, 농·공업 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한영서원의 학생들에게 농업, 목축 등의 실업교육을 지도했다.

사회활동으로는 YMCA청년회 총무·회장, 1925년 11월 태평양문제연구회 조선지회 회장, 1929년 일본 도쿄(東京)에서 개최된 제3회 범태평양회의에 한민족 대표자로 참석하였고, 1931년 재만주한인동포위문사절단 단원으로 만주에 다녀온 뒤 흥업구락부 회장 을 역임했고, 1928년부터 1937년까지는 대한체육회의 전신인 조선체육회 제9대 회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105인 사건으로 수감 중 전향하여 일제 강점기 후반에는 귀족원 의원 및 임전보국단 고문 등 친일단체에서 활동했다. 조선인 최초의 영어통역관이기도 하였다.[1] 한국인 스스로 자치능력이 부족하다 판단한 그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지원을 해주면서도 일정 부분 거리를 두었다. 이솝 우화걸리버 여행기를 국내에 처음 번역해서 소개하기도 했다.

1930년 모교인 에모리 대학교로부터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고, 박사로 불리게 되었다. 조선 선조때의 영의정 윤두수의 둘째 아들 윤흔의 8대손으로, 병조판서를 지낸 초기 개화파 정치인 윤웅렬전주 이씨의 아들이었다. 해방 후 대한민국의 군의관 윤치왕, 사업가 겸 외교관 윤치창의 이복 형이며, 윤치소, 윤치오, 윤치영의 사촌이며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이자 정치인인 윤보선(尹潽善)의 5촌 당숙이었다. 어윤중(魚允中)의 문인이다. 본관은 해평(海平), (號)는 좌옹(佐翁)이다. 충청남도 아산군 둔포면 신항리 출신.

생애

생애 초기

출생과 가계

아버지 윤웅렬(왼편 담배 피우는 이)

윤치호는 1864년 음력 12월 26일 충청남도 아산 둔포면 신항리 신촌에서 서얼 출신 무관 윤웅렬(尹雄烈)과 이일영(李日永)의 딸인 전주이씨(全州李氏) 이정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리고 서모 김정순(金貞淳)에게서는 30년 터울 이복 동생인 윤치왕(尹致旺), 윤치창(尹致昌) 등이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조선 선조(宣祖) 때의 형제 정승 윤두수·윤근수 형제의 후손으로 윤두수의 둘째 아들 예조판서를 지낸 윤흔(尹昕)의 후손이었다.[2] 순종비 순명효황후의 친정인 윤덕영·윤택영 일가와는 먼 일족이었다. 그의 집안은 18세기 중엽까지 명문 양반가문이었다가 그뒤 향반(鄕班)으로 몰락하였으나 할아버지 윤취동이 지중추부사가 되고 아버지 윤웅렬, 숙부 윤영렬무관으로 출세하여 중앙으로 진출하면서 다시 가세를 일으켰다. 윤치호는 유복한 어린시절을 보냈는데 유년기에 그는 한학을 수학하였고, 충남 아산 둔포면 고향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그는 100칸에 가까운 대저택에서 생활하였는데, 이 저택은 아버지 윤웅렬 사후 매각되었다가 여러차례 주인이 바뀐 뒤 이복동생 윤치창이 매입하여 일시 거주하기도 했다. 아버지 윤웅렬은 글재주가 있고 암기력이 좋은 장남 치호에게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아버지 윤웅렬은 자신이 서자 출신이었다는 점이 아들과 자손들의 앞날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을 우려하였다.

유·소년기

1882년 임오군란으로 일본 망명중인 아버지 윤웅렬(오른쪽에 앉은 이)과 함께

윤치호는 9세에 한성으로 유학하여 서당에 입학하여 2년간 한학을 배웠다. 1875년 11세 때부터 개화파 인사 서광범(徐光範)의 친척 김정언(金正言)의 집에서 숙식하며 수학하였으며, 영특했던 그는 15세에 스승 김정언에게 과거에 응시하게 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이때 김정언의 인척 서광범이 그의 사랑에 있었는데 스승 김정언은 나이가 되지 않았다며 거절하였으나, 이를 목격한 김정언과 서광범은 그의 글재주가 비상함을 알아보았다.

1879년 15세에 한성부 정동 출신 진주강씨 부인과 결혼하였으나 7년만인 1886년에 사별하였다. 아버지 윤웅렬이 향반에다가 서얼 출신 무관이라서 동료들에게 무시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게 된 그는 열심히 한학 공부에 몰입하였다.

중국인 아내 마애방과 자녀들(왼쪽으로부터 아들 광선, 영선, 딸 봉희) (1902년)

동시에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지니게 되었고, 이어 신분제 철폐, 서구 문물 개방 및 수용, 민중들의 권리 향상, 민중의 참정권 획득 등 사회 개혁에 대한 의지로 승화시키게 된다. 또한 여성을 인격체로 생각하지 않는 유교적 가치관 역시 그릇된 사고방식으로 철폐되어야 한다고 봤다. 그는 1894년 중국 여인 마애방(馬愛芳 1871-1905)과 재혼하여 윤영선, 윤광선, 윤봉희, 윤용희를 두었다. 이때 서재필, 김옥균, 서광범, 안경수, 홍영식 등을 만나게 되는데, 뒤에 그는 1896년 서재필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활동하게 된다.

아버지 윤웅렬은 무관이나 서얼출신으로 제2차 수신사 일행을 따라가 메이지 일본의 새로운 문물을 시찰하고 돌아와 개화파 인사로 활약하였으며 교련병대 창설을 주관하기도 했다. 그러나 학문적 수준은 높았지만 몰락한 향반가에다가 서얼이었던 신분 탓에 아들 치호가 문과 과거에 응시, 급제할 길이 막혀있는 현실에서 아들의 장래를 염려하였다. 아버지 윤웅렬김옥균민영익과 접촉, 그들에게 부탁하여 아들의 일본 유학을 주선하였다. 1881년 1월 어윤중(魚允中)의 문하생이 되어 수학했다. 아버지 윤웅렬은 개화승 이동인과도 교류하며 아들의 유학을 주선하였고, 그의 스승 어윤중 역시 그의 도일을 적극 추천, 지원하였다.

출국과 일본 유학

아버지 윤웅렬 등의 노력으로 윤치호는 1881년 17세 때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 조사(朝士)였던 어윤중의 수행원의 한사람으로 일본에 건너가, 한국 최초의 동경 유학생의 한 사람이 되어 개화사상을 수용하였다. 서얼의 후예였던 그는 농업학교와 기술학교 중에 택일하게 되었으나 아버지 윤웅렬의 부탁과 노력으로 기술학교나 농업학교 대신 일본 외무상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와 가까이하며 이노우에 가오루의 주선으로 동인사(同人社)에 입학했다.

비상한 기억력과 암기력이 눈에 띄어 이노우에 가오루,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등을 수시로 만나 면담했다. 일본 체류 중 그는 일본이 빠르게 서양문물을 받아 들여 근대국가로 발전하고 있는 것을 보고, 문명개화가 시대의 정신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일본보다도 서양에 더 관심이 많았다. 독학으로 일본어 공부를 한 뒤, 1882년 도쿄제국대학 철학교수의 부인 밀레트도쿄제국대학 영어강사 간다(神田乃武) 등에게서 영어를 배웠다. 일본어와 영어를 배우고 유학생활을 하면서도 여가에 그는 김옥균(金玉均)·서광범·박영효(朴泳孝)·유길준(兪吉濬) 등 개화파 인물과 게이오 의숙(慶應義塾)의 경영자 후쿠자와(福澤諭吉), 동인사의 경영자이며 도쿄제국대학 교수인 나카무라(中村正直) 등 당대 일본의 문명 개화론자을 만나 가까이 지냈다. 한편 임오군란의 책임자로 지목된 아버지 윤웅렬일본으로 망명했다가 곧 귀국하였다. 윤웅렬은 일본에 있는 동안 아들과 함께 보냈다.

일본 유학 중 그는 여행을 하며 견문을 시찰하기도 했다. 동시에 낙후된 조국 조선에 대한 비판의식이 싹트게 되었다. 또한 일본을 통해 신분 차별이 없고, 적서 차별이 없고, 남녀 차별이 없는 미국유럽의 문물을 접하게 되면서 그는 문명개화의 필요성을 신념으로 삼았다. 이후 그는 조선의 문명개화에 뜻을 두고 본격적인 개방, 문명개화노선을 걷게 되었다.

인종편견과 차별이 극심한 미국, 지독한 냄새가 나는 중국, 그리고 악마 같은 정부가 있는 조선이 아니라, 동양의 낙원이자 세계의 정원인 축복 받은 일본에서 살고 싶다.[3]

김씨, 조씨에 이어 민씨 척족 세력이 전권을 장악하고 부패와 전횡을 일삼는 것에 회의감을 느끼기도 했다.

청년기

조선인 최초의 영어 통역사

1883년 1월~4월간에 일본의 요코하마에 있는 네덜란드 영사관의 서기관 레온 폴데르씨에게 영어를 배웠다.[3] 1883년 4월까지 일본에 체류하였고 이후 미국에 건너가 신학문을 접한뒤, 직접 신학문을 배웠다. 당시 그는 미국 사회에서 인맥에 의존하지 않고, 실력에 따라 공개채용하는 제도를 보고 충격을 받기도 했다. 또 1883년 5월 한미수호조약(韓美修好條約)이 체결될 때는 초대 주한 미국공사 푸트의 통역관으로 귀국하여, 통역관으로 활동했다. 원어민이 아닌 네덜란드인에게 배운 어설픈 수준의 영어 실력이었지만 당시 영어 통역관이 없는 조선에서는 그의 통역에 의존해야 했다. 그러나 통역관과 외무 아문의 주사로 활동하는 중에도 그는 틈틈히 미국인들을 찾아가 영어를 배우며 철자와 어투를 고치며 영어 실력을 가다듬곤 했다.

윤치호는 서서히 미국인과 대화하면서 자신의 어법과 어투를 고쳐나갔는데, 1884년 봄에 이르면 당시 한글에 없던 단어까지도 명확하게 파악할 정도의 영어 구사 실력을 갖추게 된다.

2003년 그의 서한을 검토했던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 교수 박노자경희대학교 교수 허동현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1883년~1884년에 그가 작성한 영문 문서를 보면 요즘 웬만한 대학생의 영어 작문보다 훨씬 고급으로 보인다[3]고 평하였다. 그가 영문으로 번역한, 조선의 최초의 도미(渡美)사절로 1883년에 미국에 건너간 민영익(閔泳翊,1860~1914)의 신임장[4]을 보면“비준”(批准:ratification)처럼 그 당시에 한글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근대적 한자어의 영문 번역어까지 다 보입니다.웬만한 조선 선비 같았으면,한자로 써도 정확하게 무슨 소리인지 모를 그 단어들의 정확한 의미를,윤치호가 이미 영어로 파악했다는 것이다.[3]

귀국과 갑신정변

푸트 공사 일행과 함께 (오른쪽 세번째, 미국인 일행을 보고 서있는 관복입은 이가 윤치호)

1883년 5월 그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주사로 임명되었다. 이후 푸트의 통역관을 겸하며 푸트와 고종, 개화파 사이를 오가며 푸트와 고종, 개화파를 연결시키며 교량 역할을 하면서 청나라조선 내정간섭 배제와 미국, 유럽 국가들과의 외교와 유대 강화, 각종 정치기구 개편과 민중들의 정치참여와 참정권 부여를 역설했다. 동시에 문호를 개방하고 서구의 민권사상과 문물을 수용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해 아버지 윤웅렬이 향헌비(鄕憲碑)의 비문을 깎아내린 것과, 별기군을 유임시킨 일로 탄핵을 받자 아버지 윤웅렬의 무고함을 변론하는 상소를 써서 올리기도 했다.

신의 아버지 윤웅렬(尹雄烈)은 외람되게 특별한 은혜를 입고 나아가 곤수(梱帥)의 직임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삼가 북백(北伯) 임한수(林翰洙)가 북청(北靑) 유생(儒生) 조면한(趙冕漢) 등의 말에 근거해서 정부(政府)에 올린 장계의 내용을 보니, 논계(論啓)한 것은 터무니없이 날조하여 모함한 것이 끝이 없었는데, 심지어 가렴주구 하였다고 말하기까지 한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신의 아버지는 북청 관리가 백성들의 돈 1만 냥을 더 거둔 것을 조사해 내어 민간들에게 돌려주었는데, 이것을 가지고 가렴주구라고 한다면 관름(官廩)을 착취하고 아전들의 급료에서 거두어들였다는 말입니까?

또 ‘열 집에 한 명의 병정을 내면서 어찌 뿔뿔이 흩어지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가?’라고 말합니다. 대개 장정을 뽑아서 새로 군사 편제를 정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로 인하여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진다면 본토에서 첨병(簽兵)을 모집하지 않고 어느 지방의 백성들을 모집하겠습니까?

또 ‘향헌비(鄕憲碑)의 비문을 깎아버렸다.’고 한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신미년(1871)에 북청 사람이 사적으로 비 하나를 세우고 비액(碑額)에 ‘빈척신유(擯斥新儒)’라고 크게 썼는데, 이것은 대략 《향헌록(鄕憲錄)》의 문구를 베껴서 권위 있는 것에 의거하는 것입니다. 가령 《향헌록》에 초목을 지어 나열한 것 가운데 어찌 유생(儒生)과 향인(鄕人)을 구별한 것과 신진 유생을 배척한 글이 있습니까?

지난 을해년(1875)에 세유(世儒)들이 전하께서 행행하는 길에서 원통함을 호소하여 계하된 관문(關文)이 있기까지 하였습니다. 정부(政府)에서 관문으로 신칙하였는데도 그대로 가로막혀 시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향인이 감영과 고을에서 권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의 아비는 삼가 판하(判下)한 사목(事目)에 따라 시행하였고, ‘유생을 배척한다.’는 들의 글자를 깎아버리도록 허락했을 뿐입니다.

또 ‘별기군(別技軍)이 재임(齋任)이 된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삼가 열성조(列聖朝)에서 판하한 남병영 친기위 사목(南兵營親騎衛事目)을 살펴보니, 향임(鄕任), 교임(校任), 무임(武任)에 대해서는 친기위를 지내지 않은 자는 차임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전부터 외병방(外兵房)이 재임을 지낸 경우가 있었고 전전 별장(別將)이 향임을 지낸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의 아버지도 사목에 의거하여 친기위를 몸이 좋고 재주가 있으며 글과 식견을 겸비하고 부지런한 사람으로 차출하게 함으로써 격려하고 권면하였던 것입니다. 지금의 별기군은 바로 예전의 친기위이니, 이것은 신의 아비가 처음으로 행한 일이 아닙니다.

대체로 일의 상황이 이처럼 명백한데도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전적으로 남을 구렁텅이에 빠뜨리기만을 일삼고 있습니다. 신의 아비가 모함을 받은 것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그의 아들 된 자로서 어떻게 진심과 정성을 피력하여 한 번 그 원통함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자애로운 성상께서는 엄하게 사핵(査覈)하여 주소서

1884년 12월의 갑신정변 직전까지 그는 온건파 개화당의 일원으로 자주독립과 참정권, 부국강병을 위해 활동하였다.

영어 실력의 부족함을 느낀 그는 다시 주조선미국 공사관의 직원들과 교류하며 자신에게 영어를 가르쳐줄 것을 부탁하여 주조선미국공사관 직원 베르나든(J. B. Bernadon)이 이를 수락하였다. 5월 그는 1개월간 베르나든에게 하루 한 시간씩 영어 개인 지도를 받기도 했다.

1884년 12월 갑신정변 초기에 윤치호는 정변 계획을 접하고 혁명의 성공을 기대하였다. 당시 김옥균을 믿고 따랐던 그는 1894년 9월에 접어들면서 윤치호는 아버지인 윤웅렬과 함께 '개화당의 급진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개화당의 급진성을 겨냥, 근신을 촉구하는 입장을 보였다.[5][6] 며칠 뒤 윤치호는 김옥균에게 "가친(아버지)이 기회를 보고, 변화를 엿보아 움직이는 것이 좋겠다고 한다.[5][7]"라는 말을 전했다.

서광범, 김옥균, 서재필, 박영효 등과 가까이 지냈고 혁명의 성공을 내심 기대하였지만 1884년 12월 갑신정변 때는 개량적 근대화론자로서, 주도층과의 시국관 차이로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다.[8]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에 갑신정변이 발생하자 음력 10월 18일 윤치호와 윤웅렬은 "(개화당)이 무식하여 이치를 모르고, 무지하여 시세에 어두운 것"이라고 논했다.[5][9] 윤치호는 독립과 개화를 달성하는데 고종 만을 믿을 수는 없다고 봤다.

그러나 김옥균, 박영효 등과 절친했기 때문에 정변 실패 후 신변의 위협[8]을 느껴 출국을 결심하게 된다. 사실 갑신정변의 실패를 예감했던 그는 망명할 계획을 미리 세워놓기도 했다.

유학과 서구 문물 수용

갑신정변의 실패와 망명 생활
모교 중서서원(둥우대학으로 개명)
모교 중서서원(둥우대학)의 교문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1885년 1월 고종의 윤허를 얻어 출국, 1885년 1월 프트 공사의 추천서를 가지고 배를 타고 인천항을 출발 일본 나가사키를 경유하여 1월 23일 청나라 상하이에 도착했다. 미국으로 가고 싶었으나 길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미국행을 단념하고 청나라에서 유학하였다. 상하이에 도착 직후, 윤치호는 그길로 청나라로 망명하여 주미국 총영사 G. 스탈을 찾아갔다. 스탈의 알선으로 그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 A. J. 앨런이 세운 중서서원(中西書院, the Anglo-Chinese College, 둥우대학(東吳大學)의 전신)에 입학했다.

갑신정변의 실패에 절망한 그는 상하이에서 방황의 나날을 보냈다. 20대 초반 상하이에서 '색루'(사창가)에 수시로 출입했고, 음주에 몰두[10]했다. 후일 정운현은 그의 <일기>(日記)에 따르면 초기 2년간(1885년 2월∼1887년 2월) 음주 횟수 67회, 밤의 여성과 동침횟수는 11회. 망명객의 울분과 20대 초반의 객지생활의 외로움이 겹친 것이었으리라[11]고 분석하였다. 그를 암살하려 파견된 자객들 역시 그의 망가진 모습을 보고 그대로 되돌아갔고, 더이상 그를 추격하는 추격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상하이에서 방황하던 중 한 미국기독교 선교사를 만나 감화받고 그의 인도로 교회에 나간 뒤,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태어나기로 다짐하고 공부에 몰두한다. 상하이 체류 중 그는 선교사를 통해 그는 기독교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이후 더이상 사창가를 출입하거나 음주와 흡연을 그만두고 새사람으로 거듭나기로 결심한다. 그는 다시 조선의 개화를 위해 투신할 것을 재다짐한다.

상하이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윤치호는 더럽고 냄새 나는 중국인을 보며 조선인의 미개한 삶을 더욱 부끄럽게 생각했다. "청인(淸人)의 집은 음침하기 측량 없어 일본 사람의 정결하고 명랑한 집에 비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의 똥뒷간 같은 집이야 어찌 청인의 2층집에 비하겠는가.[12]"

기독교 개종과 미국 유학

중서서원에서 3년간 공부하며 윤치호는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중서서원 재학 동안 열심히 서양의 문물을 접하며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보던 조선인들의 중화사상(中華思想)에 입각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며, 낙후된 조선중국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과 낙후된 조선 사회의 현실에 절망, 조선 근대화에 대한 비판적,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되었다. 상하이에서 3년 반을 보낸 후 청국(淸國, 청나라) 사회에 대한 그의 소감은 ‘더러운 물로 가득 채워진 연못’이었다. 반면 일본은 ‘동양의 한 도원(桃園)’이었다.[11] 윤치호에게는 본부인 진주강씨 외에 두 명의 첩이 있었던 듯 하다. 그가 상하이에 체류하는 동안 그의 두번째 첩은 다른 남자에게 개가했다.[13] 1886년에는 그의 첫 부인인 진주강씨가 사망했다. 그가 상하이로 망명하고, 그의 아버지 윤웅렬은 능주로 유배되었을 무렵[14]이었다.

이후 윤치호는 10여 년간 중국미국으로 망명·유학하여 문물을 접하고, 서구 민권사상기독교 신앙을 수용했으며, 그는 부유했던 집안의 지원과 동시에 그를 높이 평가한 기독교 선교사들, 조선개화파 인사들, 일본인 개화인사 등 여러 곳에서 지원받으며 마음껏 학업에 정진할 수 있었다. 알렌과 W. B. 보넬 교수의 영향으로 개신교에 귀의를 결심하여 1887년 4월 3일 상하이에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가 크리스찬이 된 배경에는 4년 여의 그리스도교 연구와 수련 끝에 그는 크리스천이 되는 결심을 하였고, 마침내 스스로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1887년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다.[15]

그에게는 노동을 천시, 경시하는 사농공상의 풍조와 출세욕, 관직열에 빠진 조선의 배관열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는 유학기간 중 그는 서구의 민권사상과 합리주의, 직업윤리 의식, 민중의 참정권을 수용, 개혁의 필요성을 확신하게 되었다.

내나라 자랑할 일은 하나도 없고, 다만 흉 잡힐 일만 많으매 일변 한심하며, 일변 일본이 부러워 못견디겠도다.[16]

조선이 지금의 야만적 상태에 머무느니 차라리 문명국의 식민지가 되는 게 낫겠다.

윤치호, 윤치호일기 1890년 5월 18일자[17]

1890년대 초반 미국 체류시 윤치호는 사회진화론을 최고의 진리로 받아들여 중국인들에 대한 미국 사회의 무시와 억압과 중국인에 대한 인종주의적인 왕따 행위까지도 옹호했다.[18] 그러나 합리주의적인 사회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밴더빌트 대학교 재학 시절
에모리 대학 재학 시절

1888년 선교사 알렌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밴더빌트 대학교영어 영문학과에 입학하였다. 밴더빌트 대학교 재학 중에 그는 감옥의 수인선교를 위해 1년 6개월간 매주일 오후에 형무소를 방문하여, 미국인 죄인들에게 기독교 강론이나 성경을 가르쳤다.[15] 조지아 주에 가서는 가난한 흑인들에 비참한 생활에 관심을 가지며 그들에게 개신교를 전도하기도 했다.[15] 한편으로 그는 학비걱정이나 일본 학생친구들과의 대화, 교수들의 초청과 시귀임, 자신의 이성이나 성적인 혹은 음주문제의 고민, 그 절제를 위한 노력과 실패 등도 언급하며 자신의 수련의 결의를 때로 ‘머리를 깎는 삭발’로 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윤치호의 떠나지 않는 고뇌는 역시 약소하고 미개하며 썩은 관료들로 인해 피폐한 조선을 구할 수 있을가 하는 것이었다. 그의 여러 미국의 스승들 중에 조직신학 교수 틸레트와 성경사 교수 호스, 캔들러 총장 등은 특별한 영향을 윤치호에게 주었다. 특히 캔들러는 윤치호의 정치 사회 역사의식이나 기독교적 원숙한 인격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15]

미국 유학은 그에게 또 하나의 자극이었다. 선거로 대통령을 뽑는 미국의 ‘위대함’을 목격하고는 미국은 일본보다도 한 수 위의 나라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생각은 미국사회의 ‘인종차별’로 깨지고 말았다.[11] 내심 미국의 민주주의와 청교도적 합리주의 사상과 일한만큼 받는다는 사상에는 경의를 표하면서도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들에 대한 백인종의 차별대우를 보고 그는 분개했다.

모교 에모리 대학교
모교 에모리 대학 전경

밴더빌트 대학교에서 그는 주로 신학(神學)과 영어 등을 배웠으며, 1891년 초 밴더빌트 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밴더빌트 졸업 직후 윤치호는 조지아 주로 건너가 조지아 주 카빙턴(Covington)에 있는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한다. 그러나 1891년 가을 그는 옥스퍼드 대학을 중퇴한다. 이 기간 중 그는 집안에서 부치는 학비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비와 생활비를 조달한다. 낮선 환경에서 넉넉치 않은 환경은 그의 학업에 어느정도 지장을 가져다 주었다.

에모리 대학 수학과 재혼

그러나 다시 1891년 미국 애틀랜타에 정착한 뒤 다시 에모리 대학(Emory University) 등에서 2년간 인문사회과학, 자연과학 등을 수학하였다. 1893년 가을 윤치호는 미국 에모리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한편 그에게 대학원 과정에 진학하면 장학금 전액을 지원하겠다는 미국 감리교회의 제안이 들어왔으나 그는 조국을 위해 할 일이 있다며 양해를 구하고 귀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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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부인 마애방

귀국 전 윤치호와 서재필은 한 차례 만났었다. 1893년 가을 에모리 대학을 마치고 상하이로 되돌아가기 전인 윤치호는 인사차 서재필을 방문했었다.[19] 서재필은 윤치호의 방문이 내키지 않았다. 그를 만나자 잊고 있었던 십년 전의 일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무모했던 정변이 떠올라 회한에 잠겨 스스로 부끄러워지며 자신 때문에 죽은 부모와 처자를 떠올렸다. 서재필은 졸업을 축하한다는 의례적인 인사만 하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고, 윤치호는 왜 그런지 알면서도 무척 서운해했다.[19] 윤치호는 서재필의 심정을 이해하고 그를 보내주었다.

1893년 9월 윤치호는 에모리 대학교의 캔들러 총장에게 $200달러를 기탁하며 한국 선교를 간청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15] 1894년 3월 중국 여성 마애방과 재혼하였다. 마애방과의 결혼은 연애결혼이었다.[14] 마애방미국 남감리회에서 운영하는 맥티여학교를 졸업한 여성으로[14] 박노자는 마애방이 기독교 신도이자 매우 서구화된 중국 여성이라고 지목했다.[18] 마애방과의 사이에서는 봉희, 영선, 광선, 용희 등 2남 2녀가 태어났다.[20]

미국 유학기간 동안 윤치호는 기독교민주주의, 과학문명 등을 목격하였고, 기독교 사상, 민주주의, 과학 문명에 기초한 합리주의적인 사회를 경험하면서[8] 조선의 체제에 실망을 느끼는 한편 이를 조선근대화의 기본방향으로 설정했다. 이후 윤치호의 사상적 기초는 '힘의 정의'라는 사회진화론적 세계관으로 변모해갔으며, 사회개혁에서는 미개한 전통사회를 선교와 교육이라는 국민개조를 통하여 근대사회를 형성한다는 국민계몽의 이상을 품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조선 사회에 대한 경멸감도 품기도 했다.

차별대우와 인종주의적 사고로 변화

그러나 한편으로는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주의적, 흑인을 차별하는 태도를 목격하면서 백인들의 오만함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다. 미국 체류 중 황인종을 멸시하는 백인 불량배들에게 가끔 얻어맞기도 하고, “유색 인종”이라는 이유로 호텔 투숙을 거절당해 정거장에서 밤을 지샜는가 하면, 세례 교인이었던 그와 가장 가까워야 할 미국 선교사에게마저 늘 은근히 - 그리고 가끔은 매우 노골적으로 - “왕따”당하는 처지였다.[3] 이는 귀국 이후에 조선에서 만난 미국인 선교사들도 비슷하게 그를 대우했다.

만약 내가 마음대로 내 고국을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일본을 선택할 것이다. 오, 축복받은 일본이여! 동방의 낙원이여! 1893년 11월 1일자 일기[21]

그는 평소 조선인들의 불결한 위생과 겉치레, 감정적 대응 등을 내심 경멸해왔다. 그리고 서구의 기독교사상과 일한만큼만 댓가를 받는다는 청교도 정신, 합리주의의 수용을 통해 이를 개선하려 했다. 그러나 평소 기독교선교사들로부터도 자기 일 처리도 못하는 작은 아이, 원주민, 예의를 지키지 않아도 될 만한 사람의 대접을 늘 받아 온 윤치호는, 인종주의야말로 미국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3] 그뒤 그는 미국의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기독교 사상과 개척정신은 높이 평가하면서도 내심 백인종을 혐오하는 이중적인 태도와 인종주의적인 사고를 갖게 되었다.

또한 흑인이 백인들로부터 차별대우를 받는 것에는 분노하면서도 흑인에 대해서는 1893년 2월 17일자 일기에 '(아프리카인들이 미국에 끌려와) 영어를 배운 것만으로도 그들의 노예생활에 대해 충분히 보상받은 것이다.[17]라는 이중적인 시각을 갖게 된다. 귀국 이후 그는 국내 인사들이 미국을 무조건적으로 의존하거나 일제와는 다른 선량한 국가일 것이라는 생각을 비판, 경계하기도 했다.

청나라 체류, 중서서원 교사 생활

1893년 11월 배를 타고 청나라의 상하이에 도착했다. 청나라로 건너간 윤치호는 이듬해 7월 25일 청일 전쟁이 터지자 8월 모교인 상하이 중서서원의 교사가 되었다. 1893년 8월부터 1895년 1월까지 그는 중서학원에서 영어, 영문학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때에 이르러 그는 유창하지는 않았지만, 조선인이나 청나라인, 일본인들을 상대로 영어를 가르칠 만큼의 영어 회화 실력을 갖추었다.

청나라 상하이에서 체류하면서 지냈을때인 1898년 3월 27일 오후, 윤치호는 김옥균홍종우등 일행을 맡아들였다. 김옥균은 윤치호에게 '리훙장의 양아들 리징황의 초청으로 오게되었다.[22][23] 경비는 홍종우라는 자가 대고 있다."고 말하자, 윤치호는 의아스러운 눈빛으로 "홍종우는 (조선에서 보낸) 스파이 같으니 조심하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그러자, 김옥균은 "그가 스파이일리가 없다."고 답했다 한다.[22][23]

3월 27일 김옥균은 인편으로 윤치호에게 오후 1시 반에 자신이 숙박하고 있는 동화양행(일본 호텔)로 와서 함께 갈 곳이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급히 보낸다. 그러나 윤치호는 학교 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김옥균의 제안을 사양한다.

다음날 3월 28일 김옥균은 홍종우에 의해 저격, 암살당했다.[22][23] 미행의 그림자를 예상한 그는 김옥균의 암살 소식을 접하고 수시로 거처를 이동하였다.

개화파 활동

귀국과 초기 개화파 시절

윤치호는 독립신문의 주필로 활동하다가 2대 사장에 취임했다.

1895년 2월 그는 조선으로 귀국, 2월 13일 배편으로 입국하여 돌아왔다. 귀국 후 김홍집 내각에서 외무부협판을 지냈다. 박영효 내각에서는[8] 그 뒤 총리 대신 비서관을 거쳐 1895년 6월 학부협판(學部協辦)이 되었으나, 춘생문(春生門)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하였다. 그 후 이상재, 서재필, 이승만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독립협회 운동이 절정기에 달한 1898년 경에는 독립협회 회장, 《독립신문》 주필 그리고 만민공동회의 최고 지도자로서 민권운동과 참정·개혁운동을 정력적으로 지도했고, 실력양성운동에 진력하였다.[24] 윤치호는 1895년 귀국한 이후 개화파 정권에서 김홍집-유길준 일파와 박영효 일파 사이에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개혁 정책 추진에만 힘을 쏟았다.[25] 또한 강연 활동을 다니며 서구 세계를 알지 못하는 민초와 식자들에게 미국과 유럽의 존재를 인식시키고 선진문명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렸다. 한편으로 독립신문사의 주필, 발행인으로 활동하며 칼럼과 논설활동 및 신문 발행 제반에 직접 참여하였고, 황국협회와 척족 정권의 압력과 맞서 자신의 재산을 비용으로 투자하여 신문과 독립협회의 자금으로 활용하였다. 또한 한성부의 사교모임인 정동구락부에도 회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했다.[26]

윤치호의 친구 유길준. 그러나 윤치호는 그를 명성황후 암살의 협력자라고 기록해놓았다.

1895년 8월 윤치호는 함경남도 북청에 주재하던 남감리교 선교사 헨드릭스 감독 비숍 핸드릭스(Bishop E.R. Hendrix) 등에게 조선의 선교를 위한 방문을 부탁하는 서신을 보냈다.[15] 그가 보낸 편지에 자극을 받은 헨드릭스는 1895년 10월 13일 미국감리교 선교사 리드(C. F. Reid) 등과 함께 한성에 와 남감리교의 시작이라 할 선교를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27] 그해 9월 26일 사촌동생 윤치오와 함께 특파대사 수행원에 임명되었다.

10월 8일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일본인 낭인들에게 암살당하자 그는 일본 및 일본인의 협력자들을 규탄했다. 조선땅을 처음 밟은 일본인들이 명성황후를 쉽게 찾아내서 살해하는 데는 조선인 협력자들이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 명성황후의 암살에 국내에서 자발적으로 가담한 조선인 가담자와 내통한 조선인 고위 인사들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윤치호의 조선인 고위층의 민비 암살 협력설은 무시당하였다. 그의 주장은 그의 일기에도 나타나는데, 윤치호는 자신의 일기에서 그를 암살한 일본 낭인들의 지휘자 중 한사람으로 유길준을 지목하였다.[28] 명성황후가 암살당할 무렵 윤치호는 유길준과 일본인 이시츠카가 사건의 전말을 은폐하기 위해 자신을 그날의 저녁 식사에 자신을 초대했다는 것이다.[28] 한편 유길준은 그의 친한 친구이자 그와 연락을 자주 주고받는 몇안되는 사람이기도 했다.

을미사변 뒤로도 윤치호는 유길준과 친하게 지냈고, 유길준 사후에도 유길준의 아들 유만겸과 유억겸 형제와 가까이 지냈다.

러시아 사절단 파견과 베트남 방문

1896년 러시아 차르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했을 때, 앞줄 왼쪽 두 번째가 영어담당 통역관인 윤치호, 세 번째는 대한제국 사절단장 민영환

1895년 12월 독립협회의 동지 서재필이 복권되어 귀국했다. 서재필이 처음 귀국했을 때 윤치호는 춘생문 사건에 가담했다가 체포대상이 되어 미국공사관에 피신해 있었다. 서재필은 두문불출하던 윤치호를 찾아 정세에 대해 자문했고, 윤치호는 선배 서재필의 공백기에 조선 정세를 친절하게 알려주면서 동시에 정동구락부 인사들과 접촉할 수 있도록 주선, 다리를 놓아주기도 했다.[29]귀국 직후 시도했던 신문 간행이 일본에 의해 좌절될 뻔했을 때 서재필의 상심을 들어주던 유일한 대화 상대는 윤치호였던 것이다.[29] 윤치호는 아관파천 직후 신문 간행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던 서재필을 돕고 싶었지만, 이미 민영환을 수행해 러시아에 다녀오라는 고종의 명을 받았기에 도울 수 없었다[29] 서재필, 이승만 등에게 양해를 구한뒤 러시아 파견 사절단에 임명되었다. 1896년 2월 징계명령이 내려졌으나 고종의 특사로 철회되었고, 2월 12일 학부협판에 임명되었다.

1896년 4월 1일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대한제국의 사절단인 민영환(閔泳煥)의 수행원으로 파견되었다. 4월 11일 러시아로 가는 길에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임명되었다. 러시아를 방문하면서 그는 러시아가 미국이나 유럽 국가에 비해서 영토는 넓으나 기술발전이 훨씬 느렸던 사실을 눈치챘으나, 러시아의 군사력만은 높이 평가했다. 그는 장차 러시아가 군사 강국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윤치호와 수행원들은 열차편으로 러시아에 건너가 황제의 대관식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이때 윤치호의 귀국은 늦어졌는데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고 프랑스에 들렸다 오느라고 늦[29]어졌다. 프랑스에 도착한 이후 그해 유럽을 순방하고 1896년 12월 윤치호는 유럽에서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베트남의 항구 사이공(西貢)에 들렀다.[30] 사이공을 체류할 때 윤치호는 프랑스인들이 베트남 농민들과 상인들에게서 빼앗은 세금으로 닦은 사이공의 '파리 수준 이상'의 깨끗한 도로들을 보고 감격했다.[30] 1896년 사이공에서 윤치호는 일본의 공식 사절단을 만났다.[31][30] 사이공을 떠난 뒤에 홍콩(香港)으로 가서 사람을 압도하는 웅장한 건물을 본 후 "유럽의 인종이 확실히 자연을 정복하는 기술을 잘 익혔다."는 결론을 내렸다. 윤치호는 사회진화론에 영향을 받아 서구 열강 세력에 대해 "신대륙의 초원과 밀림을 새로운 제국과 공화국으로 만들"만큼 세계 문명화의 큰 일을 완벽하게 실천하는 '우월한 인종'이라 평가했다.[30]

독립협회 활동과 사회 활동

독립협회와 계몽운동
이완용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참여하였으나 위험한 단체로 여겨 탈퇴한다. 그는 이후 친러파친일파로 변신한 이완용을 경멸했다.)

귀국 후 1897년 중반 독립협회에 가입하였고, 윤치호는 열정적으로 독립협회 활동에 참여했다. 1897년 7월 8일 정동에 새로 지은 감리교회 예배당에서 배재학당 졸업식이 있었고 600명의 청중이 모였다. 1부는 문학 시강으로 한문과 영어의 공개 강독이 시행되었다.[32] 윤치호는 배재학당 졸업식 연설에 참석하였다. 1부는 문학 시강으로 한문과 영어의 공개 강독이 시행되었다.[32] 영어 강독에서 신흥우가 영어 문장을 읽고 한글로 유창하게 번역하자 청중들이 크게 호응했다. 이어 이승만영어 연설이 시작되었는데, 발음도 유창하거니와 조선 독립을 역설하는 패기가 청중들을 사로잡았다.[32] 2부는 갈고 닦은 협성회 토론 시범을 보이는 차례였다.[32] 토론회의 호응도는 높았고 토론은 성공적이었고 서재필은 1년간 자신의 강연을 수강한 학생들 가운데 우등 1명, 이등 1명, 삼등 2명의 학생을 뽑아 각각 5원, 3원, 2원씩의 상금을 수여하였다.[33]

이는 토론회에 내빈으로 참석, 참관하던 윤치호에게도 영향을 주었다.[29] 협성회 공개 토론회의 성공은 그날 하객으로 참석했던 독립협회 회원들에게도 큰 자극이 되었다. 러시아에 다녀온 뒤 의기소침했던 윤치호에게 남다른 감격이었다.[29] 윤치호는 청년들의 역량을 믿고 신분제도 철폐, 적서 차별 철폐, 남녀 차별 철폐, 민중의 참정권 획득을 위한 설득, 홍보작업을 추진해야 된다고 확신한다.

동지 서재필

1893년 에모리대학 졸업 직후 윤치호는 미국에서 서재필을 만났을때 혹시나 조선의 정국이 변한다고 해도 서재필이 아픈 기억을 되살리고 싶지 않아 귀국하지는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그런데 뜻밖에도 2년 후 한성 정동에서 재회하게 되자 윤치호는 놀라워했다. 그리고 윤치호와 서재필은 독립협회에서 의기투합하여 활동했다.[19] 1897년 8월 28일 윤치호는 독립협회의 제2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10월 원산항재판소 판사로 부임했으며, 10월 28일에는 만민공동회 회장에 선출됐다. 독립협회 참가 이후에는 서재필(徐載弼)·이승만·이상재(李商在)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이끌면서, 토론회 개최와 강연 활동을 계속하였다. 1898년 3월에 열린 만민공동회를 주관할 때는, 러시아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의 철수 등 반(反) 러시아 운동을 전개하여 부분적인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1898년 사촌 윤치소와 함께 경성신문 창간에 참여하였다. 학무 아문참의를 거쳐 1898년 7월 8일 다시 중추원 1등 의관에 임명되었고, 7월 22일 국왕에게 부패 관료들을 축출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소득이 없었다. 도리어 구 관료들을 탄핵한 상소가 구 관료, 척신 세력의 귀에 들어가면서 그는 배척과 모함, 음해를 당하기도 한다.

기독교 선교 활동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그는 조선을 방문한 선교사들의 통역을 하면서 기독교 선교를 도와주었다. 세례 교인이었던 그와 가장 가까워야 할 미국 선교사에게마저[3]도 그는 은근히 무시와 모욕을 당하곤 했다.

나에게 짐을 미리 배에다가 실으라고 강력하게 권고했던 휴제스(Hughes) 부인(한 선교사의 부인 - 인용자의 주)이 끝내 내가 너무 지나치게 강요를 해서 대단히 미안한데, 우리 선교사 같으면 당신네들을 보통 작은 아이로 보는 습관이 있지 않습니까. 그 습관이 나에게도 있어서 (자기도 모르게) 강요를 합니다. 당신이 우리네 선교사들을 아시잖아요? 라고 이야기했다. 이 말이 내 마음을 질러버렸다. 그녀는, 우리 원주민들이 우리 일을 스스로 처리 못할 만큼 다 우둔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우리 원주민들을 그렇게 보는 그들이, 민감한 일본인들의 분노를 그토록 많이 유발하는 것이 과연 놀라운 일이 아니다. (…) 내가 선교사의 조수가 되고 싶지 않은 많은 이유 중의 하나는, 너무 많은 영적인 보스 밑에 있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휴제스 부인에 대해서 하등의 불만을 가지고 있지 않다. (…) 그녀는 충실하면서 선심이 많은 선교사인데, 이처럼 우리 원주민들을 무시하는 것이, 인종주의적인 오만과 편견이 강한 미국의 출신이기 때문이다.[3]

(윤치호 일기 1897년 4월 23일자)

오늘 아침에 레르(Loehr) 목사가 중국 학생 신도들에게 교회에서 예수가 악마를 이겨서 천당을 쟁취하셨듯이 일본이 중국을 이겨 대만을 얻었다고 설교했다. (…) 중국인들에게 설교하는 자리에서 더 어리석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선교사들이 원주민들이 왜 예수에게 그들의 마음을 열어주지 않느냐고 불평한다. 그러나 선교사 자신들이 그들의 주택의 접견실에서 원주민들을 절대 대접하지 않는 (오만한 태도)를 버리지 않으면 원주민들도 마음을 열 리가 없다.[3]

(윤치호 일기 1897년 6월 31일자)

1899년에 언더우드(Underwood)박사와 그 부인이 (내가 지방관으로 있었던) 원산으로 잠깐 들렸다. 내 사랑하는 아내가 그 부인을 방문했다. 그러나, 그들이 1주일 후에 원산을 떠날 때 우리 집을 지나가면서도 우리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자신들끼리 예의를 정확하게 지키는 데다 우리에게도 자신들에게 예의 지키기를 강력하게 요구하는 그들이기에, 그러한 행실은 도저히 납득이 안 간다. 우리에게 인류 평등의 원칙이 명백하게 적혀 있는 성경을 가르치면서, 이처럼 그 원칙을 자신들이 위반하는 것이다 (…) 그들의 오만한 태도 때문에 나는 손해를 보면서도 그들과 되도록이면 사교하지 않으려고 한다.[3]

(윤치호 일기 1903년 1월 15일자)

백인 선교사들의 이런 태도는 윤치호로 하여금 실망과 냉소를 가져다주었다. 백인들의 인종차별주의적인 태도를 조국에서도 목격하게 된 그는 기독교를 신봉하면서도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나 기독교 사상만이 곧 진리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결국 그는 기독교 선교 사업을 도와주는 일에서 한발 물러서, 소극적으로 움직이게 된다.

개혁안 제출과 독립협회 강제해산

1897년, 1898년 독립협회만민공동회의 연사로 강연하며 윤치호는 백성들이 스스로 그 대표자를 선출하여 백성들의 의견이 국정에 반영되어야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왕정폐지론이나 황제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았다.[34] 군주의 존재는 별개로 국민이 선발한 대표자들을 통해 국민의 의견이 반영되어야 되고, 관료임면권에 있어서는 군주나 인사임명권자만의 의견이 아닌 백성들의 의견도 반영되어야 된다고 봤다.

황국협회 측은 '윤치호 대통령설', '박영효 대통령설' 등을 흘려 독립협회를 곤경에 몰아넣고 정부에 압력을 가하였[35] 다. 개화파가 쿠데타를 일으켜 공화국을 구성하고 윤치호 자신은 대통령 내지는 부통령이 될 것이라는 루머가 시중에 유포되자 윤치호는 은신처를 물색했다.

이후 서재필의 암살이 불가능하다고 본 수구파에 의해 서재필이 국외 추방당하자[36] 그는 독립협회를 이끌어나가게 됐고 1898년 8월 제2대 독립협회회장에 선출 되었다. 10월의 만민공동회를 주최할 때는, 헌의6조를 결의하여 국정에 반영시켰다. 11월 그는 최인환(崔寅煥)의 피습을 당했으나 미수로 그쳤다. 최인환은 탁지부대신 민영기(閔泳綺)의 측근이었다. 현장에서 잡힌 최인환은 곧 경무청으로 넘겨졌다. 그러나 독립협회대한제국 조정의 견제를 받다가 1898년 12월 강제적인 정부의 해산조처로 해산당하였다. 후속 조치로 12월 헌의 육조에 서명한 대신들이 파면당하였다.

윤치호는 독립협회의 혁파와 헌의 6조에 서명한 대신들을 파면시킨 관보를 보고[37] 고종과 정부, 일본과 러시아를 비난하였다.

이것이 국왕이라니! 어떠한 거짓말을 잘 하는 배신적인 겁쟁이라도 이 대한의 대황제보다 더 비열한 짓을 하지 못할 것이다. 정부는 친일노예 유기환(兪箕煥)과 친러악당 조병식(趙秉式)의 수중에 있다. 러시아인과 일본인들이 틀림없이 모종의 이권을 위하여 이 사건에 개입하여 그들의 노예들을 지원하고 있다. 저주받을 일본놈들!
나는 그들이 대한의 마지막 희망인 독립협회를 분쇄하는 데 러시아인들을 돕는 이유를 (민중들이) 알게 되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37]

독립협회의 해산에 외국 세력을 등에 업은 자들의 농간이 작용했고, 그는 일본의 앞잡이로 유기환, 이완용 등을, 러시아조병식 등을 비판, 성토했다. 한편 그는 조선이 살 길로 미국과의 수교가 필요하다고 내다봤다.

외세의 압력과 좌절

이처럼 그는 독립협회를 분쇄하는 데 고종과 수구파, 그리고 러시아와 일본이 결탁되어 있음을 간파하고 고종의 배신적인 비열한 행위를 매도하고, 일본의 탐욕적이고 간교한 행동을 저주했다.[37] 동시에 자신을 황제에 불충하는 역적으로 보는 민중들의 시선에도 크게 실망, 좌절하게 된다. 독립협회는 실패했고, 민중들은 그를 황제에게 불충하는 인물로 보게 되자 실망한 그는 그는 민중을 계몽의 대상에서 개조, 훈련의 대상으로 시각을 바꾸게 된다.

그는 당시 대한제국 조정을 휘젓던 친일파친러파 모두를 매국노로 봤다. 또한 독립협회에서 활동하다 친일파로 변절한 이완용에 대해서 시종일관 적개심과 냉담한 태도로 일관하게 된다.

그해 양력 11월 23일, 12월 15일~22일, 한성 판윤을 역임하였다.[38] 한성 판윤에 임명되었으나 뜻이 없던 그는 사직할 의사를 내비쳤고, 12월 17일12월 18일 한성 판윤직을 사임하는 상소를 올렸고, 12월 22일 면직되었다. 12월 22일 중추원 부의장(中樞院副議長)에 임명되었다.

이 기간 중 윤치호는 여러 번 탄핵과 제거 음모에 시달려야 했다. 1898년 12월 24일 그를 제거하려는 대신들의 탄핵 상소가 있었다. 1899년 1월 2일 심상희(沈相禧)가 왕에게 상소를 올려 윤치호와 고영근(高永根)에게 역적률로 다스릴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윤치호는 생명의 위험을 피하여 수시로 은신, 숨어 다녀야 했다.

독립협회 해산 이후

독립신문의 주필과 발행인을 하던 그는 신문사를 떠맡게 되어 1898년 독립신문사 제2대 사장이 되었으나, 관직에 임용되면서 사퇴하였고, 1899년 이후 독립협회에 대한 탄압은 가중되었다. 윤치호는 독립협회의 탄압·해산 시 외국인의 집에 은신하고 있다가 1899년 1월 7일자로 덕원감리사 겸 덕원부윤에 임명되었고, 윤치호는 1899년 2월 2일 이를 수락하였다.[39]

후에 유영렬은 '민중운동의 최고 지도자였던 윤치호에 대한 이같은 조처는 당시 법부대신 윤웅렬의 노력과 윤치호에 대한 고종의 친애감, 그리고 평소 대인관계가 원만했던 윤치호와 일부 관료들과의 친분관계가 트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았다.[39] 한편 윤치호 자신이 개화운동을 포기하고 타협한 것에 대하여 유영렬은 '윤치호에 대한 감리사직의 임명은 일종의 회유적 추방이었으며, 윤치호의 감리사직 수락은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위한 일종의 자구책이었던 것[39]'이라고 보았다. 반정부 민권운동의 최고지도자가, 그것도.[39] 민중지도자들이 대거 체포 구금되는 상황에서, 극복의 대상인 수구반동하의 지방관직을 수락한 사실은 일종의 변절적 자세로 보지 않을 수 없으며, 전통적 통치체제에 대한 비판의식의 불철저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40]고 해석하였다.

1899년 1월 그에게 함경남도 원산부윤으로 임명되리라는 설이 돌았다. 1월 16일 오후 7시경 은밀히 일본인 집에 피신한 고영근의 행방을 알고 그를 찾아갔다. 윤치호를 만났던 고영근은 그에게 원산부윤직에 나갈 것이냐고 물었고, 윤치호가 대답을 주저하자 그의 아버지 윤웅렬이 법부대신으로 승진한 것은 만민공동회 덕택이며, 윤웅렬이 독립협회만민공동회의 해산에 가담했던 척신파 대신 민영기와의 친분관계를 지적하기도 했다. 윤치호는 고영근의 언급에 불쾌했으나 논쟁을 하면 감정싸움으로 발전할 것이라 보고 언급을 회피하고 헤어졌다. 1899년 1월 그는 중추원 부의장을 사퇴하였고[41], 1월초 그는 함경남도 원산으로 떠났다.[40]

그는 독립협회 운동의 좌절을 민중의 어리석음의 탓으로 보고, 민중에 대한 증오심을 더욱 증폭시켰다.[40] 이후 민족패배주의적 사고방식에 함몰되어 타협적 개량주의를 지향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한일 합방 이후 1915년 무렵부터 일제의 통치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게 하였고, 독립불능론 내지 독립무용론으로 변모하는 결과를 낳았다. 원산에 도착했던 윤치호는 '원산 사람들은 공공정신(에티켓)이 없고 구습과 미신에 강하게 집착하고 있다. 다른 지방의 사람들과 같이 무지하고 게으르다.'라고 하고, '이 인종의 피는 새로운 교육과 새로운 정부 그리고 새로운 종교를 갖고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확신했다.[40] 민중을 계몽의 대상에서 철저한 갱생의 대상으로 시각을 바꾸게 되었다. 민중을 철저한 갱생의 대상으로 생각하게 된 윤치호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조선의 망국과 식민지화를 당연한 벌로서 받아들이게 된다.

관료 생활

이후 윤치호는 계몽운동에 진력하며 실력 양성론을 주장하였다. 그의 실력 양성론은 후일 독립운동 세력 내부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1920년대 독립운동 세력은 김좌진, 홍범도 같은 무력 투쟁파와,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외교활동이 큰 축을 이루고 있었고, 양자 사이에서 민족의 실력을 키워야 뭐든 해도 된다는 집단이 존재했다. 이들 제3그룹은 주로 만주와 연해주를 중심으로 경제 자립 기반 확보와, 교육 활동 및 신흥무관학교와 같은 무관 양성에 힘썼다. 그러나 윤치호는 개화기 시절부터 조선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과 패배주의적 사고방식에 젖어 있었고, 그것이 결국 그가 친일파로 변절(전향)하는데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윤치호일기}

1899년 이후 윤치호는 외직에 임명되었다. 1899년 원산감리로 부임한 뒤, 1901년 6월에는 다시 함경도 덕원감리사 겸 덕원부윤(德源府尹)으로 재임명되었다. 이어 원산항재판소 판사에 재임명되었다. 1900년 7월 삼화감리 겸 삼화부윤, 7월 12일 겸 삼화항재판소 판사(三和港裁判所判事)[42]로 발령되었다.

1903년 1월 함경도 안핵사로 임명되어 함경남도 함흥에 파견되었고, 7월 천안군수, 1904년 2월 무안감리로 발령받았다가 3월 12일 다시 외부협판 겸 칙임관 3등에 임명되었다. 지방관으로 있으며 동안 러·일 양국의 각축을 보면서 인종적 차원에서 일본인들의 '동양평화론'과 일맥상통한 '극동3국제휴론'을 주장했으며, 일본을 비판하였으나 러일전쟁은 동양과 서양인의 전쟁으로 간주하여 일본의 승리를 축하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한국의 장래를 비판적, 비관적으로 전망했다.

윤치호는 중앙 정계에서 좌절된 민중을 위한 개혁정치의 이상을 제한된 지방에서나마 실현시키고자 진력하였다.[43] 그러나 실효성은 없었고, 윤치호의 이와 같은 치적도 결과적으로는 독립협회 해체 후에 강화된 보수 반동정치에 협조하는 것이었음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43] 윤치호 역시 민권사상과 참정권과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했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황제에 대항하려는 역적 집단으로 보는 민중들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고 있었다.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1904년 3월 윤치호는 내각의 외무부협판에 임명되어 다시 중앙 정계로 불려지게 되었다.[40] 그러나 윤치호는 여전히 보수적 정치체제에 대해 적대적이었으며 그 이념적 지주라 할 수 있는 유교(성리학)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다.[43] 윤치호는 청일전쟁 후 들어선 김홍집의 내각에서 군부대신을 지내기도 했다.

미국에 대한 실망
김규식

1904년 김규식, 이상재 등과 함께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의 이사로 선출되었다. 그해 8월 20일 외무부대신 서리를 겸임하였다. 9월 주러시아 특파대사 이범진(李範晉)에게 전보를 보냈으나 귀국하지 않자 그를 탄핵하여 면직시켰다. 12월 15일 관제 개정소 의정관(官制改正所議政官)에 임명되었다.

1905년 재혼한 아내 마애방(馬愛芳·1871~1905)이 병으로 사망했다. 평소에 중국중국인들을 경멸, 야만시하는 윤치호였지만, 부인 마애방만큼은 거의 끔찍하다 할 정도로 사랑했다고 한다.[44] 마애방이 요절한 뒤에 ‘하늘에 가 계시는 사랑하는 그녀에게’ 보내는 편지의 형식으로 쓰인 윤치호의 영문 일기를 썼다.[44]

1905년 9월 26일 서울 전동에 있던 시종무관장 민영환 집에서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 엘리스 루스벨트를 환영하는 이색 만찬이 개최되었다.[45] 윤치호는 이 만찬에 큰 기대를 걸고 참석했다. 주빈은 당시 미국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이고 배빈이 앨리스양을 수행한 해군대장 트레인과 앨리스 양의 약혼자 커빈 해군 중장이었다.[45] 한국 조정에서는 민영환 이외 이준, 이상재, 이용익, 윤치호, 그리고 미국인으로 서울에 와 항일 필봉을 휘두르고 있던 '코리안 리뷰'사 주간 헐버트(흘법) 여사 등 반일 친미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다.[45] 그리고 앨리스양에게 아버지인 대통령에게 다리놓아줄 것을 부탁했고, 앨리스양은 황제의 국서를 지닌 특사를 파견한다는 조건으로 쾌히 응낙했다.[45]

미국을 정의와 자유의 국가라고 생각한 윤치호는 이번 일로 미국일본을 견제하고 한국을 도와주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7월에 있었던 가쓰라-태프트 밀약 소식을 알게 되면서 윤치호는 미국에 대한 기대감 만큼 큰 실망감을 품게 된다.

을사조약 체결과 체념

1905년 황성기독교청년회 부회장에 취임[46]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윤치호는 관직을 사퇴했으며, 정부로부터 외부대신 서리에 임명되었으나 수락하지 않고, 취임을 거부했다.[8] 정부를 장악한 이완용을 그는 심히 경멸하였다.

11월 17일 일본에 의해 을사 보호 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12월 그는 을사 보호 조약에 서명한 대신들을 처벌할 것을 상소하였다.

지난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로 자주권과 독립의 기초를 남에게 의지한 적 없이 여유 있게 지켜온 지 이제 10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내정이 잘 다스려지지 않아 하소연할 데 없는 백성들이 모두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졌고 외교를 잘못하여 조약을 체결한 나라와 동등한 지위에 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폐하께서 하찮은 소인들에게 눈이 가리어졌기 때문입니다.

궁실을 꾸미는 데 힘쓰게 되니 토목 공사가 그치지 않았고, 기도하는 일에 미혹되니 무당의 술수가 번성하였습니다. 충실하고 어진 사람들이 벼슬을 내놓고 물러나니 아첨하는 무리들이 염치없이 조정에 가득 찼고, 상하가 잇속만을 추구하니 가렴주구 하는 무리들이 만족할 줄을 모른 채 고을에 널렸습니다. 개인 창고는 차고 넘치는데 국고(國庫)는 고갈되었으며 악화(惡貨)가 함부로 주조되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습니다. 그리하여 두 이웃 나라가 전쟁을 일으키고 우리나라에 물자를 자뢰하니 온 나라가 입은 피해는 실로 우리의 탓이었습니다. 심지어 최근 새 조약을 강제로 청한 데 대하여 벼슬자리를 잃을까 걱정하는 무리들이 끝끝내 거절하지 않고 머리를 굽실거리며 따랐기 때문에 조정과 재야에 울분이 끓고 상소들을 올려 누누이 호소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로 일치된 충성심과 애국심은 어두운 거리에 빛나는 해나 별과 같고 홍수에 버티는 돌기둥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지난날의 조약을 도로 회수해 없애버릴 방도가 있다면 누가 죽기를 맹세하고 다투어 나아가지 않겠습니까마는, 지금의 내정과 지금의 외교를 보면 어찌 상심해서 통곡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 지금이라도 든든히 가다듬고 실심으로 개혁하지 않는다면 종묘사직과 백성들은 필경 오늘날의 위태로운 정도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독립의 길은 자강(自强)에 있고 자강의 길은 내정을 닦고 외교를 미덥게 하는 데 있습니다. 오늘날의 급선무는 일을 그르친 무리들을 내쫓음으로써 민심을 위로하고 공명정대한 사람들을 조정에 불러들여 빨리 치안을 도모하며, 토목 공사를 정지하고 간사한 무당들을 내쫓으며 궁방(宮房)의 사재 축적을 엄하게 징계하고 궁인(宮人)들의 청탁으로 벼슬길에 나서게 되는 일이 없게 할 것입니다. 자강의 방도와 독립의 기초가 여기에 연유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힘쓰고 힘쓰소서.[47]

그러나 고종은 윤치호의 상소에 내심 동의하면서도 관련자들을 처벌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신들은 역으로 그가 갑신정변 관련자인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박영효 등과 친밀했던 점을 들어 윤치호를 비난했다. 윤치호가 다른 마음을 먹고 공화제를 획책한다는 것이었다.

윤치호는 민주주의와 참정권의 나라인 미국에 기대를 하였지만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기 전인 1905년 7월 29일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한 것을 접하고 미국에게도 실망하게 되었다. 을사조약 체결 이후 그는 체념하고 교육과 YMCA 청년회 활동에 매진했다.

1906년 그는 황성기독교청년회 부회장으로 재선되었다. 1906년 5월 4일 대한제국 정부의 일본 유학생 감독(日本留學生監督)에 임명되었다. 10월 15일 그는 의정부 참정대신(議政府參政大臣) 박제순(朴齊純), 학부 대신(學部大臣) 이완용의 상소로 해임되어 귀국했다. 후임자는 그의 사촌인 윤치오였다.

국권회복 운동

이후 그는 애국계몽운동을 하였으며 대한자강회를 지도하였다.[1] 1906년 3월 장지연(張志淵)·윤효정(尹孝定) 등과 함께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했고, 회장에 선출되기도 했다.[8] 이후 교육 계몽 사업에 힘썼다. 대한자강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그는 교육의 확대와 산업개발로 자강독립을 달성한다는 목표를 표방하고 국민사상계몽에 노력했다.[8] 그러나 대한자강회는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일본고종의 퇴위를 강요하자 이에 반대운동을 펴다 해산되어 그의 뜻은 무산되었다.

윤치호와 어머니 전주이씨(오른쪽), 삼취 부인 남포백씨 백매려(1907년)

1906년 10월 그는 캔들러와 상의하여 개성한미서원(韓美書院)을 설립하고 원장이 되어 교육사업에 전념하였다. 12월 중추원 찬의(中樞院贊議)에 임명되었다. 1907년 3월 어머니 전주이씨의 권유로 남포 백씨[20] 백매려(白梅麗)와 중매로 재혼하였다. 당시 윤치호는 43세였고, 백매려는 18세였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열리자 그도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다.

안창호.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활동 중 만났으며, 이후 안창호가 죽을 때까지 계속 서신과 연락을 주고 받았다.

1907년 그는 안창호(安昌浩)·양기탁(梁起鐸)·이동휘(李東輝)·전덕기·김구 등의 주도로 조직된 신민회에 가입하였다. 신민회1907년 2월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가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배양' 필요성을 역설하는 강연회를 열고 동지를 모으면서 만든 조직이었다.[48] 윤치호는 안창호의 '실력배양'에 동의하였다. 이에 동의한 윤치호를 회장으로 하고 안창호가 부회장에 선출되었으며, 그 밖에 양기탁·전덕기·이동휘·이갑·이승훈 등 언론인·군인·산업인 등이 중심이 되었다.[48]

교육, 계몽단체 활동

신민회의 회원이자 회장으로 활동하며 그는 평양 시내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이 되었다. 1908년 10월 3일 현재의 송도고등학교송도중학교의 전신인 한영서원을 설립하였다. 10월 3일 그는 한영서원의 초대 원장 겸 이사장에 취임하였으나, 이사장직은 공성학에게 넘기고, 원장직도 곧 윌라드 크램(Willard G. Cram, 한국명 기의남)에게 넘겼다. 송도고보는 그뒤 6·25전쟁 이후에는 인천으로 피난 와서 송도고등학교로 다시 태어났다.

주요한에 의하면 그가 한영서원을 설립한 것은 안창호의 영향이라 한다.[49] 윤치호가 개성에 설립한 한영서원(韓英書院)은 안창호신민회 조직 2년 후인 1908년도에 평양의 유지인 김진후의 지원으로 설립한 대성학교에서 윤치호가 안창호의 인도로 교장직을 맡아 일하면서 얻은 경험이 동기가 되어 세운 것이라고 주요한은 <안도산전서>(安島山全書) 에서 서술하고 있다.[49] 또한 1909년 안태국(安泰國) 등과 함께 청년학우회를 조직해 청년운동을 적극 지도하였으며, 계몽강연 연사로도 활약하며 신사상과 신문물 수용, 개발 등 실력양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이상재
(윤치호는 그를 도와 YMCA를 사수하고 기독교 선교활동을 지도하였다.)

1908년 11월 평민 출신 의병장 신돌석이 조선인들의 밀고로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한국 독립의 가망성에 대한 회의를 품게 됐다. 1910년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의 조직에 가담한 후 안창호의 제의로 대성학교 교장으로 다시 초빙되었다. 송도학원과 대성학교 외에도 신앙 활동에도 전념했는데, 신앙 활동으로는 기독교청년회(YMCA)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청년회 이사와 부회장, 세계주일학교 한국지회 회장 등으로 일했다. 이후 이상재와 함께 기독교청년회를 지도하고 기독교 선교사업과 개척교회 활동을 지원하는데 주력하였다.

일제 강점기 활동

한일합방 직후

1910년 8월 27일 종2품에서 정2품 자헌대부로 승진했다. 그러나 1910년 10월 한일합방으로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그는 공직을 사퇴했다.[50] 아버지의 사망에 관계 없이 그는 정2품 이상의 고관이었으므로 남작 작위가 내려졌다. 그러나 윤치호는 남작 작위를 거절했다. 조선의 왕족과 고관들이 일제에 협력하여 귀족이 되는 것을 보고 실망, 이후 조선총독부의 협력 요청을 거절하고 경기도 개성부로 은퇴하였다.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이 한일 합방을 재촉했다[51]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조선의 패망을 안타까워하면서도 부도덕한 민중과 고관들의 탐욕, 무지 때문에 당연한 징벌로 여겼다. 그는 석호필 등과도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석호필이 "하나님은 조선사람에게 나라와 긴 손톱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도록 주셨는데 조선사람은 긴 손톱을 택하고 나라를 버렸다."고 한 것을 두고 조선인들의 게으름이 스스로 나라를 멸망시킨 것을 적절하게 표현한 것이라며 감탄하기도 했다.

한일합방 직후 도산 안창호가 거국가를 남기고 출국하는 것을 목격하고 그는 갈등, 방황하였다. 그는 병환중인 아버지와 노모와 아내, 2남 2녀가 있고 서모에게서 어린 이복동생 둘이 있어서 이들을 책임져야 된다는 압박감 때문에 출국을 주저했다. 이상재는 그에게 여러 번 이승만, 안창호의 사례를 들며 미국으로의 망명을 권고하였으나 그는 거절하였다. 1910년 12월 4일 미국에서 열리는 선교회 공회에 참석차 출국하여 1911년 1월 귀국하였다.

1911년 9월 22일 아버지 윤웅렬이 사망했다. 그는 아버지 윤웅렬을 내심 존경하면서도 적극적인 애국심을 갖지 않은 것에 실망, 부정적으로 평하기도 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형식적이나마 자작 작위를 다시 수여받게 된다.

일제 강점기 초반

전향선언과 출옥

1911년 105인 사건 때 다른 기독교인 및 민족지도자들과 함께 민족주의자로서 일제에 의해 체포, 재판을 받았다. 105인 사건의 최고 주모자로 지목된 윤치호는 가혹한 고문과 함께 3년간 옥고를 치르게 된다.[40] 1912년 2월 5일 그는 최종재판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수감 초기에 윤치호는 전향을 거절하였고, 1913년 10월에는 아버지 윤웅렬로부터 승계한 자작 작위를 박탈당하였다.

그러나 1915년에 윤치호는 전향을 선언했다. 윤치호가 친일 전향을 조건으로 1915년 2월 13일 특사로 출감한 후 매일신보 기자와 가진 인터뷰에서 친일 의사를 내비쳤다.(인터뷰 내용은 위키인용집참조) 그러나 친일파로 전향한 것인지, 단지 독립운동을 포기한 것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정운현은 그가 변절한 직접적인 요인은 '가혹한 고문과 일제의 강요였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그의 오랜 사상적 기반이 모태가 됐다고 볼 수 있다[11]'고 분석했다. <개화기의 윤치호 연구>의 저자 유영렬(柳永烈. 숭실대·사학과)교수는 “개화기 이후 그의 의식 속에 잠재돼 있던 ‘민족패배주의’와 현실적으로 일본의 조선통치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대세순응주의’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11]조선총독부는 기독교계의 지도자였던 그를 소환하여 총독부의 시책에 협력하고 애국심을 고취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윤치호는 자발적이지 않은 애국심, 강요된 애국심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며 거절한다.

윤치호의 아버지인 윤웅렬 역시 1880년부터 근대화를 위해 친일 성향을 띠기 시작했다. 이 성향은 특히 그가 1882년에 발생한 임오군란 후 일본으로 망명하면서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윤웅렬한일합방 직후 곧 사망했고, 1910년 8월 일제한국 강점 이후 일본으로부터 남작 작위와 공채 2만 5000원을 받기도 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 그는 이완용, 윤덕영 등의 변절자들을 경멸 증오하였다. 그러나 독립운동에 가담하기는 주저하였고, 이상재는 그에게 출국을 권유하였으나 응할 수 없었다. 역시 미국에 출국한 인사로부터 출국권유도 받았으나 노부모의 생존과 처자와 동생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그는 출국을 주저하게 된다.

출감 후 경성 YMCA기독교청년회의 총무와 회장에 선출되었고, 연희전문학교 재단이사, 기독연합재단법인 이사로 선임되었다. 1916년 4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연희전문학교와 통합하여 연세대학교가 되고, 세브란스 의전은 연세대 의과대학 및 세브란스병원이 되었다.)가 개교하자 세브란스 의전 재단이사로도 취임했다. 그러나 독립운동에의 참여는 소홀하게 되었다.

1차대전 종전에 대한 회의론

1916년 조선총독부는 여러 번 사람을 보내 그에게 당국 시책에 협조해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윤치호는 대답을 회피하거나 거절한다. 1916년 YMCA 기독교 청년회 제4대 총무로 취임한다.[52]1918년 겨울 한국독립운동가들은 윌슨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1919년 1월에 열리는 프랑스 파리강화회의의 대표자를 선발하여 보내려 하였다. 그러나 윤치호는 회의적이었다.

1919년 1월 17일 신흥우가 그에게 파리강화회의에 갈 의향을 타전해 왔다. 그러나 그는 거절했다.

신흥우 군이 찾아와 내게 유럽 파리에 갈 의향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계속해서 약소국에 소요가 일어나는 것과 조선에서 소요가 발생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세계대전과 관련 있는 약소국 문제는 파리강화회의에서 틀림없이 안건으로 상정될 걸세. 그러나 조선은 거론될 기회조차 없을 거야. 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에 대한 암거래는 제쳐놓고, 직간접적으로 세계대전과 관련 있는 약소국들 문제를 해결하는데 주력할 걸세.[53]"

- 윤치호 일기 1919년 1월 17일자

송진우

그날 송진우가 찾아와 '국제연맹이 창설될 것이며, 약소국에 자결권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이 기구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할 것[54]'이라고 했다. 그리고 '만일 이러한 이상적인 방안이 거부된다면 미국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할 수도 있을 것[54]'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윤치호는 파리강화회의에 기대를 거는 송진우를 설득시키려 하였다. 윤치호에 의하면 (1) 거창한 이상이 모두 그렇듯, 국제연맹이 창설되어 실제 활동에 들어가려면 앞으로도 몇 년은 걸릴 것이다, (2) 조선 문제는 파리강화회의에서 안건으로 상정되지도 않을 것이다, (3) 열강 중 누구도 바보처럼 조선 문제를 거론해 일본의 비위를 거스르지는 않을 것이다, (4) 미국이 단지 조선독립을 안겨줄 요량으로 일본과 전쟁을 불사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수 없는 일[54] 등을 들어 강화회의에 기대를 접을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송진우는 윤치호가 일본인들의 힘을 과대평가한다고 생각했다.[54] 파리강화회의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3.1 만세운동에 서명하지 않았으며 외교독립론 조차 부질없는 것으로 평가절하하는 그의 태도에 대한 청년층의 비난이 빗발쳤다. 1919년 1월 프랑스 파리에는 파리강화회의에서 내세운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된 호찌민이 베트남의 독립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들고 나타났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순진하다는 것을 깨닭았다.[55] 월남인 호찌민의 활동을 보고 그는 소용없는 행동으로 봤다.

윤치호에게 만세 운동에 적극 나서줄 것을 호소하려는 젊은이들이 수시로 찾아왔다. 그는 도덕적으로 우월한 국가나 이념이 세계를 지배한 것은 아니라고 봤다. 젊은이들은 도덕적 이상은 보편타당한 진리라고 했지만, 윤치호는 도덕적으로 우월한 국가는 존재할수 없으며, 존재한다고 해도 도덕적으로 우월한 국가나 개인이 반드시 세상을 주도하거나 지배하는 것은 아니라며 반박하여 되돌려보냈다.

이어 종로청년회관으로 신익희가 윤치호를 찾아가 세계 대세와 국내 정형을 설명하며 독립운동에 동참을 권하였다. 그러나 윤치호는 기회가 아니라며 사절하였다.[56]

윤치호는 호찌민과 같은 청년들의 좌절을 이미 예고하고 있었다.[55] 미국이나 다른 강대국들이 자국의 이익이 되지 않는다면 왜 약소국이나 후진국을 도와주겠느냐는 것이었다.

1월 21일 고종이 갑자기 사망했다. 당시 고종 독살설이 시중에 확산되고 있었으나 그는 시위를 이끌어내기 위해 지식인들이 유포한 루머 정도로 치부했다. 그러나 1년 뒤, 사돈인 한진창에게서 고종 독살설의 전말과 고종 시신의 상태에 대한 것을 전해들은 뒤 윤치호는 고종 독살설을 확신하게 된다.

3.1 운동 이후

1919년 3월 3·1 운동 당시, 독립운동가들로부터 국민대표로 서명을 권유받았으나 거절했고, 이는 실망한 일부 학생들로부터 비판을 받게 된다. 3.1 만세 운동의 실패를 예견한 그는 만세 운동이 한참 진행 중이던 3월 2일자의 일기에서 학생들을 앞세운 뒤, 만세 대열에서 슬그머니 발을 뺀 기독교, 천도교계 인사들을 음모꾼이라며 규탄했다. 이후 3월 5일~3월 7일 그는 시내를 다니며 만세 시위 직후의 동태를 파악했다. 3월 7일 기자 회견을 통해 다음과 같은 담화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강자와 서로 화합하고 서로 아껴 가는 데에는 약자가 항상 순종해야만 강자에게 애호심을 불러일으키게 해서 평화의 기틀이 마련되는 것입니다마는, 만약 약자가 강자에 대해서 무턱대고 대든다면 강자의 노여움을 사서 결국 약자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 됩니다. 그런 뜻에서도 조선은 내지에 대해서 그저 덮어 놓고 불온한 언동을 부리는 것은 이로운 일이 못됩니다.

— 윤치호, 경성일보 1919년 3월 7일

이 상황에 대해서, 일부 학자는 그 당시에, 윤치호가 '(조선의) 독립은 불가능하며 일제에 저항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일기에도 “나는 국경일에 일장기를 게양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일본의 통치하에 있는 한 우리는 그 통치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기 때문이다.”(윤치호 일기, 1919년 10월 1일자)라고 썼다. 이때문에 일부 독립운동 지도자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다.[57] 한편 3·1 만세 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의 1인인 권동진을 만났는데, 윤치호는 그로부터 처음에는 평화적인 선언서 낭독으로 이를 통해 신문 뉴스로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을 알리기로 결정했으나 학생들이 갑자기 감정이 격해져서 감정적인 시위로 변질됐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권동진이 처음 찾아왔을 때 그는 경멸적인 태도로 대하였으나, 그의 이야기를 듣고 다소 감정적인 태도에서 한발 누그러졌다.

호찌민의 실패를 예견한 그는 파리강화회의에 기대를 거는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의 기대 역시 좌절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 문제는 상정되지 않았고, 이후 김규식, 여운형 등은 소련사회주의세력에, 송진우 등은 실력양성론으로 노선을 전환한다.

1919년 4월 각지에서 임시정부가 설치되자 그에게도 임시정부에 참여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온다. 그러나 그는 임정 참여를 거절하였다. 이후 윤치호는 개인적으로 미국상하이를 오가는 김규식과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서신과 유선을 통해 그는 국내외의 정세와 임시정부의 활동 등의 정보를 수시로 교류하였다. 상해 임시정부의 초기 재정을 담당했던 이시영과도 연락이 닿았다. 그는 김규식, 이시영, 안창호, 여운형, 이승만 등을 통해 임시정부의 활동도 상세히 접할수 있었다. 그러나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그는 조선총독부일본 제국 당국에 임시정부에 대한 것은 일체 발설하지 않았다.

자치론과 경제적 실력양성론

윤치호는 1919년부터 1920년대 전반기에 걸쳐 전국의 각 지방 농촌을 무대로 '문화정치'라는 주제로 강연활동을 다녔다. 3·1운동 이후 전개된 독립운동에 대해 윤치호는 부정적인 시각을 피력했다. 그는 일본조선독립을 쉽게 승인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일본의 '독립불용인론'을 주장했으며 '독립불용인론'을 전제로 한국인들의 '자치능력결여론'도 주장했다.[8]

윤치호는 한국이 독립하려면 실력을 양성해야 하고, 실력 양성을 위한 바탕으로는 경제력과 국민성이 뒷받침되어야 하며, 국민성을 개조하고 경제력을 향상시키기 전까지는 독립은 고사하고 자치능력 조차도 어려울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조선의 당면문제는 백성들에게 유해한, 맹목적인 독립운동이 아니라 실력을 키워 지적·경제적인 부분의 향상을 하고, 지적·경제적 측면의 향상을 통하여 일본인들에게 받는 민족적 차별을 철폐[8]하는 것이 우선임을 강조했다. 그는 땅을 팔아서 독립운동자금을 대주는 것보다 농경지를 매입해 그 땅이 일본인들 손에 넘어가는 걸 막는 사람을 더 현명한 애국자[58]라고 평가했다. 토지는 생산력의 근본이었고 토지에서 생산되는 식량과 곡물, 자원, 그 밖에 목축업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가 봤을 때,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해 토지를 팔아 자금을 대는 것은, 그 토지에서 생산되는 식량과 곡물, 석탄과 광물 자원등을 포기하는 매국 행위로 인식되었다.

사회단체, 언론 활동

1920년 윤치호는 다시 YMCA 회장에 재선출되었다. 그러나 1920년대 초기의 윤치호는 친일파 로 규정짓기에는 애매한 태도를 취한다. 1921년 6월 조선인산업대회 연사, 범태평양협회 부회장 등으로 활동했다. 1922년 이상재, 이승훈, 김병로, 김성수 등과 함께 주동이 되고 발기인 1,170 명을 확보하여 민립대학 기성회를 출범시키고 모금활동을 했다.[59]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좌절하고 말았다.

1920년대 초 미국 의원 시찰단 환영회의 일원으로 선발되었으며[60], YMCA 회관에서 미국 의원 헐스맨의 통역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스스로 그러한 노력들이 모두 "부질없는 짓"이라 여겼다.[60] 미국인들이 한국인들을 동정하더라도 동아일보 등지에서 언급하는 미·일 전쟁과 같은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60]

이승만임시정부 인사들은 1919년파리 강화회의에서 한국독립을 청원하는 것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1922년의 워싱턴 군축회의에서 다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할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윤치호는 워싱턴 회의에 또 다시 한국독립 청원을 계획하며 독립의 가능성을 점치는 이승만한국민족 지도자들의 기대를 "터무늬 없는 생각"이라 여겼다.[60]

그가 외교독립론 마저도 터무늬 없는 생각이라 여긴 것은, 미국이 자국의 이익이 되지 않을 미일전쟁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미국보다 일본이 힘이 약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단순히 힘의 관계인 것만이 아니라, 전후의 질서를 재편할 주도권과 부담을 갖고 있는 미국이 자국민과 자원의 손실을 입으면서까지 전쟁을 불사할 정도로 어리석지도 않고, 국제관계가 감정적으로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한국미국의 이익에 그리 중요하지도 않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60] 미국이 자국의 국익이 되지 않는다면 왜 한국의 독립을 도와주거나, 후원하겠는가 라는 것이었다.

실업 교육

1921년에는 교풍회에 참여하였고, 워싱턴 회의 직전에 그는 한국인 대표의 한사람으로 추천되었다. 그러나 그는 한국의 대표가 될 것을 권하는데 대해서 "한국 대표들이 파리강화회의에서 뭘 얻었냐?"고 반문하였다.[60] 또한 "대중목욕탕 하나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는 우리가 현대 국가를 다스리겠다고" 하느냐며 독립운동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피력하기도 했다.[58]

그는 토지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땅을 지키는 것이 일제에게 구속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땅을 팔아 독립자금으로 주고 자신과 자손들은 굶어 죽는 자 보다 조상 대대로 물려 온 자기 땅을 일본인들로부터 지키고 젊은이들의 교육에 헌신하는 것이 애국이라는 것이다. 또한 과거 조선왕조의 사농공상을 비판, 직업에는 귀천이 없으며 인문 교육 외에 실생활에 필요한 실업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일제는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 이후 한국근대화·문명화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일본을 위한 것이며, 철거하거나 없앴을 경우 일본이 조선보다 100배 이상은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본이 육성한 조선인 엘리트들의 존재 역시 그들이 사라졌을 때, 조선이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일본이 손해를 본다며 응수했다.

윤치호는 1922년 11월 1일 송도고등보통학교 제4대 교장(敎長)에 취임하였다. 송도고보를 맡게 되면서 그는 영어 교육과 신앙 교육 외에 국내에서 사용하는 물품은 국내에서 생산할수 있어야 된다고 봤다. 미국의 흑인교육자 부커 T. 워싱턴의 터스키기 기술학교를 모방하여 실업계 과목 교육에도 역점을 두었다. 그는 우선 자신의 장남 윤영선에게 목장과 낙농, 양잠업을 가르쳐서 이를 경영하게 하였다.

1923년 1월 장남 윤영선이 개성의 일본 경찰서에 목장사업을 인가해달라는 신청서를 냈다.[61] 그러나 일본 경찰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인가를 내주지 않았다.[61] 윤치호는 그들은 일본인 목장을 보호해 주고 싶었던 것[61]이라 봤다.

윤치호는 일본이 식민지 한국을 통치하면서 공정하고 관대하게 처리한다는 주장에 회의적이었다. '서울에서 조선인이 집을 지으려면 먼저 인가를 받아야 한다.[62] 그러나 일본인들은 먼저 집을 짓고 나서 인가를 신청한다. 그런데도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이 자기들의 공평무사함에 대해 고마워하지 않는 까닭을 모르겠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62]'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 후반

사회단체 활동
일제 강점기 후반의 윤치호

일제는 1890년대부터 일선동조론을 주장했다. 일본이 단군 조선삼국 시대에 한반도에서 건너간 이주민이 이룩한 사회라고 보면서도, 일선 동조론을 근거로 일본에 대한 애국심을 호소하는 주장에도 회의적이었다. 1923년 1월 9일메이지 천황노기 마레스케를 추모하는 환등회에 참석하였으나 그는 이를 부정적으로 인식했다.

칙어실천회는 감수성이 예민한 조선 청년들에게 충성심과 애국심을 고취한다는 취지로 조선 각지에서 이 환등회를 거행하고 있다.[62] '이 프로그램은 일본인들에게는 유용할 것이다. 하지만 조선인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62]'고 봤다.

1925년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장직을 사퇴하였다. 1925년에는 조선인 산업대회에도 참여했다. 각도인민대표자대회, 조선인대회와 조선양성운동소 등 일제의 통치정책에 이용된 각종 친일 어용 단체와 모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활동했다. 1925년 11월 태평양문제연구회의 조선지회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1928년부터 1937년까지는 제9대 조선체육회(대한체육회의 전신) 회장을 지냈다.

1929년 도쿄에서 열린 제3회 범태평양회의에 참가한 한민족 대표단. 좌로부터 백관수, 송진우, 윤치호, 유억겸, 김활란

1929년초 출국, 일본 도쿄(東京)에서 열린 제3회 범태평양회의에 참석차 둘째 아들 윤광선을 대동하고 출국, 백관수(白寬洙), 송진우, 유억겸(兪億兼), 김활란 등과 함께 한민족 대표의 한사람으로 참가하고 귀국하였다. 그해 전라북도 진안군 부귀면의 자신의 사유지를 오룡리·봉암리·방각리(현 황금리) 세 마을의 농민들에게 땅을 빌려주었다. 소작인들은 1929년에 그의 영세불망비 1기를 세웠다.[63]

1930년 모교인 미국 에모리 대학교로부터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그가 윤치호 박사로 불리게 된 것은 이때 수여받은 명예박사 학위 때문이었다.

1931년 조선총독부는 그에게 사람을 보내 조선총독부 중추원 의원직을 제의하였으나 거절하였다. 1931년 재만주한인동포위문사절단의 한사람으로 만주를 방문하고 돌아왔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발발한 이후, 윤치호는 친일단체를 한층 강화해 총독부 관료친일한국인 간의 친목단체인 토요회에 참여했으며[8] 이후 조선인교풍원, 조선대회, 조선칙선귀족원경에도 참여하는 등 부일 협력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1931년 그는 전라북도 진안군 부귀면에 있는 자신의 사유지를 부귀초등학교 건립 부지로 기증했다.[63] 그 기념으로 마을 주민들이 감사의 의미로 1931년 영세불망비를 세웠다.[63] 그리고 윤치호는 부귀소학교 건립 기금으로 2000원을 내놓았고[64] 업적을 기려 부귀면장이 1931년 그의 영세불망비를 건립했다.[64] 진안군 부귀면에 세워진 영세불망비 중 2기는 2009년 7월 민족문제연구소 전라북도지부에 의해 발견된 뒤 강제 철거되어 박물관으로 옮겨졌다.[63]

1932년 일제는 다시 그에게 사람을 보내 조선총독부 중추원 의원직을 제의하였으나 거절하였다.윤봉길, 이봉창 사건으로 이반된 한국인의 민심을 끌어들이려는 일제의 술책임을 간파하였기 때문이다.

일제의 협력 제의와 거절

일제는 끊임없이 조선인들에게 천황 폐하의 은혜를 역설했다. 그러나 윤치호는 '조선에 충만한 것은 천황의 은혜가 아니라 천황의 악의일 뿐이다.[62]'며 반박했다. 조선총독부와 일제는 일제가 한일합방 이후 조선에 철도, 도로, 항만 등과 공장 등 산업자본을 건설한 것을 홍보하며 일제가 조선을 근대화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윤치호는 '일본이 조선을 개발하는 것은 수탈을 쉽게 하기 위한 것이며, 그 도로와 철도와 교량, 항만이 파괴되었을 때 손해를 입는 것은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이라는 것이다.

1934년 3월 결성된 조선 대아세아협회에 가입, 1935년 10월 일왕의 국민정신 작흥조서(作興調書)에 바탕한 내선일체를 목적으로 조직된 조선교화단체연합회 등에 가입 활동하였다. 동년 조선총독부는 그에게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지만 조선인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점을 들며 중추원 의원직을 다시 제안하였으나 그는 이를 거절하였다. 일본은 자신들이 조선의 왕실을 핍박하지 않고 살려두었으며, 조선을 위해 도로와 철도를 놓아주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윤치호는 일본을 위한 도로 철도와 일본의 체면을 위한 조선왕실 보호라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1936년 2월 어머니 전주 이씨 이정무가 사망했다. 모친상 기간 중 그는 흰 옷을 입고 다녔다.

1936년 윤치호는 이화여전 재단이사로 선임되었다. 이화여전 재단이사로 재직 당시 그는 학교내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65]하기도 했다. 자신이 설립한 송도고보에도 운영 비용과 시설 비용을 지원하고 토지를 기부하여 운동장을 확장하고 체육관을 설립했다. 일본 와세다 대학보다 크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일본인들은 송도고보의 크고 넓은 건물과 시설물, 넓은 운동장을 보고 질리기도 했다.

일본의 감시와 충격

일제로부터 협력 제의가 들어오자 그는 교육, 사회활동으로 만족한다며 일단 거절하였다. 그러나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국민조선총독력연맹에 참가하고 미나미 지로(南次郎) 총독의 정책에 찬성 하고, 1937년 7월 총독부 학무국 주최의 시국강연회에 이어 2차 전선순회 시국강연반 강사로 활동하였다. 1938년 일제가 조선인의 병력자원화를 위한 제1차적인 조치로 '육군특별지원병제' 실시를 결정했을 때, 이것을 내선일체의 합당한 조치로 보고, 환영하였다.

한편 그는 병원에 입원한 안창호의 치료비를 김성수와 함께 부담하고 있었다. 그러나 윤치호와 김성수의 비용 조달에도 고문으로 쇠약해진 안창호3월 10일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는 안창호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1930년대 후반 그는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하시 코이치로(三橋孝日郞)에게 불려가 협박을 당했다.[66] 미하시 코이치로는 자신이 윤치호를 공갈, 협박한 것에 대한 회고를 남겼다.

(경무국장 미하시 코이치로<三橋孝日郞>의 진술) 윤치호를 집으로 불렀다. 당신도 스스로의 신앙이 있으니 확신이 있겠지만 자계(자숙)하지않으면 곤란하다.

그러면(자계하면) 우리 쪽에서도 세상의 말에 편승하지 않고 충분히 당신 쪽과협력해 우선 조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 집에서 수시간에 걸쳐 설득했다.

그랬더니 매우 쾌히 승낙해주었다. 아주 무서웠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윤치호는다양한 단체(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에도 스스로 머리를 내밀게 됐다. 세상으로부터 다양한 비판을 받았지만 잘돼 주어서 결국은 매일신보의 사장도 했다.[66]

1938년까지 그는 일본 천황과 일본 왕족의 생일과 결혼식 등의 행사를 기념하는 공,사적 파티나 모임에 한번도 참석한 적이 없었다. 조선총독부는 이러한 사실을 모두 파악, 기록해 놓았고, 그해 5월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경찰관 등으로부터 1938년 4월 29일 조선총독부에서 주관한 일본천황 히로히토의 탄신일 파티에 참석하지 않은 것을 놓고 추궁당했다.

그의 일본인 친지였던 야마가타 데이사부로(山縣悌三郞) 역시 그가 총독부에서 주최한 천황 탄신 파티에 참석하지 않은 것을 질문하며, 과거 일본 천황과 천황가의 경조사 기념 모임에 참석하지 않은 점, 총독부에서 그의 행적을 파악한다는 것을 귀띔해주었다. 일본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미행, 정탐했다는 것을 깨닭게 되자 그는 경악한다.

부일협력으로 변화

일제는 민족주의 인사들을 일망타진할 목적으로 1937년 8월부터 1938년 3월 수양동우회 사건을 날조하여 민족인사를 검거한다. 윤치호는 수양동우회 사건 관련자들의 신원보증을 하거나 탄원서를 작성하여 석방케 하였다. 1938년 5월흥업구락부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에는 그의 사촌동생인 윤치영도 연루되었는데, 윤치영서대문 형무소에서 전기고문과 팔다리를 옭죄는 고문을 당하였다. 윤치영의 면회를 왔다가 고문장면을 본 동아일보 기자 서정억이 일본 경찰에 항의했다가 구타당하여 뼈가 부러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윤치호는 윤치영 등의 신원보증과 다시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겠다는 서명을 받고, 탄원서를 제출하여 흥업구락부 관련자들을 모두 석방시켰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언론인을 구타했다는 데 대한 일본 언론계의 항의와 기독교대회 참석차 방문했던 일본의 기독교 YMCA 청년회 인사들의 협력도 작용하였다.

동년 7월 황국신민화 실천운동의 조직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창립총회 준비위원 및 상임이사로 선정된 윤치호는 창립식에서 "천황폐하 만세"를 세 번 외치기도 했다. 1939년에 우가키의 중화민국과 합동하는 협상에도 반대한다. 그는 농촌 진흥 운동에 참가하기도 한다.[출처 필요] 중일전쟁을 전후하여 일제가 전시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내세운 '내선일체'의 실천기구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상무이사와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를 지내며 강연회에서 '반도민중의 협력'을 강조했다.[8] 한편으로 1934년에 윤치호는 조선물산장려회 고문에 추대되었다.

황민화 운동을 거쳐 농촌 계몽 운동사회주의, 광복군, 독립군, 임시정부, 경학사, 동제사 등의 해산을 주장하고 창조파, 개조파도 해산하자는 주장을 하는 조선총독대회와 조선력강연대회에 참가하였다. 국민참가조선참가대회 사장을 거쳐 국민조선총독력대회에 가담했으나, 한편으로는 조선어학회 사건, 수양동우회 사건 관련자의 석방, 탄원을 맡기도 하였다.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 관련자로 불려가 취조를 받았다. 그해 3월 조선총독부로부터 중추원 참의직을 다시 제안받았다. 그러나 그는 참의직 취임을 거절했다.

그러나 그는 일본의 식민통치 정당화 이론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식민통치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던 그는“도로를 놓고 학교와 병원를 세우는 등 조선에 큰 혜택을 줬다”는 일제 통치자들의 주장은 조선인들보다는 일본인 이주자들을 위한 것이었음을 간파[58]하였다. 1939년 12월 18일 정동의 이화여전 강당에서 80여 명의 관계자들이 모인 가운데 후원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에서 12개조의 후원회 장정을 통과시키고 25명의 위원을 선출했다.[67] 윤치호도 이화여전 후원회 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67]

창씨개명

1940년 1월부터 조선총독부 미나미 지로 총독은 창씨개명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주제의 담화문을 발표했고 이는 조선 사회에 논란이 되었다. 1월 4일 미나미 지로 총독은 조선인들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할 생각이 없다고 천명했다.[68] 그런데 그가 뒤이어 조선인들이 창씨개명하면 흐뭇하게 생각할 것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시사하는 바람에 상황이 더욱 복잡해졌다.[68] 총독에게 아부하는 조선인 지식인들은 당연한 것이라며 총독을 추켜세웠다.

1월 7일 그는 사촌 동생 윤치오의 집으로 형제와 사촌들을 소집했다. 그날 오후 3시 30분 윤치소, 윤치영, 윤치왕, 윤치창 등과 함께 윤치오 집에 모여 창씨개명 문제를 논의했다. 윤치창, 윤치왕, 윤치오는 아이들을 위해 창씨개명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68] 반면에 윤치영은 창씨개명을 완강히 반대했다.[68] 윤치소는 아직 그 문제에 대한 입장을 정하지 못했다.[68] 결정된 것은 없었고 윤치호는 고민하였다.

1940년 4월 그의 집에서 해평 윤씨 종친회가 열렸다. 숙부 윤영렬이 사망하고 공석인 후임 문장(門長, 종친회장)을 선출하기 위한 모임이었는데, 이때 그는 연령으로 최연장자였고 항렬 역시 가장 높았으므로 문장 후보자로 지명되었으나 그는 문장 자리를 사촌 동생 윤치소에게 양보했다.

조선총독부에서 창씨개명을 요구하자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계속 압력이 들어오자 창씨개명을 고민한다. 가족들과의 논의 끝에 창씨개명을 다짐하고 성을 윤(尹)의 파자인 이토(伊東)로 정하였다. 그가 창씨개명을 하자 실망한 학생들이 그의 집앞에 와서 연좌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1940년 5월 당시 창씨개명은 그의 자의에 의한 창씨개명은 아니었다. 1940년 4월에 열린 해평 윤씨 문중의 문중회의 결과 창씨개명을 하기로 결의되었고, 문중회의에서 창씨 성을 이토(伊東)로 하기로 정해지자 그는 이토 치코로 개명했다.

1940년 4월 29일자 일기에서 그는 문장(門長, 종친회장) 선출보다 중요한 안건은 '창씨개명 문제에 대한 윤씨 문중의 거취문제[69]'라고 기록했다.

당시 문장선출보다 중요한 안건은 창씨개명 문제에 대한 윤씨 문중의 거취문제였다.[69] 이때 윤덕영은 창씨개명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윤치호에 의하면 그는 이런 모임에 참가하기에는 너무 자존심이 강했던 나머지, 추종자들을 동원해 이 문제(창씨개명)가 아예 거론되지 못하도록 봉쇄하려 했다. 그러나 참석자의 절대 다수는 이 문제를 안건으로 채택한 후, 만장일치로 창씨개명하기로 결정했다[69]는 것이다. 한편 윤치호는 창씨개명에 부정적이었다는 이유로 5월 1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으로 소환되었다가 풀려났다.

창씨개명 사태 중재

5월 1일 오전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소환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한편 창씨개명령이 떨어지자 독립운동단체에서는 성과 이름을 바꿔서 민족혼을 말살하려 한다며 조선총독부를 규탄했다. 5월 1일 오전 11시 그는 총독부 미나미 총독을 면담했다. 미나미 총독과의 면담에서 그는 창씨개명 기일을 연기해 달라고 부탁했다.

저는 내선일체를 완성하는 수단으로 조선인들의 창씨개명을 찬성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개진하는 세 가지 이유를 총독 각하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 창씨개명을 반대하는 이들은 도쿄에서 창씨개명을 반대하고 있다는 이유를 듭니다. 전 이것이 합당한 사유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총독부가 도쿄에 있는 특정 인사들의 의견을 추종해서 조선의 세부정책을 입안해 실행하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 때문이지요.
  2. 창씨개명을 반대하는 이들은 조선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들이 창씨개명을 반대한다는 이유를 듭니다. 창씨개명으로 일본인과 조선인의 구별이 사라지게 될까봐 그렇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조선인 모두가 일본식 이름을 갖게 되면 자기들의 우월감이 사라지게 될까봐 우려하는 일본인들이 있다는 겁니다. 저는 특정 부류의 일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이 우월감을 타파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총독 각하께 우리 조선인이 고마움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 창씨개명을 반대하는 조선인들은 지난 수백 년 동안 조선인 이름을 간직해온 우리 조선인들이 지금처럼 김씨, 이씨 등으로 살면서도 충량한 일본 신민이 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말합니다.

전 이 주장에 꽤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인들이 충분한 시간을 갖고 이 문제를 결정할 수 있게 마감시한을 오는 8월 11일로부터 6~10개월 정도 늦추면 어떨까 싶습니다.[69]

윤치호는 거듭 창씨개명 기일을 연기해달라고 청했거, 그뒤 윤치호의 청을 받아들인 미나미총독은 창씨개명령 시한을 늦춰 1941년 1월부터 창씨개명이 대대적으로 단행된다.

창씨개명을 한 문중의 결의와 관계 없이 그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조카 윤보선 같은 경우는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창씨개명하지 않으면 일본인들이 자신을 감시할 것이라고 봤다. '당국이 이미 창씨개명하기로 결정한 이상, 그들은 조선인들이 창씨개명 하도록 조치를 취할 것이다.[70] 그들은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저명한 조선인들을 반일분자로 블랙리스트에 올릴 것이다. 난 차마 우리 아이들 이름이 블랙리스트에 오르게 만들 수는 없다. 그래서 창씨개명을 결정한 것[70]'이다.

1940년 7월 16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동양문화학회(東洋文化學會) 주최 동양정사(東洋事情) 강좌에 연사로 참석하다.[71] 그의 창씨개명은 자의라기 보다는 문중회의에 의한 것이었으나, 그의 창씨개명이 한알려지면서 9월 그의 창씨개명을 비난하는 투서가 나돌아 서대문 경찰서에서 수사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 이후

1941년 2월 제4대 연희전문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한편으로는 청구구락부, 수양동우회, 흥업구락부 등에서도 활동도 했지만 한편 1941년부터 3년간 연희전문학교 교장을 지낸 뒤 태평양 전쟁 이후 그는 1941년 5월 12일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자[72] 이를 받아들였고, 1941년 8월 24일 조선호텔에서 흥아보국단(興亞報國團)을 조직, 결성하였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을 맞아서는 전시결전단체인 임전대책협의회에 참가하여 ‘우리는 황국신민으로 일사보국(一死報國)의 성(誠)을 맹서하여 협력할 것을 결의함’이라는 결의문을 낭독하였다.[11]

이후 자신이 조직한 흥아보국단김동환(金東煥) 등이 이끄는 임전대책협의회의 통합을 추진하여 1941년 9월조선임전보국단의 창설을 본다. 1941년에는 '극동의 결전과 오인의 각오' 라는 주제로 황국신민으로서의 충성과 협력에 대한 결의문을 낭독하고[8], 일본제국 의회의 칙선 귀족원의원에 피선되었으며, 1945년에는 일본 귀족원 의원으로 겸 내부대신 및 경찰부원을 지냈다. 1941년 10월 22일, 윤치호는 친일단체들의 결집체인 조선임전보국단 조직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그는 중추원의 정기 모임에 간간히 출석하였으며, 1943년 9월 23일에는 중추원 모임에 나가 점심을 먹은 뒤, 중추원 의원들이 매주 목요일마다 10~20인이 출근한다는 기록을 남겼다.[72] 그러나 그에 의하면 중추원의 참의들은 출근하여 '1~2시간 동안 잡담과 흡연으로 시간을 보낸다[72]'고 질타했다.

일제 강점기 후반

1943년 11월 3일자 매일신보에 올린 학도병 권유 기고문

1943년 11월 윤치호는 이광수·박흥식·송진우·주요한·한상룡 등과 함께 학도병 종로익찬위원회를 개최하여 학병 권유를 위한 호별 방문, 권유문 발송, 간담회, 학교강연회 개최 등을 결의하였으며 5일간 진명학교 등 10개소에서 학병권유 부형간담회를 열었다. 11월 6일 언론에 '내 아들 이어든 속히 지원하라는 전보를 발송하자'는 제목의 담화문을 기고하였다. 그 날 중추원에서 개최한 단합회에 참석했고 학병제의 솔선협력을 결의한 후, 평남지역 독려강연반 연사가 되어 이튿날 90여 명과 함께 YMCA에서 학병제 경성익찬위원회를 조직하였다. 11월 12일 평양에서 열린 학도병독려 연찬회에 연사로 참석하여 강연하였고, 매일신보에 학병 독려 담화문을 발표했다.

1944년 종로의 인사들이 학도병을 독려하기 위해 조직한 종로익찬위원회의 회원[73]이 되고, 1944년 10월 연희전문학교장 직을 사퇴하였다.

1941년 이후 그는 이승만미국의 단파방송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다. 이승만미국의 프로그램인 미국의 소리 VOA방송에 출연하였고, 그 단파방송이 라디오를 타고 조선에 보급되었다. 그러나 그는 태평양 전쟁으로 미국일본이 전쟁을 벌인다는 것에 회의적이었으며, 설령 미국일본이 전쟁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과 일본이 전쟁을 하게 되었으나, 일본이 패배할 수도 있지만 반드시 패배한다는 보장은 없다고 전망했다.

신앙 활동 및 기타

1910년 미국 애틀랜타 주에서 개최된 남감리회 평신도협회 총회에 참석하였고, 미국 감리교선교부의 초청을 받고 영국 에딘버러에서 개최된 제1차 기독교 세계선교회의(I.M.C)에 참관하고 돌아왔다. 1916년에는 YMCA 청년회 총무, 1930년에는 YMCA 연합회 회장을 맡는 등 기독교계 사회운동에도 적극 참여, 활동하였다.[1] 1913년 황성 YMCA 총무에 취임한 이상재를 도와 YMCA의 혼란을 수습하였으며, 기독교 청년 지도자들의 이탈과 구속, 추방 등의 가운데 이상재와 함께 YMCA의 간판을 지키고 청년회를 사수하였다. 그 뒤 남부감리교를 한국에 설립하고 선교하는 활동을 하였고, 국제 교회연합사업을 주관하였으며 1930년부터 윤치호는 한국내 남·북감리교회 연합을 추진하기도 했다.

1938년 5월 결성된 경성기독교연합회 평의원으로 선출되었고, 6월 기독교일본화를 달성하기 위해 소집된 전조선기독교청년연맹위원회에 참가한 후 "이제야 대임(大任)을 마쳤습니다. 우리 기독청년들도 이제는 완전히 내선일체가 되었습니다"라는 요지의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한편 현실생활의 구원을 통하여 기독교를 정착시키기 위한 실천을 직접 선보였으며 기독교신앙인들의 신앙 모범촌 건설계획을 추진하기도 하였다.[8]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의 이사와 부회장, 세계주일학교 한국지회 회장으로도 활동했다.

1938년 7월 조선기독교연합회 평의원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39년 10월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아오야마 학원(靑山學院)에서 감리교의 통합을 위하여, 조선감리교회와 일본의 메소디스트 교회의 합동을 논의하는 일선(日鮮)감리교회 특별위원회가 개최되자, 그는 김영섭(金永燮), 신흥우(申興雨), 양주삼, 유형기(柳瀅基), 정춘수 등과 함께 조선인전권위원으로 참가하였다.

한편 1908년 그가 역술한 ‘찬미가’에 수록된 가사는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의 번역본과 유사하다는 의견이 나왔다.[74] 1941년 부인 백매려가 사망했다. 이후 윤치호는 재혼하지 않았다.

광복과 죽음

광복 직전

만년의 윤치호 (1945년)

1945년 2월 일본 제국의회의 칙선 귀족원의원에 선임되었다. 2월 박춘금이 결성한 대화동맹(大和同盟)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태평양 전쟁 이후, 지하 한국인 독립운동단체의 조직을 인식, 감지하였으나 독립은 가망없다고 판단했다.[75] 6월 언론보국회가 결성되자 언론보국회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8월 15일 일본이 패망, 방송을 통해 히로히토 일왕의 항복선언 소식을 접하였다. 1945년 8월 광복 이후 그는 친일반민족위원회 및 경향갤러리에 체포되어 명동재판소를 거쳤으며 3개월간 투옥당했다가 풀려났다.[출처 필요] 광복 직후 그는 애국가의 친필 사본을 셋째 딸 윤문희(尹文姬)에게 비밀리에 전달하였다. 자신이 친일파로 규탄받는 시점에서 애국가에 관련된 것이 알려지면 애국가에 타격을 주리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9월 한민당이 창당되자 그를 원로로 추대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그는 이를 거절했다.[76]

사망

1945년 10월 20일 친일파 청산 문제가 거론되자 그는 이승만김구, 미국 군정청에게 각각 <한 노인의 명상록>이라는 제목으로 역사의 불가항력을 역설하는 편지서신을 보냈다.[77] 편지에서 그는 일부 독립운동가들이 자신들이 독립을 쟁취한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애국자연 하는 독립운동가가 독립을 이룩한 것이 아니라 우연히 독립을 달성한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일본의 신민으로서 '조선에서 살아야 했던' 우리들에게 일본 정권의 명령과 요구에 응하는 것 외에는 어떤 대안이 있었겠습니까? 우리의 아들들을 전쟁터에 보내고 딸들을 공장에 보내야만 했는데, 무슨 수로 군국주의자들의 명령과 요구를 거역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하 중략)... 그러므로 누군가는 일본의 신민으로서 한 일을 가지고 비난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이하 중략)...

우리는 해방이 선물로 주어진 것임을 솔직히 시인하고, 그 행운을 고맙게 여겨야 합니다. 잃었던 보석을 찾은 듯한 은혜를 입은 만큼, 겸허한 마음으로 다시는 그것을 잃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사소한 개인적 야심과 당파적인 음모와 지역간의 증오심일랑 묻어두고, 고통을 겪고 있는 우리나라의 공익을 위해 다 함께 협력하여야 합니다. 우리 나라의 지정학적 상황을 미루어 볼 때, 민중들의 무지와 당파간의 불화 속에서 우리 조선의 미래를 낙관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분열되지 말고 단결해야 합니다. ...(이하 중략)...

마치 자기들의 힘과 용맹성을 가지고 일본 군국주의로부터 조선을 구해내기라도 한 것처럼 어딜 가느 으스대며 다니는, 자칭 구세주들의 꼴이란 참으로 가관입니다. 그들은 아둔하거나 수치심이 없는-아마도 그 둘 다인-사람들인지라, 조선의 자유는 달나라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의 자유만큼도 되지 않았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입니다. ...(이하 중략)... 이른바 그 '해방'이란, 단지 연합군의 승리의 한 부분으로 우리에게 온 것 뿐입니다.

만일 일본이 항복하지 않았더라면, 저 허세와 자만에 찬 (자칭)'애국자'들은 어떤 사람이 큰 지팡이로 일본을 내쫓을 때까지 계속해서 동방요배를 하고 황국신민서사를 읊었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 허세와[78] 자만에 찬 '애국자'들이 일본을 몰아낸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79]

광복 직후 그는 친일파로 몰리며 수시로 규탄과 성토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귀국한 독립운동가들이 개선장군인 것처럼 행세하는 것을 보고 영웅심리에 들뜬 자들이라며 경멸하였다.

11월 상하이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했다. 임정 요인 환국 직후 김규식이 그를 찾아왔다. 이후 여러 번 김규식의 방문을 받았으나 그는 김규식에 대한 정치적 지지표명은 하지 않았다. 그뒤 그는 다시 친일파의 석방, 사면론을 주장하였다. "애국자들의 공갈협박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도록 고도의 정치행위이자 보편적 정의로 일반 사면을 단행해야 하는[80]"것이 그 이유였다. 그에 의하면 친일파들을 사면, 석방해주어야 되는 이유로 그는 사이비 애국자들의 공갈과 위선, 폭력을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11월초 윤치호는 이승만, 김구와 면담하려 하였으나 모두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특히 이승만의 비서로 있는 사촌동생 윤치영을 통해 이승만 측과 교섭하였으나, 이승만은 바쁘다는 핑계로 만남을 차일피일 미루었다. 경교장 역시 윤치호의 방문 요청에 답변을 회피했다. 광복 직후 그는 친일 협력자 내지는 거물 친일파 정치인으로 수시로 규탄, 비판당하였고, 수시로 비난과 논쟁에 시달리며 이를 반박하였다. 11월 말 치아에 통증을 느낀 그는 경성부에 있는 치과에 가서 진료를 받고 오던 중 노상에서 갑자기 졸도하였다.

그해 12월 6일 오전 9시 경기도 개성부 송도면 고려정에서 뇌일혈로 갑자기 사망하였다.[79] 친일파로 규탄받자 그의 병세가 악화되었으며, 시중에는 친일파로 몰리자 슬퍼하여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었다.

사후

제2공화국의 대통령인 조카 윤보선(오른쪽에서 두 번째)과 총리 장면

충청남도 아산군 둔포면 석곡리 선영에 안장되었다. 독립유공자로 서훈대상에 선정되었으나 독립·계몽운동가였다가 후에 부일, 친일협력 활동 등이 감안되어 건국공로훈장 수훈에서 제외되었다. 1995년 광복회 주관으로 한 “윤치호 친일 협력에 대한 재평가” 강연이 개최되고[81], 1998년 4월 3일 서울 종로2가 YMCA 강당 2층에서 윤치호기념사업회가 출범하였다.

2002년 3월 친일파 708인 명단에 수록되었고, '평화와 참여로 가는 인천연대'는 7일 '친일파 윤치호 동상을 철거하라'는 성명서를 통해 일본 귀족원 의원으로 선정된 윤치호가 인천 모중학교 교정에 설립자로서 1968년 세워진 것으로 확인했다며, 해당 학교는 청소년들의 민족의식을 위해 이 동상을 자진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82] 인천연대는 이와 관련 "윤치호의 동상이 인천에 자리잡고 있는 것도 치욕스럽게 생각하지만, 그 동상이 청소년의 배움터인 학교 교정에 세워져 있는 것에 대하여 깊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며 "2001년 12월23일 서울의 광신학원이 설립자 박흥식의 동상을 친일파라는 이유로 교정에서 철거했음을 참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청소년들에게 민족의식을 바르게 심어주는 것만큼 중요한 교육은 없다고 생각한다"며 "학교 당국이 윤치호의 동상을 스스로 철거하지 않을 경우 역사바로세우기 및 인천정체성 바로찾기 차원에서 철거운동을 벌여 나갈 것"이라고 주장했다.[82]

사촌 동생 윤치영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 연세대학교 교내 단체가 선정 발표한 “연세대학교 친일파 명단”[83]기독교대한감리회가 2005년 공개한 감리교 내 친일 부역자 명단에도 포함되었다.[84] 변절자라는 견해와 나약한 지식인이라는 비판과 근대인, 냉철한 합리주의자라는 상반된 시각과 평가가 존재하고 있다.

2008년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의 교수 박노자는 그를 영화화 할 역사인물로 추천하기도 했다.[10] 그에 의하면“윤치호는 어찌 보면 한국 근대사 최초의 ‘세계인’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또 한편으로는 애국가를 작사한 민족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일제 시절에는 ‘조선민족에 자립의 능력이 없다’고 판단해 대지주인 자신의 계급적 이익에 따라 친일을 한 것도 사실이다. 국제성, 민족주의, 친일… 근대적 이념과 지향의 다면적 구도에서 한 개인이 배회하는 과정은 윤치호를 통해 대단히 잘 보여줄 수 있다. 그를 영화화하자면 그건 ‘시대와 개인’의 극이 될 것이다. 매혹적이면서도 잔혹한 격변기가 얼마나 많은 것을 개인에게 요구하는지, 개인으로서 새로이 열린 세상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가기가 얼마나 힘드는지 보여주는[10] ”인물이라는 것이다.

2009년 7월 민족문제연구소 전라북도지부에 의해 전라북도 진안군 부귀면에 세워진 윤치호의 공적을 기리는 영세불망비 3기 중 2기가 발견되어 강제 철거당했다.[64]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는 2010년 4월 제보를 받고 전라북도 진안군 부귀면 현장을 답사, 부귀초에 철거 협조 공문을 발송하는 등 학교측과 부귀면의 협조로 일제잔재물인 윤치호 불망비를 철거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64]

기타

1890년대 미국에서 돌아와 한국에 자전거를 처음 소개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 본인이 타고 다녔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85]

천자문을 본따 《유학자취》 (幼學字聚)라는 책을 출간하였다.[86] 천고지원(天高地圓)·일승월조(日昇月照) 등 모두 1,200자로 되어 있으며, 간편하고 쉬운 내용으로 구성되어 초학자인 어린이들을 가르치기에 편리하게 엮었다.[86] 이 중 ‘효조오석(曉朝午夕)’이라 하여 “새벽에서 아침이 되고 아침에서 낮이 되며 낮에서 저녁이 된다.”든가, ‘주명야암(晝明夜暗)’과 같이 “낮은 밝고 밤은 어둡다.”는 식으로 새로운 문자학을 도입한 것이다. 이 책은 개화기 아동교육을 위한 문자학습서로서 많은 노력과 연구 흔적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86]라는 평가도 있다.

1895년 10월 민비가 암살되자 그는 민비의 암살에 조선인 협력자들이 존재했다고 확신했다. 윤치호는 그의 일기에서 민비를 암살한 일본 낭인들의 지휘자 중 한사람으로 유길준을 지목하였다.[87] 민비가 암살당할 무렵 사실을 은폐시킬 의도로 유길준와 일본인 이시츠카가 저녁 식사에 자신을 초대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28]

눈 질환과 호흡기 질환이 있던 윤치호는 안과이비인후과를 자주 다녔다. 그 중 그는 당시 서울에 있던 정귀섭 안과·이비인후과 단골이었다.[88] 정귀섭 안과와 이비인후과는 윤치호 외에도 이승만, 윤보선도 단골이기도 했다.[88]

한편 일본의 귀족화된 조선 왕족에 대하여 그는 비판을 하였다.

일본인들은 이씨 조선의 지난 왕실에 대하여 무척 호의적이라고 뽐내 왔다. 동양역사에서 몰락한 왕조가 이토록 존엄한 대우를 받았던 예는 찾아볼 수가 없다.[89]

윤치호는 한일합방 이후 조선대한제국의 황실에서 책임을 통감한 인물이 의친왕 외에는 거의 없었다는 점과, 대부분의 황족들이 일제가 주는 공작, 백작, 남작의 작위를 받은 점을 무책임하다고 비난했다. 그에 의하면 일제에 협력한 양반고관 외에 일본이 주는 작위를 받았던 대한제국 황실 역시 한일합방의 원흉이자 무책임한 존재로 비춰졌다.

을사오적정미칠적을 규탄하면서도 이완용을 가장 경멸하고 혐오했다.[90] 이는 이완용이 당초에는 독립협회의 회원으로 계몽운동에 동참했다가 적극적인 친일파로 돌변한 것에 대한 분노였다.

윤영선

1909년 윤치호는 케롤라이나 학당의 이름을 배화라고 지어주었다. 1898년 10월 2일 미국인 선교사 조세핀 켐벨 여사가 서울 종로구 내자동에 세운 것이 '케롤라이나 학당'이었다. '배화'는 1909년 윤치호가 꽃을 기른다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다.[91] 이는 배화여중, 배화여고, 배화여자대학의 교명으로 이어졌다.

1929년 3월 12일 셋째 딸의 성대한 결혼식을 치렀다.[92]

1945년 광복 직후 그는 친일파로 몰려 규탄받고 몰락했으나, 그의 이복 동생 윤치왕윤치창, 아들 윤영선(尹永善)은 연좌되지 않았다.[93] 4촌 동생 윤치영과 조카 윤보선이승만의 측근으로 있었으며, 윤보선은 후일 이승만과 결별하고 민주당원으로 제2공화국대통령이 되었다. 여섯째 사위 현영학이화여대 신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민중신학자와 유신 체제에 반대하는 반체제 인사로 활동했다.

기타

인간관계

개인적으로는 서재필, 유길준, 안창호, 이동녕, 이상재, 양기탁, 송진우, 김성수, 여운형, 김규식, 이승만, 이광수 등과 친분관계를 쌓고 교류하였다. 이 중 서재필과 이승만, 김규식이 망명하고 유길준은 일찍 사망하면서 그의 인간관계의 폭은 다소 줄어들었다.

사회주의자였던 허헌 역시 그의 집에 자주 출입하였는데, 성공 가능성을 장담못하면서도 대가 없이 그에게 광산사업에 쓰라고 자금을 대주기도 했다.

애국가 작사자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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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가 셋째 딸 윤문희에게 준 애국가 필사본

그의 사촌동생 윤치영(尹致瑛)에 의하면 그는 대한민국애국가를 일부 작곡했다고 한다.[94] 윤치영에 의하면 애국가 가사의 앞부분은 최병헌 목사가 짓고, 후렴구는 윤치호가 지었다는 것이다. 최병헌 목사는 윤치호가 다니던 정동감리교회의 목사였다.[94] 윤치호와 최병헌이 함께 지었다는 애국가 사본이 2002년 한남대학교 교수 박정규에 의해 발견되기도 했다. 이는 윤치호의 ‘무궁화 노래’(1896)와 김인식의 ‘코리아’(1910)가 합쳐진 형태로, 후렴이 현재의 애국가와 같다.[95] 또한 애국가의 원본은 그가 지었으나, 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일부 개사했다고도 한다.

그밖에 '성자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로 시작되는 협성회 무궁화가 역시 윤치호가 작사를 하였다는 설이 있다.[96] 안창호가 가사의 성자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 를 문제삼아 가사를 바꾸라고 요청하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으로 고쳤다. 그러나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한 안창호는 윤치호가 지었다가 본인 스스로 수정한 부분 중에서도 우리 대한 만세를 우리 나라 만세로, 이기상과 이맘으로 임금을 섬기며를 이기상과 이맘으로 충성을 다하며로 다시 고쳤다.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주요한과, 독립운동가 안태국의 사위 홍재형 등은 그가 지은 협성회 무궁화가를 안창호의 요청으로 개사한 것이 애국가의 기원이 되었다고 진술했다. 이는 한말 독립운동가인 안태국(안창호, 양기탁 선생과 신민회를 조직,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피검)의 사위인 홍재형이 안태국의 말을 회고하는 < 안도산전서>(安島山全書) 의 내용에서 살펴 볼 수 있다.[49]

본래 애국가 가사의 첫 절이 '성자 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 산고 수려 동반도는 우리 조국일세'라고 되어 있었는데, 도산(안창호)이 하루는 서울서 내려 온 교장 윤치호를 보고 이 가사가 적당하지 않으므로 고쳐서 부름이 좋겠으니, 교장께서 새로이 한 절을 지어 보시라고 청하자 윤치호가 도산의 생각을 물었고, 도산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구절을 보여주자 윤치호가 기뻐하면서 찬성하자 도산이 이를 당시 교장인 윤치호가 지은 것으로 발표하자고 제안하여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49]

또 주요한은 <안도산전서> 에서 원래 끝 구절의 첫 가사는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임군(임금)을 섬기며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였으나 1919년도부터 상해에서 이를 지금과 같이 고쳐 부르기 시작하였고 이는 분명 안창호가 고친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다.[49]

한편 전택부 역시 윤치호가 애국가의 유력 작사자라 주장하였다.[97] 그 근거로는 첫째로, 1907년 윤치호의 역술로 출판된 <찬미가>중에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애국가가 들어 있다는 사실, 둘째로 미국에서 살고 있는 양주은이 소장한 국민가 중에 애국가가 윤치호의 작사로 되어 있다는 사실, 셋째로 해방 후 윤치호가 친필로써 ‘윤치호 작’ 애국가(사진 10번)를 쓴 것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1955년 벌써 밝혀졌던 사실[97]이라는 것이다.

윤치호가 지은 찬미가의 개사본이 1910년에 실렸다. 애국가가 수록된 최초의 문헌이 윤치호의 “찬미가”이고 1910년 9월 21일자 신한민보에 애국가의 전문이 윤치호 작사의<국민가>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어 윤치호가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다.[98]

윤치호는 안창호의 노력으로 신학문을 수용하고 체계적 교육이 시행되고 있던 대성학교의 교장으로 있으면서 느낀 바 있어 자신의 작품격인 찬미가를 저술하며 여기에 도산이 대성학교 학생들에게 가르치던 애국가를 수록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49]

음악 평론가인 김종만은 1904년 부터 1920년 사이에 부른 미국 한인 찬송가 속에 “윤선생 티호 군 작사”로 적힌 현행 애국가를 보관 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 적십자가 발간한 “National Anthems-And How They Came to be Written” 이란 영문자 책에서도 애국가 작사자가 Chiho Yun이라고 기록되어 있다.[81] 1902년에 윤치호가 지었다는 무궁화 노래가 애국가의 원형과 같다는 자료도 나타났다. 2006년 2월 27일에는 박정규(朴正圭) 한남대 교수가 충북 청원군에서 열린 단재 순국 70주기 추모 학술발표회 발표문 ‘신채호의 국내에서 쓴 글에 대한 고찰’중에서 애국가의 원형이 된 노래도 함께 발표하였다.[95] 신채호가 지은 '광무(光武) 5년 신축(辛丑) 2월 7일 신채호 배(拜)'라고 쓴 노래와 함께 발견된‘애국가’도 있었다. 이 애국가는 현재 애국가의 원형으로 추정되는 윤치호의 ‘무궁화 노래’(1896)와 김인식의 ‘코리아’(1910)가 합쳐진 형태로, 후렴이 현재의 애국가와 같다.[95]

이화여자대학김활란 박사는 윤치호로부터 애국가 작사자를 밝히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고 진술했다.[81] 김활란이 해방직후 개성에서 은둔하고 있던 좌옹을 문안 하였는데 그는 당부하기를 "애국가를 내가 작사 했다고 말 하지 마시오, 내가 지은줄 알면 나를 친일파로 모는 저 사람들이 (애국가를) 부르지 않겠다고 할지 모르니까[81]" 라고 당부 했다는 것이다.[81] 후일 김활란은 그 이야기를 연세대학교 교수 김동길에게 전하였다.[81]

그후 윤치호는 죽음 직전인 1945년 10월에 애국가 가사를 옮겨 쓴 '가사지' 필사본을 남겼다고 한다. 그는 가사지 사본을 셋째 딸인 윤문희(尹文姬)에게 주었다.

윤치호 일기

윤치호 일기 (1882 ~ 1943)

그는 1883년부터 1943년까지 60년간 일기를 썼는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기를 썼다. 처음에는 한글로 쓰다가 뒤에 한자로 쓰다가 뒤에는 영어 필기체로 기술했는데, 이때문에 후일 1968년부터 그의 아들 윤영선으로부터 자료를 기증받아 국역(한글본)으로 옮길 때 난해한 점, 판독이 어려운 부분이 상당수 되었다고 한다. 이는 타인이 자신의 일기를 볼 것을 우려해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윤치호 일기1968년 그의 장남 윤영선이 국사편찬위원회에 기증한 이후, 난해한 필기체 영어 등의 해독오류 등으로 1973년부터 1989년까지 일부 한글로 번역되었고, 2000년대 이후 다시 한글로 번역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고종 독살설

윤치호는 고종이 독살되었다고 확신했다. 윤치호는 1919년 고종 사망 당시에는 고종 독살설에 부정적이거나 비판적이었으나 후에 고종독살설에 가능성을 두는 쪽으로 입장을 선회했다. 1919년 초까지만 해도 그는 고종 독살설에 부정적이었다.

이태왕(李太王·고종)이 왕세자 이은(영친왕)과 나시모토 공주(이방자 여사)의 결혼식을 꼭 나흘 앞두고 승하하는 바람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라는 풍문이 나돌고 있다. 정말이지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다. 1907년 황제 자리를 빼앗기고, 3년 후 나라마저 빼앗긴 굴욕을 감수한 이태왕이 이제 와서 하찮은 일에 억장이 무너져 자살했다는 게 말이 되는가? 더구나 어린 왕세자와 일본 공주의 결혼이야말로 왕실의 입장에서는 경사스러운 일이 아닌가? 이 결혼을 통해 두 왕실 간의 우호관계가 증진될 것이고, 왕세자는 조선의 어떤 여성보다 우아하고 재기 넘치는 신부를 맞이하게 되는 거니까 말이다. 만약 이태왕이 ‘병합’ 이전에 승하했더라면, 조선인들의 무관심 속에 저세상으로 갔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조선인들은 복받치는 설움을 이기지 못하고 옷소매를 적셔 가며 이태왕을 위해 폭동을 일으키려 하고 있다.

1919년 1월26일자 윤치호 일기

윤치호에게 고종독살설을 전한 무관 출신 한진창은 고종이 독살되었다고 확신하였다.[99] 그리고 한진창은 자신의 누나 한진숙의 시조카 윤치호에게 고종이 독살되었을 것이라는 것을 전했다.[99]

윤치호는 자신이 한진창에게 들은 내용을 1920년 10월 13일자 일기에 기록해 놓았다. 윤치호와 한진창에 의하면

1. 이상적이라 할 만큼 건강하던 고종황제가 식혜를 마신지 30분도 안되어 심한 경련을 일으키다가 죽어갔다.

2. 고종 황제의 팔다리가 1~2일 만에 엄청나게 부어올라서, 사람들이 황제의 통넓은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바지를 찢어야만 했다.

3. 민영달과 몇몇 인사는 약용 솜으로 고종황제의 입안을 닦아내다가, 황제의 이가 모두 구강 안에 빠져 있고 혀는 닳아 없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4. 30센티 미터 가량 되는 검은 줄이 목 부위에서부터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다.

5. 고종황제가 승하한 직후에 2명의 궁녀가 의문사했다.[99]고 했다.

윤치호는 한진창 역시 고종독살설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들었는데, 민영휘, 나세환, 강석호(내관) 등과 함께 시신의 염을 한 민영달이 한진창에게 이 내용들을 말해주었다[99]고 했다. 윤치호는 처음에 고종 독살설을 부정하였으나 후에 조선총독부에 빌붙고 일제의 통치를 찬양하는 일부 대신들의 행위를 보면서 고종 독살설을 확신하게 되었다.

또, 그는 고종의 죽음을 '조선의 자결권이 끝내 소멸되었다는 상징적인 사건[100]'이라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

조선 최초의 영어회화

조선인 최초로 영어를 배웠던 사람 중의 한사람이었다. 그는 영어사전을 저술하지는 않았으나 영어 단어를 소개하고 문법을 기술한 준 영어사전급인 《영어문법첩경》을 저술했다. 그는 미국에 처음으로 한국의 민담들을 전래하기도 했다. 그에 의하면 '어느 노인과 승려가 길동무가 됐다. 노인은 상투를 틀었으나 머리가 빠져 상투가 엉성하게 되었다. 장난기가 발동한 승려는 노인의 상투를 자르고 노인에게 장삼을 입힌 뒤 도주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난 노인은 승려가 없어진 것을 알고 거울을 보고 자신의 상투를 만졌으나 상투가 없었다. 노인은 거울을 보며 그러면 중은 여기 있는데 나는 어디를 갔다는 말인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사상과 신념

독립협회와 계몽운동 당시 그는 무지한 조선의 민중을 계몽으로 새롭게 거듭나게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그가 미국 유학 당시 기독교에 입교하고 교리를 배우고 서구의 사상을 접하면서 이를 조선에 받아들여 사회를 바꿀수 있다고 봤다. 그러나 독립, 계몽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원인을 그는 민중의 무지함 때문이라 보았고 이는 후에 조선일제 식민지가 되는 것을 당연한 징벌로서 인식하게 되었다. 계몽과 개혁으로 근대 한국이 소생할 기회를 한국인 스스로 저버렸다고 판단한 그는 독립운동에도 회의적인 시각을 품게 되었다.

유교 비판

윤치호는 고려조선 1천여 년을 내려온 유교이데올로기에 부정적이었다. 그에 의하면 유교성리학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말살, 억압하는 폭압적인 사상이었다. 윤치호는 1900년 12월 18일자 일기에서 전통적인 유교 교육이 진보와 생동하는 내용도 없거니와 한국에 관한 내용도 없는, 진부한 고대 중국의 고전과 역사 위주의 교육으로 곧 한국인중국인화(中國人化)하는 교육이라고 비판했고[43], 1900년 12월 28일자 일기에서는 "현명한 정부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소학교에서 중국 서책을 금지시키는 일"이라고 말했다.[43] 그가 중국 서책을 금지시켜야 된다고 주장한 주된 원인은 중국의 유교, 성리학에 대한 것이 주로 인용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유교를 폭압적이고 독재적인 억압의 도구, 내지는 억압과 독재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봤다. 1904년 5월 27일자 일기에서는 "유교는 국가에 대하여 국왕을 압제자로, 며느리에 대하여 시어머니를 압제자로, 아내에 대하여 남편을 압제자로, 노예에 대하여 주인을 압제자로 만들어 가정과 국가에서 모든 자유정신과 기쁨을 말살시켰다. 따라서 유교는 압제적 계서(階序)체계라 할 만하다.[43]"고 혹평하였다. 도덕과 정의를 앞세워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침해하는 수단으로 간주했다. 과부의 재가를 금지한 성리학의 가례 역시 개인의 선택권을 억압하는 비인간적인 체제로 규정했다.

또한 그는 공자를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1900년 5월 27일자 일기에서는 또 그는 공자가 "사람은 관직에서 군주를 섬기는 것이 최고의 의무"라 가르쳤고, 자기 스스로 "상가지구(喪家之狗[101])"처럼 관직을 추구했던 사실을 지적하고[43], 공자를 비판, 유교한국 사회의 이기적인 관직 추구열(출세지향 현상)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43] 동시에 노동을 천시하는 국내 민중들의 인식을 증오하였다.

유교의 교조주의적인 사상과 반자유주의적인 사상이 인간의 기본권을 침해한다고 봤다. 그러나 윤치호는 유교 만을 일방적으로 문제삼은 것은 아니었다. 윤치호는 기독교를 포함하여 어떠한 종교도 처음에는 인민을 진작시키다가, 그것이 절대화 되면 인민을 퇴화시키고 억압한다고 보았으며, 그래서 한국의 모든 잘못을 유교에만 책임지우는 것은 불공정하다[43]고도 했다.

민주주의관과 참정권

윤치호는 미국에서 접한 의회민주주의 원리에 감격했다. 이후 그는 민중이 스스로 대표자를 선발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국정에 반영하거나 목소리를 내야 된다고 확신했다. 그는 중추원을 영국이나 미국의 의회식으로 개선하고, 중추원 의원을 민중들이 선발하는 것을 계획하였으나, 그가 왕정, 황제를 타도하고 대통령이 되려는 야심을 가졌다는 루머가 확산되면서 실패하였다. 민중이 대표자를 선발하여 민중들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거나 국정에 반영할 것을 주장하였으면서도 그는 왕정이나 황제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비판하지는 않았다.

민중이 자기 스스로 대표자를 선발하려면, 판단력과 선동에 휘둘리지 않는 이성이 필요하다고 확신했고, 그 이성은 교육과 서구 문물, 기독교의 청교도 사상, 합리주의 등을 통해 실현해야 된다고 봤다. 그러나 개혁이 실패로 돌아갔다. 그뒤 '공공정신(에티켓)이 없고 구습과 미신에 강하게 집착하고 있다. 다른 지방의 사람들과 같이 무지하고 게으'른 것[40]에 실망한 그는 '이 인종의 피는 새로운 교육과 새로운 정부 그리고 새로운 종교를 갖고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기독교와 조선 근대화 측면

그는 서구의 기독교 사상과 합리주의, 민권사상의 도입을 통해 사회의 개혁을 주창했다. 그리고 사회의 개혁을 위한 발판으로 민중의 계몽을 역설하였다. 독립협회 활동 당시 윤치호는 민중을 계몽의 대상으로 생각하였으나, 독립협회가 좌절당한 이후 그는 민중을 경멸, 계몽의 대상이 아닌 개조의 대상으로 시각을 바꾸게 된다. 독립협회 운동의 좌절의 원인은 '민중의 어리석음'으로 보고, 민중에 대한 반감을 증폭시켰다.[40] 한편 그는 "한국인들은 일반적으로 10%의 이성과 90%의 감성을 가지고 있다.[58]"고 주장하여 한국인의 감정적인 대응을 비판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당시 조선 사회에 거짓과 요령이 만연하다 보고, 거짓을 악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그는 조선 거짓과 속임수가 통하는 조선사회에 있어서 기독교를 유일한 양심세력으로 간주하고, 기독교를 중심으로 조선에 문명교육, 애국교육, 실업교육이 필요하다고 봤다. "조선에 있어서 가장 깊게 자리잡고 있고 동시에 가장 널리 알려진 악은 거짓이다.[102]"라고 지적하였고, 사회 부조리로 지배층과 민중 모두에게서 정직성의 부재를 문제점으로 지적하였다. 요령과 눈치를 그는 부정과 부패의 근원이라 했다.

윤치호는 조선의 낙후된 사회를 개혁하고 조선을 구할 수 있는 대안으로 미국민주주의 사상과 합리주의정신, 그리고 기독교 사상을 지목했다. 미국민주주의 사상과 합리주의정신을 보급하는 것과 기독교의 선교와 기독교 사상의 전래를 통해 조선민중을 구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미국 유학기간 동안에 그는 미국의 자유 민주주의 체제와 공화제 정부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 밑바닥에는 기독교 정신이 흐르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103] 그러므로 한국의 지식인들이 해야 할 일은 자기 나라를 기독교 국가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미국 남감리교단에 직접 연락하여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는 한편, 그 사업을 위해 자신이 먼저 선교 헌금을 하기도 하였다.[103]

윤치호는 자기 자신을 "사상 신념 차원에서 미국인보다 더 미국적인 사람"으로 규정하고, 문명의 최상을 구가하는 앵글로 색슨 인종의 용기·담력·근면성 등을 극구 찬양하였다.[104] 한편 인디언 학살 범죄에 대해서는 미국 측을 지지하는 입장을 보였다. 미국인이 조선에서 전개한 기독교 선교 사업을 "조선의 문명화를 위한 필수적인 부분"이라고 높이 평가하여 적극 협력하였다.[104] 그는 유교를 대안할 이념으로 미국유럽의 민권사상 및 기독교 정신과 신앙을 제시하였으나 이를 절대적으로 맹신하지는 않았다. 교조적이고 맹목적인 믿음은 인간의 이성과 정신을 병들게 한다고 봤다.

노동경시에 대한 비판

윤치호는 조선 사회의 노동 경시 풍조를 비판했다. 정당한 노동을 하고 정당한 대가로 월급을 받는 것을 꺼리거나 경멸하고, 자녀를 잘 키워서 출세를 시키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겼던 한국사회를 이해할 수 없었다. 1896년 1월 23일워렌 캔들러에게 쓴 편지에서 그는 "조선인에게 정직한 노동이 수치가 아님을 가르치는 것은 기독교의 의무의 하나이다.[105]"라고 지적했다.

1897년독립협회만민공동회의 강사로 전국 순회강연을 할 때에도 그는 "일하기 싫은 자 먹지도 마라 "는 성경의 구절을 인용, 정당한 노동을 하고 그 대가를 받는 것이 소중한 것이라고 했다. 또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라는 성경의 구절을 통해 정당한 노동과 함께 휴일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노동의 필요성에 대한 대안으로 그는 학생들에게 실업 교육을 추진했다. 1900년대초 윤치호는 한영서원(송도고등학교의 전신)을 지도하며 그는 실업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그가 강조한 실업교육은 농업, 목축업, 원예업 등으로, 이론 보다는 생산업 위주의 교육을 강조하고, 졸업 후 소액의 자본으로 손쉽게 운영할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우선 자신의 장남 윤영선(尹永善)에게 농업과 목축업을 가르쳐 개성에 목장 송고직을 운영케 하는 것으로 시범을 보였다.

공짜에 대한 비판

윤치호는 조선인들이 공짜를 좋아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그는 대가 없는 결과물은 없는 것이며, 자신이 노력하지 않고 얻는 대가를 좋아하는 것 역시 버려야 될 것이라 판단했다. 공짜를 좋아하는 조선인들의 심리 역시 타인에게 의존하는 의타심을 불러오는 한 원인이라고 봤다.

그는 세상에 대가가 없는 결과물은 없다고 생각했다. 공짜를 바라는 것이 타인에게 의존하는 습성을 불러왔고, 이는 일본을 비난하면서도 일본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다고 봤다. 공짜를 좋아하는 사고방식을 버리기 전까지는 일본으로부터 독립할 수도 없고, 독립해도 정신적인 독립이 불가능하다고 전망했다.

독립운동에 관련된 시각

윤치호는 그를 찾아오는 독립운동가들에게 거침없이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 또한 미국에서 활동하는 이승만구미위원부상하이 임시정부에도 비정기적으로 자금을 전달했다. 그러나 그는 한국인 독립운동가들과 일정부분 거리를 두었다. 그는 다른 조선인들이 자발적으로 일본의 앞잡이가 되는 것을 보고 독립이 불가능하다 판단, 독립운동을 조선의 백성들에게 유해한것으로 규정했다. 도덕적 독립, 지적 독립, 의식 수준의 독립이 전제되지 않는 한 정치적 독립은 쓸모 없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맹목적인 독립운동이 아니라 실력을 키워 지적·경제적인 부분의 향상을 하고, 지적·경제적 측면의 향상을 통하여 일본인들에게 받는 민족적 차별을 철폐[8]'하자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자금력과 경제력, 지식, 기술능력 등의 실력을 양성하여 한국인의 수준을 일본인이나 서구 시민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민도를 올린 뒤에나 독립운동의 가부여부를 결정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땅을 팔아 독립자금으로 주고 자신과 자손들은 굶어 죽는 자 보다 조상 대대로 물려 온 자기 땅을 일본인들로부터 지키고 젊은이들에게 양질의 교육을 시키는 사람이 진정한 애국자라고 보았다. 그는 토지에서 식량이 생산되고, 고기 역시 토지에서 나는 곡물을 먹여서 키운다고 봤다. 경제적인 기반이 사라진다면 영원히 그 경제력을 가진 자에게 종속될 수 밖에 없다, 종속되지 않더라도 굶어 죽거나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는 개인적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수시로 연락하였고, 이시영, 김규식, 안창호, 이승만 등과 비밀리에 교류하였으며 그들에게 자금을 송금해주기도 하였다. 적극적인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는 거부하였지만 그는 임시정부조선총독부에 한번도 밀고하지 않았다. 8·15 광복이 될 때까지 임시정부의 존재를 누구에게도 비밀로 하였다. 자신의 가족들에게 조차도 이승만, 안창호 등 온건파들에 대한 지원 조차도 비밀로 부쳤다.

무장투쟁론에 대한 비판

또한 무장투쟁론에 대하여 그는 비판을 가하였다. 임시정부나 기타 단체에서 보낸 밀정에게 자금을 지원하면서도 그는 '땅을 팔아서 독립운동가들에게 독립자금으로 지원하는 것보다는, 땅을 하나라도 더 매입해서 토지가 일본인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애국이라고 봤다. 그밖에 그는 안중근이토 히로부미 암살이 한일 합방을 더욱 촉진시켰다.[106]고 평가하기도 했다.

에비슨 박사의 말에 따르면, 어떤 얼간이들이 사이토 제독에게 폭탄을 던졌는데 그를 빗나간 폭탄으로 인해 수명의 구경꾼들이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난 이 얘기를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참말이지 애통한 일이다. 조선인들은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이 한일 병합을 재촉했다는 걸 잊었단 말인가. 바보들 같으니.[106]

강우규의 거사에도 상당히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1919년 9월 2일 경성역에서 강우규의 투탄 거사로 37명의 일본인 및 친일 고관이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37명과는 관계 없는 일반 구경꾼과 시민들이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윤치호는 에비슨 박사로부터 강우규 의거 소식을 전달받은 뒤, 의거 당시 민간인 부상자가 난 점을 지적하며 질타하였다.[106] 그에 의하면 안중근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이 정한론(한국 정벌론)을 외치는 일본 강경파들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 주었다는 것이었다.

외교독립론에 대한 비판

그는 외교론을 통한 외교독립론과 같은 독립운동에도 회의적이었다. 그는 '한국인들 스스로 짚신이나 옷 한벌 만들줄 모르면서 어떻게 정치를 스스로 하기를 바라는가'며 독립운동에 비판을 하기도 했다. 그는 외교를 통해 독립을 달성할수 있다며 그를 설득하려는 이승만, 김규식에게 미국이 자국에 이익이 되지 않는다면 한국의 독립을 도와줄 이유가 없다며 반박하였다. 또한 국제사회의 이상을 확신하며 그를 설득하려던 송진우김성수를 논파하여 되돌려보내기도 했다.

3·1 운동 발발 직전 윤치호는 해외로 나가 구미 열강을 상대로 외교운동을 추진해달라는 최남선, 송진우, 신흥우 등의 요청을 거부했다.[107]

1920년대 초에 한국을 방문한 미국 의원 시찰단에게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자는 주장에 회의적이었으며, 그 자신은 미국 의원들과 한국인 대표들과의 통역을 하였지만, 스스로 '그러한 노력들이 모두 "부질없는 짓"이라'고 평가절하했다.[60] 미국인들이 한국인들을 동정하더라도 동아일보 등지에서 언급하는 미·일 전쟁과 같은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것[60]이라고 생각했다. 그에 의하면 '미국이 혹시 한국인의 처지에 동정한다 하더라도 미국 자국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도 않을 일본과의 전쟁을 감행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였다.[60] 윤치호는 미국인들에 대해, '미국인들이 몽상가들이 아니라고 평가했다.[60] 미국이나 다른 국가들이 아무 이해관계 없이 한국을 지지하거나 한국의 독립을 순순히 도와줄 리는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인종 문제와 외국관

소년기에 그는 일본보다도 서양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윤치호는 서구 민권사상을 수용하면서도, 백인종에 대한 거부감과 백인우월주의에 대한 적대감을 암암리에 드러냈다. 한편으로는 미국과 서양의 선진 문물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미국이나 유럽의 약소민족에 대한 침략성을 적극 인식하고 알고 있었지만 그는 사회진화론에 입각해 이것을 어디까지나 강자의 당연한 도리[104] 내지는 어쩔수 없는 현상으로 파악하였다.

흑인에 대해서는 1893년 2월 17일자 일기에 '(아프리카인들이 미국에 끌려와) 영어를 배운 것만으로도 그들의 노예생활에 대해 충분히 보상받은 것이다.[17]'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윤치호는 '이 세상에는 힘이 곧 정의이고, 이길 힘이 없다면 떠들지도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피력하기도 했다.[104] 인종차별을 비난하면서도 역으로 인종차별을 옹호하는 모순을 보니게도 되었다.

인도주의ㆍ문명ㆍ도덕ㆍ자유 등을 구가하는 강대국—기독교 국가—간에서 자행되는 [노예제도ㆍ아편무역ㆍ주류밀수 등] 죄악은 모두 혹독히 비판받아야 한다. 그것도 그 나라들의 문명정도에 비례하여 비판되어야 한다. 강대국들의 이러한 범죄는 요즈음 자비로우신 하나님께 대한 나의 신앙에 혼란을 가져오고 있다. 공정하신 하나님께서 어찌 어떤 민족은 약하게 그리고 다른 민족은 강하게 만드셔서 후자가 전자를 못살게 굴 수 있도록 만드셨을까? 혹자는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하신 것은 아니라고 강변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역사와 사실을 잘 살펴보면 이야기는 다르다. 적도(赤道)의 불볕 아래에나 한대(寒帶)에는 강건한 민족 혹은 국민이 도무지 없다. 뿐만 아니라 각 인종이 보유하는 정신적ㆍ육체적 능력에 현격한 차이가 있다. 왜 하나님은 모든 인종을 똑 같은 환경조건에 놓아두지 않으셨는가? 왜 하나님은 모든 인종에게 똑같은 체력과 지력을 허여하지 않으셨나?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힘들다. 나의 신앙이 이러한 의문들 때문에 흔들려서는 안되겠다.[108]
- 윤치호,『윤치호일기』1889년 12월 23일자

윤치호는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조선 침략 가능성을 보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일본을 축하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후반으로 가면서 그는 일본의 조선 침략에서 백인의 아시아, 아프리카 침략으로 확대시키고 제2차 세계 대전을 인종 대 인종의 싸움으로 규정하였다.

윤치호 등은 서구의 제국주의를 비난했다. 특히 윤치호는 실천에 옮길 수 있었던 유일한 반항은 일본 중심의 황인종 연대론에 동참해 백인종과 '인종적 대결'을 벌이는 것[104]이 현명한 길이라 주장했다. 개화기에는 "지구의 천당인 일본에서 인종 차별을 당하지 않고 살고 싶다."는 개인적인 희망을 품었다. 이것이 러일 전쟁 때는 백인종 러시아에 대한 황인종 일본의 승리에 대한 기쁨으로 바뀌게 된다. 박노자는 그러다가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황인종 연대론이 "소신 친일"하게 된 윤치호의 이념적 근거가 됐다고 봤다.[104] 윤치호는 1896년 민영환의 사절단의 통역원으로 러시아 방문 당시 러시아의 군사력이 우월한 것을 목격한바 있었다. 그는 일본이 러시아를 꺾은 것을 보고 황인종이 백인종을 이길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황인종도 백인종을 이길수 있다는 사례를 제시했다고 평가했다.

중국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자세를 보였다. 이를 박노자는 '중국 멸시론'이라 규정하고 '시간이 갈수록 그의 이러한 중국 멸시론은 심해지기만 했다.'고 평가했다.[109] 그에 의하면 중국인을 묘사하기를, 그는 "청결과 정직에 있어서 중국인을 믿는 것보다는, 천문학지질학에 있어서 돼지를 믿겠다.[110]", "입만 벌이면 개똥과 같은 더러운 냄새가 나고, 이빨을 닦지 않고 허풍떨고 떠들어대는 것만 좋아하고 게으르고 무의미한 고전이나 시가(浮文)만 잘 읽는" 중국인들이라며 부정적으로 평가하며, 반감을 표했다.[109] 그리고 조선이 중국의 속국에서 벗어날수 있는 방법은 기독교와 민권사상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내다봤다.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

일제 강점기 내내 그는 친일파들이 말하는 일제의 혜택론을 반박하였다. 그에 의하면 '조선에 충만한 것은 천황의 은혜가 아니라[111], 천황의 악의이다.[107]'라고 단언하였다. 일본 천황의 은혜가 아니라

일본의 덕에 조선이 개화가 되었다는 주장을 반박하였으며 1938년 수양동우회흥업구락부 사건, 청구구락부 사건으로 궁지에 몰리기 전까지 그는 공공연히 일본이 조선을 위해 일한 것이 없다, 일제가 조선을 합병한 이후 조선을 위해서 해준 것이 무엇이냐는 항변을 했다. 윤치호에 의하면 한국의 일부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원하지 않았는데도 일제가 무단으로 한국을 점령해서 통치한다, 따라서 이는 혜택이라 볼수 없다고 봤다. 그는 일제가 힘을 앞세워 조선을 강제로 병합해놓고 조선인들에게 동화를 강요하고 있으며, 사회경제적으로 수탈과 차별을 실행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111] 억지로 한국을 합병해놓고 식민 통치를 찬양하게 해 놓고 이것을 은혜라고 주장하는 것은 한마디로 억지라는 것이다.

특히 토지강탈정책과 조세정책을 중심으로 한 일제의 경제 정책과, 모든 부문에서 관행처럼 이루어지고 있던 민족차별정책에 대해 몹시 분개하고 있었다.[111]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비판

무단통치기에 이어 문화통치기 시절 조선총독부는 한국인들에게 일본의 식민통치로 조선에 문명이 이식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조선총독부 설치 이후 설치된 각종 도로, 철도, 항구, 공장 산업 등을 예로 들었다. 그러나 윤치호는 일제가 조선을 문명화시킨 것은 일본을 위한 일이지 조선을 위한 일이 아니라고 했다.

윤치호는 일제가 자본과 기술을 투자해 조선을 개발, 곧 근대화시키는 것이 조선과 조선인들보다는 일제와 일본인들에게 더 득이 된다는 사실을 정확히 깨닭고 있었다.[107] 그는 일본인들이 철도 및 도로의 확장, 관개사업 및 조림사업의 진전 등을 자랑삼아 자기들이 조선에 은혜를 베풀고 있다고 선전하는 것에 대해, '당장 그 모든 시설이 파괴되고 제거되면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에 비해 적어도 100배 이상의 (경제적) 손해를 볼 것'이라고 반박했다.[107]

윤치호에 의하면 일제가 한국에 철도를 놓고, 도로를 놓고, 항구를 개척한 것은 일본을 위한 일이지 한국을 위한 일이 아니라고 했다. 일본이 조선의 공물과 곡식과 조선 땅에서 나오는 자원을 일본으로 약탈, 공출해가기 위한 것이지 조선인을 위해서 설치한 것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그는 일제의 통치에 의한 조선의 발전이란 것이 사실은 '일본의, 일본에 의한, 일본을 위한 발전'일 뿐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107] 그에 따라 1938년경까지 일제가 한국에 문명화와 선진화를 가져왔다는 주장은 터무늬없는 주장, 일본을 위한 것이라며 일본과 친일파의 주장을 일축했다.

애국심에 대한 관점

1923년 칙어실천회는 애국심 고취를 목적으로 메이지 천황노기 마레스케를 추모하는 전국적인 추모제를 기획했다. 그러나 윤치호는 억지로 강요하는 애국심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라고 평가했다. 칙어실천회가 전국 각지에서 메이지 천황 칙어실천회는 감수성이 예민한 조선 청년들에게 충성심과 애국심을 고취한다는 취지로 조선 각지에서 이 환등회를 거행하고 있다.[62] '이 프로그램은 일본인들에게는 유용할 것이다. 하지만 조선인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62]'고 봤다.

억지로 강요하는 애국심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말살하는 비인간적인 강요라고 평가했다. 이는 그가 유교의 일방적인 충효예를 비판한 것과도 연결된다.

획일주의에 대한 비판

1940년 1월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는 창씨개명을 억지로 강요하지 않는다면서 창씨개명을 하면 감동적일 것이라며 은연중에 창씨개명을 할 것을 권고했다. 그의 권고가 있자 총독에게 아부하려는 이들은 창씨개명을 주변에 강요하고 다녔다. 윤치호는 이를 비판적으로 봤다.

그에 의하면 '조선의 모든 것을 일본화하도록 강요하는 이 열병이 꽤나 부질없고 어리석은 처사라고 생각한다[68] 다양성이야 말로 삶을 풍요롭게 하는 양념 같은 것이다. 일본이 열망하는 대제국은 당연히 다민족으로 구성되어야만 한다. 다민족 구성원들에게 모든 점에서 똑같아지라고 강요하는 건 불가능하고 어리석은 정책이랄 수 밖에 없다.[68]

그는 한 국가나 사회에 다양한 인종이 구성원으로서 살 수 있고, 그러한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며 그 다양한 인종이 법을 어기지 않는 범위 내에서는 자율성을 존중해주어야 된다, 다원화를 인정해야 된다고 판단했다.

파시즘에 대한 인식

그는 한때 이탈리아베니토 무솔리니를 위대하고 훌륭한 사람으로 여겨 존경했다.[72] 이유는 볼셰비즘으로부터 이탈리아를 구했고, 자기 나라를 당당한 유럽 강대국의 일원으로 만들었다[72]는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에 대해서는 비판을 가하였다. 히틀러에 대해서는 '망할 놈의 히틀러[72]', '염병할 히틀러[72]'라 하였으며, '히틀러가 가는 곳은 어김없이 지옥으로 변한다.[72]'며 그를 경멸하였다.

1940년대 이후 무솔리니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경멸로 바뀌게 된 것도 무솔리니가 히틀러를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무솔리니의 실패를 예견하며, '그는 자기 능력과 시간을 자기 나라의 내적인 번영과 동북 아프리카에 있는 식민지들의 평화적인 개발에 바쳤더라면, 이탈리아는 최근 20년 동안 유럽에서 강성하고 영예로운 열강이 되었을 것이다. [72]', '그러나 그는 이탈리아제국주의 국가로 만들려는 흉악한 야망에 이끌려, 몬테니그로와 알바니아 같은 약소국들을 집어삼키는 약탈행위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 모든 건 이탈리아를 부강하게 만들지 못하고, 오히려 부채와 불행만을 안겨다 주었다.[72]'며 아쉬워했다.

그는 덧붙여 '내 생각에 그는 자기 보호의 필요성 때문에 기꺼이 염병할 히틀러 의 노예가 되었고, 결국 이탈리아의 경제적 파산과 군사적 제약을 야기했다.[72]'는 평도 남겼다.

공산, 사회주의에 대한 부정적 인식

윤치호는 공산주의한국 본격적으로 국내에 소개될 무렵에 공산·사회주의 사상을 접하였다. 그러나 그는 공산주의를 이룰수 없는 사상으로 간주함과 동시에 공산주의사회주의를 강하게 혐오하였다. 1943년 9월의 한 일기에서 그는 무솔리니를 한때 존경했던 이유 역시 볼셰비즘(공산주의)의 창궐을 막았기 때문[72]이라 할 정도였다. 그는 공산주의를 약탈로 간주했다.

윤치호는 공산주의·사회주의유교를 모두 부정적으로 간주하였다. "유교는 구걸하는 것을 '용서할 만한 약점'으로 만들지만, 조선 버전의 볼셰비즘은 강도짓을 하는 것을 '무산자의 영광'으로 만들기 때문[112]"이라는 것이다. 공산주의사회주의의 문제점으로 의존적인 것과 일방적인 평등, 분배를 지적했고 한국인의 의존적인 성향[113]과 결합하여 부정적인 효과를 낼 것이라고 내다봤다.

윤치호는 공산주의사회주의 사상이 한반도에 확산, 유행하는 이유를 일제에서 찾지 않고 다른사람에게 의존하기 좋아하고, 공짜를 좋아하는 한국인의 기생주의 습성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윤치호는 일제 강점기 조선볼셰비즘이 유행, 창궐하는 이유는 기생주의라는 한국인의 습성 외에 일본의 정책이 조선 사람에게서 먹고 살 수단을 빼앗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보았다.[112] 그는 대중이 사실상의 기아 상태, 그리고 기아에 대한 공포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한, 볼셰비즘은 뿌리뽑히지 않을[112]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여성주의에 대한 비판

그는 유교의 가부장적인 질서를 비판했고, 남녀차별을 비인간적인 것으로 규정했으면서도 1920년대 도입되기 시작한 여성주의는 상당히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윤치호는 공산주의자이자 여성주의자였던 허정숙을 평하기를 '그(허헌)의 전처 소생(허정숙)은 그에게 골칫거리만 안겨주는 존재라는게 입증되었다[114]'고 비판하였다.

허정숙은 남편인 임원근(林元根)이 조선공산당사건으로 구속중이었을 때, 또다른 공산주의자인 송봉우(宋奉瑀)와 동거하는 등 자유분방한 남성 편력을 선보였을 뿐 아니라, 서대문형무소에 본인이 복역 중에 출산을 위해 한때 가출옥했다가 다시 투옥되어 많은 화제를 뿌렸다.[114] 윤치호는 이를 질타하며 그가 허헌을 속썩이고 있다고 비토했다. 동시에 여성 해방을 주장하며 자유연애를 하는 여성들 역시 가정을 파괴하고 타락을 부추기는 존재라고 봤다.

지역감정에 대한 비판

한국인 독립운동가들 간의 지역감정 역시 독립운동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갖게 하였다.[92] 일제 강점기독립운동 지도자들 간에도 지역간의 갈등이 있었다. 윤치호 일기에 1933년 10월 4일자 내용에 따르면, "안창호는 윤치호에게 ‘일본인들은 최근의 적이지만 기호파는 500년간의 적이기에 먼저 기호파를 박멸하고 독립해야 한다’고 했다.[115] 그러자 여운형,신흥우 등도 독립지사들과 함께 윤치호를 찾아가 서북파의 음모를 분쇄하기 위한 기호파 비밀결사를 제안하였다고 한다.[115] 윤치호는 이를 자신의 일기에 기록으로 남겼고, 윤치호는 '안창호신흥우,여운형등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지역감정을 놓고, '지역감정 하나로만 봐도 한국일본으로부터 독립할 자격이 없다'고 비난했다.[115] 그러나, 안창호1932년 5월에 중국 상하이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고 징역 4년형 선고받아 대전형무소에서 복역상태였기 때문에 안창호나 여운형등이 윤치호에게 찾아가 그런 제안을 했다는것에 대해서는 앞뒤 정황이 맞지않고 시기가 불분명하다는 반론이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다.

윤치호는 1929년 3월 12일 셋째 딸의 결혼 이후[92] 그는 자신이 지역감정의 희생물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내 딸 문희의 결혼식이 있었다. 이 결혼이 서울 명문가에서 평양 출신을 사위로 맞는 첫번째 사례이므로, 난 조롱과 비난의 표적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현명했다는 것을 시간이 증명해줄 것이다.[116]" 당시 지역감정은 극심했고 충청남도 출신으로 기호 계열인 그가 서북 출신의 사위를 맞이하는 것을 두고 사람들의 이야깃거리로 회자화되기도 했다. 그는 서북출신인 사위를 두고“내 평양사위가 성공을 입증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고 서북파의 거두인 이광수와 허심탄회한 교분을 형성하기도 했다.[92] 그러나 대학교수 겸 역사학자 황병주는 그의 논쟁은 지역감정의 밖을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으로 휘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92]는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청년 지원

윤치호는 교육을 통해 무지한 사람을 깨우치는 것이 사회 발전의 첫걸음이라 진단했다. 사회활동과 계몽운동 외에도 윤치호는 기독교 신앙·선교활동에 적극적이었고, 불우한 청년들에게 비밀리에 학비를 대거나, 유학비용을 부담해주거나 장학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음악가 홍난파 역시 그가 후원하던 학생들 중의 한명이었다. 홍난파는 그의 형 홍석후를 통해 알게되었다.[117] 홍난파는 그에게 계속 후원을 받았는데, 하루는 그에게 바이올린을 살 비용을 달라고 하였으나 거절하였다. 윤치호는 '남에게서 돈을 받아 공부하면서 생활비 전액을 대달라고 하는 것이나, 고학생이 250원짜리 바이올린을 갖고 싶어한다는 건 도저히 말도 안 되는 발상'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자 홍난파는 그에게 구두쇠의 죄악에 대한 설교를 하며 볼셰비키들과 공산주의자들이 정당한 약탈자들이라고 강변하고 부자들이 혼자서 자기 재산을 누릴 수 없는 때가 곧 올 거라고 주장했다. 분개한 윤치호는 홍난파를 가리켜 '조선 청년들의 수준과 은혜에 보답하는 그들의 마음이 어떤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녀석'이라고 혹평하였다.[117]

홍영후(洪永厚 · 난파)의 편지를 읽고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작년 1~2월쯤 도쿄에 가서 음악공부를 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그가 간청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100원을 주었다. 9월 언제쯤인가 또 다시 수표로 100원을 주었다. 나중에 50원을 더 주어서, 유학비용으로 모두 250원을 대주었다. 한 달 전 그가 다시 편지를 보내와 바이올린을 사게 250원을 보내달라고 청했다. 공부하는 중에 250원짜리 바이올린을 사는 건 내 아들이나 동생이라도 절대 승낙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부탁을 들어줄 수 없다고 답장을 썼다.

남에게서 돈을 받아 공부하면서 생활비 전액을 대달라고 하는 것이나, 고학생이 250원짜리 바이올린을 갖고 싶어한다는 건 도저히 말도 안 되는 발상이었다. 그런데 오늘 배달된 편지에서, 그는 구두쇠의 죄악에 대해 내게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그는 조선의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자기 재능을 계발할 만한 아무런 수단이 없는 조선의 천재들과 영웅들의 운명을 비관했다. 그는 볼셰비키들과 공산주의자들이 정당한 약탈자들이라고 강변하고 부자들이 혼자서 자기 재산을 누릴 수 없는 때가 곧 올 거라고 협박까지 했다. 조선 청년들의 수준과 은혜에 보답하는 그들의 마음이 어떤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녀석이었다.[117]

윤치호는 실력양성이라는 그 자신의 신념 때문이었는지 자선사업 목적에서였는지는 불확실하나, 여러 고학생과 유학생들을 후원하거나 꾸준히 장학금을 지원해 주었다. 그러나 윤치호는 뒤에 자신이 지원한 학생들에게 빚을 갚으라는 요구는 하지 않았다.

신념

  •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마라
  • 땅을 팔아 독립운동에 자금을 대주는 것보다 일본인 손에 땅이 넘어가지 않도록 땅을 사들이는 것이 애국이다.

학위

가족 관계

윤취동
(尹取東)
1798~1863
전주이씨
(全州李氏)
1844~1936
반계 윤웅렬
(磻溪尹雄烈)
1840~1911
김정순
(金貞淳)
1879~1959
연구 윤영렬
(蓮龜尹英烈)
1854~1939
윤영렬 가계도
한진숙
(韓鎭淑)
1851~1938
윤씨
(尹氏)
1835~1920
친 누이동생 (花峴妹)

좌옹 윤치호
(佐翁尹致昊)
1865~1945
남포 윤치왕
(南圃尹致旺)
1895~1982
윤치창
(尹致昌)
1899~1973
손진실
(孫眞實)
홍정욱 가계도 참조


이복 동생 윤치왕. 그는 의학자, 군의관이었다.
아들 윤영선

평가와 비판

평가

서재필 때문에 빛이 가려졌지만 윤치호 또한 당대 최고의 연설가였다. 서재필이 청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로 힘이 넘치고 주장이 명확한 연설로 유명하다면, 윤치호는 특유의 온화함과 차분함으로 상대방을 논리적으로 설득시켜 감화시키는 연설이 특징이었다.[19] YMCA 청년회를 지켰다는 시각도 있다. 갈수록 심해지는 일제의 탄압속에서 서울YMCA를 지켜낸 지도자로 평가받고 있다.[52]

근대사회의 보기 드문 합리주의자라는 평가가 있다. 냉철한 평가를 내렸던 그는 민중에 대하여 비판적이면서도 "한국인들은 일반적으로 10%의 이성과 90%의 감성을 가지고 있다.[58]"고 하여 한국인의 민족성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일제의 통치정책에 큰 불만을 갖고 있으면서도 모든 유형의 독립운동을 반대하고 실력양성운동, 민족성 개조운동을 중시했던 윤치호는 안창호, 이광수 등과 사상적 맥락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58]'는 시각도 있다.

대학교수 겸 언론인 강준만은 한국근대사산책 3권 에서 그가 수구반동세력에게 타협하였지만 뒤에도 계속 독립, 계몽운동에 투신한 것에 대해 "윤치호가 현실에 굴복해 변절했을망정, 그에게 국가·사회를 생각하는 그런 정신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라고 평가하였다.[127] 그에 의하면 "그래서 윤치호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즉시 관직을 버리고 애국계몽운동에 뛰어들었다는 것이다.[127] 그러나 그는 독립협회 실패 이후로 민중의 우매함이 개혁, 계몽의 실패의 원인으로 봤고 이후 독립운동에도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다.

대학교수이자 역사학자인 이주영은 그를 이승만과 함께 지난 1세기 동안 한국의 역사에서 개신교문명 개화의 연결 고리가 가장 확실하게 드러난 대표적 인물로 평가하기도 했다.[128] 이주영은 윤치호에 대해서 “서구 문명을 여러 차례 접하면서 문명사회는 곧 민주사회기독교 사회라는 점을 알게 됐고, 한국주권을 잃자 기독교 교육을 통한 개인의 경제적·정신적 ‘주체 없는 문명화’의 파멸이었다. 자립을 운동의 방향으로 설정했다”고 평했다.[128] 이주영 교수는 '윤치호가 오늘날에 살았더라면 대통령이 되었을 큰 인물이었다.[103]'라고도 평가하였다.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 한국사교수 겸 평론가 박노자는 그를 쉽게 비판하기는 어렵다고 봤다[1] 애국가의 작사자로 알려졌고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돼 감방에서 6년이나 살았던 ‘민족주의자’ 윤치호의 행보는 희한하게도 친일로 수렴하게 된다.[1] 박노자에 의하면 '그는 선진적인 일본의 틀 안에서 한국인이 힘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했고, 1931년 중일전쟁이 일어난 뒤로는 노골적인 친일인사가 된다. 그럼에도 그를 ‘친일파’라는 밋밋한 단어만으로 비난할 수 없는 이유는 최초의 근대인 또는 최초의 세계인이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 때문[1]'이라는 것이다.

독일 라이덴 대학의 교수 군테 괴스테를은 60여년넘게 쓴 영문일기를 토대로 박사학위 받은 학자였다.[81] 그는 윤치호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군테 괴스테를1995년 대한민국 광복회 주관으로 한 '윤치호 친일 협력에 대한 재평가 라는 주제의 강연에서 “한국의 지정학적 조건때문에 좌옹이 자기 민족에게 오해를 받고 있어요. 흑백논리가 강한 나라니까요. 일본이나 미국 어디에서나 좌옹 선생을 민족주의 애국자라고 말 하는데 그를 친일파라고 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습니다[81]” 라고 평가하였다.

그는 독실한 감리교인 이기도 했다.[81] 그의 천재성을 높이 평가하는 시각도 있다. 17세에 어윤중을 수행하여 일본에 갔다가 중등 교육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1884년부터 상하이중서서원(中西書院)에서 3년 6개월, 1888년부터 미국 밴더빌트 대학과 에모리 대학에서 5년간 대학 교육을 받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그 시대에 윤치호와 어깨를 겨룰 만한 인물로는 서재필유길준 정도 밖에 없었다.[25]는 평가도 있다.

비판

나약한 지식인이라는 비판이 있다. 그밖에‘주체 없는 문명화’의 파멸이었다.[21]는 비판도 있다. 정운현은 결론적으로 말해 그는 조선(한국)의 잠재역량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한데다 식민지라는 ‘상황논리’에 빠진 나머지 결국 일제와 타협하고 말았다. 그의 친일은 갑작스런 변신이 아니라 해외유학 경험을 통한 자기확신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의 친일행적보다도 친일논리에 눈길이 쏠리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라고 평가했다.[11]

후일 정운현은 그가 '지식인으로서의 ‘반성’은 차치하고 기독교인으로서의 ‘참회’ 한마디도 없다. 명색이 독립협회 회장과 <독립신문> 사장을 지낸 그가 해방 후 남긴 ‘자기고백’은 겨우 이런 모습이다. ‘일본의 스코틀랜드화(化)’가 조선이 살 길이라며 일제의 ‘우호적인 식민통치’를 기대했던 그의 나약한 역사관이 결국 그를 친일의 길로 안내하고 만 것이다.[11]'라는 비판을 남기기도 했다.

윤치호와 서재필의 비교

서재필이 배재학당의 젊은 학생들과 애국적인 시민을 독립협회로 모으는 데 기여했다면 윤치호는 자신의 인맥을 활용하여 양심적인 중견 관료들과 개혁적인 젊은 관료들을 하나로 묶어 독립협회의 내적 통합에 기여했다.[25] 윤치호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온화한 성품을 바탕으로 성실하게 소임을 해내는 인물이었다.[25]

윤치호는 1884년 갑신정변의 정국에서 서재필과 달리 점진 노선을[25]택해 살아남을 수 있었고, 가족 또한 안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잠재적인 신변의 위협 때문에 결국 유학이란 명분으로 망명객이 되어 십년 이상 외국을 떠돌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서재필과 크게 차이는 없었다. [19]

서재필미국에서 혈혈단신으로 고투하였던데 반해[19], 윤치호는 상하이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후 미국에서도 교회기독교청년회를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쳐왔기 때문에 연설의 경험을 풍부하게 축적할 수 있었다. 작은 일까지 매일 기록하는 꼼꼼한 성격과 겸손하며 성찰적인 태도 덕분에 남의 장점을 수용하여 늘 나아가고자 노력한 윤치호의 연설에는 언제나 깊이가 있었다. 서재필미국 망명 후 기독교인이 되었지만, 기독교 신앙 자체와 그 세속화된 형태의 미국의 시민종교(공화주의민주주의)를 구분할 수 있었다. 자신의 은인 홀렌백이 '선교사가 된다면 대학교 학비를 대겠다'는 요청을 뿌리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스스로 기독교인임을 잊지는 않았지만 기독교 그 자체가 사회운동을 대체할 수 있다고는 믿지 않았기에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때로는 과하다고 할 정도로) 미국식 사유와 생활 방식을 조선에 이식하여 그 근본적인 급진성을 통해 사회운동을 일으키려고 한 것이다.[129]

반면에 윤치호는 기독교 개종 이후 삶의 중심을 언제나 신앙에 두었다. 개종의 동기는 개인적 차원이었지만 개종과 동시에 민족적 차원에서 기독교와 조선을 언제나 결부시켰다. 조선 문화에 깊게 뿌리박은 가족주의적 습속을 돌파하지 않고는 개혁이 불가능하고, 그 낡은 구질서를 깨뜨리기 위해 조선의 사회에 예수의 가르침을 설파할 책무를 수행하고자 했다. 그러나 종교와 민족을 하나로 놓고 사유하는 윤치호의 선지자적 태도는 독립협회 회원 및 참여 민중 대부분에 파고들 여지가 없었다.[129]

저서 및 번역서

소설 걸리버 여행기. 윤치호는 걸리버 여행기를 한국에 처음 번역하여 소개하였다.
이솝, 이솝 우화의 한글번역본을 윤치호가 최초로 조선에 소개했다.

저서

  • 《윤치호일기》(尹致昊日記)
  • 《우스운 소리》
  • 《영어문법첩경》(英語文法捷徑, 영어 문법 사전)
  • 《좌옹 윤치호 서한집》(佐翁尹致昊書翰集)
  • 《유학자취》 (幼學字聚)

역서

번역서로는 이솝 우화의 첫 한글번역판과 걸리버 여행기를 한글로 번역하여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또한 찬송가의 한글 번역본인 찬미가를 소개하기도 했다.

윤치호를 연기한 배우들

드라마

영화

같이 보기

참고자료

관련 서적

  • 이윤섭, 《다시 쓰는 한국근대사-세계사 속에서 바라본 한국 근대사의 진실》 (평단문화사, 2009)
  • 반민족문제연구소, 《친일파 99인 1》 (돌베개, 1993)
  • 국사편찬위원회 편, 《좌옹 윤치호 서한집》 (국사편찬위원회 편, 1995)
  • 최종고, 《인물과 전기》 (한들출판사, 2002)
  • 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윤치호 지음, 김상태 역, 역사비평사, 2007)
  • 강준만, 《한국 대중매체사》 (인물과사상사, 2007)
  • 좌옹윤치호문화사업회, 《윤치호의 생애와 사상(윤치호선집 1)》 (좌옹윤치호 외편, 을유문화사, 1998)
  • 김영희, 《좌옹 윤치호 선생 약전(윤치호선집 2)》 (김영희, 좌옹윤치호문화사업위원회, 1999)
  • 김상근, 《기독교의 역사》 (김상근 지음, 평단문화사, 2008)
  • 김상태, 《윤치호 일기》 (역사비평사, 2001)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 사상사, 2006)
  • 김상근,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기독교 역사》(김상근 지음, 평단문화사, 2006)
  • 유동식, 《풍류도와 한국의 종교사상》 (연세대학교출판부, 2009)
  • 양현혜, 《윤치호와 김교신-근대 조선의 민족적 아이덴티티와 기독교》 (한울, 2009)
  • 윤진헌, 《한국 독립운동사 (상)》 (한국학술정보, 2008)
  • 박명수, 《한국 교회사의 감동적인 이야기》 (국민일보, 2006)
  • 박노자, 《나는 폭력의 세기를 고발한다》 (인물과사상사 펴냄, 2005)
  • 박노자·허동현, 《우리 역사 최전선》 (푸른역사, 2003)
  • 신소섭, 《한국교회음악사》 (아가페문화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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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영익, 《갑요경장 연구》(일조각,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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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3:아관파천에서 하와이 이민까지》 (인물과사상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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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치호, 《윤치호 일기 1(국역)》 (송병기 역, 연세대학교출판부, 2001)
  • 윤치호, 《윤치호 일기 2(국역)》 (박정신 역, 연세대학교출판부, 2003)
  • 허경진, 정명기, 유춘동 외, 《윤치호의 우순소리 연구》 (보고사 펴냄, 2010)
  • 조성기, 《좌옹의 길》 (뿔(웅진문학에디션), 2010)
  • 이한, 《새로운 세상을 꿈꾼 사람들-조선 서얼의 꿈과 좌절 성공과 실패》 (청아출판사 펴냄, 2010)
  • 박지향, 《윤치호의 협력일기:어느 친일 지식인의 독백》 (도서출판 이숲, 2010)
  • 황호덕, 《근대 네이션과 그 표상들》(소명출판, 2005)
  • 문옥배, 《한국찬송가100년사:해설,역사》 (예솔출판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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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광수, 《이광수 전집 제17권》 (삼중당, 1962)
  • 연세대학교 박물관, 《윤웅렬·이씨부인·윤치호 유품:윤영선 기증》 (연세대학교박물관, 1976)
  • 국사편찬위원회 편, 《윤치호 일기》, (국사편찬위원회, 1973∼76)
  • 송병기, 《국역 윤치호 일기》(상·하), (탐구당, 1975)
  • 김영의, 《좌옹윤치호선생약전 (기독교조선감리회총리원, 1934)
  • 윤해동, 《식민지의 회색지대》 (역사비평사, 2003)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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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윤흔의 아들 부사직 윤취지(尹就之)의 5대손이었다.
  3. 윤치호와 유길준 프레시안 2003년2월 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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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윤치호, 윤치호일기 1884년 10월 18일자(양력 12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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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대세순응주의 빠진 나약한 지식인의 말로 - 오마이뉴스 2004.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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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전파토론 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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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http://worldanew.net/sub_read.html?uid=56&section=sc3&section2=
  16. 윤치호, 윤치호일기 1888년 12월 29일자
  17. 개화파 윤치호가 영문일기를 쓴 까닭은? 동아일보 2003-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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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이규태 역사에세이) 독일여성 손탁 이야기 조선일보 1999년 04월 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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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인물과사상>> 2003년 1월호(인물과사상사, 2003) 126페이지
  31. 윤치호 일기 제4권(국사편찬위원회편, 1975) 339-341
  32. 이황직, 《독립협회 토론 공화국을 꿈꾸다》 (프로네시스(웅진), 2007) 91페이지
  33. 이황직, 《독립협회 토론 공화국을 꿈꾸다》 (프로네시스(웅진), 2007) 92페이지
  34. 그러나 황국협회와 척신들의 사주를 받은 자들은 그가 황제를 부정했다는 거짓말을 날조하여 유포했고, 윤치호는 결국 임금의 눈밖에 나게 된다.
  35. 조성기, 《유일한 평전》 (작은씨앗, 2005) 58페이지
  36. 서재필은 미국시민권자라서 대한제국 조정이 그를 살해할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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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 http://db.history.go.kr/front/srchservice/srcFrameSet.jsp?pSearchWord=LCJPOHFKMMGA&pSearchWordList=LCJPOHFKMMGA&pSetID=-1&pTotalCount=0&pSearchType=1&pMainSearchType=2&pQuery=GGKIGGKPGGJAGGIOLCJPOHFKMMGAGGIP&pSearchClassName=&oid=&url=&method=&lang=&code=&searchword=&return=
  42. http://db.history.go.kr/front/srchservice/srcFrameSet.jsp?pSearchWord=LCJPOHFKMMGA&pSearchWordList=LCJPOHFKMMGA&pSetID=-1&pTotalCount=0&pSearchType=1&pMainSearchType=2&pQuery=GGKIGGKPGGJAGGIOLCJPOHFKMMGAGGIP&pSearchClassName=&oid=&url=&method=&lang=&code=&searchword=&return=
  43.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3》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7) 254페이지
  44. [한겨레 21] 국제결혼은 애국심을 죽이는가 한겨레 제524호(2004.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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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 박형우, 《금파 홍석후》 (연세대학교출판부, 2008) 65페이지
  47. 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 대한 광무 9년 양력 12월 1일자 5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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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 애국가 작사자, 과연 누구인가? 공감코리아 2005.11.29
  50. 그에게 부여된 대한제국의 품계인 정2품 자헌대부의 계급을 사퇴했다. 계급만 있고 직책은 없는 관리를 조선에서는 산관이라 하여 관리로 인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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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 임용한, 《난세에 길을 찾다》 (시공출판사, 2009) 309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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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136~137p
  57. 이상재 역시 3.1 운동에 서명하기를 거부했고 이는 사회주의세력이 기독교를 공격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58. <서평> 윤치호 일기 문화일보 2001년 2월 21일자
  59.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20:우리 힘으로 나라를 찾겠다》 (이이화, 한길사, 2006) 290페이지
  60. 한국외교사와 국제정치학(하영선 외 지음, 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 2005) 128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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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 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윤치호 지음, 김상태 역, 역사비평사, 2001) 241페이지
  63. 부귀면 … '친일거두' 비석 기증 진안신문 2009년 07월 06일
  64.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 친일파 윤치호 불망비 철거 대한뉴스 2009년 07월 29일
  65. 윤치호, 《윤치호일기:1916~1943》 (김상태 편역, 역사비평사, 2001) 29페이지
  66. ② 송병준 매국 대가 1억5천만엔 요구:윤치호, 조선총독부 설득 수용 친일 변신 승낙 조선일보 2004.08.12
  67. 양현혜, 《빛과 소망의 숨결을 찾아》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7) 104페이지
  68. 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김상태 역, 역사비평사, 2001) 452페이지
  69. 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김상태 역, 역사비평사, 2001) 461페이지
  70. 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김상태 역, 역사비평사, 2001) 463페이지
  71. 동아일보 1940년 7월 16일자
  72. 윤치호, 《윤치호일기》 (1916~1943) (김상태 역, 역사비평사, 2001) 499페이지
  73. 편집부 지음, 《이이화와 함께 한국사를 횡단하라》(한길사, 2004) 328페이지
  74. Çѱ¹ ÃÖ°íÀÇ ½ºÆ÷Ã÷ ¿£ÅÍÅ×ÀθÕÆ® Àü¹® ¹Ìµð¾î OSEN
  75. 건국동맹 등 지하단체의 존재를 어렴풋이 인식하고 있었다. 당시 건국동맹 등의 단체는 비밀리에 움직여 활동하고 있었다.
  76. 한민당에는 윤치호의 사촌동생 윤치영, 5촌 조카 윤보선이 조직에 참여, 몸담고 있었다.
  77.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 (인물과사상사, 2004) 137~138쪽.
  78.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 (인물과사상사, 2004) 138쪽.
  79.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 (인물과사상사, 2004) 139쪽.
  80. 공임순, 식민지의 적자들 (푸른역사, 2005) 346페이지
  81. 애국가 작사자 / 이종혁 칼럼 한국일보 2009년 12월 22일자
  82. "친일파 윤치호 동상 철거하라" '평화와 참여로 가는 인천연대', 성명서 발표 - 오마이뉴스 2002년 3월 7일자 기사
  83. 조호진. “민노당 연대 학생위, 학내 친일인사 7명 명단 발표”. 오마이뉴스. 2008년 4월 11일에 확인함. 
  84. 이승규. “감리회, 교단 내 친일인사와 독립운동가 명단 발표 - 광복 60주년 기념 예배자료집 발간…친일인사 선정 근거 없고, 교단 차원 친일은 빠져”. 뉴스앤조이. 2008년 1월 4일에 확인함. 
  85. 윤치호가 미국에서~: 이이화, 《한국사이야기22. 빼앗긴 들에 부는 근대화바람》(한길사, 2004) 49쪽.
  86. 유학자취
  87. 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윤치호, 김상태 편 번역, 역사비평사, 2007)585페이지
  88. (춤과 그들) 정무연 ‘춤추는 제비’의 고독한 날개짓 경향신문 2007년 12월 06일자
  89.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20:우리 힘으로 나라를 찾겠다 (한길사, 2004) 135페이지
  90. 한일합방 이후에도 그는 공,사석에서 이완용을 만나도 멀리하거나 대화를 피하였다.
  91. (사람들) 배화학원 내일 창립 100주년 기념식 조선일보 1998년 10월 1일자
  92. “비열한 서북, 신사적 기호” 지역을 선악구도로 본 윤치호 한겨레신문 2004년 4월 12일자
  93. 윤영선제1공화국에서 농림부 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94. http://www.ilyosisa.co.kr/ILYO-1/214/news/special/2141502.html
  95. 단재 한시·'항일가사집' 첫 공개 조선일보 2006.02.27
  96. 애국가에 대한 소고 미디어제주 2008년 08월 28일자
  97. 전택부, 《한국 기독교청년회 운동사》 (정음사, 1978) 359쪽
  98. 문옥배, 《한국찬송가100년사:해설,역사》 (예솔출판사, 2002) 530쪽
  99. 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역사비평사, 2001) 196페이지
  100. 윤치호일기 1919년 1월 23일자
  101. 상갓집의 개, 권력에 빌붙어 한자리를 바라는 것을 비유로 이르는 말
  102. 윤치호, 윤치호일기 1897년 7월 4일자
  103. 잊혀진 큰 지도자, 이주영
  104. 열강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기(박노자 외 지음 | 푸른역사, 2005) 63페이니
  105. 1896년 1월 23일자 워렌 캔들러에게 쓴 서신
  106. 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김상태 편 번역 | 역사비평사 | 2001) 133페이지
  107. 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윤치호 지음, 김상태 역, 역사비평사, 2001) 35페이지
  108.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40205140753&Section=04
  109. 박노자 외, 《열강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기》 (박노자 외 지음, 푸른역사, 2005) 168~169페이지
  110. 윤치호, 윤치호일기 1884년 7월 14일자
  111. 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윤치호 지음, 김상태 역, 역사비평사, 2001) 34페이지
  112. 윤치호, 《좌옹윤치호 서한집》 (국사편찬위원회 편, 1995) 143페이지
  113. 그의 표현에 의하면 기생주의
  114. 윤치호, 《윤치호 일기 (1916-1943)》 (김상태 편 번역, 역사비평사, 2001) 608페이지
  115. <윤치호 일기>, 1933년 10월 4일
  116. 멈춰서 돌아본 한국 근대 자화상 조선일보 1998년 11월 11일자
  117. 홍난파 바로 알기(52) 화성오산신문 2010년 2월 27일자
  118. 1895년 2월 10일생 설, 1895년 2월 17일생 설(해평윤씨대동보 권삼, 1983, 611쪽)등이 언급되고 있다. 제적등본과 육군본부의 「장교자력표」에는 1895년 2월 16일생으로 되어 있다.
  119. 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윤치호 지음, 김상태 역, 역사비평사, 2001) 636페이지
  120. 서울대학교 음대 제1회 졸업생
  121. http://www.chosun.com/w21data/html/news/200312/200312190017.html
  122. 미국 캘리포니아 LA 에서 사망
  123. 민중신학자 이화여대 현영학 교수 별세 :: 종교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Christian Today
  124. 민중신학 개척 현영학씨 별세- 중앙일보 뉴스
  125. 교수신문
  126. 윤치호, 《윤치호 일기 (1916-1943)》 (김상태 편 번역, 역사비평사, 2001) 617페이지
  127.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3》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7) 255페이지
  128. 개신교, 근대화의 장애물이었나 촉진제였나 크리스천투데이 2008년 3월 27일자
  129. 이황직, 《독립협회 토론 공화국을 꿈꾸다》 (프로네시스(웅진), 2007) 101페이지

바깥 링크

전임
민영익
한성부 판윤
1898년 양력 11월 23일
한성부 판윤
1898년 12월 15일 ~ 1898년 12월 22일
후임
이채연

틀:조선인 일본 귀족원 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