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익: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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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아버지: [[민태호 (1834년)|민태호]](閔台鎬, [[1834년]] ~ [[1884년]])
* 양아버지: [[민승호]](閔升鎬, [[1830년]] ~ [[187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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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항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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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성황후]]
* [[민영환]]
* [[우정국]]
* [[갑신정변]]
* [[개화파]]
* [[박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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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광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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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영익을 연기한 배우 ==
== 민영익을 연기한 배우 ==

2011년 3월 26일 (토) 07:19 판

민영익

민영익(閔泳翊, 1860년~1914년, 상하이)은 조선 말기 민씨 외척 정권의 주요 인물이다. 자는 우홍(遇鴻), 호는 운미(雲楣) 또는 죽미(竹楣)·원정(園丁)·천심죽재(千尋竹齋)이며, 본관은 여흥이다. 경기도 출신

생애

고종 때인 1877년 문과 급제 후 동도서기적 개화 정책을 지지하면서 별기군의 운영 책임을 맡았다. 이조참의·경리통리기무아문군무사당상(1881년)·군무변정기연사당상(軍務邊情譏沿司堂上) 협판통리아문사무(協辦通理衙門事務)를 역임했다. 1882년 임오군란 때 민씨 척족의 거물로 지목되어 구식 군대의 공격으로 가옥이 파괴되었다. 난이 수습된 후 사죄사절로 일본에 다녀왔다.

권지 협판교섭통상사무로 톈진에 파견되어 해관사무를 교섭하다가 1883년 주한(駐韓) 미국 공사 푸트가 조선에 부임하자 보빙사의 정사 및 전권대신이 되어 사절단을 이끌고 미국을 방문하였다. 태평양을 건너고 샌프란시스코를 시작으로 미주 대륙을 횡단한 다음 뉴욕에서 체스터 아서 미국 대통령과 회동하고 국서를 전하였다. 보스턴 등 각지를 순회하고 유럽을 거쳐 귀국하였다.

파일:1883년조선주미보빙사절단01.jpg
1883년 9월 미국에 파견된 조선의 보빙사절단원(앞줄 왼쪽 두번째가 민영익, 앞줄 왼쪽 두번째는 홍영식, 뒷줄 가운데는 유길준)

중도 개화파의 후원자였으며, 1883년 보부상을 단속하는 혜상공국(惠商公局) 총판이 되기도 했다. 친일적 급진 개화파와 갈등이 생겨 1884년 김옥균 등 급진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감행할 때 가장 먼저 자객의 기습을 받아 중상을 입었으나 독일인 묄렌도르프에게 구출되어 미국인 의사 알렌에게 치료를 받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일본에 망명 중인 김옥균·서광범 등을 암살하기 위하여 자객을 밀파한 일도 있었다.

그 뒤 1885년 군국기무아문 협판, 병조 판서, 한성 판윤, 이조·형조·예조의 판서를 지냈으며, 1886년 조선 정부의 친러 거청(親露拒淸) 정책에 반대하여 위안스카이(원세개)에게 이를 밀보했다가 자신의 입장이 난처하여 홍콩으로 망명했다.

뒤에 귀국하여 1889년 판의금부사·1894년 선혜청 당상이 되었다. 대한제국 성립하자 1898년 의정부 찬정이 되었고, 1905년 을사조약이 성립하자 고종 폐위 음모에 관련되어 홍콩으로 망명, 상하이에서 죽었다.

그는 한때 오스트리아-헝가리 측의 권유로 주(駐)오스트리아-헝가리 대사로 일한 적도 있었다. 행서를 잘 썼으며 묵란도에도 능하였다.

가족 관계

관련 항목

민영익을 연기한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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