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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탄'''(韋誕)은 [[중국]] [[후한]] 말 ~ [[삼국 시대 (중국)|삼국 시대]]의 서예가로, [[자 (이름)|자]]는 '''중장'''(仲將)이며 사례(司隷) 경조윤(京兆尹)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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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적==
==행적==

2011년 3월 26일 (토) 01:04 판

위탄(韋誕)은 중국 후한 말 ~ 삼국 시대의 서예가로, 중장(仲將)이며 사례(司隷) 경조윤(京兆尹) 사람이다.

행적

건안(建安) 연간에 상계리(上計吏)를 지냈고, 특별히 낭중(郞中)에 올랐다. 태화(太和) 연간에는 무도태수(武都太守)[1]에 임명되었으나, 글에 능했으므로 부임하지 않고 조정에 남아서 시중(侍中)이 되었다. 이후 중서감(中書監)이 되었고, 광록대부(光祿大夫)가 되었다가 은퇴하여 75세에 죽었다.[2]

서예

한단순(邯鄲淳) · 위기(衛覬)와 함께 서예에 능해 이름을 날렸다. 위기의 손자 위항에 따르면, 전서는 한단순에게서 배웠으나 그에 미치지는 못했다. 초서에 대해서는 장백영(張伯英)[3]을 초성(草聖)이라 일컬었고, 또 강맹영(姜孟穎)[4] · 양공달(梁孔達)[5] · 전언화(田彦和)[6]와 함께 장백영에게 배워 당대에 명성이 있었으나, 장백영에 버금간다는 평가를 받은 아우 장문서(張文舒)[7]에는 미치지 못했다.[2]

친척 관계

  • 위단 (아버지)

주석

  1. 당시 무도군은 촉한(蜀漢)에게 빼앗긴 상태였다.
  2. 《문장서록》 (진수, 《삼국지》 권21 왕위이유부전에 주석으로 인용
  3. 백영은 자이고, 본명은 장지(張芝)이다.
  4. 맹영은 자이고, 본명은 강후(姜詡)이다.
  5. 공달은 자이고, 본명은 양선(梁宣)이다.
  6. 언화는 자인 것이 확실하나, 본명은 알려지지 않았다.
  7. 문서는 자이고, 본명은 장창(張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