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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타르 1세 (세르비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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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페르시다 네나도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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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타르 1세'''(Petar I Karađorđević)는 [[세르비아 왕국|세르비아]]의 국왕(재위 [[1903년]]~[[1918년]])이며 [[유고슬라비아 왕국|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의 왕(재위 [[1918년]]~[[1921년]])으로,이다. [[카라조르제비치]](Карађорђевић, Karađorđević) 가(家)에 속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알렉산다르 카라조르제비치]](Aleksandar Karađorđević, Александар Карађорђевић)인데 [[1842년]]부터 [[1858년]]까지 [[세르비아 공국|세르비아]]의 [[세르비아의 군주|공(公)]]을 지냈다출신이다.
 
전왕은 [[알렉산다르 1세 (세르비아)|알렉산다르 1세]]로써, 그는 극도로 보수반동적인 정치로 국민들의 원성이 높았다. 마침내 그는 [[드라구틴 드미트리예비치]] 육군대령에 의해서 왕비, 시종들과 함께 암살되었다. 그리고 카라조르제비치 가와는 원수지간이었던 [[오브레노비치]] 가문이 멸문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페타르 1세는 새로운 왕으로 즉위할 수 있게 되었다.
== 역사 ==
=== 알렉산다르 국왕 암살 사건 ===
[[1889년]]에 즉위한 [[알렉산다르 1세 (세르비아)|알렉산다르 1세]](Alexander Obrenović, Александар Обреновић)는 아버지인 [[밀란 4세]](Милан Обреновић, Milan Obrenović)가 퇴위한 후에 즉위한 사람이다. 밀란 1세는 퇴위 이후 [[1901년]]에 죽을 때까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인 [[빈]](Wien)에서 살았다. 밀란 1세는 진보적인 인사들과 쉽게 친했으며, 그들의 정책을 국가의 발전으로 생각하면서 받아들였다. 밀란 1세 자신이 진보적인 인사였다. 그리고 급진당이 [[1888년]]에 왕권을 그대로 두는 상태에서 입헌 군주제를 추진할 것을 건의하였는데, 밀란 왕은 그것을 곧바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가 퇴위한 이후 모든 것이 달라져버렸다.
 
그는 [[니콜라 파시치]]를 총리로 기용하여, 대세르비아주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세르비아의 대학생인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반오스트리아적인 정서를 이용하여 오스트리아 황태자를 사살하였으며(이른바 [[사라예보 사건]]),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하였다. 세르비아는 전승국이 되어, [[1918년]]에 이웃나라 [[몬테네그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를 합병하였다. 이후,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이 되었고, 페타르 1세는 새 왕국의 왕이 되었다. 그는 [[1921년]]에 서거했다. 그가 서거하고 나서,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바꿔어 [[1941년]]까지 존속했다.
알렉산다르 국왕은 그의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못했다고 한다. 아버지인 밀란 국왕 역시 돈을 많이 썼지만, 밀란의 경우는 [[나세르 앗딘 샤]]의 경우처럼 국가의 발전을 위해 투자했다. 알렉산다르는 그 반대였다.
 
알렉산다르는 많은 물의를 일으킨 인물이었다. 밀란 국왕은 알렉산다르에게 경고를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일부는 '알렉산다르 때문에 왕실의 체면이 구겨졌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라면 헌법을 파기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반동 정치뿐만이 아니었다. 경제력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어, 국민들은 더욱 가난해졌다. 기근으로 죽은 자도 많은데 정작 알렉산다르는 그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알렉산다르는 [[1903년]] [[6월]] 어느 날, [[육군]] [[대령]]인 [[드라구틴 드미트리예비치]]가 주도하는 쿠데타로 암살되었다. 오브레노비치 가문과 카라조르제비치 가문은 서로가 원수지간이었는데, 알렉산다르 왕의 죽음으로 인하여 카라조르제비치는 드디어 정권을 쥐게 된 것이다.
 
=== 페타르의 즉위와 국가적인 발전 ===
[[파일:BwII kratovo.jpg|thumb|right|[[1913년]]경의 세르비아군]]
 
친오스트리아적이고 반동정책으로 민중의 원망을 사던 알렉산다르 왕과는 달리 페타르는 진보적인 정치가와 민족주의자들을 등용하여 민족주의를 일으켰고, 의회 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하였다. 그리고 그는 세르비아를 자급자족적인 국가로 만들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였으며,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우방으로 삼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자신의 적국인 [[프랑스]]와 [[이탈리아 왕국|이탈리아]]가 세르비아와 동맹을 맺었다는 이유로 세르비아를 비난했다. 그러나, 페타르는 프랑스 군의 장교 생활을 한 경험이 있어서 강국에 대해서도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민족주의자 중 한 명인 [[니콜라 파시치]]를 등용하여 [[대세르비아주의]]의 제창을 도왔다. 니콜라 파시치는 '[[세르비아인]]이 생활하는 모든 지역을 통일하여 카라조르제비치 가문의 통치 아래에 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사상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 왕국|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으로 국명이 바뀌었을 때 실현되었으며, [[공산주의자]]인 [[요시프 브로즈 티토]] 정권도 그것을 계승했다. 유고슬라비아는 [[1992년]]에 와해되었지만 대세르비아주의는 세르비아인에게는 희망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페타르가 즉위한 이후, 세르비아는 경제력이 성장하였고 군사력도 증강되었다. [[세르비아 육군|육군]]이나 [[1912년]]에 창설된 [[세르비아 왕국 항공대|항공대]](Srpska Avijatika. [[1923년]]에 정식으로 [[유고슬라비아 왕국 공군|공군]]이 창설된다)나 프랑스제 무기를 사용하였다. 성격이 당당했던 그는 경제학과 정치학을 배웠으며 [[생시르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고, [[보불전쟁]]에서는 육군 중위로 복무하였다. 사병을 잘 지휘하였다는 사실이 프랑스군 당국에도 알려져 [[레지옹 도뇌르 훈장]]도 받았다. [[세르비아]]가 비록 적대적인 오브레노비치 가문이 통치하고 있다지만 애국심이 남달랐던 그는 세르비아의 독립을 지원했다. 그는 그 공로로 [[몬테네그로 왕국|몬테네그로]]의 상원의원도 지낸 경험도 가지고 있었다.
 
=== 전쟁 ===
 
==== 발칸 전쟁 ====
 
==== 제1차 세계대전 ====
 
=== 그 이후 ===
세르비아가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 된 이후, 그는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1929년]]에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개칭된다)의 왕이 되었으나 [[1921년]]에 별세했다. 그의 뒤를 이어 아들인 [[알렉산다르 1세 (유고슬라비아)|알렉산다르]]가 즉위하였다.
 
== 바깥 고리 ==
* [http://www.royal.rs/ 세르비아 왕실 공식홈페이지]
 
{{전임후임
|직책=[[세르비아의 군주|세르비아 국왕]]의 왕
|임기=[[1903년]] [[6월 11일]]~[[1918년]] [[12월 1일]]
|전임자=[[알렉산다르 1세 (세르비아)|알렉산다르 1세]]
}}
{{전임후임
|직책=[[유고슬라비아의 군주유고슬라비아|세르보크로아트슬로베네 국왕]]의 왕
|임기=[[1918년]] [[12월 1일]]~[[1921년]] [[8월 16일]]
|전임자=신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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