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둘러보기 메뉴

"스틸리코"의 두 판 사이의 차이

8 바이트 추가됨 ,  10년 전
 
=== 죽음 그리고 그 후 ===
그러나 그에게는 항상 '반(半)야만족' 내지는 '아리우스파 이교도'라는 비난이 따라다녔으며, 또한 황제의 부하 사령관이라는 직함 때문에 원로원이나[[원로원]]이나 황제의 측근으로부터 수많은 정치적 방해를 받았다. 호노리우스가 어렸을 때에는 황제의 후견인으로서 군대와 정치를 움직일 수 있었지만, 호노리우스가 성인이 된 뒤에는 그와 소원해졌다. 황제의 측근이었던 올림피우스가 그 반대파의 필두였다. 그리고 알라리크를 잡지 않은 것도 실은 그와 내통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결국 서고트족과 내통했다는 혐의를 받고 호노리우스에게 변론하기 위해서 라벤나로[[라벤나]]로 향하지만, 호노리우스의 명령으로 처형당했다. 이때 그는 저항하지 않고 사형을 받았다. 그것이 실제로 스틸리코가 알라리크와 내통했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불안정한 서로마 제국의 장래를 걱정했기 때문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아들 에우케리우스도 그의 사후 곧바로 살해당했다.
 
스틸리코의 죽음은 서로마 제국의 큰 손실이었다. 스틸리코 사후 로마군에 복무하고 있던 야만족 용병들이 로마군 손에 학살당했고, 대다수는 서로마 제국을 버리고 알라리크에게 가담했다. 그리고 스틸리코가 처형되고 한 달도 되지 않아 서고트족은 로마의 성벽을 빈번히 포위해왔다. 이러한 위기 앞에 호노리우스는 어떤 대책도 내놓지 못한 채 로마로부터 멀어진 라벤나에 틀어박혀 로마를 떠나줄 것을 요청할 뿐이었다. 그러한 그의 소극적인 태도는 서고트족이 이탈리아 국내를 유린할 틈을 허용했고, 410년의 로마 약탈을 불러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