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엽 (1563년): 두 판 사이의 차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Dja920 (토론 | 기여)
편집 요약 없음
Dja920 (토론 | 기여)
편집 요약 없음
1번째 줄: 1번째 줄:
{{다른 뜻|안정엽|조선의 정치가}}
{{다른 뜻|안정엽|조선의 정치가|대한민국의 가수}}
'''정엽'''(鄭曄, [[1563년]]~[[1625년]])은 [[조선]]의 정치가이며, 자는 시회(時晦), 호는 수몽(守夢)·설촌(雪村), 시호는 문숙(文肅), 본관은 [[초계 정씨|초계]](草溪)이며, 이산보(李山甫)의 사위이다.
'''정엽'''(鄭曄, [[1563년]]~[[1625년]])은 [[조선]]의 정치가이며, 자는 시회(時晦), 호는 수몽(守夢)·설촌(雪村), 시호는 문숙(文肅), 본관은 [[초계 정씨|초계]](草溪)이며, 이산보(李山甫)의 사위이다.



2010년 9월 21일 (화) 21:42 판

정엽(鄭曄, 1563년~1625년)은 조선의 정치가이며, 자는 시회(時晦), 호는 수몽(守夢)·설촌(雪村), 시호는 문숙(文肅), 본관은 초계(草溪)이며, 이산보(李山甫)의 사위이다.

생애

이이(李珥)·성혼(成渾)·송익필(宋翼弼)의 문인으로, 1583년(선조 16) 문과에 급제, 승문원에 등용되고, 1587년에 감찰(監察)·형조 좌랑을 지내었다. 1593년 황주 판관으로 왜군을 격퇴하고, 그 공으로 중화 부사(中和府使)가 되었다. 수찬(修撰)·장령(掌令) 및 서천 군수를 역임하였으며, 1597년 정유재란 때 예조 정랑으로 급고사(急告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후 사성(司成)이 되고, 수원 부사를 거쳐 이듬해 응교로 필선을 겸임하였다. 이어 승지·형조 참의·나주 목사를 거쳐 대사간에 이르렀다. 1602년(선조 35) 성혼(成渾)의 문인이라는 혐의를 받고 종성 부사(鍾城府使)로 좌천되었다가 1606년 성주(星州) 및 홍주(洪州)의 목사를 역임하였다.

광해군 즉위 초 예조 참의·대사성·승지·판결사(判決使)·대사간· 등을 지냈다. 1610년 충청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1612년(광해군 4) 도승지로 왕을 경연에 자주 나가도록 했고, 1614년 공조 참판이 되었다. 1617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자원하여 양양 부사(襄陽府使)로 나갔다가 1년 만에 사퇴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대사성 겸 동지경연·원자사부(元子師傅)가 되어 학제(學制)를 상정했고, 여러 번 다른 직에 전임되었으나, 언제나 대사성을 겸함으로써 이때부터 대사헌을 거쳐 좌참찬·좌부빈객 등을 지냈다. 이괄의 난 당시 인조에게 공주로 피할 것을 청하였다.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