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규: 두 판 사이의 차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Gapo (토론 | 기여)
잔글 교정, replaced: 그후 → 그 후 using AWB
3번째 줄: 3번째 줄:
[[1010년]] [[거란의 침입|제2차 고려-거란 전쟁]] 당시 양규는 [[흥화진]]을 지켰으나 총사령관 [[강조]]가 전사하고 [[거란]]이 항복을 권하자 항복하라는 편지로 위장해서 보냈으나 '''우리는 왕의 명령으로 싸우지 강조의 명령으로 싸운게 아니다'''하며 지켰다.
[[1010년]] [[거란의 침입|제2차 고려-거란 전쟁]] 당시 양규는 [[흥화진]]을 지켰으나 총사령관 [[강조]]가 전사하고 [[거란]]이 항복을 권하자 항복하라는 편지로 위장해서 보냈으나 '''우리는 왕의 명령으로 싸우지 강조의 명령으로 싸운게 아니다'''하며 지켰다.


그후 부하 [[곽주로]]가 군사 700명을 이끌고 강조의 부하를 구했으며 거란군 6000명을 공격해 성을 탈환하고 백성 7000명을 데리고 [[통주]]로 갔고 수도 [[개경]]이 거란에 의해 함락되고 왕 [[고려 목종|목종]]이 [[나주]]까지 피란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 후 부하 [[곽주로]]가 군사 700명을 이끌고 강조의 부하를 구했으며 거란군 6000명을 공격해 성을 탈환하고 백성 7000명을 데리고 [[통주]]로 갔고 수도 [[개경]]이 거란에 의해 함락되고 왕 [[고려 목종|목종]]이 [[나주]]까지 피란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1011년]] 봄 거란군이 철병하게 되자 [[구주]] 방면에서 돌아가는 거란군을 지키고 있다가 부하 [[김숙흥]]과 함께 거란군을 기습해 2000명을 죽이고 포로가 되었던 남녀 2,000여명을 구출했으며 석령에 이르러 다시 거란군 2500명을 베고 포로가 된 포로 1000명을 구출하였다.
[[1011년]] 봄 거란군이 철병하게 되자 [[구주]] 방면에서 돌아가는 거란군을 지키고 있다가 부하 [[김숙흥]]과 함께 거란군을 기습해 2000명을 죽이고 포로가 되었던 남녀 2,000여명을 구출했으며 석령에 이르러 다시 거란군 2500명을 베고 포로가 된 포로 1000명을 구출하였다.

2010년 7월 8일 (목) 22:24 판

양규(? ~ 1011년)는 고려 중기의 문신으로 제2차 고려-거란 전쟁 때 크게 활약했다.

1010년 제2차 고려-거란 전쟁 당시 양규는 흥화진을 지켰으나 총사령관 강조가 전사하고 거란이 항복을 권하자 항복하라는 편지로 위장해서 보냈으나 우리는 왕의 명령으로 싸우지 강조의 명령으로 싸운게 아니다하며 지켰다.

그 후 부하 곽주로가 군사 700명을 이끌고 강조의 부하를 구했으며 거란군 6000명을 공격해 성을 탈환하고 백성 7000명을 데리고 통주로 갔고 수도 개경이 거란에 의해 함락되고 왕 목종나주까지 피란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1011년 봄 거란군이 철병하게 되자 구주 방면에서 돌아가는 거란군을 지키고 있다가 부하 김숙흥과 함께 거란군을 기습해 2000명을 죽이고 포로가 되었던 남녀 2,000여명을 구출했으며 석령에 이르러 다시 거란군 2500명을 베고 포로가 된 포로 1000명을 구출하였다.

여러참에서는 거란군 1,000명을 죽이고 포로가 된 1,000명을 구출했고 다시 거란의 선봉과 애전에서 싸워 1,000여명을 베었다. 그리하여 고군에서 순월 사이에 7차례나 거란군을 기습해 적 6500명을 죽이고 포로가 된 백성 3만 명을 구출했으며 헤아릴 수 없는 전리품을 노획했다.

애전에서 김숙흥과 함께 거란군과 싸우다 전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