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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 ==
== 문화 ==
소련의 헌법은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었으나, 사실상 검열에 의해 [[언론]]과 표현의 자유는 제약되었고 이중 출판은 [[공산주의]] 이념을 선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래서, 많은 문인(文人)과 예술가들이 서방으로 망명했다.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 정권하의 [[1932년]]의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공산주의 리얼리즘]]」의 방침을 제창했다. 이는 1930년대 전반기 동안에 문학이나 조각, 회화 등 모든 예술 분야의 작가 대회에서 공식적으로 채용되었다. 정부의 후원으로 소련은 [[발레]]와 클래식 음악([[쇼스타코비치]] 등)에서도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또한 [[예브게니 무라빈스키]]가 이끄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니 교향악단]] 등은 명연주를 남겼다.
소련의 헌법은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었으나, 사실상 검열에 의해 [[언론]]과 표현의 자유는 제약되었고 이중 출판은 [[공산주의]] 이념을 선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래서, 많은 문인(文人)과 예술가들이 서방으로 망명했다.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 정권하의 [[1932년]]의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공산주의 리얼리즘]]」의 방침을 제창했다. 이는 1930년대 전반기 동안에 문학이나 조각, 회화 등 모든 예술 분야의 작가 대회에서 공식적으로 채용되었다. 정부의 후원으로 소련은 [[발레]]와 클래식 음악([[쇼스타코비치]] 등)에서도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또한 [[예브게니 알렉산드로비치 므라빈스키|므라빈스키]]가 이끄는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은 명연주를 남겼다.





2010년 4월 28일 (수) 11:13 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Сою́з Сове́тских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спу́блик
1922년~1991년
표어Пролетарии всех стран, соединяйтесь!
(러시아어: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국가인터내셔널가
(1922–1944)

소비에트 연방 찬가
(1944-1991)

수도모스크바 55°45′N 37°37′E
정치
정치체제연방제, 일당제, 사회주의 국가
국가원수
1922년 – 1946년
1988년 – 1991년
정부수반
1922년 – 1924년
1985년 – 1991년
서기장
1922년 – 1952년
1985년 – 1991년

미하일 칼리닌(초대)
미하일 고르바초프(말대)

블라디미르 레닌(초대)
니콜라이 리즈코프(말대)

이오시프 스탈린(초대)
미하일 고르바초프(말대)
입법부최고 소비에트
상원국가 소비에트
하원연합 소비에트
역사
 • 설립
 • 해체
1922년 12월 30일
1991년 12월 26일
지리
1990년 면적22,402,200 km2 (1위)
인문
공용어러시아어, 기타 다수
데모님소련인
민족
인구
1990년 어림291,000,000명 (3위)
인구 밀도13명/km2
경제
통화루블 (SUR) (руб)
기타
현재 국가
ISO 3166-1810, SU, SUN
도메인.su
국제 전화+7
이전 국가
다음 국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자캅카스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라트비아 제1공화국
리투아니아 제1공화국
에스토니아 제1공화국
러시아
조지아
우크라이나
몰도바
벨라루스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러시아어: Союз Советских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спублик / СССР 소유스 소베츠키흐 소치알리스티체스키흐 레스푸블리크 / 에스에스에스에르[*]/영어: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USSR/ 유니언 오브 소비에트 소셜리스트 리퍼블릭스/ 유에스에스알[*], 중국어: 蘇維埃社會主義共和國聯邦) 줄여서 소련(蘇聯, 러시아어: Советский Союз 소베츠키 소유스[*], 조선말: 쏘비에트련방(쏘련))은 1922년 12월 30일부터 1991년 12월 25일까지 유라시아 대륙 북부에 존재 하였던 세계최초의 공산주의 국가이다. 세계 최대의 다민족 국가를 이루었으며, 러시아 연방의 전신국이다.

개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라는 명칭은 소비에트 (Soviet) 에서 나왔는데, 이는 러시아어로 '평의회' 를 뜻한다. 노동자의 조직인 소비에트는 간접민주제를 거부하고, 작게는 각 직장에서부터 크게는 모스크바의 중앙 (최고 소비에트) 에 이르기까지 각 계층에 걸쳐 설치되어 있었고, 소련의 성립기와 말기를 제외하면 소련 공산당의 일당독재 체제였다.

소비에트 연방의 국기의 비율은 가로와 세로의 비가 2:1로 붉은색은 혁명을, 금색의 낫과 망치는 각각 농민과 노동자를 상징했고, 그 위의 붉은 별은 5대륙 노동자의 단결을 의미했다. 국장에는 지구를 배경으로 하여 낫과 망치를 놓고, 그 위에 붉은 별을 놓았으며, 그것을 리본과 밀 이삭이 둘러싸고 있는데, 리본에는 15개 공화국의 언어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라는 문구를 써 넣었다.

명칭

러시아어 정식 명칭은 Союз Советских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спублик (사유스 사볫스끼흐 사찌알리스찌췌스키흐 리스뿌블릭), 통칭은 Советский Союз (소베츠키 소유스), 약칭은 СССР (에스에스에스에르) 이며, 한국어 정식 명칭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통칭은 소비에트 연방, 약칭은 소련 이다.

역사

러시아 혁명

1917년 2월차르(황제) 퇴위 이후 성립한 임시정부는 점진적인 개혁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1914년 7월 28일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 특히 독일과의 전쟁으로 인해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었다. 또한 어린이들이 먹을 우유가 모자랄 정도로 심각한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는 임시정부에 휴전할 것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17년 11월 7일에 레닌의 지도하에 11월 혁명이 일어났다.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는 적위군을 조직해 러시아 제국의 수도인 페트로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장악했다. 혁명에 반대하는 백군 및 외국 열강의 군대에 대항하려고 레온 트로츠키는 적위군을 적군으로 개편했다. 그후 일본을 포함한 열강에 의한 간섭 전쟁과 시베리아 출병, 백군과의 내전에 승리했으며, 모든 반대파를 숙청해 러시아에 있어서 볼셰비키의 일당독재 지배를 결정지었다.

이어 1922년 12월 30일의 전연방 소비에트 대회에서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백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자카프카스 공화국이 연합하여 소비에트 연방의 성립이 선언되었다.

1924년 레닌의 사후 집권한 요시프 스탈린은 세계 공산혁명을 주장하는 트로츠키와는 달리 나라안의 안정이 더 중요하다는 일국공산주의를 내세우며, 1928년에는 경제발전 5개년 계획을 발표하였다. 또한 그 과정에서 트로츠키를 외국으로 추방했고, 반대파를 숙청하였다. 일설에 따르면 스탈린이 숙청한 사람은 4500여만 명도 넘었다고도 하며, 무리한 경제발전계획으로 강제수용된 이들도 많았다.

제2차 세계 대전: 대조국전쟁

1933년 1월 독일에서는 나치스가 집권했고, 나치스는 중앙유럽 일대를 독일인의 생활권(독일어: Lebensraum 레벤스라움)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스탈린중앙유럽 국가를 공산주의화해 위성국으로 둘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양자는 결국 중앙유럽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충돌하게 된다.

1939년 8월 소련과 나치 독일독소 불가침조약을 맺고, 그 해 9월 1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독일과 소련은 폴란드의 영토를 분할했다. 이어 소련은 1940년 리벤트로프-몰로토프 밀약으로 말미암아 발트 3국까지 점령했다. 또한 소련은 핀란드를 흡수하려고 겨울 전쟁을 일으켰지만 실패로 돌아간다.

그러나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은 독소 불가침조약을 파기, 독일과 소련 사이에 전쟁(대조국전쟁)이 발발했다. 그 결과로써 소련은 연합국에 참전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독일군이 우세하여 소련의 수도(首都) 모스크바 근처까지 진격했으나, 소련은 레닌그라드 포위(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스탈린그라드 전투(스탈린그라드=지금의 볼고그라드), 쿠르스크 전투 등의 공방전에서 수백만의 희생자를 낸 끝에 승리, 전세를 역전시켜 끝내 1945년 4월 30일 나치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함락시켰다. 군기가 문란한 소련군은 독일군이나 독일시민이 항복, 포기한 후에도 여성에 대한 강간 등의 만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소련군을 무서워한 독일군은 방위 지역을 버리고 서진해 미군에 항복하도록 했다. 이로써 소련군은 동부 독일을 쉽게 점령할 수 있어 그 후의 동서독 분할을 부르게 되었다. 소련군 점령지대에는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이라는 공산주의 국가가, 연합군 점령지역에는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이라는 민주주의 국가가 들어선 것이다.

1945년 8월 8일에는 얄타 회담의 협정에 근거해 소-일 불가침조약을 파기, 일본선전포고를 하여 사할린, 만주국 및 38도선 이북의 한국을 점령했다.

냉전

소련의 중앙유럽 점령 이후 중앙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연이어 공산주의 정부가 들어서 차츰 소련의 위성국가가 되어갔다. 이들은 1949년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결성, 미국을 비롯한 민주주의 진영에 맞서려고 했다. 미국은 이에 대항하기 위해 마셜 플랜을 발표, 서유럽의 경제 부흥을 도우려고 했다. 이 과정에서 양 진영은 대립하게 되었는데, 이로부터 냉전이 시작되었다.

흐루시초프와 스탈린

1953년 스탈린의 사망 이후 등장한 니키타 흐루시초프는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여 전체주의 독재정책을 크게 누그러뜨렸다. 그러나 소련은 여전히 경찰국가, 감시국가였다. 그는 식량 생산에 힘을 쏟아 일시적으로는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너무 갑작스러운 농업생산의 확대로써 농지의 비영양화, 사막화가 진행되어, 결국 소련은 식량을 해외로부터 수입해야 하게 되었다.

또, 중앙유럽 위성국에서는 자주 반체제 운동, 개혁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에 대해 소련은 1956년 부다페스트 봉기, 1968년 8월 프라하의 봄에 대해 무력개입을 통하여 이를 진압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소련 붕괴 사이에 미국과는 직접적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았으나, 베를린 봉쇄 등의 적대 행동이나 한국전쟁이나 베트남 전쟁 등, 세계 각지에서의 대리전쟁이라고 하는 형태로 냉전으로 불리는 대립관계가 형성되었다. 특히 한없는 군비 확장과 또한 개발 경쟁은 세계를 핵전쟁의 공포로 몰아넣었다(1962년쿠바 위기 등).

1960년대에 들어와 흐루시초프 체제가 안정되면서 미국과의 관계는 다소 개선되었다. 그러나 흐루시초프의 개혁 노선에 회의적이었던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이 이끄는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는 반대로 악화되었다(중소대립).

1964년에 농업정책의 실패와 서방에 대한 유화정책을 이유로 실각한 흐루시초프에 이어 강경파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지도자가 된 이후, 관료의 비대화 등 체제의 부패가 진행된 동시에 식료나 연료, 생활필수품의 공급 부족으로 국민 생활이 어려워졌으며, 이와 함께 동쪽 제국 전체의 경제가 갈수록 침체해 갔다.

파일:Evstafiev-afghan-apc-passes-russian.jpg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는 소련군 탱크

또한 1979년 12월 27일에 브레즈네프는 아프가니스탄에 공산정권을 수립하려고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실시했지만 이는 다음해의 모스크바 올림픽에 대한 서방 여러 나라의 대량 보이콧을 부르게 되었다. 이 전쟁은 1989년까지 계속되어 소련의 국제사회로부터의 고립을 불렀던 것뿐 아니라, 막대한 전비를 낭비했기 때문에 경제를 더욱더 압박하는 결과를 낳았다.

페레스트로이카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1982년 브레즈네프가 사망하고 이어 유리 안드로포프, 콘스탄틴 체르넨코가 후계자가 되었고, 그에 이어 1985년에 등장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경공업에 대한 심각한 경제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정보 공개, 개방)가 진행되었다. 또한 부패한 정치체제의 개혁이 추진되어, 1990년에 지금까지의 옛 소련 공산당 일당 독재제 대신 복수정당제와 대통령제가 도입되었다.

또한 소련의 개혁에 영향을 받아 중앙유럽 위성 국가에도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 1989년부터 1990년 사이에 동독,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등 소련의 위성국들이 연이어 민주화를 달성했다. 대부분은 무혈혁명이었지만 루마니아에서는 유혈혁명으로, 1989년 12월 25일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즉석 재판에서 사형에 처해졌다.

이에 따라 냉전은 사실상 종식, 1989년 12월몰타에서 고르바초프와 미국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냉전이 종결되었다는 선언을 했다.

소련 붕괴

1991년 3월 17일 소련의 유지를 묻는 국민투표에서 투표자의 76%가 찬성했다. 그 이후 각 공화국에게 대폭 권한을 양도하는 신연방 조약이 조인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개혁노선에 반대하는 국가비상사태위원회등은 이에 반발해 8월에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개혁파와 소련 국민, 서방 각국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이어 같은 해 9월 최고 소비에트는 발트 3국의 독립을 승인했다.

같은 해 12월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백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독립국가연합(CIS)의 창설에 합의하고, 다른 소련 가맹 공화국들도 CIS에 연달아 가입했기 때문에, 1991년 12월 25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사임하고, 소련은 해체되었다. CIS에 참가한 국가는 소비에트 연방을 구성한 15개 SSR발트 3국을 제외한 12개국이다.

지리

타지크 공화국에 있는 코뮤니즘 봉, 1989년.

소련은 유럽 대륙의 동부와 아시아 대륙의 북부를 차지하였다. 그 영토의 대부분은 북위 50도 이북에 있었다. 또한 소련은 22,402,200㎢의 면적을 차지하여 세계 제1의 넓은 영토를 자랑했으며, 그 면적은 지구의 육지 면적의 1/6에 달하였다. 소련의 거대한 영토는 한대, 아한대로부터 아열대에 이르기까지 걸쳐 있었다. 면적의 11%는 경작지, 16%는 초원지대, 41%는 숲, 32%는 (툰드라를 포함한) "기타"로 분류되었다.

소련 서부의 그단스크 만칼리닌그라드로부터 동부의 베링 해협에 있는 라트마노바 섬 사이의 거리는 1만km가 넘었으며, 소련 서부와 동부 사이의 시차는 11시간에 이르렀다.

1991년 당시, 소련은 서쪽으로 노르웨이, 핀란드,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남쪽으로는 터키, 이란, 아프가니스탄, 중화인민공화국, 몽골, 북한과 육상의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구성국

소련은 15개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SSR : Socialist Soviet Republics)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인구 100만 이상의 민족은 공화국(SSR)을 이루었다. 이들은 독자적인 헌법, 최고회의를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소련방으로부터의 이탈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연방 이탈의 수속을 정한 법률은 없었고, 말기에 고르바초프가 정한 연방 이탈법은 지극히 까다로웠다. 이에 발트 3국은 연방 이탈법을 무시하고 1990년에 독립 선언을 했다.

인구 100만이 되지 않는 민족은 그 규모에 따라 자치공화국(ASSR), 자치주, 자치관구를 이루었다. 그들도 독자적인 헌법과 최고회의를 가지고 있었지만, 연방으로부터의 이탈권은 없었다.

1992년 이래 15개의 공화국은 각기 모두 독립한 국가가 되었다.

소비에트 공화국 독립국가 수도 가맹연도
러시아 공화국 러시아의 기 러시아 모스크바 1922년
우크라이나 공화국 우크라이나의 기 우크라이나 키예프 1922년
백러시아 공화국 벨라루스의 기 벨라루스 민스크 1922년
우즈베크 공화국 우즈베키스탄의 기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1924년
투르크멘 공화국 투르크메니스탄의 기 투르크메니스탄 아슈가바트 1924년
타지크 공화국 타지키스탄의 기 타지키스탄 두샨베 1929년
아르메니아 공화국 아르메니아의 기 아르메니아 에리반 1936년
아제르바이잔 공화국 아제르바이잔의 기 아제르바이잔 바쿠 1936년
카자흐 공화국 카자흐스탄의 기 카자흐스탄 알마티 1936년
키르기스 공화국 키르기스스탄의 기 키르기스스탄 프룬제 1936년
그루지야 공화국 조지아의 기 조지아 트빌리시 1936년
에스토니아 공화국 에스토니아의 기 에스토니아 탈린 1940년
라트비아 공화국 라트비아의 기 라트비아 리가 1940년
리투아니아 공화국 리투아니아의 기 리투아니아 빌뉴스 1940년
몰다비아 공화국 몰도바의 기 몰도바 키시뇨프 1940년


주요 도시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소련 제3의 도시였던 키예프
블라디보스토크

정치

붉은 광장은 소련 정치의 중심이었다

레닌 시대 초기와 고르바초프 시대 후반의 잠깐을 제외하고는 소련 공산당에서 1당독재가 이루어졌다. 공산당에 의한 일당 독재, 민주집중제, 통제경제를 기초로 하는 이른바 '소련형 공산주의'로 불리는 체제는, 당에 의한 억압적인 체제이며, 표현이나 집회, 결사의 자유는 사실상 없었다. 이 때문에, 카를 마르크스가 주창한 공산주의의 이상과는 크게 동떨어져 일반 노동자·농민에게 있어서는 지배자가 로마노프 왕조차르를 공산당이 대신한 것뿐으로, 정치적으로는 어떤 해방도 되지 않은 체제가 되었다. 그 때문에 실질적 최고 지도자인 서기장은 「적색황제」라고도 불렸다.

특히 스탈린 시대에는 숙청으로 많은 사람들이 살해되어 스탈린주의 하의 사회주의·공산주의는 억압적인 체제와 동일시 되었다. 스탈린의 사후에도 국가 반역죄 등으로 체포 또는 망명을 강요당한 사람은 계속 증가해 소련 70년 동안 4500여만 명 넘는 사람들이 숙청되었다. 이것은 러시아 정부가 1997년 인정한 공식 데이터이나, 숙청의 전모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만 공개하고 있다.

고르바초프 시대 마지막에 잠시 대통령제를 도입한 것을 제외하고는, 스탈린 시대 이래 소련의 국가원수는 소비에트 최고간부회의의 의장이었으나, 실권은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있었으며 서기장과 최고 간부회의 의장을 겸임한 사람도 있다. 소련 공산당의 1당독재는 1991년 8월의 쿠데타가 3일 천하로 실패한 뒤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소련 공산당을 해체하여 그 막을 내렸다.

역대 소련의 지도자들은 다음과 같다.

정치국

정치국(러시아어:Политбюро, 정식 명칭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러시아어:Политбюро ЦК КПСС)은 소련 공산당의 주요 정책을 결정하는 통치체의 기능을 했다. 이것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주요 구성원들이 참여했다. 1952년부터 1966년 사이에는 간부회라고 불렸다.

1990년에 열린 제28차 당대회에서는 정치국의 권한을 최고 소비에트로 이양하는 것이 승인되었다. 정치국은 1991년 8월의 쿠데타 실패 직후에 해산되었다.

마지막 정치국원이 선출되었던 1990년 7월 14일에는 부로케비시우스, 굼바리아제, 고르바초프, 구렌코, 자소호프, 이바시코, 카리모프, 루신쉬, 마살리예프, 모프시샨, 무탈리보프, 나자르바예프, 니야조프, 폴로즈코프, 프로코피예프, 루비크스, 세묘노바, 실라리, 소콜로프, 스트로예프, 프롤로프, 셰닌, 야나예프 등이 정치국원으로 선출되었다.

최고 평의회

최고 평의회(Верховный Совет)는 소련의 최고 국가권력기관으로 광범위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상설 기관으로는 최고회의 간부회를 선출했으며, 최고 평의회 간부회 의장이 소련 국가원수였다.

연방 평의회(연방원)과 민족평의회(민족원)의 양원제)를 택했으며, 임기는 모두 5년이었다. 연방 평의회는 30만 명을 1개 선거구로 한 소선거구제를 택했고, 민족 평의회는 각 민족별 인구를 반영해 설치했다. 그 대의원은 소련의 15개 공화국, 11개 자치공화국, 5개의 자치구 및 민족관구에서 선출되었다.

경제

1989년, 소련의 50코페이카 동전

소비에트 연방은 공산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정부에서 경제계획을 세우고 이를 주도하는 계획경제를 따랐다. 소련의 계획경제는 고스플란(소련 국가계획위원회 Gosudarstvennyy Planovyy Komitet의 약칭)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농민의 집단화를 도모할 수 있었다(집단농장).

1920년대 통제경제의 문제점이 크게 부각되자, 레닌이 자본주의 경제를 약간 도입하여 "신경제정책"을 실시하였다. 1930년대대공황으로 자본주의 국가가 일제히 불황에 시달렸지만 구 소련은 그 영향을 받지 않고 높은 경제발전을 달성했기 때문에, 서구미국좌파 지식인들로부터 「실업계급도 없는 이상적인 국가」라고 평가되었다. 하지만 구 소련의 경제발전은 구 소련에 반대한 정치범이나 사상범을 중심으로 한 강제 노동에 의지한 것이었으며, 이들의 생산활동으로 형성된 부도 공산당의 간부에 집중해 배분되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1960년대 이후에는 계획경제가 파탄에 이르러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소비재의 부족 등으로 국민의 생활은 궁핍해졌다.

소련이 해체되기 전, 당시 총서기 미하일 고르바초프(소련의 마지막 총 서기이자 소련의 초대 대통령)는 통제경제의 문제점이 날로 커지는 것을 보고 시장을 열어 자본주의 경제를 받아들었다.

또, 유통의 정비가 늦었기 때문에, 농산물의 생산이 충분히 있었다고 해도 그것이 소비자에게 도착되기도 전에 부패해 버리는 일이 많았다. 그 때문에 암시장과 같은 지하경제나 독직이 만연했으며, 공산귀족 즉, 특권을 누리는 공산당 간부들이 배를 불리는 부패가 벌어졌다.

1990년 당시 소련의 GDP는 2조 6600억 달러였다.

소비재

대중차 라다(ЛАДА) 1200

군사력에 투자되는 자금에 비해 국민 생활에 필요한 전자제품이나 소비재의 개발과 생산, 물류의 정비는 소홀히 다루어졌다. 따라서 서방제국에 비해 기술, 품질 모두 비교도 되지 않는 제품조차도 입수하려면 몇 년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대부분의 전자제품이나 자동차의 기술은 서방의 기술보다 10년 이상 뒤처졌기 때문에 그 대부분이 피아트나 패커드 등의 서방의 기업과 제휴해, 구형제품의 기술공여를 받은 것이었다.

서방의 전자제품이나 화장품, 의류 등의 소비재의 수입, 유통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었지만, 모스크바 등의 대도시에만 설치된 (GUM)등의 외화 전용 백화점에서 구입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들을 구입할 수 있는 것은 외국인이나 공산당 간부와 그 가족뿐이었다. 그 때문에, 말보로 담배나 리바이스 등 많은 서방의 제품이 어둠의 경로를 통해 유통되었다.

무역

전자제품, 소비재, 공작기계, 자동차 등의 기술과 품질이 서방에 비해 뒤떨어졌기 때문에 서방으로의 수출은, 농산물이나 어패류등의 제1차 상품, 원유나 천연가스등의 에너지 자원이 대부분이었다. 통화인 루블 자체도 국외에서 통화로서의 가치가 낮았기 때문에 서방과의 무역수지는 대개 적자였거나 매우 적었다.

그에 비해 위성국이나 공산국가들과의 무역은 1차 상품이나 에너지 자원은 물론, 기업들의 치열한 생존경쟁으로 기술이 발전한 서방국가들과는 상대가 못 되었던 전자제품이나 소비재, 공작기계로부터 자동차, 항공기 등의 군사 물자까지도 수출되었다. 또한 그 대부분의 물자가 사실상의 원조품으로서 무상에 가까운 형태로 공급되었다.

공업

드네프르 강의 댐 건설, 1934년.

소련의 공업은 콤비나트(Kombinat)를 통해 이루어졌다. 소련의 스탈린1928년부터 5개년계획을 실시하면서 의식적으로 콤비나트 공업지대를 설치했다. 유명한 콤비나트로는 드네프르 콤비나트, 앙가라-바이칼 콤비나트, 우랄 콤비나트, 쿠즈네츠크 콤비나트 등이 있다.

소련은 중공업 생산에 치중하였기 때문에, 국민의 생활에 밀접하게 관계되는 생필품의 질은 서방 세계에 비해 떨어졌다.

농업

소련의 농업은 대부분 소프호스(Sovkhoz)와 콜호스(Kholkoz)를 통해 이루어졌다. 소프호스는 Sovetskoe khozyaistvo(소비에트 농장)의 약칭으로, 거대한 국영농장이었다. 소프호스의 농업 생산은 나라의 계획에 따라 경영되었다. 생산하는 작물은 수매 가격까지도 정부의 결정에 따라 정해졌다.

콜호스는 협동농장으로, 1928년 시작된 스탈린의 5개년 계획 기간 중에 만들어졌다. 콜호스는 국유지를 무료로 사용하고 경작을 실시했으며 이에 따라 부농을 의미하는 쿨라크가 일소되었다. 농기구나 가축 등은 공유되었으며 생산물은 정부에 매각되었다. 각 개인의 주택에 부속된 소규모 농지에서 채소의 재배, 가축의 사육이 가능했고, 개인이 생산한 생산물은 자유롭게 판매해도 되었다. 생산력 향상이 농민의 수입증가에 직접 연결되는 이 자류지 재배는 집단농장보다 높은 효율성을 나타내, 취약한 소련 농업에 도움이 되었다.

외교

소련 외무부 청사

소련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공산진영의 맹주였으며, 중앙유럽의 위성국가 이외에도 중남미(쿠바), 중동(남예멘), 아프리카(앙골라, 모잠비크 등), 동아시아 등에서의 공산정권 수립을 지원했다. 따라서 미국일본, 대한민국을 비롯한 민주주의 진영과는 대립관계에 있었다.

소련은 국제연합의 원년(元年) 회원국이었으며, 연방 이외에도 우크라이나 공화국백러시아 공화국을 따로 국제연합에 가맹시켰다.

위성국가

이들 위성국가들은 대부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소련의 위성국가가 되었다 (1920년대부터 위성국가가 된 몽골 인민공화국은 제외).

대한민국과의 관계

제2차 세계 대전 이래 대한민국(남한)과 소련의 관계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북조선)의 수립을 소련이 간접적으로 지원했다는 것과 특히 한국 전쟁에서 북한을 지원한 소련의 역할 때문에 출발부터 적대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전쟁 때에 부분적으로 참전하여,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우려가 있었다.

1970년대 이후 한국(남한)과 소련의 관계는 점차 누그러져 갔으나, 1978년 4월 21일 대한항공보잉 707기가 무르만스크 인근에 강제착륙당한 사건과 1983년대한항공기 격추 사건이 벌어졌다.

고르바초프의 등장 이후 한국과 소련의 관계는 차츰 해빙하였다. 서울 올림픽에 소련이 참가하였고,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에 따라 1990년 6월 한국-소련 정상회담이 열렸으며, 그 해 10월 국교가 수립되었다.

미국과의 관계

공산국가들의 맹주였던 소련은 민주주의 진영의 맹주였던 미국과는 '냉전'이라고 하는 형태로 대립해, 1950년대한국 전쟁이나 1960년대베트남 전쟁 등, 대리 전쟁이라고 하는 간접적인 형태의 군사적 대립을 하고 있었지만, 전면적인 핵전쟁에 대한 공포가 쌍방의 억제력이 되었기 때문에 전면적인 군사적 대립은 없었다.

그러나 베를린 봉쇄쿠바 위기 등에서는 전면적인 군사적 대립의 일보직전까지 갔으며, 영공을 침범한 미군기의 격추 등 한정적인 군사적 대립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와 같은 대립관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식 국교가 끊어진 적은 없고, 쌍방의 수도에 대한 민간기의 노선연장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한항공기 격추 사건이나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의 사건이 있었을 때에는, 「제재 조치」로서 민간기의 노선연장이 시한적으로 제한되거나 스파이 사건 등이 표면화되어, 한쪽의 외교관이 국외 추방되면 그에 대한 「보복 조치」로서, 다른 한쪽 국가의 외교관을 맞받아 국외 추방하는 등의 외교적 술책을 하고 있었다.

일본과의 관계

일본과는 제2차 세계 대전 이전부터 만주국과의 국경에서 종종 군사적 충돌을 일으키고 있었다(노몬한 사건 등). 1941년 4월에 소-일 중립 조약이 체결되었지만 1945년 8월 8일에 소련은 이것을 일방적 파기, 일본에 선전 포고를 했다. 또한 일본인 포로를 오랫동안 강제 노동 수용소에 구류했다.

그 후, 1956년에 소-일 공동 선언을 통해 국교가 회복했지만, 일본이 미국의 동맹국인데다가 북방 영토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관계 개선은 진전되지 않은 채 냉전이 종결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중국)과의 관계

소련의 지원으로 국공내전에 승리한 중국 공산당1949년 성립한 중화인민공화국(중국)과는 당초 협력관계에 있었지만(소련은 중화민국(대만)과 단교하고 중화인민공화국(중국)과 수교한 세계 최초의 국가이다), 1950년대 후반부터 서서히 관계가 악화되어 1960년대에는 영토 문제에 의한 군사 충돌(다만스키섬 사건 등)이나 사상적인 대립의 문제로 말미암아 중공과 소련의 대립이 표면화했다. 양국간의 이와 같은 대립관계는 그 후 문화대혁명이 종결되는 1970년대 후반까지 계속되었다.

도항

외국에의 개인적 도항은 망명과 외화 유출을 막는 것을 주된 이유로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당국의 허가가 없는 한 도항은 불가능했다. 또, 자본주의 진영 국민과의 교제나 결혼은 사실상 불가능했으며, 심지어 위성국 국민과의 결혼조차도 소련 당국으로부터 다양한 방해를 받았다고 한다.

또한 외국 항로를 운행하는 선박이나 외국에서 연주여행을 하는 악단등에는, 승무원이나 악단원의 망명을 저지하고 서방 언론에의 노출을 감시하기 위해서 반드시 공산당의 정치장교가 동행하고 있었다.

군사

미코얀 MiG-31BM

소련은 미국을 필두로 하는 민주주의 진영에 대항하기 위해, 재래식 무기 이외에도 1949년원자 폭탄을 개발하였고, 1961년에는 수소 폭탄 실험을 하여 현재까지 폭발한 가장 큰 폭탄이었던 차르 폭탄을 폭발시켰다. 그 이외에도 핵무기를 탑재 할 수 있는 초음속 항공기, 대륙간 탄도 미사일이나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탑재 가능한 핵잠수함 등을 배치해,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1989년 당시 정규군의 총원은 500만 명에 이르렀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싸우는 소련군 병사, 1988년

그러나 이렇게 방대한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막대한 예산이 필요했으며, 이는 국민들의 생활을 피폐하게 했다. 특히 1979년부터 10년 동안 계속된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아무 성과도 없이 실패해 많은 전비나 인명을 잃었던 것뿐만 아니라, 소련의 위신도 저하시켰다. 또한 대한항공기 격추사건과 같은 민간기 격추 사건을 일으키는 등 관료주의와 권위주의는 서방제국의 반발을 샀다.

또한 소련은 중앙유럽의 위성국가들과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결성, 민주주의 진영과 대립했으며, 동시에 회원국 내에서 일어난 반소, 반공 운동에 무력으로 개입했다. 소련은 이들 위성국뿐만 아니라 북한이나 중화인민공화국, 쿠바북베트남 등, 세계의 반미적인 사회주의, 공산주의 국가에 각종 무기를 수출했다.

파일:VE-day-parade-moscow.jpg
1945년 대독 승전기념 군사 퍼레이드

뿐만 아니라 이러한 나라에 낡은 무기와 그 기술을 수출하고 장교 등을 파견해 군사훈련을 해, 그들 나라의 군사 기술의 향상에 기여했으며, 그 중에는 스파이테러리스트의 양성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군사 퍼레이드

소련은 자국의 군사력과 붉은 군대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붉은 광장에서 미사일, 탱크장갑차까지 동원해 군사 퍼레이드를 자주 벌였다.

과학

소련은 1950년대 이후 미국과 나라의 위신을 걸고 우주개발 경쟁을 벌였다. 1957년 소련은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쏘아올렸고, 또한 최초의 우주비행사인 유리 가가린,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인 발렌티나 테레시코바 등을 배출하였다. 소련은 보스토크 계획, 소유즈 등일련의 우주개발 프로그램을 추진하였고, 장기간 운용하는 우주 정거장 미르 계획을 성공시켰으며, 우주개발 이외에도 원자력 개발 등의 거대과학에 있어서도 소련은 큰 발자취를 남겼다.

또한 소련은 항공기, 잠수함, 탱크 등의 무기 기술도 발달하였다. 대표적인 소련의 전투기로는 수호이, 미그를, 항공기로는 일류신, 투폴레프 등을 들 수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스탈린의 오르간」이라고 불리며 독일군이 두려워한 「카츄샤」로켓도 개발했다. 또한 스텔스에도 중요한 이론적 영향을 주었으며, 테트리스 등의 컴퓨터 게임도 개발했다.

소련의 미르호(號)

그러나 소련의 거대과학에 대한 치중은 군사비와 마찬가지로 경제에 상당한 부담을 주었으며, 항공 우주 기술이나 중공업을 우선한 나머지 소비재의 제조가 뒷전으로 밀려 민중을 괴롭히게 되었다. 또한 안전과 건강을 고려하지 않은 원자력 개발과 공장 건설로 인해 체르노빌 사고와 같은 일도 벌어졌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공장의 유해물질과 방사능에 의한 환경오염도 심각했다.

소련은 아카뎀고로도크 같은 과학도시를 건설하기도 했다. 그러나 소련 당국은 외국으로 기술이 노출되는 것을 꺼려해 과학 시설이 밀집한 일부 도시는 외국인의 출입이 금지된 폐쇄된 도시가 되었으며, 이들 도시는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았다.

교통

항공

일류신 II-86

소련은 넓은 국토 덕으로 항공교통이 발달하였다. 소련의 항공교통은 국영인 소련항공으로만 이루어졌다. 장거리 국제선으로부터 항공기에 의해서만 접근이 가능한 벽지나, 포장된 활주로가 정비되어 있지 않은 지방 공항에 이르기까지, 또한 대형 제트기로부터 소형 복엽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운행하고 있었다.

국제선은 소련 당국의 엄격한 여행 제한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국력과 우호관계를 과시할 목적으로, 서방 세계의 주요국이나 중앙유럽의 위성국, 쿠바앙골라 등의 우호국에 노선연결을 실시했다. 그러나 이익을 도외시한 운영인데다가 그 서비스와 요금은 서방 국가의 그것에는 한참 뒤떨어져 있었다.

해외에서 많은 공산주의 우호국의 항공 회사가 모스크바 등의 대도시로 항공기 노선이 개통되었으며, 일본이나 미국, 서독 등의 서방 국가로부터도 일본항공이나 전미항공, 루프트한자 등의 항공 회사가 노선을 개통하고 있었다. 소련과 대한민국과의 사이에는 1990년의 수교 전까지 항공로가 개설되어 있지 않았다.

철도와 지하철

모스크바의 지하철

시베리아 횡단철도 등의 철도망이 각 도시를 연결했으며, 외국으로 통하는 국제열차가 운행되었다. 소련은 공산주의 국가의 발전상을 과시하기 위해 모스크바레닌그라드 등의 대도시를 운행하는 지하철에 화려한 장식을 했다. 공산주의 국가들의 특징으론 지하철을 깊고, 화려하게 건설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소련이 시초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언론

소련 공산당의 기관지인 프라우다와 정부 기관지인 이즈베스티야, 공산청년동맹 기관지인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 등의 신문이 유명했다. 통신사로는 1925년에 창설된 국영 타스 통신이 있었다. 대외 방송으로는 1922년 창설된 모스크바 라디오가 있었다.

소련인은 외국의 방송을 듣는 것이 금지되었고, 신문라디오, 텔레비전 같은 보도기관에 대해서는 소련 공산당이 완벽하게 보도관제를 이루었다. 이것은 외국의 큰 뉴스나 체르노빌 사고대한항공기 격추 사건과 같은 큰 사건으로부터 국내의 정치, 경제적인 사건, 당간부의 숙청이나 지하철 사고, 탄광 사고와 같은 사건에 이르기까지 소련 정부와 공산당에 위해가 되는 보도는 일절 불가능했으며, 만약 보도되어도 정부와 당에 유리하도록 왜곡되었다.

또, 서방 언론의 특파원은 기본적으로 국내를 자유롭게 취재, 보도하는 것이 금지되고 있어 사전에 신청이 필요했다. 또한 취재처의 선택 및 일정은 모두 준비 된 것에 따라야 했다. 모스크바 올림픽 등의 국제적 이벤트나, 서방제국의 수뇌진이 공식 방문을 할 때 소련을 방문한 보도진에 대해서는 준비된 취재 스케줄이 반드시 제공되었다. 서방의 보도기관에서 일하는 소련인 종업원 역시 당국이 선택하였다. 그들은 서방의 보도기관이나 그 특파원의 행동을 당국에 보고해야만 했다.

스포츠

소련은 국위 선양을 위해 스포츠, 특히 올림픽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소련은 국가의 선수 육성 프로그램으로 선수를 육성했고, 그들 선수들은 올림픽에서 많은 금메달을 획득했다. 특히 소련은 아이스하키, 배구, 하키 강국으로, 올림픽 메달 획득에 있어서 미국, 동독 등과 수위(首位) 경쟁을 벌였다. 그러나 소련 붕괴 후 그러한 선수의 대부분은 불법 도핑 등에 의한 약물중독 상태였던 것이 당사자의 고백으로 밝혀졌다.

또한 스포츠는 국가가 직접 관리했기 때문에, 민주주의 국가에서 볼 수 있는 프로 스포츠는 존재하지 않았다.

1980년 소련은 모스크바 올림픽을 개최했으나, 미국을 필두로 한 서방측은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해 이 대회를 보이콧했다. 소련과 공산 진영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1984년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을 보이콧했다. 이 두 올림픽을 두고 "반쪽 대회"라고 한다.

소련은 월드컵 대회에 7회 출전했으며, 1966년에는 4위를 차지했다. 또한 1956년1988년 올림픽 축구에서 금메달을 차지하였다.

인구

파일:USSR Ethnic Groups 1974.jpg
1974년의 소련 내 민족 분포도

소비에트 연방은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인종 구성을 보였다. 그 국경 내에 150개 이상의 서로 다른 민족이 살고 있었다. 총인구는 1991년, 연방 붕괴 직전에 3억으로 중국, 인도에 이어 당시 세계 제3위였다.

다수를 이루는 민족은 러시아인(50.78%)이고, 다음은 우크라이나인(15.45%), 우즈베크인(5.84%)의 순이었다. 그 이외에도 벨라루스인(3.51%), 카자흐인(2.85%), 아제리인(2.38%), 아르메니아인(1.62%), 타지크인(1.48%), 그루지야인(1.39%), 몰도바인(1.17%), 리투아니아인(1.07%), 투르크멘인(0.95%), 키르기스인(0.89%), 라트비아인(0.51%), 에스토니아인(0.36%), 기타(9.75%: 타타르인, 체첸인, 독일인, 야쿠트인, 바슈키르인, 유대인, 헝가리인 등)등의 민족이 있었다.

인구 증가율은 러시아 공화국발트 3국, 우크라이나 공화국에서는 낮았던 데 비해, 코카서스 3국과 몰다비아 공화국, 특히 중앙 아시아에서 비교적 높았다. 따라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러시아인이 소련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차차 낮아져 갔다.

언어와 종교

연방 차원의 공식적 언어는 없었으나 사실상 러시아어가 공용어 역할을 하면서 주로 사용되었다.

소련 정부는 '신을 주장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라는 레닌의 말에서 알 수 있듯, 공식적으로 무신론을 내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다양한 자료에 따르면 소련 인구의 1/3이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 중 대다수는 그리스도교이슬람교(대부분 수니파, 아제르바이잔인시아파)를 신봉하였다. 소수의 유대교, 불교, 라마교, 샤머니즘 신자도 있었다. 러시아 교회는 러시아 정교회가 다수이며 옛 소련시절 사제들과 주교들이 순교당하는 수난의 길을 걸었다. 스탈린시대에는 독일과의 전쟁을 지원하여 종교의 자유를 일부 허용받았으나, 정교회 사제들은 목회를 할 수 없었고, 어린이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은 인정되지 않았다. 그외 로마 가톨릭개신교도 존재했으며, 이중 개신교는 침례교, 루터교, 오순절교회 등의 교파들이 있다. 이들은 구 소련시절 살던 집에서 강제퇴거당하는등 차별을 받았다.

교육

모스크바 대학교.

소련의 교육체계는 11년제를 채택하고 있었으며, 교육비는 무료였다. 종합대학은 5년제, 단과대학은 4~6년제였다.

문화

소련의 헌법은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었으나, 사실상 검열에 의해 언론과 표현의 자유는 제약되었고 이중 출판은 공산주의 이념을 선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래서, 많은 문인(文人)과 예술가들이 서방으로 망명했다. 스탈린 정권하의 1932년의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공산주의 리얼리즘」의 방침을 제창했다. 이는 1930년대 전반기 동안에 문학이나 조각, 회화 등 모든 예술 분야의 작가 대회에서 공식적으로 채용되었다. 정부의 후원으로 소련은 발레와 클래식 음악(쇼스타코비치 등)에서도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또한 므라빈스키가 이끄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은 명연주를 남겼다.


프로파간다

프로파간다는 소련이 나라의 시민들의 애국심을 키우기 위해서 만든 일종의 이벤트다. 프로파간다를 위해 소련은 포스터, 라디오, 책, 미술 등에 소련을 나타내서 중앙유럽 국가들에다 설치했다. 소련의 프로파간다, 특히 레닌 시대의 프로파간다는 선구적인 것으로, 몽타주 이론이나 전위파 등이 그 대표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그 정교함은 나치 독일의 선전상 요제프 괴벨스도 극찬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스탈린 시대에 대부분의 프로파간다 전문가가 숙청된 뒤에는 차츰 쇠퇴하여 갔다.

외국 문화

서방에서 인기가 있던 로큰롤이나 헤비메탈, 재즈 등의 음악이나 할리우드 영화 등의 대중문화는 퇴폐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원칙적으로 금지되었다. 다만 유럽의 대중음악이나 공산주의 위성국과 일본, 미국 등지의 예술영화만이 상영이 허락되었다. 또한 외국의 라디오 방송을 듣는 것도 금지되었다.


국경일
날짜 한국어 이름 러시아어 이름 변경 사항
1월 1일 새해 Новый Год
2월 23일 소련군의 날 День Советской Армии и Военно-Морского Флота 1917년2월 혁명, 1918년 붉은 군대(Красная Армия)의 창설
3월 8일 국제 여성의 날 Международный Женский День
5월 1일 국제 노동자의 날 Первое Мая - День Солидарности Трудящихся
5월 9일 승리의 날 День Победы 1945년나치 독일을 몰락시킴
11월 7일-11월 8일 10월 혁명 Седьмое Ноября 1917년에 있었던 10월 혁명; День Примирения이라고도 불림.

소련의 주요 인물

같이 보기

바깥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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