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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파일:Johann Joachim Becher.jpg|thumb|right|230px|요한 요아힘 베커]]
{{포털/화학}}
'''요한 요아힘 베커'''({{llang|de|Johann Joachim Becher}}, [[1635년]] [[5월 6일]] ~ [[1682년]] 10월)은 [[독일]]의 [[화학자]], [[의사]], 학자이다.
 
== 생애 ==
=== 초년 ===
베커는 [[1635년]] [[슈파이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루터파의 목사였는데, 그가 어린 시절 때 사망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재혼하였으나, 양부는 아이들의 양육에 인색하여 베커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와 형제들을 부양해야했다. 베커는 수세공 기술을 익혔고, 갖가지 지식들을 공부하였다. 이와 함께 그는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기도 하여 약간의 돈을 벌기도 하였다. [[1660년]]에는 그가 저술한 ''Metallurgia''가 출판되었다. 다음해 그는 ''Character pro notitia linguarum universali''를 저술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세계 공용어로서 사용될 수 있는 10,000단어를 제안하였다. [[1663년]]에는 동물, 식물, 광물에 대한 책인 ''Oedipum Chemicum''을 출판하였다. 같은 시기에 그는 여러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중에서는 실용적인 것도, 실용적이지 않은 것도 있었다. 그는 팔라틴 선제후에게 [[만하임]]에 공장을 지을 것을 제안하기도 하였고, [[바이에른]] 선제후에게 [[기니]]와 [[서인도 제도]]를 식민지화 할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의 요청은 정부의 직조 산업과 교역의 독점을 야기한다고 하여 [[뮌헨]]의 상인들의 분노를 일으켰고, 베커는 [[뮌헨]]을 떠나야만했다.
 
=== 신성로마제국 ===
[[1666년]] 베커는 [[마인츠 대학교]]의 의학 강사로 취직할 수 있었고, 이와 동시에 대주교의 주치의가 되었다. 같은 해에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신성 로마 제국의 레오폴트 1세|레오폴트 1세]]의 수상이자 의전관인 [[진젠도르프 백작 알브레히트]]의 지원을 받아 그는 [[빈]]의 상업 고문관이 되었다. 그는 황제의 명으로 [[네덜란드]]로 떠나는 도중 ''Methodus Didactica''를 저술하였고, 이후 ''Regeln der Christlichen Bundesgenossenschaft'', ''Politischer Discurs von den eigentlichen Ursachen des Auf- und Abnehmens der Städte, Länder und Republiken''을 저술하였다. [[1669년]]에는 ''Physica subterrancea''를 저술하였고 같은 해 [[하나우]] 백작과 [[오리노코]]와 [[아마존 강]]의 영토를 식민지화하는 계획을 약조하였다. 그동안 그는 [[바이에른]] 선제후의 주치의를 맡기도 하였다. [[1670년]], 그는 다시 [[빈]]으로 불리어졌고 직조 공장의 설립 계획, 저지대 국가와 교역할 회사 설립에 대한 안, [[라인 강]]과 [[도나우 강]]을 이을 운하 건설안을 제안하였다. 그 후 그는 다시 바이에른으로 돌아왔다. 베커는 불완전한 상업 자문회와 취약한 교역로 등에 대해서 황제에게 건의하기도 하였다. [[1674년]] 구스타브스 아돌푸스 공작이 베커에게 그의 영지로 와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바로 다음해 베커는 빈으로 돌아와 바쁜 나날을 보냈다. 빈에서 그는 [[도나우 강]]의 모래를 [[금]]으로 바꾸는 방법을 연구하였고, 이에 대해서 ''Theses chemicae veritatem transmulationis metallorum evincentes''를 썼지만,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 영국 행 ===
어떠한 이유로 인해서 베커는 [[진젠도르프]] 백작의 원조를 잃게 되었고 [[네덜란드]]로 향해야했다. 그 곳에서 그는 정부의 지원을 받아 그의 실험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진젠도르프 백작의 압력으로 인하여 그는 [[잉글랜드]]로 건너가야 했다. 그 곳에서 그는 루퍼트 공의 요청으로 [[스코틀랜드]]의 광산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그 후 베커는 [[콘월]]에서도 같은 일을 반복하였다. [[1680년]] 초 그는 [[왕립 학회]]에 [[크리스티안 하위헌스]]가 진자로 시계를 측정하는 방법을 개발 한 것에 대한 공로를 독차지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논문인 ''De nova temporis dimetiendi ratione et accurata horologiorum constructione''를 제출하였다. [[1682년]] [[런던]]으로 돌아온 그는 ''Chemischer Glückshafen oder grosse Concordanz und Collection von 1500 Processen''을 출판하였고 같은 해 10월 사망하였다.
 
== 화학 이론 ==
베커의 연소에 대한 이론은 상당히 오랜시간동안 큰 변화없이 받아들여졌다. 그는 물질이 탈 때, ''terra pinguis''라는 물질이 방출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이론은 [[게오르그 에른스트 슈탈]]의 이론의 근간이 되었고, 슈탈은 이에 기초하여 [[플로지스톤설]]을 주장하였다.
 
== 같이보기 ==
*[[게오르그 에른스트 슈탈]]
*[[플로지스톤설]]
[[fr:Johann Joachim Becher]]
[[gl:Johann Joachim Becher]]
[[he:יוהןיוהאן יואכים בכר]]
[[ja:ヨハン・ベッヒャー]]
[[pl:Johann Joachim Bech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