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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
'''퇴레게네 카툰'''({{llang|mn|{{만몽 유니코드|ᠲᠥᠷᠡᠭᠡᠨᠡ<br>ᠬᠠᠲᠤᠨ}}|Töregene Khatun}}, {{한자|脫列哥那可敦|탈열가내 가돈}}, {{한자|朵列格捏可敦|단열각날 가돈}}, [[몽골]] [[키릴 문자]]:Дөргэнэ, [[키랄 문자]]:Туракина, [[1186년]] ~ [[1246년]] [[10월]])는 [[몽골 제국]]의 황후, 섭정으로섭정(재위:[[1241년]] [[12월 12일]]~[[1246년]] [[10월]])으로 [[나이만]] 부족 출신이였다. [[우구데이 칸]]의 황후이자 [[귀위크 칸]]의 어머니였다. [[우구데이 칸]]의 6황후였다가 [[1241년]] 그의 사후 [[1241년]] 그녀의 장남 [[귀위크 칸]]이 선출될 때까지 섭정하였다[[몽골 제국]]의 섭정이었다. [[나이만]]족 출신이라 '''내마진후'''(乃馬真后)라 부르기도 한다.
 
[[오고타이칸]]이 후계자로 지정한 시레문 대신, 자신의 아들 [[구유크]]를 대칸 적임자로 추천한 뒤 여러 몽골 부족장들을 설득, 책략을 통해 구유크를 칸으로 옹립했다. 그는 [[몽골 제국]]을 통치한 최초의 여성이다. [[시호]]는 '''소자황후'''(昭慈皇后)이다.
 
== 생애 ==
[[나이만]] 부족 출신으로 퇴레게네의 정확한 생일과, 친정 가계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퇴레게네는 외모가 아름다웠다 한다. 퇴레게네는 처음에는 [[칭기즈 칸]]의 두 번째 황후가 된 크란 하툰의 아버지 우하즈 [[메르키트족]]의 족장 다이루 우슨의 비였다가 칭기즈 칸의 메르키트 토벌시에 포로가 되어 [[오고타이 칸]]의 부인이 되었다.
 
일설에는 [[메르키트족]]의 족장 [[토크토아 베키]]의 아들 쿠투(1217년 사망)의 부인이었다고도 한다.<ref name="P. Atwood p.544">C.P. Atwood ''Encyclopedia of Mongolia and the Mongol Empire'', p. 544</ref><ref>{{Citation|title=Töregene|date=2018|url=https://www.cambridge.org/core/books/women-and-the-making-of-the-mongol-empire/toregene/3AB147D1C4DC5D78B57FD0DDA79E4D18|work=Women and the Making of the Mongol Empire|pages=164–194|editor-last=Broadbridge|editor-first=Anne F.|series=Cambridge Studies in Islamic Civilization|place=Cambridge|publisher=Cambridge University Press|doi=10.1017/9781108347990.007|isbn=978-1-108-44100-1|access-date=2021-02-01}}</ref> [[라시드 알 딘]]은 퇴레게네의 첫 남편을 메르키트의 다이루 우슨이라 했다.<ref> Fazlullah, Rashiduddin (1998). Jami`u't-tawarikh: Compendium of Chronicles (A History of the Mongols). Harvard University. p. 53.</ref> [[1204년]] [[칭기즈 칸]]이 [[메르키트족]]을 정벌할 때 퇴레게네는 칭기즈 칸에게 붙잡혀 칭기즈 칸의 셋째 아들인 [[오고타이]]에게 주어졌다.
 
오고타이 칸의 6번째 부인이었지만 용감하고 지적이며, 유능하고 매력적인영리한 인물이라 오고타이의 다른 비빈들을 제치고 오고타이의 총애를 받아, 귀위크, 쿠투쿠, 호르차르, 카라카르 등 아들 다섯을 낳아 주었다. 일설에는 [[코단]]도 퇴레게네의 소생이라는 설이 있다. [[오고타이]]가 칸이 된 뒤 정확한 책봉 시점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보락친 카툰]] 대신 정궁 황후로 승격되었다. 퇴레게네는 오고타이의 정책에도 관여, 영향을 행사하려 했고 [[이슬람]] 상인 출신 [[압둘 라흐만]]을 추천하기도 했다. 오고타이 칸은 그녀의 건의를 받아들여, 압둘 라흐만을 만나 면담한 뒤 중국 북부지역의 세무 관리자로 임명하였다. 퇴레게네는 무슬림 상인들과 매우 가깝게 지냈으며, 이들을 점령지의 세무 관리자, 총독 등으로 여러명 발탁, 임명하였다.
 
[[오고타이]]의 치세 후반 오고타이는 [[갈색]] [[포도주]]에 중독되면서, 퇴레게네는 몽골 제국의 정치사무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일설에는 퇴레게네가 오고타이 치세 말년에는 국가원수 역할이었다고도 한다.
 
=== 귀위크 추대 운동 ===
퇴레게네는 이에 반발하여 자신의 아들 [[귀위크]]를 후계자로 정할 것을 요구했으나, [[오고타이 칸]]은 거절하였다. 퇴레게네는 여러 번 [[오고타이 칸]]을 설득하였으나, 오고타이의 결정을 바꾸지 못했다.
 
오고타이는 1241년 가을 사냥을 나갔다가, 그해 [[12월 11일]] 과도한 음주로 인한 [[알콜 중독]]성 병으로 갑자기 사망했다. 오고타이의 죽음을 암살로 추정하는 이들도 있다. 그녀는 제국내의 다양한 경쟁 권력의 균형을 맞추고, 5년 동안 전 [[몽골 제국]]을 다스렸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아들 [[귀위크 칸]]이 즉위할 무대를 설정하였다.
 
[[1241년]] [[오고타이 칸]]이 죽자 우구데이의 숙부로 칭기즈 칸의 막내동생인 [[테무게|테무게 옷치긴]]이 대칸의 유궁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이끌고 우구데이의 황후들이 거처하는 오르두(행궁)로 오자, "우리는 당신의 의붓딸이며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다. 무장한 많은 군대를 이끌고 온 것은 무슨 까닭인가? 왜 모든 백성과 군대를 불안하게 만드는가?"<ref>Rashid al-Din, J. A. Boyle tr., The Sucessors of Genghis Khan, Columbia University Press, 1971, 178쪽.</ref>라는 항의하며 거절하였다. 앞서 서방 원정을 나갔던 우구데이의 아들 [[구유크]]가 도착했다는 보고를 듣고 테무게는 대칸의 자리를 포기, 퇴레게네 카툰에게 우구데이에 대한 조의를 전하고 철군하였다. 이러한 옷치긴의 거병은 앞서 우구데이가 옷치긴에 대해 시행했던 중앙집권정책에 수반한 강한 견제책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ref>김호동 「구육과 그의 시대」 『근세 동아시아의 국가와 사회』 일조각, 1998, 123~124</ref> 퇴레게네는 아들 [[귀위크]]를 빨리 [[카라코룸]]으로 오게 했다. [[테무게 옷치킨]]은 오고타이의 조문을 왔다는 핑계를 대고 만주로 되돌아갔다.
 
=== 몽골의 섭정 ===
[[1241년]] [[12월 11일]] [[오고타이 칸]]이 사냥 도중 술병으로 갑자기 죽자 퇴레게네는 시레문이 아직 유년이라는 이유로, 그의 제위 계승을 반대하였다. 차기 칸이 옹립될 때가지 몽골의 통치자가 누가 되느냐가 곧 쟁점이 되었고, [[차가타이]]는 퇴레게네를 지지했다. 퇴레게네는 [[차가타이]]의 지원과, 자신의 아들들의 지원으로 [[몽골 제국]]의 섭정이 되어 임조칭제 하였다. 오고타이의 일부 측근들은 퇴레게네에게 퇴레게네는 국가를 책임지고 있는 인물이며, 시레문을 지지하고 추대할 것을 건의하였다. 퇴레게네는 시레문이 어리다는 이유로 이들의 요구를 거절했다.
 
퇴레게네는 섭정으로서 완전한 권력을 쥐었으며, [[야율초재]], [[친친카이]], [[마흐무드 아라와치]] 등의 재상들을 해고했으며, 오고타이가 임명한 관료들을 해고하고 그녀 자신의 인물로 대체하였는데, 가장 중요한 인물은 [[무슬림]] 출신 상인 [[압둘 라흐만]], 타지크 또는 페르시아 여인으로 중동 원정에서 포로로 온 파티마였다. 퇴레게네는 자신의 측근 인물들을 통해 귀위크가 칸의 적임자라는 여론을 조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