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레게네 카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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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5월 21일 (금) 20:26 판

퇴레게네 카툰
ᠲᠥᠷᠡᠭᠡᠨᠡ
ᠬᠠᠲᠤᠨ
몽골 대카툰
재위 ?–1246년
전임 보락친 카툰
후임 오굴 카미시 카툰
몽골의 섭정
재위 1241년–1246년
전임 오고타이 칸
후임 구유크 칸
이름
나이만 퇴레게네 (몽골어: ᠨᠠᠶᠢᠮᠠᠨ
ᠲᠥᠷᠡᠭᠡᠨᠡ
, 한국 한자: 乃马真 脱列哥那 내마진 탈열가내)
시호 소자황후 (昭慈皇后)
신상정보
사망일 1246년 10월
사망지 오고타이 속령 에밀
왕조 몽골 제국
가문 나이만부
배우자 다이르우순우구데이 칸
자녀 귀위크 칸

퇴레게네 카툰(몽골어: ᠲᠥᠷᠡᠭᠡᠨᠡ
ᠬᠠᠲᠤᠨ
Töregene Khatun, 한국 한자: 脫列哥那可敦 탈열가내 가돈, 1186년 ~ 1246년 10월)는 몽골 제국의 황후, 섭정으로 나이만 부족 출신이였다. 우구데이 칸의 6황후였다가 1241년 그의 사후 1241년 그녀의 장남 귀위크 칸이 선출될 때까지 섭정하였다.

오고타이칸이 후계자로 지정한 시레문 대신, 자신의 아들 구유크를 대칸 적임자로 추천한 뒤 여러 몽골 부족장들을 설득, 책략을 통해 구유크를 칸으로 옹립했다.

생애

정확한 생일과 친정 가계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퇴레게네는 처음에는 칭기즈 칸의 두 번째 황후가 된 크란 하툰의 아버지 우하즈 메르키트족의 족장 다이루 우슨의 비였다가 칭기즈 칸의 메르키트 토벌시에 포로가 되어 오고타이 칸의 부인이 되었다. 일설에는 메르키트족의 족장 토크토아 베키의 아들 쿠투의 부인이었다고도 한다. 오고타이 칸의 6번째 부인이었지만 그의 총애를 받아, 오고타이의 아들들 다섯을 낳아 주었다.

오고타이 칸보라쿠친 카툰 소생 쿠추를 후계자로 지명하였으나, 1234년 11월 쿠추가 남송 원정 중 덕안부에서 전사했다. 오고타이 칸은 쿠추의 아들 시레문을 후계자로 지정하였다. 또한 오고타이 칸은 툴루이 가문의 몽케를 잠재적 후계자로도 보았다.

퇴레게네는 이에 반발하여 자신의 아들 귀위크를 후계자로 정할 것을 요구했으나, 오고타이는 거절하였다. 오고타이는 1241년

가을 사냥을 나갔다가, 그해 12월 과도한 음주로 인한 알콜 중독성 병으로 갑자기 사망했다. 그녀는 제국내의 다양한 경쟁 권력의 균형을 맞추고, 5년 동안 전 몽골 제국을 다스렸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아들 귀위크 칸이 즉위할 무대를 설정하였다. 

1241년 오고타이 칸이 죽자 우구데이의 숙부로 칭기즈 칸의 막내동생인 테무게 옷치긴이 대칸의 유궁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이끌고 우구데이의 황후들이 거처하는 오르두(행궁)로 오자, "우리는 당신의 의붓딸이며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다. 무장한 많은 군대를 이끌고 온 것은 무슨 까닭인가? 왜 모든 백성과 군대를 불안하게 만드는가?"[1]라는 항의하며 거절하였다. 앞서 서방 원정을 나갔던 우구데이의 아들 구유크가 도착했다는 보고를 듣고 테무게는 대칸의 자리를 포기, 퇴레게네 카툰에게 우구데이에 대한 조의를 전하고 철군하였다. 이러한 옷치긴의 거병은 앞서 우구데이가 옷치긴에 대해 시행했던 중앙집권정책에 수반한 강한 견제책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2] 테무게 옷치킨은 오고타이의 조문을 왔다는 핑계를 대고 만주로 되돌아갔다.

퇴레게네는 섭정으로서 완전한 권력을 쥐었으며, 야율초재, 친친카이, 마흐무드 아라와치 등의 재상들을 해고했으며, 오고타이가 임명한의 관료들을 해고하고 그녀 자신의 인물로 대체하였는데, 가장 중요한 인물은 무슬림 출신 상인 압둘 라흐만, 타지크 또는 페르시아 여인으로 중동 원정에서 포로로 온 파티마였다.

몽골은 일부다처제를 시행하였는데 오고타이 칸이 선호했던 코추는 다른 아내를 통해 얻었다. 그는 코추의 아들 시레문으로 자신을 계승하게 지명하였다.

퇴레게네는 반대하고 귀위크를 선택할 것을 설득하였으나 오고타이에게 거절당했다. 그러나 그녀는 책략으로 야망을 달성하였다.

오고타이 사후 그녀는 그녀의 세력이 확고해질 때까지 쿠릴타이를 여는 것을 미루었다. 퇴레게네는 오고타이가 지명한 후계자 시레문은 아직 성인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후계자에서 배제하고, 자신의 아들 귀위크가 대칸 적임자로 정했다. 퇴레게네는 1242년부터 쿠릴타이 소집을 지시했다. 킵차크 한국의 칸 바투귀위크의 즉위를 반대, 퇴레게네의 쿠릴타이 소집 명령에 응하지 않고 불참했다.

퇴레게네는 권력을 그녀의 아들 귀위크 칸에게 1246년에 건네고 2개월 만에 죽었다. 귀위크와 동유럽 원정에서 반목을 일으킨 바투, 그밖에 툴루이 가문의 몽케 등은 귀위크의 즉위에 대한 불만이 높아져, 제국의 권력 투쟁은 증폭되어갔다. 후일 몽골 제국 분열의 한가지 요인이 되었다. 쿠빌라이 칸이 태묘를 설치하고 추서한 중국식 시호소자황후(昭慈皇后)이다.

가계

퇴레게네가 등장한 작품

각주

  1. Rashid al-Din, J. A. Boyle tr., The Sucessors of Genghis Khan, Columbia University Press, 1971, 178쪽.
  2. 김호동 「구육과 그의 시대」 『근세 동아시아의 국가와 사회』 일조각, 1998, 123~124
전임
보락친 카툰
몽골 제국 황후
? ~ 1246년
후임
오굴 카미시 카툰
전임
남편 오고타이 칸
몽골 제국의 섭정
1241년 12월 14일 ~ 1241년 12월 13일
후임
아들 구육 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