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퓌러 대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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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퓌러 대리'''(指導者Führer 代理, {{llang|de|Stellvertreter des Führers|슈텔페르트레터 데스 퓌러스}})는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 당수인 "지도자퓌러({{lang|de|Führer}})" [[아돌프 히틀러]]의 부관직이다. 히틀러가 국가원수로서 사용한 직함인 "지도자 겸 국가수상"을 흔히 "[[나치 독일의 총통퓌러|총통]]"이라고 하기 때문에 지도자퓌러 대리 역시 흔히 "부총통"으로 번역되지만, 이 직책은 국가 공직이 아닌 나치 당직이었기 때문에 차라리 "부당수"가 맞다. 이 직책을 역임한 사람은 [[루돌프 헤스]]가 유일하다.
 
1933년 나치당이 권력을 장악하자 최고 지도자인 [[아돌프 히틀러|히틀러]]는 [[독일의 수상|수상]]으로 취임하여 행정부 업무까지 담당하게 되었기에 지도자퓌러 대리인 헤스가 당내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로 부상했다. 헤스는 당무를 책임지고 또한 당과 입법부 사이의 조율 역할을 했다. 지도자퓌러 대리는 매년 열리는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의 주최자 자격을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 [[강제적 동일화]] 정책으로 나치 당직들과 국가 공직들이 통합됨에 따라 각 간부들은 히틀러에게 직접 보고를 하게 되었고, 1939년이 되면 지도자퓌러 대리로서 헤스의 역할은 당 행사를 주최하는 의전 담당자로 축소되었다. 헤스는 뮌헨에 약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베를린에서는 거의 무시당하는 사람이 되었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이후 헤스는 히틀러의 관심사에 대해 [[마르틴 보어만]]과의 협조를 통해야만 관여할 수 있게 되었다. 헤스는 아직 SS 소속이었지만 [[SS국가지도자]]였던 [[하인리히 힘러]] 역시 헤스에게 아무런 일도 맡기지 않았다. 정치적 거세에 절망한 헤스는 영국과의 평화회담을 이끌어내 국가적 영웅이 되겠다는 망상을 품고 1941년 5월 10일 작은 비행기 한 대를 타고 혼자서 [[스코틀랜드]]로 건너갔다. 그러나 영국은 헤스를 그 자리에서 체포했고, 히틀러는 이틀 뒤인 5월 12일 지도자퓌러 대리 직책을 폐지하고 [[나치 당수부|당수부]]를 대신 설치, 보어만을 당수부장에 임명한다.
 
== 참고 자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