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포에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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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인생에 있서 포에르는 에마뉘엘 무니에 (Emmanuel Mounier) 의 [[인격주의]] 영향을 받았다. [[1938년]] 그는 재정 경재산업부 ({{llang|fr|Ministère de l'Économie, des Finances et de l'Industrie}})에 들어갔으며,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프랑스 국내군|레지스탕스]]들과 접촉 업무를 맡아 해방 후에도 재정경재산업부에 남는다.
정치 인생에 있서 포에르는 에마뉘엘 무니에 (Emmanuel Mounier) 의 [[인격주의]] 영향을 받았다. [[1938년]] 그는 재정 경재산업부 ({{llang|fr|Ministère de l'Économie, des Finances et de l'Industrie}})에 들어갔으며,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프랑스 국내군|레지스탕스]]들과 접촉 업무를 맡아 해방 후에도 재정경재산업부에 남는다.


해방기에 재정경재산업부의 사회부서 책임자인 그는 재정경재산업부의 장관이었던 [[로베르 쉬망]]과 긴밀한 관계가 되었고, [[1948년]]부터 [[1952년]]까지 전후 그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관한 문제의 책임자로 일했다. 또한 [[독일]] [[:en:Ruhr Area|루르 지역]]의 비무장화를 감독하는 국제 관리 기관({{llang|fr|Autorité internationale de la Ruhr}}) 관리하였다.
해방기에 재정경재산업부의 사회부서 책임자인 그는 재정경재산업부의 장관이었던 [[로베르 쉬망]]과 긴밀한 관계가 되었고, [[1948년]]부터 [[1952년]]까지 전후 그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관한 문제의 책임자로 일했다. 또한 [[독일]] [[:en:Ruhr Area|루르 지역]]의 비무장화를 감독하는 국제 관리 기관({{llang|fr|Autorité internationale de la Ruhr}}) 관리하기도 했으며, [[1945년]]부터 [[1983년]] 사이에 자신의 고향인 [[파리 (도시)|파리]] 근교의 압롱 쉬르 센의 시장 직도 역임하였다.

[[1945년]]부터 [[1983년]]사이에 그는 역시 그의 고향인 [[파리 (도시)|파리]] 근교 압롱 쉬르 센의 시장직도 역임했다.


===상원에서의 50년===
===상원에서의 50년===
그는 [[1946년]] [[프랑스 상원]]에 들어갔고 이후 [[1948년]]과 [[1952년]]사이의 기간을 제외하고 [[1995년]]까지 연이어 재선된다. 또 그는 공화국민운동({{llang|fr|Mouvement républicain populaire}})의 [[프랑스 상원]] 원내대표직도 수행했었다. 알랭 포에르는 [[로베르 쉬망]] 2기 내각과 [[:en:Henri Queuille|앙리 쾨이]] 1기 내각의 예산부 장관직을 [[1948년]] [[9월 5일]]부터 [[11월 20일]]까지 수행했고 [[1957년]] [[11월 11일]]부터 [[1958년]] [[5월 14일]]까지 [[:en:Félix Gaillard|펠릭스 가이아르]]의 내각에서는 해양부장관으로 일했다. 그리고 알랭 포에르는 [[프랑스]] 4공화국의 '''끝, 종결?''' 작업에 참여했다.
그는 [[1946년]] [[프랑스 상원]]에 들어갔으며, 이후 [[1948년]]과 [[1952년]] 사이의 기간을 제외하곤 [[1995년]]까지 연이어 재선되었다. 또 그는 공화국민운동({{llang|fr|Mouvement républicain populaire}})의 [[프랑스 상원]] 원내 대표직도 수행했었다. 알랭 포에르는 [[로베르 쉬망]] 2기 내각과 [[:en:Henri Queuille|앙리 쾨이]] 1기 내각의 예산부 장관직을 [[1948년]] [[9월 5일]]부터 [[11월 20일]]까지 수행했으며, [[1957년]] [[11월 11일]]부터 [[1958년]] [[5월 14일]]까지 [[:en:Félix Gaillard|펠릭스 가이아르]]의 내각에서는 해양부장관으로 일했다. 그리고 알랭 포에르는 [[프랑스]] [[프랑스 제4공화국]]의 마무리 작업에 참여하였다. {{모호}}

===임시대통령과 대선후보===


===프랑스 임시 대통령과 대선 후보===
그는 [[프랑스 상원]]에서 [[1968년]] [[10월 3일]]부터 [[1992년]] [[10월 1일]]까지 의장으로 있었다.
그는 [[프랑스 상원]]에서 [[1968년]] [[10월 3일]]부터 [[1992년]] [[10월 1일]]까지 의장으로 있었다.



2009년 2월 20일 (금) 13:02 판

알랭 포에르(Alain Poher, 1909년 4월 17일 압롱 쉬르 센 (프랑스어: Ablon-sur-Seine) ~ 1996년 12월 9일 파리) 는 프랑스의 정치인이다. 공화국민운동 (프랑스어: Mouvement républicain populaire) 의 당원으로 그는 1968년부터 1992년까지 상원 의장을 지냈고, 1969년부터 1974년까지 프랑스 공화국의 임시 대통령직을 수행하였다.

인물과 경력

알랭 포에르는 브르타뉴 공작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브르타뉴 출신의 중산 가정 출신으로, 그는 프랑스 국립광업학교 출신의 공학 기술자였다.

정치 인생의 시작

정치 인생에 있서 포에르는 에마뉘엘 무니에 (Emmanuel Mounier) 의 인격주의 영향을 받았다. 1938년 그는 재정 경재산업부 (프랑스어: Ministère de l'Économie, des Finances et de l'Industrie)에 들어갔으며,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레지스탕스들과 접촉 업무를 맡아 해방 후에도 재정경재산업부에 남는다.

해방기에 재정경재산업부의 사회부서 책임자인 그는 재정경재산업부의 장관이었던 로베르 쉬망과 긴밀한 관계가 되었고, 1948년부터 1952년까지 전후 그는 독일오스트리아에 관한 문제의 책임자로 일했다. 또한 독일 루르 지역의 비무장화를 감독하는 국제 관리 기관(프랑스어: Autorité internationale de la Ruhr) 을 관리하기도 했으며, 1945년부터 1983년 사이에 자신의 고향인 파리 근교의 압롱 쉬르 센의 시장 직도 역임하였다.

상원에서의 50년

그는 1946년 프랑스 상원에 들어갔으며, 이후 1948년1952년 사이의 기간을 제외하곤 1995년까지 연이어 재선되었다. 또 그는 공화국민운동(프랑스어: Mouvement républicain populaire)의 프랑스 상원 원내 대표직도 수행했었다. 알랭 포에르는 로베르 쉬망 2기 내각과 앙리 쾨이 1기 내각의 예산부 장관직을 1948년 9월 5일부터 11월 20일까지 수행했으며, 1957년 11월 11일부터 1958년 5월 14일까지 펠릭스 가이아르의 내각에서는 해양부장관으로 일했다. 그리고 알랭 포에르는 프랑스 프랑스 제4공화국의 마무리 작업에 참여하였다. [모호한 표현]

프랑스 임시 대통령과 대선 후보

그는 프랑스 상원에서 1968년 10월 3일부터 1992년 10월 1일까지 의장으로 있었다.

그리고 또한 2번 프랑스공화국 임시대통령직을 맡았다. 첫번째로 1969년 4월 28일부터 6월 16일까지 샤를 드 골의 사임으로 대통령 대리직을 맡았다. 샤를 드 골의 사임을 이후 1969년 프랑스 대선후보로써, 그는 2차 선거에서 조르주 퐁피두 후보와 경쟁을 하였다. 알랭 포에르는 5 268 613표(23,31 %)를 1차 선거에서 획득하였고 2차 선거에서는 7 943 118표(41,79 %)를 얻었다. 1차 선거에서 3위를 한 프랑스 공산당의 자크 뒤클로(Jacques Duclos)는 2차 선거에서 조르주 퐁피두와 알랭 포에르, 두 후보 중 어떤 후보도 지지하지 않았다. 포에르는 비 샤를 드 골계 우파와 사회당 지지자들로 부터 지지를 받았다.

두번째 대통령 대행직은 조르주 퐁피두대통령의 죽음 이후 대통령선거 이전인 1974년 4월 2일부터 5월 24일사이에 수행되었다.

알랭 포에르는 자서전에서 샤를 드 골 정부의 내각을 그대로 받아들였기때문에 자신의 1차 대통령 대행기가 '역사상' 첫번째 동거 정부라고 밝혔다.

권력에 대한 열광

프랑스 상원의 의장 자격으로 그는 샤를 드 골의 사임후 대통령 대행직을 수행했다. 권력에 대한 집착은 1969년 4월 28일 엘리제궁로 그를 안내했다. 사임하는 샤를 드 골 대통령은 알랭 포에르에게 권력을 이양했다. 알랭 포에르의 대통령직은 6월 19일로 끝났다. 1969년 조르주 퐁피두에 대항한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하였기때문에 그는 결국 대통령이 되지 못했다. 조르주 퐁피두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는 다시 한번 대통령 대행직을 수행한다. 하지만 이번에도 다시한번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와의 대선에서 패배한다.

친유럽 정책

그의 인생기간 동안, 알랭 포에르는 친유럽 정책에 매우 열의를 나타냈다. 알랭 포에르는 그의 두번째 대통령 대행직 수행기간동안 유럽인권조약의 비준을 위한 기회로 삼았다. 프랑스는 이 조약에 1950년서명 하였으나 권력을 잡은 샤를 드 골계 우파 인사들때문에 비준이 되어지지 않았다. 알랭 포에르는 대통령 대행으로써 유럽인권조약을 비준시켰다. 상징적으로 알랭 포에르는 1974년 5월 6일 25주년을 맞는 유럽 평의회에서 연설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