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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삼국사기]]》에 따르면 [[개루왕]]의 아들(서자)로 보나, 《[[삼국사기]]》의 다른 기록 및 《[[삼국유사]]》에는 [[초고왕]]의 외삼촌이라 되어 있어 논란이 있으며, [[초고왕]] 사후 20년 뒤에 즉위하여 그때로부터 다시 50년을 재위하였으므로 [[초고왕]]의 동생 여부에 이견이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구수왕]]이 죽은 뒤 구수왕의 장자인 [[사반왕]]이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어려서 정사를 감당하지 못하자, 사반왕을 강제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랐다.
 
그는 재위 기간 중 괴곡(槐谷: [[충청북도]] 괴산군)·[[봉산]](烽山: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을 중심으로 영토를 확장 중이던 [[신라]]가 자주 침공했고 한사군의 후신인 [[낙랑]], 강원도 북부의 [[말갈]]과도 충돌하며 나라가 불안정하였다. 또한 남옥저의 일부를 점령하고, 중국 대륙의 서진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대방과는 혼인을 통해 휴전을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재위 13년([[246년]]) [[위 (삼국)|위나라]]가 낙랑군(樂浪軍)과 삭방(朔方)과 합공해 [[고구려]]와 전쟁을 벌이는 틈을 타서 낙랑군의 변방을 침입하였다. 또한, [[한나라]]와 낙랑군, 대방군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을 때 대방군을 기습하여 대방태수 궁준을 전사하게 한 사건의 배후에 백제가 있었음이 추측된다.
 
관리로서 재물을 받은 자와 남의 것을 도둑질한 자에게는 3배를 징출(徵出)케 하는 동시에 종신 금고(禁錮)에 처한다는 법령을 내렸다.
 
== 평가 ==
한강 유역의 부족들이 백제족을 중심으로 결속하면서 백제는 부족 국가로 성장하게 되었다.
 
== 가계 ==
고이왕의 이름은, 《주서》 및 《수서》의 백제전에 시조라 기록된 '[[구태]](仇台)'라는 이름을 ‘구이’로 읽어서 ‘고이’와 음운상으로 통한다고 보아 ‘구이=고이’로 해석함으로써 고이왕을 백제의 건국자로 보는 견해가 있다([[이병도]]). 반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고이왕을 “초고왕모제(肖古王母弟)”라고 한 것을 ‘초고왕 어머니의 동생’으로 해석하여<ref>김성호, 김상한 저, 《한중일 국가기원과 그 역사》 맑은소리, 2008, p.155</ref>, 고이왕은 온조왕계와는 계보를 달리하는 우태(優台) - 비류계(沸流系) 출신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ref> 천관우는 백제계를 "우태(優台)-비류(沸流)-고이계(古爾系)"와 "주몽(朱蒙)-온조(溫祚)-초고계(肖古系)"로 보았다. </ref>
 
== 가계 ==
** 모후 : 미상
*** 형 : [[초고왕|초고]](肖古), 이설 있음<ref>고이왕과의 나이 차이 때문에 동생인지에 대해 논란이 있다.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증오판)》웅진닷컴, 2004, p.95</ref>
*** 국왕 : [[고이왕|고이]](古尒, ? ~286, 재위:234~286), 이설 있음<ref> 고이왕은 초고왕과의 나이 차이 때문에 개루왕의 둘째 아들인지에 대해 논란이 있다.</ref>
**** 아들 : [[책계왕|책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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