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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 마한은 백제에 완전히 정벌 됐기 때문에 신라 삼국통일 이후에는 마한이 아닌 백제만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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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성 ==
== 구성 ==
보덕국은 일명 후고려국으로 불렸고 신라에 망명한 고구려 왕족과 고구려 유민이 주축이 되었으며 지리적으로는 백제 유민들의 근거지였고, [[마한]] 세력도 존재하였다. 그래서 [[당나라]]가 [[고구려]] 유민들을 포로로 데려가자, 반대로 [[신라]]는 고구려 유민들을 신라 영토로 이주시키면서 보덕국을 세우고 마한과 연합하게 하였다.
보덕국은 일명 후고려국으로 불렸고 신라에 망명한 고구려 왕족과 고구려 유민이 주축이 되었으며 지리적으로는 백제 유민들의 근거지였다. 그래서 [[당나라]]가 [[고구려]] 유민들을 포로로 데려가자, 반대로 [[신라]]는 고구려 유민들을 신라 영토로 이주시키면서 보덕국을 세우고 마한과 연합하게 하였다.


[[검모잠]]은 [[연개소문]]의 가장 깊은 교우가 있었던 인물로, 보덕국을 실제 통치하던 세력은 [[보덕왕]]과 검모잠이었다. [[신라]]본기와 [[고구려]]본기를 종합해보면 검모잠과 [[연정토]] 일가가 보덕국의 실지배 계층이다. [[연개소문]] 가문이 고구려 후기에 실질적으로 왕권을 행사하던 세력이므로 [[보덕왕]]이 [[연정토]]의 아들이라고 하여도 실제로는 고구려 왕족과 대등하였다.
[[검모잠]]은 [[연개소문]]의 가장 깊은 교우가 있었던 인물로, 보덕국을 실제 통치하던 세력은 [[보덕왕]]과 검모잠이었다. [[신라]]본기와 [[고구려]]본기를 종합해보면 검모잠과 [[연정토]] 일가가 보덕국의 실지배 계층이다. [[연개소문]] 가문이 고구려 후기에 실질적으로 왕권을 행사하던 세력이므로 [[보덕왕]]이 [[연정토]]의 아들이라고 하여도 실제로는 고구려 왕족과 대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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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대군주 ==
== 역대군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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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덕국]] 군주와 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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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부 링크 ==
== 외부 링크 ==

2020년 8월 24일 (월) 10:31 판

보덕국, 고려
報德國, 高麗

674년~683년
수도금마저(전라북도 익산시)
정치
정치체제통일신라괴뢰국
군주제
보덕왕(報德王)
7000명
종교
종교불교, 무속신앙
기타
현재 국가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보덕국(報德國, 674∼683)은 고구려 멸망 후 674년, 신라의 문무왕이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의 아들 안승(安勝)을 보덕국왕(報德國王)으로 봉하고 신라의 금마저를 식읍으로 하사하자, 이에 안승이 고구려 유민들을 모아 전라북도 익산 지역에 세운 나라이다. 9년 간 지속하다가 다시 통일신라에 편입되었다.

역사

보덕왕(報德王) 고안승(高安勝)은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의 서자(庶子), 또는 외손(신라본기에는 연정토의 아들)이자. 횡성 고씨(橫城 高氏) 중시조 고인승의 동복동생이다. 고구려 유민의 왕으로 추대될 정도이니 보장왕의 아들이라는 설이 통설이다. 안승이 황해도 재령 지방에서 고구려를 다시 세우기 위해 당나라에 투쟁하면서 신라의 도움을 청하였다.

그 뒤 신라와 연합하여 함께 당나라에 맞서다가 고구려 부흥군이 전멸하여 신라로 망명하였다. 그러자 신라문무왕은 그에게 금마저(金馬渚 : 전라북도 익산)를 하사하고 보덕국왕(報德國王)으로 책봉하였다. 이는 신라고구려 유민을 흡수하고 당나라를 한반도에서 몰아내기 위해 편 화합 정책의 하나였다. 이후 보덕국은 신라를 도와 매소성에서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었다. 683년(신문왕 3)에 보덕국왕 안승이 신라의 신문왕의 딸과 혼인하기 위해 경주에 올라간 사이 안승의 부하 대문(大文)과 실복(悉伏)이 일으킨 반란이 진압된 후 신라에 편입되었다. 그 뒤 멸망한 고구려의 귀족들은 남국주현으로 옮겨져 6두품의 신분으로 신라 귀족이 되었다.

국호

보덕왕(報德王)은 보장왕의 서자인 왕족이고 보덕왕의 세력은 고구려계 유민들과 귀족들이었기 때문에 고구려를 계승해 고려(高麗) 국호를 사용하였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사료에도 보덕국일본에게 고려(高麗) 국호를 내세워 사신을 보낸 것이 기록되어있으며 일본도 이에 화답해 "견고려사"라는 이름의 사신단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교류

보덕국(報德國)은 신라에 망명한 고구려 왕족과 고구려 유민이 주축이 된 신라의 속국이었지만, 일본과 고려(高麗) 국호를 내걸고 교류를 하기도 하였다. 또한 위두대형과 같은 고구려의 관직체계를 사용했으며, 일본은 보덕국을 고구려의 후신으로 인식하고 '견고려사'(遣高麗使)라는 명칭으로 사신을 보냈다. 일본에서의 마지막 견고려사(遣高麗使)는 685년 5월 28일에 파견되었다.

구성

보덕국은 일명 후고려국으로 불렸고 신라에 망명한 고구려 왕족과 고구려 유민이 주축이 되었으며 지리적으로는 백제 유민들의 근거지였다. 그래서 당나라고구려 유민들을 포로로 데려가자, 반대로 신라는 고구려 유민들을 신라 영토로 이주시키면서 보덕국을 세우고 마한과 연합하게 하였다.

검모잠연개소문의 가장 깊은 교우가 있었던 인물로, 보덕국을 실제 통치하던 세력은 보덕왕과 검모잠이었다. 신라본기와 고구려본기를 종합해보면 검모잠과 연정토 일가가 보덕국의 실지배 계층이다. 연개소문 가문이 고구려 후기에 실질적으로 왕권을 행사하던 세력이므로 보덕왕연정토의 아들이라고 하여도 실제로는 고구려 왕족과 대등하였다.

멸망

683년(신문왕 3)에 보덕왕이 신라의 투항해 신문왕의 딸과 혼인하기 위해 경주에 올라간 사이 보덕왕의 부하 대문(大文)과 실복(悉伏)이 일으킨 반란이 진압된 후 신라에 편입되었다. 그 뒤 멸망한 보덕국(報德國)의 고구려계 귀족들은 남국주현으로 옮겨져 6두품의 신분으로 신라 귀족이 되었으며, 보덕국의 고구려계 백성들은 686년 신라의 중앙군 벽금서당과 적금서당으로 편입되었다.

역대군주

보덕국 군주와 연호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 기간 비고 능호
제1대 - 보덕왕
(報德王)
고안승
(高安勝)
- 674년 ~ 683년 고구려 마지막 왕 보장왕의 서자 -


외부 링크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신라의 삼국통일〉" 항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