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내현: 두 판 사이의 차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May2030 (토론 | 기여)
링크 수정.
May2030 (토론 | 기여)
저서 추가 기입, 그리고 문구수정.
129번째 줄: 129번째 줄:
*《중국사2》, 민음사, 1992
*《중국사2》, 민음사, 1992
*〈중부내륙 고속도로 문화유적 지표조사보고서〉, 《연구소총서》 1책, 1992
*〈중부내륙 고속도로 문화유적 지표조사보고서〉, 《연구소총서》 1책, 1992
*〈갑골문에 나타난 고대 중국인의 신앙〉, 《승가》 제10집, 1993
*〈고조선의 경제적 기반〉, 《백산학보》 41호, 1993
*〈고조선의 종교와 그 사상〉, 《동양학》 제23집, 1993
*〈고조선의 종교와 그 사상〉, 《동양학》 제23집, 1993
*〈인류사회진화상의 고조선 위치〉, 《사학지》 제26집, 1993
*〈정선 덕천리 소골 유적(1): 고인돌 발굴보고〉, 《고적조사보고서》 17권, 1993
*《[[고조선 연구]]》, 일지사, 1994
*《[[고조선 연구]]》, 일지사, 1994
*〈한민족의 형성과 출현〉, 《사학지》 제27집, 1994
*〈고구려의 이동과 건국〉, 《백산학보》 45호, 1995
*《고조선 - 우리의 미래가 보인다》, 민음사, 1995
*《고조선 - 우리의 미래가 보인다》, 민음사, 1995
*〈단군신화의 역사적 해석〉, 《인문과학연구논총》 제13호, (명지대학교), 1995
*〈열국시대의 한반도 말갈〉, 《한국민족학연구》 3권, 1995
*《중국사3》, 민음사, 1995
*《중국사3》, 민음사, 1995
*〈갑골문에 보이는 “부모(婦某)”가 상대사에서 갖는 의미〉, 《사학지》 제29집, 1996
*〈신라 초기의 사회성격에 대한 재검토〉, 《고문화》 49집, 1996
*〈가야의 건국과 성장에 대한 재고찰〉, 《사학지》 제30집, 1997
*〈고조선은 실제로 존재했는가〉, 《한국인》 16권 7호, 1997
*〈동부여의 국가와 사회성격〉, 《백산학보》 49호, 1997
*〈국조신화: 단군 신화의 역사성과 환웅 곰 호랑이의 정체〉, 《인문과학》 28권, 1998
*〈한국사에서 고대와 중세의 전환시기〉, 《동양학》 제28집, 1998
*《한국열국사연구》, 지식산업사, 1998
*《한국열국사연구》, 지식산업사, 1998
*〈이은봉 교수님의 “단군의 참성단과 홍익인간 사상”을 읽고〉, 《누리와 말씀》 5권, 1999
*《홍익인간의 세계와 이해(공저)》, 단국대학교출판부, 1999
*《홍익인간의 세계와 이해(공저)》, 단국대학교출판부, 1999
*〈현행 국사교과서의 문제점과 개편방향: 상고사를 중심으로〉, 《단군학연구》 제3호, 2000
*〈고조선의 도읍 위치와 그 이동〉, 《단군학연구》 제7호, 2002
*〈고조선의 국가구조와 그 성격〉, 《단군학연구》 제9호, 2003
*〈단군학 정립을 위한 몇 가지 전제〉, 《단군학연구》 제8호, 2003
*《우리 고대사 - 상상에서 현실로》, 지식산업사, 2003
*《우리 고대사 - 상상에서 현실로》, 지식산업사, 2003
*〈고구려사의 귀속문제〉, 《단군학연구》 제11호, 2004
*《광개토대왕이 중국인이라고?(공저)》, 중앙일보시사미디어, 2004
*《광개토대왕이 중국인이라고?(공저)》, 중앙일보시사미디어, 2004
*〈고조선의 종교와 사회성격〉, 《단군학연구》 제12호, 2005
*《동아시아의 지역과 인간》, 지식산업사, 2005
*《동아시아의 지역과 인간》, 지식산업사, 2005
*《새로운 한국사(개정판, 공저)》, 집문당, 2005
*《새로운 한국사(개정판, 공저)》, 집문당, 2005
142번째 줄: 164번째 줄:
*《사료로 보는 우리 고대사 - 동북공정 논란을 둘러싼 진실게임》, 지식산업사, 2007
*《사료로 보는 우리 고대사 - 동북공정 논란을 둘러싼 진실게임》, 지식산업사, 2007
*《고대에도 한류가 있었다(공저)》, 지식산업사, 2007
*《고대에도 한류가 있었다(공저)》, 지식산업사, 2007
*〈조·연 전쟁의 전개와 국경 변화〉, 《단군학연구》 제20호, 2009
*〈고조선의 붕괴 원인〉, 《단군학연구》 제23호, 2010
*〈“삼국유사”와 “잠부론”의 고조선 인식〉, 《단군학연구》 제22호, 2010
*〈고조선의 실존문제: 상식적 탐색〉, 《단군학연구》 제25호, 2011
*《고조선 연구 (상)》, 만권당, 2015
*《고조선 연구 (상)》, 만권당, 2015
*《고조선 연구 (하)》, 만권당, 2016
*《고조선 연구 (하)》, 만권당, 2016
149번째 줄: 175번째 줄:


== 비판과 반론 ==
== 비판과 반론 ==
윤내현의 고조선 관련 연구 및 그의 대표적인 저서 《[[고조선 연구]]》는 [[북한]]의 [[역사학자]]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1963)를 표절했다는 비판을 받았다.<ref>이형구, 〈리지린과 윤내현의 '고조선 연구' 비교〉, 《역사학보》 146호, 1995 / [[서영수 (1949년)]], 〈요동군의 설치와 전개〉 p22, 《요동군과 현도군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08</ref>
이형구와 서영수는 윤내현의 고조선 관련 연구 및 그의 대표적인 저서 《[[고조선 연구]]》는 [[북한]]의 [[역사학자]]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1963)를 표절했다고 주장을 했다.<ref>이형구, 〈리지린과 윤내현의 '고조선 연구' 비교〉, 《역사학보》 146호, 1995 / [[서영수 (1949년)]], 〈요동군의 설치와 전개〉 p22, 《요동군과 현도군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08</ref>


윤내현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정보부의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북한 학설을 유포하여 학계를 어지럽히고 있다는 신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졸지에 북한 공산주의를 추종한다고 매도당했다.<ref>윤내현,《우리 고대사 - 상상에서 현실로》,지식산업사, 2003, p.227. </ref>
그런데, 윤내현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정보부의 조사까지 받았다고 한다. 북한 학설을 유포하여 학계를 어지럽히고 있다는 신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졸지에 북한 공산주의를 추종한다고 매도당했다.<ref>윤내현,《우리 고대사 - 상상에서 현실로》,지식산업사, 2003, p.227. </ref>
이와는 반대로 독재정권에 발맞추어 도움을 준 것처럼 헛소문이 퍼지기도 했다.<ref>《우리 고대사 - 상상에서 현실로》,지식산업사, 2003, p.229.</ref>
이와는 반대로 독재정권에 발맞추어 도움을 준 것처럼 헛소문이 퍼지기도 했다.<ref>《우리 고대사 - 상상에서 현실로》,지식산업사, 2003, p.229.</ref>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윤내현이 재직하던 단국대학교의 당시 총장에게 학교에서 쫓아내라는 투서가 들어왔다. 윤내현은 학교의 입장이 난처하면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의사를 표명했지만, 당시 총장은 새로운 학설을 내놓는 것이 학자의 본분이라며 오히려 격려해주었다고 한다.<ref>《우리 고대사 - 상상에서 현실로》,지식산업사, 2003, p.227.</ref>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윤내현이 재직하던 단국대학교의 당시 총장에게 학교에서 쫓아내라는 투서가 들어왔다. 윤내현은 학교의 입장이 난처하면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의사를 표명했지만, 당시 총장은 새로운 학설을 내놓는 것이 학자의 본분이라며 오히려 격려해주었다고 한다.<ref>《우리 고대사 - 상상에서 현실로》,지식산업사, 2003, p.227.</ref>
162번째 줄: 188번째 줄:




또한 이형구는 "민족사학자들의 견해를 수용·보완한 북한 학자의 연구 업적과 발굴 자료를 많이 활용하면서도 이에 대한 설명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민족사학자들은 약간의 견해를 피력했을 뿐이지 리지린과 같은 본격적인 연구는 없었다. 또 분단시대의 한국 역사학계가 겪고 있는 고통 때문에 주기를 일일이 달지 않겠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왜 다른 학자들은 북한의 학술 성과를 주기로 소개한단 말인가? 그리고 역사학계만이 마치 그런 고통을 겪고 있는 것처럼 표현하여 일반 독자들의 눈을 가리고 있다. 분단상황은 민족 모두의 고통이지 역사학계만 안고 있는 고통이 아니다. 북한의 자료가 제대로 입수되지 못하고 또 입수하기 어려운 상황이 고통이라고 할 수는 있어도, 입수하고 검토하여 활용한 자료를 유독 밝히지 않고 넘어가겠다는 것은 분단상황의 고통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자신의 주장에 영향을 주고 참고로 삼은 타인의 연구 업적을 밝힐 용기가 없으면 글을 발표하지 않는 것이 바른 태도이다."라고 비판하였다.<ref>이형구, 〈리지린과 윤내현의 '고조선 연구' 비교〉, 《역사학보》 146호, 1995</ref>
이형구는 윤내현에 대해서 "민족사학자들의 견해를 수용·보완한 북한 학자의 연구 업적과 발굴 자료를 많이 활용하면서도 이에 대한 설명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민족사학자들은 약간의 견해를 피력했을 뿐이지 리지린과 같은 본격적인 연구는 없었다. 또 분단시대의 한국 역사학계가 겪고 있는 고통 때문에 주기를 일일이 달지 않겠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왜 다른 학자들은 북한의 학술 성과를 주기로 소개한단 말인가? 그리고 역사학계만이 마치 그런 고통을 겪고 있는 것처럼 표현하여 일반 독자들의 눈을 가리고 있다. 분단상황은 민족 모두의 고통이지 역사학계만 안고 있는 고통이 아니다. 북한의 자료가 제대로 입수되지 못하고 또 입수하기 어려운 상황이 고통이라고 할 수는 있어도, 입수하고 검토하여 활용한 자료를 유독 밝히지 않고 넘어가겠다는 것은 분단상황의 고통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자신의 주장에 영향을 주고 참고로 삼은 타인의 연구 업적을 밝힐 용기가 없으면 글을 발표하지 않는 것이 바른 태도이다."라고 비판하였다.<ref>이형구, 〈리지린과 윤내현의 '고조선 연구' 비교〉, 《역사학보》 146호, 1995</ref>


이런 비판에 대해 윤내현은“나의 주장은 [[신채호]]·[[정인보]]·[[장도빈]] 등의 ‘민족사학자’들이 주장해왔던 기존 학설과 궤를 같이하고 있을 뿐 표절과는 거리가 먼 주장”이라고 말한다. 또한 이러한 조치가 학자의 양심을 저해한 행위가 아니며 자신의 연구 결과에 따른 것이라 말하고 있다. <ref>「고조선의 강역」해석싸고 표절 논쟁 재연 경향신문 6면 생활/문화 기사(뉴스, 1986.04.23) 참조</ref><ref>{{뉴스 인용|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6042300329206001&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86-04-23&officeId=00032&pageNo=6&printNo=12483&publishType=00020|제목=「古朝鮮(고조선)의 疆域(강역)」해석싸고 표절 論爭(논쟁) 재연|언어=한국어|성명=이용(李傭)기자|날짜=1986-04-23|출판사=경향신문(네이버)|확인날짜=2012-07-03}}</ref><ref>{{뉴스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1539985|제목="고구려 태동 현도군과 관계없어"|언어=한국어|성명=김태식 기자|날짜=2007-02-06|출판사=연합뉴스(네이버)|확인날짜=2012-07-03}}</ref><ref>{{뉴스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21&aid=0000166612|제목=오후여담, 역사 vs 역사|언어=한국어|성명=김성호/객원논설위원|날짜=2006-10-04|출판사=문화일보(네이버)|확인날짜=2012-07-03}}</ref> <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81&aid=0002850292 비운의 역사학자 윤내현 서울신문 기사]</ref><ref>[https://shindonga.donga.com/Library/3/06/13/103001/5 신동아, 2003년12월호 기사]</ref>
윤내현은 이런 비판에 대해“나의 주장은 [[신채호]]·[[정인보]]·[[장도빈]] 등의 ‘민족사학자’들이 주장해왔던 기존 학설과 궤를 같이하고 있을 뿐 표절과는 거리가 먼 주장”이라고 말한다. 또한 이러한 조치가 학자의 양심을 저해한 행위가 아니며 자신의 연구 결과에 따른 것이라 말하고 있다. <ref>「고조선의 강역」해석싸고 표절 논쟁 재연 경향신문 6면 생활/문화 기사(뉴스, 1986.04.23) 참조</ref><ref>{{뉴스 인용|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6042300329206001&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86-04-23&officeId=00032&pageNo=6&printNo=12483&publishType=00020|제목=「古朝鮮(고조선)의 疆域(강역)」해석싸고 표절 論爭(논쟁) 재연|언어=한국어|성명=이용(李傭)기자|날짜=1986-04-23|출판사=경향신문(네이버)|확인날짜=2012-07-03}}</ref><ref>{{뉴스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1539985|제목="고구려 태동 현도군과 관계없어"|언어=한국어|성명=김태식 기자|날짜=2007-02-06|출판사=연합뉴스(네이버)|확인날짜=2012-07-03}}</ref><ref>{{뉴스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21&aid=0000166612|제목=오후여담, 역사 vs 역사|언어=한국어|성명=김성호/객원논설위원|날짜=2006-10-04|출판사=문화일보(네이버)|확인날짜=2012-07-03}}</ref><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81&aid=0002850292 비운의 역사학자 윤내현 서울신문 기사]</ref><ref>[https://shindonga.donga.com/Library/3/06/13/103001/5 신동아, 2003년12월호 기사]</ref>


== 같이 보기 ==
== 같이 보기 ==

2019년 10월 25일 (금) 22:26 판

윤내현(尹乃鉉)
출생1939년 6월 11일(1939-06-11)(84세)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전라남도 해남군
성별남성
국적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본관해남
학력단국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 문학사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동양사 문학석사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동양사 문학박사
하버드대학교 대학원 동아시아역사언어학과
골든스테이트대학교
경력단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
단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학과장
단국대학교 문과대학 학장
단국대학교 중앙박물관 관장
단국대학교 서울캠퍼스 부총장
단국대학교 대학원 원장
단국대학교 산업디자인대학원 원장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원장
하버드대학교 인류학과 객원교수
문화관광부 문화재위원
총무처 사법고시, 외무고시 시험위원
교사편찬위원회 위원장
교육인적자원부 국사교육심의위원
남북역사학자 공동학술회의 남측단장
고조선연구회 회장
단군학회 회장
고조선학회 회장
직업단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명예교수
소속단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전직단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
상훈바론스 후스후 인터네쇼날에 등재
마르퀴스 후스후에 등재
제3회 자랑스런 목포중고인/2001.2.2/재경목포중고동창회

윤내현(尹乃鉉, 1939년 6월 11일 ~ )은 대한민국 역사학자이다.[1][2] 본관은 해남이며, 전라남도 해남군 출생이다.

생애

단국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에서 학사과정을 거쳐 동대학원 석·박사과정을 마치고 하버드대학교 대학원 동아시아역사언어학과에서 수학하였다. 단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 부총장, 대학원장 등을 역임했다.

문화관광부 문화재위원과 단군학회 회장을 맡으면서 남북역사학자 공동학술회의 남측단장으로 북한에 다녀오기도 했고, 한국고대사 연구와 남북역사학자 학술 교류 및 공동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2005년 12월 1일부터 2009년 8월 31일까지의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원장, 고조선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학력

경력

  • 1975년 ~ 1978년 단국대학교, 강원대학교, 경찰대학교 강사
  • 1978년 ~ 1992년 단국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 교수
  • 1979년 ~ 1981년 하버드대학교 인류학과 객원교수
  • 1982년 ~ 1984년 단국대학교 인문과학대학 역사학과 교수, 학과장
  • 1987년 ~ 1997년 단국대학교 중앙박물관 관장
  • 1992년 ~ 2005년 단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
  • 1993년 ~ 1995년 문화관광부 문화재위원
  • 1993년 ~ 1995년 총무처 사법고시, 외무고시 시험위원
  • 1993년 ~ 1995년 문교부(현 교육부) 국사교육심의위원
  • 1993년 ~ 1995년 문화관광부 문화재위원
  • 1997년 ~ 1998년 단국대학교 교수협의회 회장
  • 1998년 ~ 1999년 단국대학교 문과대학 학장
  • 1998년 ~ 2000년 단국대학교 산업디자인대학원 원장
  • 1999년 ~ 2002년 단국대학교 서울캠퍼스 부총장
  • 2001년 ~ 2004년 단군학회 회장
  • 2002년 ~ 2005년 단국대학교 일반대학원 원장
  • 2002년 10월 남북역사학자 공동학술회의 남측단장
  • 2002년 단국대학교 테솔대학원 원장
  • 2005년 ~ 2007년 단국대학교 교사편찬위원회 위원장
  • 2005년 ~ 2009년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원장
  • 2008년 ~ 2009년 고조선학회 회장
  • 2005년 ~ 2010년 단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석좌교수
  • 2005년 ~ 현재 단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명예교수

수상

  • '오늘의 책' 상
  • 일석학술상
  • 금호학술상
  • 국무총리 표창

저서

  • 〈갑골문을 통해 본 은왕조의 숭신사상과 왕권변천〉, 《사학지》 제9집, 1975
  • 〈은족의 동북방기원설에 대한 검토〉, 《학술논총》 제1집, 1976
  • 〈은문화의 경제적 기반에 대하여: 농경을 중심으로〉, 《사학지》 제10집, 1976
  • 〈상족의 시조 설화 검토〉, 《학술논총》 제2집, 1978
  • 《상왕조사의 연구》, 경인문화사, 1978
  • 〈중국의 신석기시대 소고〉, 《사학지》 제15집, 1981
  • 〈중국에 있어서 무리사회의 전개〉, 《동양학》 제11집, 1981
  • 〈상왕국의 국가구조와 사회성격〉, 《사학지》 제16집, 1982
  • 《중국의 원시시대》, 단국대학교출판부, 1982
  • 〈기자신고〉, 《한국사연구》 41호, 1983
  • 《상주사》, 민음사, 1984
  •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 《군사》 제8호, 1984
  • 〈고조선의 강역〉, 《한국학》 제7권 제3호, 1984
  • 〈고조선의 도읍 천이고〉, 《백산학보》 30·31호, 1985
  • 〈위만조선의 재인식〉, 《사학지》 제19집, 1985
  • 《한국 고대의 국가와 사회(공저)》, 일조각, 1985
  • 〈한사군의 낙랑군과 평양의 낙랑〉, 《한국학보》 제11권 4호, 1985
  • 〈지상논단: 고조선사의 재인식〉, 《통일한국》 32권, 1986
  • 《한국고대사신론》, 일지사, 1986
  • 〈한국 상고사 체계의 복원〉, 《동양학》 제17집, 1987
  • 〈고조선과 삼한의 관계〉, 《한국학보》 14권 3호, 1988
  • 〈삼한지역의 사회변천〉, 《백산학보》 35호, 1988
  • 《상문명(번역)》, 민음사, 1988
  • 《중국의 천하사상(공저)》, 민음사, 1988
  • 〈고조선의 건국- 드디어 한민족은 국가를 출현시켰다〉, 《월간샘터》 제20권 4호, 1989
  • 〈고조선의 국가구조- 고조선은 봉건제국가 읍제국가였다〉, 《월간샘터》 제20권 8호, 1989
  • 〈고조선의 영토- 고조선은 한반도와 만주 전지역을 통치하였다〉, 《월간샘터》 제20권 7호, 1989
  • 〈고조선의 지도이념은 ‘홍익인간’이었다- 선교〉, 《월간샘터》 제20권 12호, 1989
  • 〈단군- 단군은 고조선의 통치자이자 종교지도자였다〉, 《월간샘터》 제20권 9호, 1989
  • 〈단군신화- 단군신화는 한민족의 민족사화이다〉, 《월간샘터》 제20권 5호, 1989
  • 〈명도전- 고조선은 외화를 많이 보유한 부유한 나라였다〉, 《월간샘터》 제20권 11호, 1989
  • 〈무리사회- 사람들은 초기에 이동생활을 하였다〉, 《월간샘터》 제20권 1호, 1989
  • 〈부락사회- 사람들은 부락을 이루게 되었다〉, 《월간샘터》 제20권 2호, 1989
  • 〈부락연맹체사회- 여러 부락이 연맹을 맺게 되었다〉, 《월간샘터》 제20권 3호, 1989
  • 《새로운 한국사(공저)》, 삼광출판사, 1989
  • 〈역사의 주체- 한국사의 주체는 한민족이다〉, 《월간샘터》 제20권 6호, 1989
  • 《윤내현교수의 한국고대사》, 삼광출판사, 1989
  • 〈조연전쟁- 고조선은 군사적으로도 강국이었다〉, 《월간샘터》 제20권 10호, 1989
  • 〈한국 고대사의 제문제〉, 《명지대학교 개회40주년 기념논문집》, 1989
  • 〈고조선과 위만조선은 동서로 대치되어 있었다- 우거왕〉, 《월간샘터》 제21권 4호, 1990
  • 〈고조선의 붕괴- 고조선의 붕괴원인은 철기 보급과 전쟁이었다〉, 《월간샘터》 제21권 7호, 1990
  • 〈공후인- 고조선에는 수준높은 문학·음악·청동기술이 있었다〉, 《월간샘터》 제21권 1호, 1990
  • 〈동이전은 열국시대에 관한 기록이다- 동이전〉, 《월간샘터》 제21권 9호, 1990
  • 〈부여는 열국시대 초기의 패자였다- 부여〉, 《월간샘터》 제21권 10호, 1990
  • 〈부여의 정치- 부여는 자주적인 화친정책을 취하였다〉, 《월간샘터》 제21권 11호, 1990
  • 〈열국시대- 열국시대는 민족의식을 강화시켜 주었다〉, 《월간샘터》 제21권 8호, 1990
  • 〈위만조선은 난하유역에서 건국되었다〉, 《월간샘터》 제21권 3호, 1990
  • 〈읍루는 한민족이 세운 나라였다- 읍루〉, 《월간샘터》 제21권 12호, 1990
  • 〈준왕- 준왕은 고조선 왕이 아니다〉, 《월간샘터》 제21권 2호, 1990
  • 〈평양유적은 낙랑군유적이 아니다- 낙랑유적〉, 《월간샘터》 제21권 6호, 1990
  • 〈한사군은 요서지역에 있었다- 한사군〉, 《월간샘터》 제21권 5호, 1990
  • 〈고구려와 백제는 중국 진출에 적극적이었다- 열국의 변화〉, 《월간샘터》 제22권 2호, 1991
  • 〈열국시대는 고대에서 중세로의 이행기였다- 열국시대의 성격〉, 《월간샘터》 제22권 3호, 1991
  • 〈읍루는 고구려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읍루의 사회〉, 《월간샘터》 제22권 11호, 1991
  • 《중국사1》, 민음사, 1991
  • 《한국사의 이해 1 - 고대, 고고(공저)》, 신서원, 1991
  • 〈고대조선고〉, 《중재 장충식박사 화갑기념논총》 1권 역사학편, 1992
  • 〈양평 병산리 유적〉, 《고적조사보고서》 14권, (단국대학교), 1992 (공동저자 한창균)
  • 《중국사2》, 민음사, 1992
  • 〈중부내륙 고속도로 문화유적 지표조사보고서〉, 《연구소총서》 1책, 1992
  • 〈갑골문에 나타난 고대 중국인의 신앙〉, 《승가》 제10집, 1993
  • 〈고조선의 경제적 기반〉, 《백산학보》 41호, 1993
  • 〈고조선의 종교와 그 사상〉, 《동양학》 제23집, 1993
  • 〈인류사회진화상의 고조선 위치〉, 《사학지》 제26집, 1993
  • 〈정선 덕천리 소골 유적(1): 고인돌 발굴보고〉, 《고적조사보고서》 17권, 1993
  • 고조선 연구》, 일지사, 1994
  • 〈한민족의 형성과 출현〉, 《사학지》 제27집, 1994
  • 〈고구려의 이동과 건국〉, 《백산학보》 45호, 1995
  • 《고조선 - 우리의 미래가 보인다》, 민음사, 1995
  • 〈단군신화의 역사적 해석〉, 《인문과학연구논총》 제13호, (명지대학교), 1995
  • 〈열국시대의 한반도 말갈〉, 《한국민족학연구》 3권, 1995
  • 《중국사3》, 민음사, 1995
  • 〈갑골문에 보이는 “부모(婦某)”가 상대사에서 갖는 의미〉, 《사학지》 제29집, 1996
  • 〈신라 초기의 사회성격에 대한 재검토〉, 《고문화》 49집, 1996
  • 〈가야의 건국과 성장에 대한 재고찰〉, 《사학지》 제30집, 1997
  • 〈고조선은 실제로 존재했는가〉, 《한국인》 16권 7호, 1997
  • 〈동부여의 국가와 사회성격〉, 《백산학보》 49호, 1997
  • 〈국조신화: 단군 신화의 역사성과 환웅 곰 호랑이의 정체〉, 《인문과학》 28권, 1998
  • 〈한국사에서 고대와 중세의 전환시기〉, 《동양학》 제28집, 1998
  • 《한국열국사연구》, 지식산업사, 1998
  • 〈이은봉 교수님의 “단군의 참성단과 홍익인간 사상”을 읽고〉, 《누리와 말씀》 5권, 1999
  • 《홍익인간의 세계와 이해(공저)》, 단국대학교출판부, 1999
  • 〈현행 국사교과서의 문제점과 개편방향: 상고사를 중심으로〉, 《단군학연구》 제3호, 2000
  • 〈고조선의 도읍 위치와 그 이동〉, 《단군학연구》 제7호, 2002
  • 〈고조선의 국가구조와 그 성격〉, 《단군학연구》 제9호, 2003
  • 〈단군학 정립을 위한 몇 가지 전제〉, 《단군학연구》 제8호, 2003
  • 《우리 고대사 - 상상에서 현실로》, 지식산업사, 2003
  • 〈고구려사의 귀속문제〉, 《단군학연구》 제11호, 2004
  • 《광개토대왕이 중국인이라고?(공저)》, 중앙일보시사미디어, 2004
  • 〈고조선의 종교와 사회성격〉, 《단군학연구》 제12호, 2005
  • 《동아시아의 지역과 인간》, 지식산업사, 2005
  • 《새로운 한국사(개정판, 공저)》, 집문당, 2005
  • 《고조선의 강역을 밝힌다(공저)》, 지식산업사, 2006
  • 《사료로 보는 우리 고대사 - 동북공정 논란을 둘러싼 진실게임》, 지식산업사, 2007
  • 《고대에도 한류가 있었다(공저)》, 지식산업사, 2007
  • 〈조·연 전쟁의 전개와 국경 변화〉, 《단군학연구》 제20호, 2009
  • 〈고조선의 붕괴 원인〉, 《단군학연구》 제23호, 2010
  • 〈“삼국유사”와 “잠부론”의 고조선 인식〉, 《단군학연구》 제22호, 2010
  • 〈고조선의 실존문제: 상식적 탐색〉, 《단군학연구》 제25호, 2011
  • 《고조선 연구 (상)》, 만권당, 2015
  • 《고조선 연구 (하)》, 만권당, 2016
  • 《한국 열국사 연구》, 만권당, 2016[3]
  • 《고조선, 우리 역사의 탄생》, 만권당, 2016
  • 《우리 고대사, 상상에서 현실로》, 만권당, 2016

비판과 반론

이형구와 서영수는 윤내현의 고조선 관련 연구 및 그의 대표적인 저서 《고조선 연구》는 북한역사학자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1963)를 표절했다고 주장을 했다.[4]

그런데, 윤내현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정보부의 조사까지 받았다고 한다. 북한 학설을 유포하여 학계를 어지럽히고 있다는 신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졸지에 북한 공산주의를 추종한다고 매도당했다.[5] 이와는 반대로 독재정권에 발맞추어 도움을 준 것처럼 헛소문이 퍼지기도 했다.[6]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윤내현이 재직하던 단국대학교의 당시 총장에게 학교에서 쫓아내라는 투서가 들어왔다. 윤내현은 학교의 입장이 난처하면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의사를 표명했지만, 당시 총장은 새로운 학설을 내놓는 것이 학자의 본분이라며 오히려 격려해주었다고 한다.[7]

이형구의 증언에 따르면 84년 당시 학술세미나에서 윤내현은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와 유사하다는 지적이 있자, 자신이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등 북한 자료를 미국의 대학도서관에서 입수했음을 시인하면서도, 85년 11월 "주를 달면 자신의 학설이 무너진다" 는 말을 남기고 이미 지급된 연구비를 반납하고 자신의 글을 거두어 갔다고 주장한다.[8]

하지만 윤내현은 연구비 지원에 대해서 일체 외부기관으로부터 받은 사실이 없다며《우리 고대사 - 상상에서 현실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9]

 "역대 어느 정부나 정권 또는 기관이나 집단에서 연구비나 행정지원을 받아 본 적이 없다."


이형구는 윤내현에 대해서 "민족사학자들의 견해를 수용·보완한 북한 학자의 연구 업적과 발굴 자료를 많이 활용하면서도 이에 대한 설명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민족사학자들은 약간의 견해를 피력했을 뿐이지 리지린과 같은 본격적인 연구는 없었다. 또 분단시대의 한국 역사학계가 겪고 있는 고통 때문에 주기를 일일이 달지 않겠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왜 다른 학자들은 북한의 학술 성과를 주기로 소개한단 말인가? 그리고 역사학계만이 마치 그런 고통을 겪고 있는 것처럼 표현하여 일반 독자들의 눈을 가리고 있다. 분단상황은 민족 모두의 고통이지 역사학계만 안고 있는 고통이 아니다. 북한의 자료가 제대로 입수되지 못하고 또 입수하기 어려운 상황이 고통이라고 할 수는 있어도, 입수하고 검토하여 활용한 자료를 유독 밝히지 않고 넘어가겠다는 것은 분단상황의 고통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자신의 주장에 영향을 주고 참고로 삼은 타인의 연구 업적을 밝힐 용기가 없으면 글을 발표하지 않는 것이 바른 태도이다."라고 비판하였다.[10]

윤내현은 이런 비판에 대해“나의 주장은 신채호·정인보·장도빈 등의 ‘민족사학자’들이 주장해왔던 기존 학설과 궤를 같이하고 있을 뿐 표절과는 거리가 먼 주장”이라고 말한다. 또한 이러한 조치가 학자의 양심을 저해한 행위가 아니며 자신의 연구 결과에 따른 것이라 말하고 있다. [11][12][13][14][15][16]

같이 보기

각주

  1. 윤내현교수 - ::: 해남신문 :::‎
  2. 조선닷컴 포커스 인물
  3. 1998년 출간된 동명의 저서의 개정판
  4. 이형구, 〈리지린과 윤내현의 '고조선 연구' 비교〉, 《역사학보》 146호, 1995 / 서영수 (1949년), 〈요동군의 설치와 전개〉 p22, 《요동군과 현도군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08
  5. 윤내현,《우리 고대사 - 상상에서 현실로》,지식산업사, 2003, p.227.
  6. 《우리 고대사 - 상상에서 현실로》,지식산업사, 2003, p.229.
  7. 《우리 고대사 - 상상에서 현실로》,지식산업사, 2003, p.227.
  8. 이형구, 〈리지린과 윤내현의 '고조선 연구' 비교〉, 《역사학보》 146호, 1995
  9. 윤내현,《우리 고대사 - 상상에서 현실로》,지식산업사, 2003, p.229.
  10. 이형구, 〈리지린과 윤내현의 '고조선 연구' 비교〉, 《역사학보》 146호, 1995
  11. 「고조선의 강역」해석싸고 표절 논쟁 재연 경향신문 6면 생활/문화 기사(뉴스, 1986.04.23) 참조
  12. “「古朝鮮(고조선)의 疆域(강역)」해석싸고 표절 論爭(논쟁) 재연”. 경향신문(네이버). 1986년 4월 23일. 2012년 7월 3일에 확인함. 
  13. "고구려 태동 현도군과 관계없어". 연합뉴스(네이버). 2007년 2월 6일. 2012년 7월 3일에 확인함. 
  14. “오후여담, 역사 vs 역사”. 문화일보(네이버). 2006년 10월 4일. 2012년 7월 3일에 확인함. 
  15. 비운의 역사학자 윤내현 서울신문 기사
  16. 신동아, 2003년12월호 기사

읽을 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