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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판 ==
== 비판 ==
윤내현의 고조선 관련 연구 및 그의 대표적인 저서 《[[고조선 연구]]》는 [[북한]]의 [[역사학자]]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1963)를 표절했다는 비판을 받았다.<ref>이형구, 〈리지린과 윤내현의 '고조선 연구' 비교〉, 《역사학보》 146호, 1995 / [[서영수 (1949년)]], 〈요동군의 설치와 전개〉 p22, 《요동군과 현도군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08</ref>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북한 학설을 표절한 빨갱이로 신고당해, 당시 정보부에 끌려가서 조사를 받았다.<ref>[서울광장] 비운의 역사학자 윤내현/오일만 논설위원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81&aid=0002850292</ref> 용공혐의 없음으로 결론이 났고, 연구를 계속해도 된다는 말을 들었다. 정보부 측에서도 너무 황당했었는지 역사학자 아무개가 신고했다고 귀띔해주었고 한다.<ref>https://www.youtube.com/watch?v=jIB5qx-4TQM 동영상 38:00 이후 참조.</ref> 이형구의 증언에 따르면 84년 당시 학술세미나에서 윤내현은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와 유사하다는 지적이 있자, 자신이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등 북한 자료를 미국의 대학도서관에서 입수했음을 시인하면서도, 85년 11월 "주를 달면 자신의 학설이 무너진다" 는 말을 남기고 이미 지급된 연구비를 반납하고 자신의 글을 거두어 갔다. 하지만 이형구의 증언이 사실인지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다. 윤내현의 증언에 따르면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연구비를 받지도 않았고, 이야기만 왔다갔다한 선에서 그쳤다. 시간이 지나서 윤내현의 제자가 당시 상황을 아는 분께 확인해보니 연구비를 지급한 기억은 없다고 한다.<ref>https://www.youtube.com/watch?v=jIB5qx-4TQM 동영상 44:51 부터 참조.</ref> 한편 윤내현은 《한국고대사신론》에서 "필자는 민족사학자들의 견해를 수용 · 보완한 북한 학자들의 연구 업적과 그들이 발굴한 자료도 활용하게 될 것이지만 그것을 일일이 주기하지 않을 것이며 대표적인 문헌 몇 권만을 소개하는데 그칠 것이다. 이 점은 분단시대에 있어서 한국 역사학계가 겪고 있는 고통이므로 독자들의 이해 있기를 바란다."라고 언급했던 일이 있는데,<ref>윤내현, 《한국고대사신론》, 일지사, 1986, p.14</ref> 이에 대해서 이형구는 "민족사학자들의 견해를 수용·보완한 북한 학자의 연구 업적과 발굴 자료를 많이 활용하면서도 이에 대한 설명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민족사학자들은 약간의 견해를 피력했을 뿐이지 리지린과 같은 본격적인 연구는 없었다. 또 분단시대의 한국 역사학계가 겪고 있는 고통 때문에 주기를 일일이 달지 않겠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왜 다른 학자들은 북한의 학술 성과를 주기로 소개한단 말인가? 그리고 역사학계만이 마치 그런 고통을 겪고 있는 것처럼 표현하여 일반 독자들의 눈을 가리고 있다. 분단상황은 민족 모두의 고통이지 역사학계만 안고 있는 고통이 아니다. 북한의 자료가 제대로 입수되지 못하고 또 입수하기 어려운 상황이 고통이라고 할 수는 있어도, 입수하고 검토하여 활용한 자료를 유독 밝히지 않고 넘어가겠다는 것은 분단상황의 고통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자신의 주장에 영향을 주고 참고로 삼은 타인의 연구 업적을 밝힐 용기가 없으면 글을 발표하지 않는 것이 바른 태도이다."라고 비판하였다.
윤내현의 고조선 관련 연구 및 그의 대표적인 저서 《[[고조선 연구]]》는 [[북한]]의 [[역사학자]]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1963)를 표절했다는 비판을 받았다.<ref>이형구, 〈리지린과 윤내현의 '고조선 연구' 비교〉, 《역사학보》 146호, 1995 / [[서영수 (1949년)]], 〈요동군의 설치와 전개〉 p22, 《요동군과 현도군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08</ref>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북한 학설을 표절한 빨갱이로 신고당해, 당시 정보부에 끌려가서 조사를 받았다.<ref>[서울광장] 비운의 역사학자 윤내현/오일만 논설위원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81&aid=0002850292</ref> 용공혐의 없음으로 결론이 났고, 연구를 계속해도 된다는 말을 들었다. 정보부 측에서도 너무 황당했었는지 역사학자 아무개가 신고했다고 귀띔해주었고 한다.<ref>https://www.youtube.com/watch?v=jIB5qx-4TQM 동영상 38:00 이후 참조.</ref> 이형구의 증언에 따르면 84년 당시 학술세미나에서 윤내현은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와 유사하다는 지적이 있자, 자신이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등 북한 자료를 미국의 대학도서관에서 입수했음을 시인하면서도, 85년 11월 "주를 달면 자신의 학설이 무너진다" 는 말을 남기고 이미 지급된 연구비를 반납하고 자신의 글을 거두어 갔다. 하지만 이형구의 증언은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다. 윤내현의 증언에 따르면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연구비를 받지도 않았고, 이야기만 왔다갔다한 선에서 그쳤다. 시간이 지나서 윤내현의 제자가 당시 상황을 아는 분께 확인해보니 연구비를 지급한 기억은 없다고 한다.<ref>https://www.youtube.com/watch?v=jIB5qx-4TQM 동영상 44:51 부터 참조.</ref> 한편 윤내현은 《한국고대사신론》에서 "필자는 민족사학자들의 견해를 수용 · 보완한 북한 학자들의 연구 업적과 그들이 발굴한 자료도 활용하게 될 것이지만 그것을 일일이 주기하지 않을 것이며 대표적인 문헌 몇 권만을 소개하는데 그칠 것이다. 이 점은 분단시대에 있어서 한국 역사학계가 겪고 있는 고통이므로 독자들의 이해 있기를 바란다."라고 언급했던 일이 있는데,<ref>윤내현, 《한국고대사신론》, 일지사, 1986, p.14</ref> 이에 대해서 이형구는 "민족사학자들의 견해를 수용·보완한 북한 학자의 연구 업적과 발굴 자료를 많이 활용하면서도 이에 대한 설명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민족사학자들은 약간의 견해를 피력했을 뿐이지 리지린과 같은 본격적인 연구는 없었다. 또 분단시대의 한국 역사학계가 겪고 있는 고통 때문에 주기를 일일이 달지 않겠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왜 다른 학자들은 북한의 학술 성과를 주기로 소개한단 말인가? 그리고 역사학계만이 마치 그런 고통을 겪고 있는 것처럼 표현하여 일반 독자들의 눈을 가리고 있다. 분단상황은 민족 모두의 고통이지 역사학계만 안고 있는 고통이 아니다. 북한의 자료가 제대로 입수되지 못하고 또 입수하기 어려운 상황이 고통이라고 할 수는 있어도, 입수하고 검토하여 활용한 자료를 유독 밝히지 않고 넘어가겠다는 것은 분단상황의 고통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자신의 주장에 영향을 주고 참고로 삼은 타인의 연구 업적을 밝힐 용기가 없으면 글을 발표하지 않는 것이 바른 태도이다."라고 비판하였다.


이런 비판에 대해 윤내현은 이러한 조치가 학자의 양심을 저해한 행위가 아니며 자신의 연구 결과에 따른 것이라 주장했으며<ref>「고조선의 강역」해석싸고 표절 논쟁 재연 경향신문 6면 생활/문화 기사(뉴스, 1986.04.23) 참조</ref> “나의 주장은 [[신채호]]·[[정인보]]·[[장도빈]] 등의 ‘민족사학자’들이 주장해왔던 기존 학설과 궤를 같이하고 있을 뿐 표절과는 거리가 먼 주장”이라고 입장을 표명했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6042300329206001&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86-04-23&officeId=00032&pageNo=6&printNo=12483&publishType=00020|제목=「古朝鮮(고조선)의 疆域(강역)」해석싸고 표절 論爭(논쟁) 재연|언어=한국어|성명=이용(李傭)기자|날짜=1986-04-23|출판사=경향신문(네이버)|확인날짜=2012-07-03}}</ref><ref>{{뉴스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1539985|제목="고구려 태동 현도군과 관계없어"|언어=한국어|성명=김태식 기자|날짜=2007-02-06|출판사=연합뉴스(네이버)|확인날짜=2012-07-03}}</ref><ref>{{뉴스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21&aid=0000166612|제목=오후여담, 역사 vs 역사|언어=한국어|성명=김성호/객원논설위원|날짜=2006-10-04|출판사=문화일보(네이버)|확인날짜=2012-07-03}}</ref>
이런 비판에 대해 윤내현은 이러한 조치가 학자의 양심을 저해한 행위가 아니며 자신의 연구 결과에 따른 것이라 주장했으며<ref>「고조선의 강역」해석싸고 표절 논쟁 재연 경향신문 6면 생활/문화 기사(뉴스, 1986.04.23) 참조</ref> “나의 주장은 [[신채호]]·[[정인보]]·[[장도빈]] 등의 ‘민족사학자’들이 주장해왔던 기존 학설과 궤를 같이하고 있을 뿐 표절과는 거리가 먼 주장”이라고 입장을 표명했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6042300329206001&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86-04-23&officeId=00032&pageNo=6&printNo=12483&publishType=00020|제목=「古朝鮮(고조선)의 疆域(강역)」해석싸고 표절 論爭(논쟁) 재연|언어=한국어|성명=이용(李傭)기자|날짜=1986-04-23|출판사=경향신문(네이버)|확인날짜=2012-07-03}}</ref><ref>{{뉴스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1539985|제목="고구려 태동 현도군과 관계없어"|언어=한국어|성명=김태식 기자|날짜=2007-02-06|출판사=연합뉴스(네이버)|확인날짜=2012-07-03}}</ref><ref>{{뉴스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21&aid=0000166612|제목=오후여담, 역사 vs 역사|언어=한국어|성명=김성호/객원논설위원|날짜=2006-10-04|출판사=문화일보(네이버)|확인날짜=2012-07-03}}</ref>

2019년 10월 15일 (화) 13:53 판

윤내현(尹乃鉉)
출생1939년 6월 11일(1939-06-11)(84세)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전라남도 해남군
성별남성
국적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본관해남
학력단국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 문학사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동양사 문학석사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동양사 문학박사
하버드대학교 대학원 동아시아역사언어학과
골든스테이트대학교
경력단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
단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학과장
단국대학교 문과대학 학장
단국대학교 중앙박물관 관장
단국대학교 서울캠퍼스 부총장
단국대학교 대학원 원장
단국대학교 산업디자인대학원 원장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원장
하버드대학교 인류학과 객원교수
문화관광부 문화재위원
총무처 사법고시, 외무고시 시험위원
교사편찬위원회 위원장
교육인적자원부 국사교육심의위원
남북역사학자 공동학술회의 남측단장
고조선연구회 회장
단군학회 회장
고조선학회 회장
직업단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명예교수
소속단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전직단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
상훈바론스 후스후 인터네쇼날에 등재
마르퀴스 후스후에 등재
제3회 자랑스런 목포중고인/2001.2.2/재경목포중고동창회

윤내현(尹乃鉉, 1939년 6월 11일 ~ )은 대한민국 역사학자이다.[1][2] 본관은 해남이며, 전라남도 해남군 출생이다.

생애

단국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에서 학사과정을 거쳐 동대학원 석·박사과정을 마치고 하버드대학교 대학원 동아시아역사언어학과에서 수학하였다. 단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 부총장, 대학원장 등을 역임했다.

문화관광부 문화재위원과 단군학회 회장을 맡으면서 남북역사학자 공동학술회의 남측단장으로 북한에 다녀오기도 했고, 한국고대사 연구와 남북역사학자 학술 교류 및 공동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2005년 12월 1일부터 2009년 8월 31일까지의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원장, 고조선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학력

경력

  • 1975년 ~ 1978년 단국대학교, 강원대학교, 경찰대학교 강사
  • 1978년 ~ 1992년 단국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 교수
  • 1979년 ~ 1981년 하버드대학교 인류학과 객원교수
  • 1982년 ~ 1984년 단국대학교 인문과학대학 역사학과 교수, 학과장
  • 1987년 ~ 1997년 단국대학교 중앙박물관 관장
  • 1992년 ~ 2005년 단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
  • 1993년 ~ 1995년 문화관광부 문화재위원
  • 1993년 ~ 1995년 총무처 사법고시, 외무고시 시험위원
  • 1993년 ~ 1995년 문교부(현 교육부) 국사교육심의위원
  • 1993년 ~ 1995년 문화관광부 문화재위원
  • 1997년 ~ 1998년 단국대학교 교수협의회 회장
  • 1998년 ~ 1999년 단국대학교 문과대학 학장
  • 1998년 ~ 2000년 단국대학교 산업디자인대학원 원장
  • 1999년 ~ 2002년 단국대학교 서울캠퍼스 부총장
  • 2001년 ~ 2004년 단군학회 회장
  • 2002년 ~ 2005년 단국대학교 일반대학원 원장
  • 2002년 10월 남북역사학자 공동학술회의 남측단장
  • 2002년 단국대학교 테솔대학원 원장
  • 2005년 ~ 2007년 단국대학교 교사편찬위원회 위원장
  • 2005년 ~ 2009년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원장
  • 2008년 ~ 2009년 고조선학회 회장
  • 2005년 ~ 2010년 단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석좌교수
  • 2005년 ~ 현재 단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명예교수

수상

  • '오늘의 책' 상
  • 일석학술상
  • 금호학술상
  • 국무총리 표창

저서

  • 《상왕조사의 연구》, 경인문화사, 1978
  • 《중국의 원시시대》, 단국대학교출판부, 1982
  • 《상주사》, 민음사, 1984
  • 《한국 고대의 국가와 사회(공저)》, 일조각, 1985
  • 《한국고대사신론》, 일지사, 1986
  • 《상문명(번역)》, 민음사, 1988
  • 《중국의 천하사상(공저)》, 민음사, 1988
  • 《새로운 한국사(공저)》, 삼광출판사, 1989
  • 《윤내현교수의 한국고대사》, 삼광출판사, 1989
  • 《한국사의 이해 1 - 고대, 고고(공저)》, 신서원, 1991
  • 《중국사1》, 민음사, 1991
  • 《중국사2》, 민음사, 1992
  • 고조선 연구》, 일지사, 1994
  • 《고조선 - 우리의 미래가 보인다》, 민음사, 1995
  • 《중국사3》, 민음사, 1995
  • 《한국열국사연구》, 지식산업사, 1998
  • 《홍익인간의 세계와 이해(공저)》, 단국대학교출판부, 1999
  • 《우리 고대사 - 상상에서 현실로》, 지식산업사, 2003
  • 《광개토대왕이 중국인이라고?(공저)》, 중앙일보시사미디어, 2004
  • 《동아시아의 지역과 인간》, 지식산업사, 2005
  • 《새로운 한국사(개정판, 공저)》, 집문당, 2005
  • 《고조선의 강역을 밝힌다(공저)》, 지식산업사, 2006
  • 《사료로 보는 우리 고대사 - 동북공정 논란을 둘러싼 진실게임》, 지식산업사, 2007
  • 《고대에도 한류가 있었다(공저)》, 지식산업사, 2007
  • 《고조선 연구 (상)》, 만권당, 2015
  • 《고조선 연구 (하)》, 만권당, 2016
  • 《한국 열국사 연구》, 만권당, 2016[3]
  • 《고조선, 우리 역사의 탄생》, 만권당, 2016
  • 《우리 고대사, 상상에서 현실로》, 만권당, 2016

비판

윤내현의 고조선 관련 연구 및 그의 대표적인 저서 《고조선 연구》는 북한역사학자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1963)를 표절했다는 비판을 받았다.[4]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북한 학설을 표절한 빨갱이로 신고당해, 당시 정보부에 끌려가서 조사를 받았다.[5] 용공혐의 없음으로 결론이 났고, 연구를 계속해도 된다는 말을 들었다. 정보부 측에서도 너무 황당했었는지 역사학자 아무개가 신고했다고 귀띔해주었고 한다.[6] 이형구의 증언에 따르면 84년 당시 학술세미나에서 윤내현은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와 유사하다는 지적이 있자, 자신이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등 북한 자료를 미국의 대학도서관에서 입수했음을 시인하면서도, 85년 11월 "주를 달면 자신의 학설이 무너진다" 는 말을 남기고 이미 지급된 연구비를 반납하고 자신의 글을 거두어 갔다. 하지만 이형구의 증언은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다. 윤내현의 증언에 따르면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연구비를 받지도 않았고, 이야기만 왔다갔다한 선에서 그쳤다. 시간이 지나서 윤내현의 제자가 당시 상황을 아는 분께 확인해보니 연구비를 지급한 기억은 없다고 한다.[7] 한편 윤내현은 《한국고대사신론》에서 "필자는 민족사학자들의 견해를 수용 · 보완한 북한 학자들의 연구 업적과 그들이 발굴한 자료도 활용하게 될 것이지만 그것을 일일이 주기하지 않을 것이며 대표적인 문헌 몇 권만을 소개하는데 그칠 것이다. 이 점은 분단시대에 있어서 한국 역사학계가 겪고 있는 고통이므로 독자들의 이해 있기를 바란다."라고 언급했던 일이 있는데,[8] 이에 대해서 이형구는 "민족사학자들의 견해를 수용·보완한 북한 학자의 연구 업적과 발굴 자료를 많이 활용하면서도 이에 대한 설명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민족사학자들은 약간의 견해를 피력했을 뿐이지 리지린과 같은 본격적인 연구는 없었다. 또 분단시대의 한국 역사학계가 겪고 있는 고통 때문에 주기를 일일이 달지 않겠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왜 다른 학자들은 북한의 학술 성과를 주기로 소개한단 말인가? 그리고 역사학계만이 마치 그런 고통을 겪고 있는 것처럼 표현하여 일반 독자들의 눈을 가리고 있다. 분단상황은 민족 모두의 고통이지 역사학계만 안고 있는 고통이 아니다. 북한의 자료가 제대로 입수되지 못하고 또 입수하기 어려운 상황이 고통이라고 할 수는 있어도, 입수하고 검토하여 활용한 자료를 유독 밝히지 않고 넘어가겠다는 것은 분단상황의 고통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자신의 주장에 영향을 주고 참고로 삼은 타인의 연구 업적을 밝힐 용기가 없으면 글을 발표하지 않는 것이 바른 태도이다."라고 비판하였다.

이런 비판에 대해 윤내현은 이러한 조치가 학자의 양심을 저해한 행위가 아니며 자신의 연구 결과에 따른 것이라 주장했으며[9] “나의 주장은 신채호·정인보·장도빈 등의 ‘민족사학자’들이 주장해왔던 기존 학설과 궤를 같이하고 있을 뿐 표절과는 거리가 먼 주장”이라고 입장을 표명했다.[10][11][12]

같이 보기

각주

  1. 윤내현교수 - ::: 해남신문 :::‎
  2. 조선닷컴 포커스 인물
  3. 1998년 출간된 동명의 저서의 개정판
  4. 이형구, 〈리지린과 윤내현의 '고조선 연구' 비교〉, 《역사학보》 146호, 1995 / 서영수 (1949년), 〈요동군의 설치와 전개〉 p22, 《요동군과 현도군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08
  5. [서울광장] 비운의 역사학자 윤내현/오일만 논설위원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81&aid=0002850292
  6. https://www.youtube.com/watch?v=jIB5qx-4TQM 동영상 38:00 이후 참조.
  7. https://www.youtube.com/watch?v=jIB5qx-4TQM 동영상 44:51 부터 참조.
  8. 윤내현, 《한국고대사신론》, 일지사, 1986, p.14
  9. 「고조선의 강역」해석싸고 표절 논쟁 재연 경향신문 6면 생활/문화 기사(뉴스, 1986.04.23) 참조
  10. “「古朝鮮(고조선)의 疆域(강역)」해석싸고 표절 論爭(논쟁) 재연”. 경향신문(네이버). 1986년 4월 23일. 2012년 7월 3일에 확인함. 
  11. "고구려 태동 현도군과 관계없어". 연합뉴스(네이버). 2007년 2월 6일. 2012년 7월 3일에 확인함. 
  12. “오후여담, 역사 vs 역사”. 문화일보(네이버). 2006년 10월 4일. 2012년 7월 3일에 확인함. 

읽을 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