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 해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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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좁은 목(項)을 통과하려던 일본 수군은 수로를 틀어막고 있던 조선 수군에 의해 막히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형국이었다. 통제사 이순신은 이점을 노린 것이 분명했다. 일본 수군에게 또 하나의 악재로, 정오 즈음이 되자 점차 [[조류]]및 바람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하였다. 이번에는 조류의 방향이 조선 수군에는 순조(順潮)가 되고 일본 수군에 역조(逆潮)가 되어, 포구에 갇힌 일본 수군에게 대단히 불리한 상황이 되었다. 썰물이 시작되었기에 첨저선이었던 일본 수군은 수심이 낮은 임하도 안쪽 해역에서 좌초되기 시작했다. 배를 돌려서 탈출하려 해도 좁은 해역에 많은 수의 전선이 밀집되어 있었기에 일종의 아비규환이 되었다.
또한 좁은 목(項)을 통과하려던 일본 수군은 수로를 틀어막고 있던 조선 수군에 의해 막히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형국이었다. 통제사 이순신은 이점을 노린 것이 분명했다. 일본 수군에게 또 하나의 악재로, 정오 즈음이 되자 점차 [[조류]]및 바람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하였다. 이번에는 조류의 방향이 조선 수군에는 순조(順潮)가 되고 일본 수군에 역조(逆潮)가 되어, 포구에 갇힌 일본 수군에게 대단히 불리한 상황이 되었다. 썰물이 시작되었기에 첨저선이었던 일본 수군은 수심이 낮은 임하도 안쪽 해역에서 좌초되기 시작했다. 배를 돌려서 탈출하려 해도 좁은 해역에 많은 수의 전선이 밀집되어 있었기에 일종의 아비규환이 되었다.
포구안으로 여러 전선이 모인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들을 화전(火戰)으로 유린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한 기술은 [[난중잡록]]에 기록되어 있다. 해남명량대첩비(海南鳴梁大捷碑)에도 "적의 배는 불에 타고 부서져서 침몰되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포구안으로 여러 전선이 모인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들을 화전(火戰)으로 유린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한 기술은 [[난중잡록]]과 [[선묘중흥지]]에 기록되어 있다. 해남명량대첩비(海南鳴梁大捷碑)에도 "적의 배는 불에 타고 부서져서 침몰되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b>"육박하여 난전이 되었을 때 홀연히 장수 배에서 주라를 번갈아 불어대고, 지휘기가 일제히 흔들리고 도고(鼗鼓)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불이 적의 배에서 일어나 여러 배가 연소되니, 불길은 하늘을 뒤덮었고, 화살을 쏘아대고 돌을 던지고 창검이 어울려서 찌르니, 죽는 자는 삼대가 쓰러지듯 하였고, 불에 타 죽고 빠져 죽는 자가 그 수효를 알 수 없었다.<난중잡론>"</b>
<b>"육박하여 난전이 되었을 때 홀연히 장수 배에서 주라를 번갈아 불어대고, 지휘기가 일제히 흔들리고 도고(鼗鼓)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불이 적의 배에서 일어나 여러 배가 연소되니, 불길은 하늘을 뒤덮었고, 화살을 쏘아대고 돌을 던지고 창검이 어울려서 찌르니, 죽는 자는 삼대가 쓰러지듯 하였고, 불에 타 죽고 빠져 죽는 자가 그 수효를 알 수 없었다.<난중잡론>"</b>
<br>

<b>안위등이 배를 돌려 들어서서 적을 대항하자 적이 개미 때처럼 붙어 안위의배가 거의 침몰하게 되므로 이순신이 배를 돌려 그것을 구원하고 그 자리에서 적선 두 척을 쳐부수고 잠시 동안에 삼십척을 연달아 깨뜨리며 그 선봉장의 목을 베니 적이 크게 놀라 물러 갔다. 이순신이 적의 머리를 달아 매고 배 위에서 풍악을 치며 도전하니 적이 분노하여 군사를 나누어 교대로 나오는데 이순신은 승리한 기세를 타고 불을 놓아 여러 배들을 불태우니 시뻘건 불길이 바다를 덮은 속에서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는 적병이 그 수를 알 수 없었으며 마침내 래도수(구르시마 미치후사)를 죽이고 모리민부는 물에 떨어져서 죽음을 겨우 면했고 그 밖에도 적장의 죽은자가 몇 명 있었다.<선묘중흥지></b>


난중일기에는 "화전(火戰)”이라는 문구가 없고 “화살을 비오듯 쏘아대니”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난중잡록에서는 화전(火戰)임을 알게 해준다. 난중일기에는 화전(火戰)에 관한 기록이 빠져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군감 [[모리 다카마사]]는 바다에 빠졌다가 구조되었고 일본군 사령관 [[도도다카토라]](藤堂高虎)는 부상을 당했다. 임하도의 좁은 수로에서 막힌 일본 수군의 피해는 매우 컸다 할 수 있다. 또한 해상에서 싸우던 일본 수군 중 [[도도다카토라]](藤堂高虎)등 일부가 도주에 성공하였으며 일본 수군은 유시(酉時 오후 5시~7시) 무렵, 물살이 느려지고 바람이 [[일본]] 수군쪽으로 부는 것을 이용, 퇴각하였다.또한 조선 수군은 해전후 당사도(唐沙島)로 퇴각하여 이튿날 어외도(무안군 지도읍)에서 피난민들과 합류하였다.
난중일기에는 "화전(火戰)”이라는 문구가 없고 “화살을 비오듯 쏘아대니”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난중잡록에서는 화전(火戰)임을 알게 해준다. 난중일기에는 화전(火戰)에 관한 기록이 빠져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군감 [[모리 다카마사]]는 바다에 빠졌다가 구조되었고 일본군 사령관 [[도도다카토라]](藤堂高虎)는 부상을 당했다. 임하도의 좁은 수로에서 막힌 일본 수군의 피해는 매우 컸다 할 수 있다. 또한 해상에서 싸우던 일본 수군 중 [[도도다카토라]](藤堂高虎)등 일부가 도주에 성공하였으며 일본 수군은 유시(酉時 오후 5시~7시) 무렵, 물살이 느려지고 바람이 [[일본]] 수군쪽으로 부는 것을 이용, 퇴각하였다.또한 조선 수군은 해전후 당사도(唐沙島)로 퇴각하여 이튿날 어외도(무안군 지도읍)에서 피난민들과 합류하였다.

2019년 10월 13일 (일) 19:22 판

명량해전(鳴梁海戰)
정유재란의 일부

회본태합기에 수록된 명량 해전도(섬과 육지사이의 좁은 목에서의 전투를 그렸으며 섬은 임하도(林下島)이다.)
날짜1597년 10월 25일(음력 9월 16일)
장소
명량해협:전남 해남군 문내면 예락리(임하도(林下島))
결과 조선군의 결정적 승리
교전국
지휘관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전라우수사 김억추
조방장 배흥립
회령포만호 민정붕
발포만호 소계남
녹도만호 송여종
미조항첨사 김응함
영등포만호 조계종
안골포만호 우수
거제현령 안위
평산포대장 정응두
가리포첨사 이응표
해남현감 류형

금구현령(金溝縣令) 나대용

도도 다카토라
구루시마 미치후사  
가토 요시아키
구키 요시타카
하타 노부토키  
와키자카 야스하루
간 미치나가
간 마사카게  

모리 다카마사
병력
판옥선 13척외 초탐선등 기타병력 군선 세키부네 130여 척[1], 수송선 아타케부네 200여 척
피해 규모

순천감목관 김규동, 우수영노비 계생 전사 (전사자 총 2명)
박영남, 봉학, 이극신 등 3명 부상,기타 상세 불명[2]

임치 첨사가 탄 배의 격군이 부족했다 하였으므로 조선수군의 피해규모가 컸을것으로 추정됨(난중일기 1597년 9월17일)
전선 100여척이상 완파, 이외 전선 다수 파괴[3],
도도 다카토라 부상
구루시마 미치후사 전사
칸 마타시로 마사케가 전사
최소 8000여 명 전사 추정[4]

명량 해전(鳴梁海戰) 또는 명량 대첩(鳴梁大捷)은 1597년(선조 30) 음력 9월 16일(양력 10월 25일)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 13척이 명량에서 일본 수군 130척 이상을 격퇴한 해전이었다.

배경

조선 수군의 재건

원균윤두수를 비롯한 일부 서인 세력의 모함을 받고 이순신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서 파직당한 뒤 원균은 새로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한산도(閑山島)에서 일본 수군과 접전을 벌였으나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여 다수의 장병과 대부분의 전선을 잃고, 조선수군은 제해권을 상실하였다. 이에 선조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자 이순신을 다시 복권하여 삼도수군통제사로 기용하였다. 선조는 이순신을 통제사로 복권시키는 대신 품계를 낮춰 조선 수군의 지휘 체계 혼란을 야기하였다.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 받았을 때 종2품 이었으나 차후 자헌대부 정2품의 벼슬을 받았다. 조선 육군은 대부분 궤멸되다 시피하고 통제사 이순신이 한산도(閑山島)에서 대첩을 하자 대감급인 정헌대부 정2품의 벼슬을 받았다. 정헌대부는 현직이 그 공로에 의거해서 따로 임명해주는 일종의 명예직 같은 것이라 보면 쉽게 이해 할 수 있다. 따라서 통제사 이순신은 “영감”이라 부르는 것이 옳다.

통제사의 고충

그러나 선조(宣祖)는 이순신(李舜臣)을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복권하기는 하였으나 휘하 장수들과의 마찰도 발생했다. 특히 이순신과 전라우수사 김억추는 통제사와 충돌을 일으켰다. 난중일기(亂中日記) 1597년 9월 8일자에는 이순신은 장수들을 모아놓고 대책에 대해 논의를 했다. 일기에는 “김억추”에 대한 비판으로 그저 “만호”나 어울리는 사람이라 평가를 했다. 군사 회의에서 “김억추”가 말썽을 부렸을것으로 추정하게 한다. 또한 선조는 이순신의 휘하장수였던 충청수사 권준과 무의공 이순신을 수도방위를 이유로 전투참가를 불허하였다. 조선 수군에게 남은 전선은 겨우 12척에 불과하였다. 이순신이 1597년 9월 28일(음력 8월 18일) 회령포에서 전선 10척을 거두었고, 그 후 2척이 더 회수됨으로써 12척이 남은 전선의 전부였던 것이다. 나중에 명량 해전을 앞두고 또 1척이 김억추나 송여종의 지원으로 추가되어 13척이 되었다.

그러나 12척의 전선으로 수많은 일본 수군을 막아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기에 통제사 이순신의 휘하 장수들에게는 갑을 박론이 있었을 것이다. 난중일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날 새벽에 배설(裵楔)이 도망갔다<난중일기 1597년 9월 2일>”

배설이 도망을 쳤다고 난중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대부분 “배설”이 비겁해서 도망쳤다고 말을 한다. 영화명량에서도 배설이 비겁하게 도망친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배설이 비겁해서 도망간 것은 아니다. 아마도 한산도(閑山島) 칠천량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한 후 정신적으로 문제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현대 의학 용어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이다. 난중일기를 읽어 보면 그런 증후일 것으로 분석 된다. 배설외에도 일본군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장수들이 여럿이 있었다. 부하 장수들의 두려움은 곧 통제사에게는 큰 고충이었을 것이다.

통재사의 결의

선조는 칠천량에서의 패전으로 조선군의 손실이 커서 선조는 수군을 폐지하려고도 하였다. 그러자 이순신은 선조에게 다음과 같은 장계를 올려 수군폐지불가론을 펼쳤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남아 있나이다. 죽을 힘을 다하여 막아 싸운다면 능히 대적할 수 있사옵니다. 비록 전선의 수는 적지만 신이 죽지 않은 한 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 후, 이순신은 남해안 일대를 돌아다니며 흩어진 병사들을 모아 수군 재건에 전력을 다했다. 이순신은 음력 8월에 일본 전투선이 어란포(현재 해남군 어란리 근처)에 나타난 것을 격퇴한 후, 음력 9월에 일본 함대가 어란포에 들어온다는 보고를 받고 음력 9월 15일에 벽파진에서 해남의 우수영(右水營)앞바다인 임하도(林下島)로 진을 옮겼다.

임하도의 항구 모습

▶故移陣于右水營前洋: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겼다.(난중일기 1597년 음력 9월 15일:국보 제 67호)
국보 제 67호인 난중일기(亂中日記)에는 우수영(右水營)이 아닌 우수영(右水營) 앞바다(前洋)로 진(陣)을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해상으로 진(陣)을 옮긴 것이다.

일본 수군의 기동

이 때, 어란포의 일본 수군은 구루시마 미치후사도도 다카토라, 와키사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구키 요시타카, 칸 마타시로 마사케가가 지휘하는 130척 이상의 함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왜장 산도(山道)에게 붙잡혀 포로 생활을 했던 전풍상(全風上)에 의하면 산도가 정유 재란때 본국에서 120척의 자기소속의 배를 가지고 왔다고 하였으므로 다른 왜장들의 전선까지 합치면 200여척은 넘지 않을까 추정하게 한다.)

일본 수군은 목포 쪽으로 흐르는 북서류를 타고 명량해협을 통과하여 전라도로 서진하여 일본 육군과 합류할 계획이었다. 명량해협진도화원 반도 사이에 있는 좁은 수로로 조류는 당시 조선의 수로 중에서 가장 빠른 곳이고 전세계에서도 5번째로 빠른 곳이다. 빠른 수로를 이용하여 잔존하는 조선 수군을 격파한 후 일본 육군과 합류하여 한양으로 진격하려는 것이었다.

일본 수군은 1592년의 전훈을 참조하여 내륙으로 깊숙이 진격하기 전에 반드시 서해의 해상권과 전라도를 장악하고자 하였다. 이순신이 복귀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13척의 전선만으로는 무력하리라는 것이 일본 수군의 판단이었다. 이순신과 전투에서 이미 패배를 경험한 도도 다카토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칠천량 해전의 승리가 일본 수군의 사기를 드높여준 탓이었다. 일본 수군은 압도적인 전력으로 이순신의 수군을 격파할 것을 결의했다.

한편, 이순신도 일본 수군의 기동 보고를 받고 명량대첩 직전 날인 10월 24일(음력 9월 15일), 장병들에게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卽生 必生卽死)’고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다면 즉시 군율을 적용하여 조금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라고 거듭 말하며, 장병들과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것을 결의하였다.[5]

임하도(林下島)에서의 접전(우수영(右水營) 앞바다(前洋))

울돌목(명량해협)은 수심이 얕아서 배가 항해할 수 있는 범위는 좁고, 그 중에서도 밀물 때 넓은 남해의 바닷물이 좁은 울돌목으로 한꺼번에 밀려와서 서해로 빠져 나가면서 해안의 양쪽 바닷가와 급경사를 이뤄 물이 쏟아지듯 빠른 조류가 흘렸다. 울돌목 물살의 또 다른 특징은 수십 개의 크고 작은 암초가 솟아 있다는 점이다. 급조류로 흐르던 물살이 암초에 부딪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소용돌이치게 되는 것이다.[6]

명량해협모습

따라서 통제사 이순신과 제장들은 울돌목에서는 전투가 불가하다는것을 깨닫고는 판옥선을 이끌고 우수영(右水嶺) 앞바다인 임하도(林下島)로 진을 옮긴 것이다. 임하도는 도도다카토라(藤堂高虎)의 "고산공실록(高山公実録)"에 기록된 대로 물살이 약한곳이요. 모리고정(毛利高政)의 "모리고동문서(毛利高棟文書)"에 기록된 대로 신성해협(명량해협)입구가 된다. (지금의 임하도 안쪽 해역은 간척이 되어 세광염전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당시엔 그곳까지 일본 수군이 몰려서 격파되었을 것이다.)

일본 수군 지휘부는 순류에 맞춰 명량해협(울돌목)을 단숨에 넘어가 고니시 육군을 지원하기로 하였다. 특히 구루시마 수군은 원래 해적 출신으로 이 같이 물살이 빠른 지역을 근거로 했던 바, 빠른 물살에 익숙한 이들은 명량해협에서 이순신이 막는다 하더라도 무리없이 전개할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명량해전에서 전사한 칸 히라우이몬 미치나가(菅平右衛門達長)의 서자인 칸 마타시로 마사케가(菅野又四郎正陰)도 수전에 능한 일본군 장수이다. 그러나 일본군은 서해 물길을 잘 몰랐으니 당시 길목이었던 임하도(林下島)의 좁은 수로를 통과하기로 마음 먹었던 것이다.

  • 임하도의 서쪽해상은 밀물이 되면 진도의 넓은 바다에서 올라오는 조류와 울돌목에서 올라오는 조류가 충돌하는 지점이다. 또한 마진도와 임하도 사이의 간격이 4km정도 되는데 넓은 바다에 비하면 폭이 좁기에 물살이 거칠고 빠른 속도로 북쪽으로 이동한다. 울돌목에 비하면 조류 속도가 느리지만 당시의 무동력선인 중소형의 왜선은 통과하기가 힘든 해상이다.

해전 경과

10월 16일(음력 9월 7일) 조선 수군은 벽파진 근처에서 일본 수군과 접전을 하여 물리쳤다. 이에 분한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이 13척뿐임을 알고, 해상의 적 이순신과 조선 수군을 완전히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경성으로 곧장 올라가기로 마음 먹는다. 이에 이순신은 일본군이 조선군을 가볍게 보고 있다는 점을 이용하여 그들을 임하도(林下島) 유인하고자 했다.

임하도좁은목
임하도의 좁은목-울돌목으로들어가는목

이에 대해 “김중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조선 수군 10여 척이 우리 배를 추격하여 군사를 사살하고 배를 불태웠다. 통분할 일이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전선들을 모두 불러모아 합세해서 조선 수군을 섬멸하자. 그리고 곧장 경성으로 올라가자."

벽파진(碧波津)에서 우수영 앞바다(임하도)로 본진을 옮긴 이튿날인 10월 25일(음력 9월 16일) 새벽 3~4시 경 어란진에서 출병한 일본 수군 130(혹은 200여척)여 척이 7~8시 경 순조(順潮)를 타고 울돌목(鬱陶項)을 지나 임하도(林下島)로 접근했다. 일본 수군 지휘부는 중형 군선인 관선(세키부네)로 진영을 짜고 대열을 맞추며 울돌목(鬱陶項)을 통과하고 있었다. 이때 조류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즉, 일본 수군의 진격 방향이 조류의 흐름과 일치하는 순방향이었다. 이순신은 여러장수(6척의 판옥선 장수)에게 명령하여 임하도의 좁은 수로에 닻을 내리고 적이 오기를 기다리게 했다. 그곳의 수로를 막음으로써 임하도의 바다는 하나의 큰 포구(浦口)가 된 셈이었다. 일본 수군을 좁은 수로와 포구(浦口)에 가두어서 섬멸하려는 것이 이순신의 계략이었다.

  • 조선 수군 공격대:통제사(統制使)이순신(李舜臣),김억추(金億秋),배흥립(裵興立),송여종(宋汝悰),정응두(丁應斗),안위(安衛),김응함(金應諴)
  • 조선 수군 수비대:민정붕(閔廷鵬),우수(禹壽),조계종(趙繼宗),이응표(李應彪),류형(柳珩),소계남(蘇季男),나대용(羅大用)등 기타 병력
......나아가 명량 해협을 지키고 있었는데, 적군이 이르자 적군의 망루(望樓)와 노(櫓)가 바다를 덮는 듯 하였다. 공은 여러 장군들에게 명령하여 배를 몰아 좁은 목에 대기시키고, 뱃머리를 나란히하여 닻을 내리고 중류(中流)를 막고 적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명량은 육지 사이가 좁은데다가 때마침 밀물이 세차게 몰려와 파도가 매우 급했다. 적은 상류로부터 조수를 타고 몰려 내려오는데 그 세력이 마치 산이 내려누르는 듯하였다......<이충무공전서, 명량대첩비>


일본 수군이 “마치 산을 누르듯이” 울돌목을 통과하고 임하도(林下島)해역으로 들어와 좁은목을 통과하려고 했다. 그러나 조선수군이 이곳을 막고 있었고 왜선은 조선수군에 막혀 통과를 하지 못했다. 이때 이순신과 그를 따르던 7척의 판옥선들이 임하도 바깥 해역을 우회하여 진군하였고 일본군은 두패로 나누어서 번걸아가면서 대응을 했다. 그러나 전투 초반 그의 휘하 장수들이 겁을 먹고 뒤로 물러나 버렸다. 그러나 통제사 이순신은 결단을 내려 일본군 진영으로 들어가서 본격적인 해전이 시작되고, 화포를 폭풍우처럼 발사하고 화살을 비 오듯 발사했다. 난중잡록에는 이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임하도해역

왜적은 우리 군대가 외롭고 힘이 약함을 보자 삼킬 듯이 서로 다투어 먼저 올라와 사면을 포위하고 엄습하여 왔다. 아군은 싸울 뜻이 없는 양 보이며 거짓으로 적의 포위 속으로 들어가니, 왜적은 아군의 두려워하고 겁냄을 기뻐하였다.<난중잡록>

본격적인 해전이 시작되자 통제사 이순신이 부하를 데려오고 싶었겠으나 사태가 좋지 못하여 이러지도 못할때 초요기를 올려 뒤로 물러나있던 중군장 미조항 첨사 김응함과 거제현령 안위를 진격해 오도록 한 뒤, 그들을 매우 다그쳤다. 두 사람의 배가 적진으로 공격하기 시작하고 안위의 군선으로 일본 수군의 공격이 집중되었다. 격전의 와중에 이순신의 대포와 화공에 맞아 안위의 배를 둘러쌌던 왜선이 파괴되었고 여도 만호 송여종(宋汝悰)과 평산포 대장 정응두(丁應斗)의 배가 속속 이르러 힘을 합쳐 적을 쏘았다. 기함에 탑승하고 있던 항왜 준사(俊沙)가 "저기 그림무늬 붉은 면옷(畫文紅錦衣)을 입은 자가 안골 적진의 적장 마다시입니다(馬多時,칸 마타시로 마사케가)다"라고 알렸다.

조선 수군의 공세

이순신은 무상(無上,물긷는 군사)김돌손(金乭孫)을 시켜 즉시 마다시(馬多時)를 끌어올릴 것을 명했다. 갈고랑쇠에 낚여 배 위로 끌려 올라온 적장 마다시(칸 마타시로 마사케가)는 곧바로 촌참(寸斬)하자 조선 수군의 사기는 급격히 올라갔다. 반면에, 전투 중에 지휘관이 적군에 의해 참수되고 토막난 것을 본 일본 수군의 사기는 떨어졌다. (내도수(來島守)인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부상으로 사망했다. 그리고 난중잡록에는 효수되었다고 기록되었다.)

또한 좁은 목(項)을 통과하려던 일본 수군은 수로를 틀어막고 있던 조선 수군에 의해 막히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형국이었다. 통제사 이순신은 이점을 노린 것이 분명했다. 일본 수군에게 또 하나의 악재로, 정오 즈음이 되자 점차 조류및 바람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하였다. 이번에는 조류의 방향이 조선 수군에는 순조(順潮)가 되고 일본 수군에 역조(逆潮)가 되어, 포구에 갇힌 일본 수군에게 대단히 불리한 상황이 되었다. 썰물이 시작되었기에 첨저선이었던 일본 수군은 수심이 낮은 임하도 안쪽 해역에서 좌초되기 시작했다. 배를 돌려서 탈출하려 해도 좁은 해역에 많은 수의 전선이 밀집되어 있었기에 일종의 아비규환이 되었다. 포구안으로 여러 전선이 모인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들을 화전(火戰)으로 유린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한 기술은 난중잡록선묘중흥지에 기록되어 있다. 해남명량대첩비(海南鳴梁大捷碑)에도 "적의 배는 불에 타고 부서져서 침몰되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육박하여 난전이 되었을 때 홀연히 장수 배에서 주라를 번갈아 불어대고, 지휘기가 일제히 흔들리고 도고(鼗鼓)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불이 적의 배에서 일어나 여러 배가 연소되니, 불길은 하늘을 뒤덮었고, 화살을 쏘아대고 돌을 던지고 창검이 어울려서 찌르니, 죽는 자는 삼대가 쓰러지듯 하였고, 불에 타 죽고 빠져 죽는 자가 그 수효를 알 수 없었다.<난중잡론>"

안위등이 배를 돌려 들어서서 적을 대항하자 적이 개미 때처럼 붙어 안위의배가 거의 침몰하게 되므로 이순신이 배를 돌려 그것을 구원하고 그 자리에서 적선 두 척을 쳐부수고 잠시 동안에 삼십척을 연달아 깨뜨리며 그 선봉장의 목을 베니 적이 크게 놀라 물러 갔다. 이순신이 적의 머리를 달아 매고 배 위에서 풍악을 치며 도전하니 적이 분노하여 군사를 나누어 교대로 나오는데 이순신은 승리한 기세를 타고 불을 놓아 여러 배들을 불태우니 시뻘건 불길이 바다를 덮은 속에서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는 적병이 그 수를 알 수 없었으며 마침내 래도수(구르시마 미치후사)를 죽이고 모리민부는 물에 떨어져서 죽음을 겨우 면했고 그 밖에도 적장의 죽은자가 몇 명 있었다.<선묘중흥지>

난중일기에는 "화전(火戰)”이라는 문구가 없고 “화살을 비오듯 쏘아대니”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난중잡록에서는 화전(火戰)임을 알게 해준다. 난중일기에는 화전(火戰)에 관한 기록이 빠져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군감 모리 다카마사는 바다에 빠졌다가 구조되었고 일본군 사령관 도도다카토라(藤堂高虎)는 부상을 당했다. 임하도의 좁은 수로에서 막힌 일본 수군의 피해는 매우 컸다 할 수 있다. 또한 해상에서 싸우던 일본 수군 중 도도다카토라(藤堂高虎)등 일부가 도주에 성공하였으며 일본 수군은 유시(酉時 오후 5시~7시) 무렵, 물살이 느려지고 바람이 일본 수군쪽으로 부는 것을 이용, 퇴각하였다.또한 조선 수군은 해전후 당사도(唐沙島)로 퇴각하여 이튿날 어외도(무안군 지도읍)에서 피난민들과 합류하였다.

승리의 요인

주요 승리 요인으로는 임하도(林下島)의 지형을 이용하고 시간에 따른 조류및 바람의 변화를 이용한 이순신의 뛰어난 전술과 기이한 계략 덕분이었다. 해남명량대첩비문(보물 제503호)에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명량(鳴梁)의 입구여 좁고도 단단하니/ 조수가 밀려오면 양쪽의 땅이 잠길 듯하구나/ 지리를 잘 이용하여 기이한 계략을 내었으니/ 새까맣게 몰려들던 추한 무리 버틸 수가 없었네

당파전술과 함포전술

조선 수군에게 함포전은 백병전 중심의 일본 수군을 상대로 효과적이라 할 수 있으며, 다양한 종류와 구경의 화포를 사용하였다. 오늘날 다연장포에 비교할 수 있는 신기전, 박격포에 해당할 비격진천뢰, 대형 로켓 병기라 할 만한 대장군전 등의 신무기를 사용하였다. 일본 수군 역시 함포를 사용하였으나 조선 수군에 비해 사용이 서툴렀으며 일본 수군의 함포 적재량이 조선 수군에 비해 열세였다. 조선 수군은 백병전에 불리하므로 함포전으로 일본 전선의 근접을 저지했으며 또한 조선 수군은 함포전 뿐만 아니라 판옥선이 적선보다 견고한 점을 활용하여 일본의 전선과 충돌하여 부서뜨리는 당파전술(충각전술)도 구사했다.[7]

  • 일본 수군의 주요 전술은 "등선육박"이었다.

판옥선과 왜선의 비교

일본 수군의 전선은 뱃머리가 뾰족한 첨저선으로 아타케부네(安宅船) 등이 있다. 길고 좁은 각재 하나만을 바닥에 깔고 그것을 뼈대로 외판을 붙여나가는(V자형 바닥) 첨저선과 달리, 조선 수군의 판옥선은 배 밑이 평평한 평저선이다. 판옥선은 바닥이 평평하고 뱃머리가 뭉툭하며, 크기는 일본 수군의 가장 큰 배인 아타케부네보다 조금 크다. 평저선은 첨저선 보다 배가 물에 잠기는 지점인 흘수선이 낮으며, 물에 깊게 잠기지 않으므로 전선을 회전시키는 선회기동에서 물속의 저항을 덜 받는다. 하지만 평평한 바닥이 물 표면에 닿는 면적은 넓어서 배의 직진 능력에는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 암초가 많고 조수간만의 차이가 심한 우리나라 바다에서 사용이 적합했는데, 갑작스레 썰물이 되어도 판옥선이 뒤집힐 위험이 없었다.

또한 물과 닿는 면적이 넓어 화포를 발사할 때의 반동 흡수가 용이하다. 판옥선에서 사용한 나무못은 물을 먹으면서 팽창하여 결합부위를 견고하게 했으며, 판자로는 소나무를 사용했다. 소나무 판자는 일본 수군의 삼나무전나무 판자 보다 단단하다. 일본 수군의 전선은 쇠못을 사용했는데, 쇠못은 바닷물에 녹이 슬어 전선의 결합부위가 약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판옥선의 판옥 구조는 높이가 높아서 화포의 사거리를 늘리고, 노꾼과 사부를 튼튼한 판옥으로 보호하여 전투에 안정적으로 임하도록 한다. 또한 내부가 넓어 노 한 자루당 4~6명의 노꾼이 커다란 노를 저었으며 작은 노를 젓는 일본 수군보다 효율적이다. 판옥선의 돛은 역풍에도 사용할 수 있는 세로돛을 사용했으며 일본 수군은 역풍에 무용지물인 가로돛을 사용했다. 일본 수군의 전선은 순풍이 불어올 경우에 판옥선보다 조금 빨랐을 것으로 보인다.[8]

결과

유시(酉時, 오후5시 ~ 7시)무렵, 전투는 끝났다. 난중일기상으로 전투에 참여한 일본 수군의 전선 130여 척 중 30여 척(31~33)이 격침되었고, 왜군의 중형 군선에는 약 100명씩 타고 있었으므로 최소 3000여 명의 전사자가 났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지만 난중잡록을 통해서 더 많은 피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기록마다 격침된 왜선수가 다르므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깊이 연구를 할 필요가 있다. 반면, 조선군의 전선은 단 하나도 격침되지 않았다. 순천감목관 김탁과 이순신의 종 계생이 전사하였고, 안위의 전함의 격군 일고여덟 명이 물에 빠졌지만 생존 여부는 불투명하다. 그러나 난중일기는 좁은 수로에서의 기록이 빠진것이므로 실제 조선군의 피해는 더 있을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우수영과 인근의 수 많은 피난민들이 안전한 북쪽지역으로 이동을 하는데 시간을 벌어준 해전이기도 하며 조선이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끄는 결정적 전투가 되었다.

당시 일본 수군이 남해안 대부분의 재해권을 장악[9]하였고 수군과 합세한 일본 육군은 1597년 9월 25일(음력 8월 15일), 9월 29일(음력 8월 19일) 남원 전투, 전주성에서 조명 연합군을 대파하고 남원전주를 함락시켰다. 일본 육군은 전라도 점령 이후 충청도 직산까지 진격하여 명나라군과 대치중인 상황이었다. 일본 육군과 수군은 수륙 병진을 통한 한양 공격을 목전에 두고 있었으나, 명량 해전으로 인해 일본군의 수륙병진작전이 철저히 무산되었으며,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에 분산되어 왜성을 쌓고 농성전에 들어가게 된다. 이후 정유재란은 농성하는 일본군을 조명연합군이 수륙 양면에서 협공하는 공성전으로 바뀌게 된다.

  • 기타 사항은 링크된 블러그를 통해서 정보를 얻을수 있다. 명량해전

해전 위치에 대한 논란

해전 위치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여러 학설이 있었으며 정확한 해전 위치를 찾지 못함에 명량해협의 중간인 울돌목에 한정해서 정설로 인정되어 왔다. 그러나 울돌목은 대한민국에서 조류가 가장 빠른 곳이므로 무동력선이 해전을 치르기에는 부적합하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한 이유는 고대 문헌을 이해 하는데 어려움이 많았으며 통제사 이순신의 전술을 이해하는데 오류가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닻을 내리고 중류(中流)를 막게 한다"함은 항로(航路)를 차단하는 것을 말하며 단 1척의 왜선도 통과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임무가 달성될 때까지 닻을 올리지 않아야 한다. 울돌목이라면 이러한 조건을 달성하지 못한다. 또한 항로(航路)를 차단했기에 통제사는 섬을 우회하여 배후를 공격해야 하지만 울돌목이라면 진도 섬을 우회해야 하는데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통제사가 병력을 나누어서 각기 다른 임무를 부여했음을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동안 미궁에 빠졌던 부분이다.(이것은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명량해전에 대한 학설중에서 여러 학설이 있지만 그중에서 사관학교 “이민웅” 교수님이 말씀하신 “우수영 앞바다설”이 가장 근접한 학설이라 본다. 그러나 그에 대한 반박도 있는데 내용은 아래와 같다.

우선 우수영 앞바다는 조류의 흐름과 무관하며 바다는 호수같이 잔잔하다. 때문에 조류의 방향이 바뀌어도 왜군들은 물러가지 않고 조선 함대가 궤멸될 때까지 계속 공격해 올 것이다. 또 <지도 5-1-2>(옮긴이 주 : 우수영 앞바다에서의 전투모습)와 같은 진법으로 대치하고 있었다면 마다시의 죽음과 관계없이 도도 다카도라, 구키 요시다카,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의 선단들도 총력 공세를 폈을 것인바, 왜군들은 칠천량에서 조선 함대를 전멸시켰듯이 13척의 이순신 함대를 전멸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진도대교 아래에서 마다시를 죽였고 마다시 선단을 대신해서 공격을 시도코자 했던 도도 다카도라 등 뒤따르고 있던 왜선단은 패전한 마다시의 선단이 불이 붙은 채 아비규환의 상황에서 떠내려 오고 있었기에 공격에 나설 수 없었다. 그 위에 역류가 된 물살은 더욱 급류로 변해 갔기에 이순신 함대에 접근해 간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이렇게 정리해 볼 때 필자들은 <지도5-1-2>에 동의할 수가 없다.

울돌목설에 대한 반론
명량해전에 직접 참가한 “도도다카도라”의 기록인“고산공실록”에 의하면 조선수군의 판옥선이 물살이 약한 구역에 있었다고 명백히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조류가 빠른 울돌목에서는 전투가 발생할 수 없다. 또한 판옥선은 평저선이므로 직진 항해 속도가 왜선에 비해 느리다. 따라서 이른 아침에 빠른 조류는 판옥선이 감당할 수준이 되지 못한다. 또한 일본 수군이 통제사의 대장선을 포위를 하려면 물살이 약한 곳이어야 한다. 난중일기와 난중잡록의 형태를 보건데 “포구”안에서의 전투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통제사 이순신은 조류가 빠른 울돌목(진도대교)의 전투를 피했던 것이다. 또한 오늘날의 엔진의 힘을 이용한 동력선도 울돌목(진도대교)의 빠른 물살에 못이겨 전진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하니 당시의 무동력선은 물돌목의 물살을 이기지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 자료에 대한 고증

*고산공실록(도도다카토라)

“​ちとまへかとにこもかいへ御こしなされ候 処にすいえんと申所にはん舟の大しやう分十三そうい申候 大川のせよりはやきしはのさし引御さ候 所の內にちとしほのやハらき申候 所に十三そうのふねい申候
그 조금 전에 제포(薺浦-경상우수영)에 가셨습니다. '수영(조선 수군의 진인 벽파진)'이라는 곳에 조선 대장선 13척이 있었습니다. 큰 강의 여울목(울돌목)에서 바닷물의 간만이 빠른 해역(명량해협)인데, 약간 바닷물의 흐름이 약해진 구역(임하도를 말함)에 13척의 배가 있었습니다. <출처 리안2001>

"약간 바닷물의 흐름이 약해진 구역”에 조선 수군이 있었고 물살이 매우 빠른 울돌목에서는 전투가 발생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울돌목”에 집착을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고산공실록(高山公実録)은 당시 명량해전에 참가한 일본 수군 사령관 도도다카토라(藤堂高虎)의 실전 기록이다.

*해남명량대첩비(보물 제503호)의 기록

명량대첩비에는 전투장소가 기록되어 있다. 우선 해남명량대첩비문(海南鳴梁大捷碑文)[10]을 살펴보도록 하자.

해남명량대첩비

▶1597년 통제사 이충무공이 수군을 거느리고 진도 벽파진 아래에 주둔하고 있다가 울돌목으로 들어가는 목에서 왜군을 크게 쳐부수었다."

비문에는 통제사 이순신이 진도 벽파진 아래 주둔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난중일기에는 첩보를 통해 1597년 9월 15일에 벽파진에서 우수영(右水營) 앞바다(임하도)로 수군 진지를 급하게 옮겼다. 따라서 "주둔하고 있다가"라는 표현이 맞다. 또한 울돌목(鬱陶項)으로 들어가는 목(項)에서 전투가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울돌목(鬱陶項)과 목(項)은 서로 다른 장소의 지형임을 알 수 있다. 명량(鳴梁)으로 들어가는 입구(入口)에 좁은 수로(水路)가 있는데 그곳은 임하도(林下島)이다. 해남명량대첩비는 임하도에서의 해전을 기록한 것이다.

▶그 중에서 울돌목의 싸움은 가장 통쾌한 승리였다.

언뜻 보면 "울돌목"에서 전투가 일어난 것으로 보기 쉽다. 그러나 명량해협(鳴梁海峽)을 속칭으로 울돌목(鬱陶項)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임하도 앞바다(안쪽)도 명량(속칭 울돌목)에 속한다 볼 수 있다.

▶공은 여러 장군에게 명령하여 배를 명량으로 들어와서 좁은 목에 대기시키고 적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조선 수군은 명량해협(임하도)밖에서 정박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일본 수군이 다가오자 통제사(統制使)는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좁은 목(項)에 수척의 함선을 대기시키게 하고 적이 오기를 기다린 것이다. 일본군이 임하도(林下島)로 다가오자 나머지 수척의 판옥선이 노를 저어 임하도(林下島)를 우회하여 전투를 치른 것이다. 난중일기에는 통제사(統制使)는 여러 장수와 함께 닻을 올리고 노를 저어서 바다로 나아갔다라고 했는데 그는 좁은 목(項)에서 닻을 내리고 적이 오기를 기다리지는 않은 것이다. 조선 수군의 병력을 나누어서 각기 다른 임무를 수행한것이다.

*난중 잡록

왜적의 괴수인 내도수(來島守)는 병선 수백 척을 거느리고 먼저 서해로 향하여 진도(珍島)의 벽파정(碧波亭) 밑에 이르렀다. 이때에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은 명량(鳴梁)에 유진하고 피란한 배 백여 척이 뒤에서 성원하였다.<난중잡록>

"통제사 이순신은 명량(鳴梁)에 유진"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유진(留陣)이란 "군사들이 머물다"란 의미인데 우수영(육지)이 아닌 바다에 머물고 있었다는 뜻이며 수군진을 "우수영 앞바다"로 옮겼다는 난중일기의 기록과 일치한다.

*연려실기술

이순신이 군사를 돌려서 우수영 명량 앞바다에 있는데 날이 밝아오자 적선 5, 6백 척이 바다를 가리우고 왔다. 적의 장수 마다시(馬多時)는 본래 수전을 잘한다는 소문이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다 걱정하고 두려워하였다.

연려실기술에도 통제사는 우수영 명량 앞바다에 있었다고 적고 있다. 이것은 난중일기의 "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겼다는 기록과 일치한다. 따라서 통제사 이순신은 "우수영"에는 없었다.

*징비록

통제사 이순신이 벽파정 아래에서 왜군을 무찌르고 적장 마다시를 죽였다....<징비록>

징비록에는 벽파정 아래에서 일본군을 무찔렀다고 적고 있다. 난중일기에는 우수영 앞바다로 수군진을 옮겼기에 벽파진(碧波津)해역에서 마다시가 죽은것은 기록상 오류가 있다. 그러나 선조실록처럼 장계에 의해서 기록을 했다면 벽파정으로 적었을 것으로 추정케 한다. 명량대첩비에도 "진도 벽파진 아래에 주둔하고 있다가 울돌목(鬱陶項)으로 들어가는 목(項)에서 왜군을 크게 쳐부수었다." 라고 적고 있다. 언뜻보기에는 벽파정(碧波津)에서 해전이 발생한것으로 착각 하기 쉽다. 수군진을 옮긴것에 대한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회본태합기

회본태합기(일본 에도시대)명량해전도에 그려진 섬은 임하도(林下島)이다. 이 문서에 수록된 그림을 임하도 실사진과 비교를 해보면 명량해전의 위치가 임하도임을 누구나 판별할 수 있다. 판옥선과 작은 전선까지 합하면 약 8-9척의 조선 수군이 임하도의 좁은 수로를 틀어막고 있음을 그리고 있다. 민간인 배도 동원이 된듯 하다. 또한 난중일기에 기록처럼 통제사는 7척의(난중일기 6척과 선조실록의 배흥립) 판옥선으로 닻을 올리고 임하도를 우회하여 바다로 나아가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던 것이다. 따라서 철쇄설(鐵鎖說)은 부정되며 진도와 해남 사이의 울돌목설(鬱陶項說)도 부정된다. 또한 양도-학동리설도 부정되며 기타 다른 학설도 부정된다. 회본태합기에는 조선 수군이 임하도의 좁은 목(項)을 막기 위해서 돛대를 앞으로 눕힌것이 보인다. 삿대 역할이라 보면 맞을 것이다. 따라서 철쇄가 아니라 돛대로 봐야 한다. 먼거리서 보면 철쇄와 돛대가 혼돈될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1872년 진도지방지도

1872년에 발행된 진도 지방 지도에는 명량해전 위치를 정확히 기술하고 있다. 이 지도에는 오양탄(嗚洋灘)이 기재되어 있으며 충무공이 왜적을 크게 무찌른 곳임을 알려주고 있다. 오양탄(嗚洋灘)은 울돌목(鬱陶項)과는 내포하는 의미가 다르므로 서로 다른 장소를 가르킨다. 이 지도에는 오양탄(嗚洋灘)의 위치가 우수영 경계(右水營界)밖에 있음을 표시하고 있다. 이것은 우수영 성벽을 기준으로 삼은것인데 오늘날의 "서상리"가 경계지점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충무공이 왜적을 크게 무찌른 오양탄(嗚洋灘)은 오늘날의 "전남 해남군 문내면 예락리"에 위치에 있음을 지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또한 지도 맨위에 첫번째산은 "일성산"으로 판단된다. 일성산 옆으로 홍색으로 통행로가 그려져 있는데 오늘날에도 이 통행로는 "성산교차로"와 "이목교차로"가 연결된 "관광레저로"이다. 오양탄(嗚洋灘)이 우수영경계와 일성산 사이에 표기되어 있으므로 해전 장소는 "임하도"가 된다. 지도는 "서울대학교 규장각 지리지 종합정보//서울대규장각지리"에서 열람할 수 있다.

1872년에 발행된 진도 지방지도의 일부분(된 진도 지방지도의 일부분(고종 9년)

명량 해전에 참전했던 일본 병력에 대한 논란

《난중일기》에서 정유일기 1권을 보면 적선 133척으로, 정유일기 2권을 보면 적선 130여척으로 나온다. 이《난중일기》를 엮은 간행관은 적선을 330척으로 표기했으나 이는 난중일기를 잘못 판독한 것이다.[11] 유득공의 《이충무전서》에서는 333척으로 나왔다.

한편 《난중잡록》에서는 병선 수백척으로, 《이충무공전서》[12] 와 《연려실기술》은 5~6백척 이라고한다. 한편 《선조실록》의 장계 등에서는 130여척으로 나오는데다 입으로 전해져서 과장되었다고 보는 추측이 있고, 또한 조선 수군에 많이 패한 와키자카 등이 대함대를 거느릴 수 있었는가 하는 의문에서 130여척으로 보는 편이다. 다만 전풍상의 증언에 의하면 “산도(山道)"[13]인 “도도다카토라"가 정유재란때 본국에서 120척의 자기배를 가지고 왔다고 했으므로 130여척의 전선중에서 120척이“도도다카도라"의 소속이라면 130척보다 많아진다고 봐야 한다.

정확한 일본 수군의 병력 규모는 파악하지는 못하지만 난중잡록에는 10척 정도만이 탈출에 성공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난중일기나 선조실록에 기록된 전과를 인정하고 있기에 그동안 미궁에 빠진 부분이었다. 그러나 난중일기(선조실록)에 격파된 30여척의 일본 수군은 통제사가 이끄는 공격대가 올린 전과이고 좁은 수로나 포구 안쪽에서 발생한 전과는 기록되지 않은 것이다. 이곳은 뱃길이었으므로 일본 수군이 통과를 위해 진입했을 것인데 통째로 누락된것이다. 통제사는 일기나 장계에 좁은 수로에서의 전과를 왜 기록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는 부하들의 전공만 기재를 하고 자신의 전공을 기재하지 않은 적도 있기 때문에 해전 위치와 전술을 노출시키지 않거나 전공에 대한 부담으로 고의로 누락 시켰다는 설도 있다.

전풍상에 의하면 도도다카토라는 명량에서 통제사와 접전하여 자기 부하 절반이 죽고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하였으므로 최소 60여척의 왜선이 격침되거나 전투 불능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에 대한 평가는 이르지만 난중일기에 기록된 격파된 왜선수 30척보다 2배나 많은 숫자에 해당된다. 따라서 난중일기는 좁은 수로를 지키고 있던 조선 수군의 피해 상황과 전투 기록이 누락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행스러운것은 난중잡록은 난중일기에서 기록되지 않은 전투상황의 기록이므로 상당수의 일본군이 화전(火戰)에 의해 피해를 보았음을 알 수 있으며 통제사가 30척을 격파하고 해남명량대첩비에 100척이 화공으로 침몰하고 난중잡록에 10척이 도주를 했다고 하였으므로 왜선은 약 130-140척이 되는 셈이다. 여기에 도도다카토라의 살아남은 60척을 더하면 200척이 된다. 도도다카토라(藤堂高虎,山道)가 120척의 전선을 가지고 왔으며 다른 왜장의 전선까지 합치면 200척(추정)이나 되지만 역시 일본군의 전체 병력 수를 정확히는 알지 못한다.

기타

마다시와 구루시마 미치후사

난중잡록》에는 내도수(來島守 )로 기록되어 있으나 본명은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通總)로, 일본의 해적 가문 출신이다. 당포 해전에서 이순신의 함대와 맞서 싸우다 전사한 구루시마 미치유키(來島通之)의 동생으로 알려져 있다. 마다시(馬多時)는 칸 히라우이몬 미치나가(菅平右衛門達長)의 서자인 칸 마타시로 마사케가(菅野又四郎正陰)로 알려져 있다. 언뜻보기에는 난중일기난중잡록은 둘다 명량해전을 기록한 것이지만 서로 다른 각도에서 관찰하여 기록한 문헌이다. 난중일기는 임하도를 우회한 통제사 이순신이 이끄는 공격부대측의 기록이며 수로측에서 발생한 기록은 빠져있다. 그러나 난중잡록은 해상에서의 전투기록은 매우 간략하지만 수로측이나 포구 안쪽에서 발생한 해전 기록은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두 문헌은 서로 다른 기록선상에 있기에 "마다시"와 "내도수"는 서로 다른 인물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증명하는 문헌이 있는데 "선묘중흥지(宣廟中興誌)"[14]에는 마다시로 추정되는 일본군의 선봉장이 효수되었으며 "래도수"는 통제사가 화공으로 일본 수군을 공격할때에 사망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마다시(칸 마타시로 마사케가)"로 추정되는 인물과 "래도수(구르시마 미치후사)"를 서로 다른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난중일기에 기록된 명량해전은 통제사가 이끌고 해상에서 전투를 벌인 기록일뿐 "임하도의 좁은목"주변이나 해안가에서 발생한 전투기록은 빠져있음을 증명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난중잡록의 저자인 의병장 조경남은 마다시와 내도수를 혼돈했을 가능성이 높다. 효수된 왜장은 마다시이며 내도수는 효수되지 않은것으로 봐야 한다.

오익창의 사호집

2012년 9월, 이순신의 부하였던 오익창의 사호집이 발굴되었다. 자료에는 "이순신 장군을 힘을 모아 돕는다면 살 것이요, 죽더라도 나라에 충성했다는 명분은 남을 것이다." 등에 피난길에 나선 사대부들을 설득해 식량과 옷을 조달하게 한 것도 승리의 밑바탕이 되었다고 하며, "사대부들의 솜이불 백여 채를 걷어다가 물에 담가 적신 뒤 12척의 배에 걸었더니, 왜군의 조총 탄환이 그것을 뚫지 못했다"고 적고 있다. 난중일기, 사호집을 완역한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은 "다른 부하들의 문집보다 사호공의 문집이 더 구체적이고 상세해서 12척의 배를 가지고 어떻게 싸웠는가를 알 수 있는 자료"라고 평가했다.[15]

명량대첩기념비

전남 해남군 문내면 동외리에 명량대첩기념비가 있다. 1688년(숙종 14년)에 세워졌으나 일제 강점기시 피해를 입어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옮겨졌던 것을 1945년 해방 이후 우수영 유지들에 의해 원래 세워졌던 장소로 회수됐다. 보물 제503호로 지정되어 있다. 해남명량대첩비에는 해전 장소가 임하도(林下島)임을 가르키고 있다. 임하도(林下島)에는 명량(鳴梁)으로 들어가는 입구(入口)인 좁은 목(項)이 있다.

같이 보기

각주

  1. '난중일기 정유년 1'의 (명량해전 날) 9월 16일자 일기에는 133척이라 적혀있으나 정확한 기록을 위해 이순신이 다시 쓴 '정유년 2'의 9월 16일자 일기에는 130여 척이라 기록되어 있다.
  2. 이순신 (1597). 《난중일기》. 
  3. 나머지 90여 척 모두 다 반파됐다는 일각의 주장이 있으나, 전문가 중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난중일기, 조선왕조실록, 장계 등에도 그에 관하여까지 서술하고 있는 역사적 근거는 없다. 예컨대, 이순신의 난중일기 중 정유일기2의 9월 16일자를 보면 마지막 부분에 "적선 서른한 척을 쳐부수자"라고 돼있을뿐, 나머지 전선에 대해서는 정확히 얼마나 많은 수가 완파 혹은 반파됐는지 불분명하다. 그러나 난중일기는 통제사측이 이끄는 공격부대의 전과일뿐 좁은 수로에서의 전투기록이 누락되었으므로 100여척이상이 완파되었을 것으로 예측된다.[출처 필요]
  4. 반파된 일본군 전함 수가 불분명한 것과 마찬가지로, 사극 '불멸의이순신'을 비롯하여 불특정 일각에서 일본군 전사자 수를 18466명이라 하는데, 전문가 중 전사자 수로 18466명을 드는 사람도 없으나 난중잡록을 통해서 수많은 왜선이 화공으로 완파되고 많은 일본군이 물에 빠져죽었다는것을 알 수 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 임금에게 올린 장계, 조선왕조실록 등 어느 사료 중에서도 일본군 전사자 수를 18466명이라고 기록한 사료는 없지만 난중일기는 통제사가 이끄는 공격부대의 전과이므로 임하도의 좁은 수로를 방어하는 지역에서의 전과는 빠져 있다. 따라서 실제 완파된 왜선수는 100여척에 이를것으로 보인다. 다만 당시 일본군의 참전 군함이었던 세키부네에는 한 척당 80-100명 정도가 탔을 것으로 오늘날 추정되는데, 설령 일본군 함대 130여 척이 다 완파됐다고 하더라도 18466명은 전혀 부합하지 못하는 전사자 수이지만 그 만큼 많은 일본군이 피해를 겪었음은 난중잡록이 증명해 준다. 그러나 일본군 총 전사자 수는 불명이다.[출처 필요]
  5. 이순신 지음, 노승석 옮김, “난중일기”
  6. 울돌목(명량해협)에는 현재 진도대교가 건설되어 있으며 조류의 속도는 예전에 비해 다소 줄었다.
  7. 해전전술관 Archived 2014년 8월 21일 - 웨이백 머신 경남도청 광관진흥과, 임진왜란 불패신화 충무공 이순신
  8. 조선의 주력함 '판옥선'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PDF 문서)
  9. 이순신의 파직과 조선 수군의 칠천량 해전 패배
  10. 1597년 통제사 이충무공이 수군을 거느리고 진도 벽파진 아래에 주둔하고 있다가 울돌목으로 들어가는 목에서 왜군을 크게 쳐부수었다. 이로 인하여 적은 다시 해로를 통하여 전라도지역을 넘보지 못하였고 그 이듬해에 적은 마침내 완전히 철수하고 말았다. 임진왜란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분이 이충무공이요 그 중에서 울돌목의 싸움은 가장 통쾌한 승리였다. 공이 처음에 전라좌수사로 있다가 적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을 듣고 비장한 각오로 병졸과 함께 서약을 행하고 경상도 지역을 들어가 침입하는 적군을 맞아 싸워 옥포, 당포, 고성의 당황포에서 모두 적은 군대로써 많은 적군을 상대로 싸워 번번이 큰 전과를 올렸고 뒤에 한산도에서 대승리를 거두었다. 나라에서는 공을 통제사에 임명하고 삼도의 수군을 다 지휘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공이 그대로 한산도에 수년간 주둔하게 되고 적은 감히 바닷길에 나올 생각을 갖지 못하였다. 이 해에 적은 크게 병력을 동원하여 두 번째의 침략을 감행했다. 과거의 실패를 만회할 생각으로 전력을 기울여 해상공격을 시도하였다. 이때에 마침 공은 모함을 입어 백의종군 하고 있었는데 나라에서는 사태가 위급함으로 다시 공을 통제사에 임명하였다. 이에 앞서 원균이 공을 대신 적과 싸우다가 크게 패하여 배와 장비와 병졸을 모조리 잃어버리고 한산도도 적에 빼앗겼다. 공은 백지상태로 된 현지에 단신으로 부임하여 흩어진 병졸을 모아들이며 부서진 배를 수리하여 가까스로 십여척을 마련하였다. 이것으로 명량해협을 지키고 있었는데 적군은 큰 배와 많은 군대로 바다에 가득히 몰려왔다. 공은 여러 장군에게 명령하여 배를 명량으로 들어와서 좁은 목에 대기시키고 적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곳은 좁은데다가 때마침 세차게 몰려오는 밀물의 파도가 매우 급했다. 적은 상류를 이용하여 산에 내려 누르는 듯이 아군을 향하여 몰려들었다. 이를 본 이순신 장군은 병졸을 격려하며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맹렬한 공격을 개시 하였다. 장병들은 이공과 함께 결사적으로 싸웠고 배는 날으듯이 적선들 사이에 출몰하여 대포의 불꽃이 사방으로 튀어 바닷물이 끓어오르는듯 하였다. 이러는 동안 적의 배는 불에 타고 부서져서 침몰되고 물에 빠져 죽은자가 헤아릴수 없이 많았다. 적은 마침내 크게 패하여 전함 백여척을 쳐 부서졌고 적장 마다시도 죽었다. 임진왜란중 승전은 있었다 하나 이는 모두 가까스로 그 성을 지킨데 불과하며 공과 같이 한 해역을 도맡아 독자적으로 완전한 승리를 거둔 일은 없다. 마지막으로 노량의 싸움은 중대한 결전이었고 또 위대한 승리였으나 공은 이 싸움에서 목숨을 바쳤고 적도 이땅에서 완전히 물려났다. 나라에서는 왜란을 평정한 공적으로 공을 선무공신의 칭호를 내리고 벼슬을 좌의정에 추증하고 노량에 충민사를 지어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이름은 순신, 자는 여해, 아산출신이다. 명량대첩비는 남방인사들이 전적지인 명량에 공의 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마련한 것이다. 숙종11년(1685년)3월 예조판서 이민서 짓고, 판돈녕 부사 이정영이 쓰고 홍문관대제학 김만중이 전자를 썼다.
  11. 명량(鳴梁)의 진실과 오해 데일리한국
  12. 이충무공전서 9권 부록1. 행장, 이분
  13. “지난 임진년 8월 산골로 피란했다가 왜적에게 잡혔는데 왜장 산도(山道)의 진중에 소속되어 안골포(安骨浦)에 한달 남짓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산도를 따라 바다를 건너 일본의 국도(國都)에서 동쪽으로 하룻길인 진역군리(鎭域軍里)에 도착했는데 진역군리는 바로 산도가 다스리는 고을이었습니다. 또 산도에게 딸린 부장(副將) 우다능기(尤多凌其)의 종이 되어 복역하면서 이따금 문서(文書)를 선소(船所)에 송달하기도 했는데 대체로 우다능기는 바로 산도가 관할하는 전선(戰船)의 장수였습니다. 선척의 숫자는 1백 20여 척으로 지난해 6월 산도가 재차 자기 소속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부산포(釜山浦)에 정박하였고, 7월 사이에는 한산도(閑山島)에서 접전한 뒤에 하동(河東) 앞 포구에서 하륙(下陸)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구례(求禮) 지방을 거쳐 남원(南原)을 함락시키고 전주(全州)에 도착했다가 즉시 하동으로 돌아왔는데 대개 갔다가 돌아온 기간이 20여 일이었습니다. 또 하동에서 열흘 간 머문 뒤에 산도(山道)가 선척을 다 거느리고 수로(水路)를 따라 순천(順天)·흥양(興陽)을 거쳐 우수영(右水營) 앞바다에 도착했는데, 거기서 통제사(統制使)와 접전을 하여 왜적의 반이 죽거나 부상당했습니다. 그리하여 무안(務安) 지방으로 후퇴하여 정박하면서 날마다 분탕질을 한 뒤에 다시 순천으로 들어와서 왜교(倭橋)에다 성을 쌓고 주난궁(走難宮)에게 지키도록 한 다음 산도는 즉시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우다능기를 따라 광양(光陽) 지방의 장도(獐島)에 옮겨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또 우다능기가 일본으로 다시 들어간다는 기별을 듣고 고향 생각을 이기지 못하여 밤을 타서 도망와 현감(縣監)에게 자수(自首)해 온 것입니다. 순천왜교성은 육군 장수인 우끼다히데이(宇喜多秀家)와 수군장수인 도도다카토라(藤堂高虎,山道))가 축성했다.
  14. 안위등이 배를 돌려 들어서서 적을 대항하자 적이 개미 때처럼 붙어 안위의배가 거의 침몰하게 되므로 이순신이 배를 돌려 그것을 구원하고 그 자리에서 적선 두 척을 쳐부수고 잠시 동안에 삼십척을 연달아 깨뜨리며 그 선봉장의 목을 베니 적이 크게 놀라 물러 갔다. 이순신이 적의 머리를 달아 매고 배 위에서 풍악을 치며 도전하니 적이 분노하여 군사를 나누어 교대로 나오는데 이순신은 승리한 기세를 타고 불을 놓아 여러 배들을 불태우니 시뻘건 불길이 바다를 덮은 속에서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는 적병이 그 수를 알 수 없었으며 마침내 래도수를 죽이고 모리민부는 물에 떨어져서 죽음을 겨우 면했고 그 밖에도 적장의 죽은자가 몇 명 있었다./선묘중흥지(宣廟中興誌):1587년(선조 20)부터 1607년(선조 40)까지 임진왜란의 전말, 극복 과정, 전후 교섭 등을 기술한 책.
  15. 명량해전 대승의 비결은?‥사대부 희생 빛나 Archived 2012년 10월 21일 - 웨이백 머신 mbc뉴스 2012년 9월 19일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