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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 23일 (월) 23:08 판

변계량(卞季良, 1369년~1430년)은 고려조선 초의 정치가이다. 자는 거경(巨卿), 호는 춘정(春亭), 본관은 초계 (밀양)이며,[1]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생애

이색·정몽주 밑에서 가르침을 받고, 고려 우왕 때인 1385년 문과에 급제하여 전교·주부(主簿)·진덕박사 등을 지냈다.

조선 건국 초 천우위우령(天牛位右領) 중랑장 겸 전의감승(典醫監丞) · 의학교수관(醫學敎授官)이 되고, 사헌부 시사(司憲府侍史)·성균관 학정(成均館學正)·직예문관(直藝文館)·사재소감(司宰少監)·예문관 응교(應敎)·직제학 등을 지냈다.

태종 7년(1407년) 문과중시에 급제, 예조 우참의, 1409년에 예문관 제학(提學), 1417년 예문관 대제학·예조 판서, 이듬해 참찬(參贊)이 되었다. (세종 8년(1426년) 판우군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事)가 되었다.

20여 년간 대제학을 지내면서 외교 문서를 지어 잡과출신으로는 문장이 있었으며, 《태조실록》 편찬과 《고려사》 개수에 참여하였다. 시에도 뛰어나 문묘·기자묘의 비문과 낙천정기(樂天亭記) · 헌릉지문(獻陵誌文) 등을 지었으며 《청구영언》에 시조 2수가 전한다.

일화

  • 《용재총화》에는, 변계량의 인색한 성품에 대한 일화가 수록되어 있는데, "과일을 먹을 때마다 몇 개를 쪼갰는지 그 수를 기록하였으며, 집에 손님이 찾아와 술을 마실 때도 손님이 몇 잔을 마셨는지를 세고 있다가 어느 순간에 술병을 가만히 봉해버렸다. 이러한 그의 모습에 불쾌함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찍 일어나는 손님도 많았다고 한다."
  • 뛰어난 문장으로 세종의 명을 받아 흥덕사(興德寺)에서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엮는 임무를 맡아 머무르는 동안, 세종이 궁중의 귀한 음식을 하사하였고, 조정의 고관도 동료들 또한 자주 변계량에게 술와 음식을 보내 위로하였는데, 변계량은 그 음식과 술을 모두 먹지 않고 방에다 저장해 둘 뿐, 따르던 종이나 시자 누구에게도 한 입 나눠주는 일이 없었고 급기야 날이 오래되어 음식들이 구더기를 까고 악취가 진동할 정도로 썩으면 그냥 언덕에 갖다 버릴 뿐이었다.
  • 한 번은 휴가를 얻어 시골의 별장에서 지었던 시를 서울로 올라가면 왕에게 바치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문사 김구경(金久冏)이 듣고 자신이 예전에 지어두었던 시와 비교하면서 "춘정(변계량)이라는 자는 시를 모른다더니 과연 그렇구나. (중략) 그의 문장은 기(氣)가 아주 졸렬한데 그런 시를 갖다 바치면 이는 임금을 기망하는 짓이다"라고 비웃었고, 변계량도 옛 시를 인용하며 "구경은 자신도 시를 모르면서 내가 지은 것을 비웃는다"고 반박했고, 《용재총화》의 저자는 김구경은 문사로써 자신의 재주를 믿고 남을 멸시하며 후배로써 선배를 경멸하였으니 변계량 또한 마음에 아니꼽게 여겨 서로 싫어하고 갈라져서, 평생 김구경은 현달한 관직을 얻지 못했다고 평한다. 또한 변계량이 지은 《낙천정기》를 보고 김구경은 "이 글에서 성리(性理)를 논한 부분은 《중용》의 서(序)와 흡사하다."고 폄하 하였다고 한다.

위의 이야기에 대하여 용제총화에 나오는 이야기의 사실성 문제에 대하여 언급하고저 한다. 1)낙천정기에 대하여 성현의 용재총화에는 당시 춘정 변계량이 ‘낙천정기’를 짓고 김구경을 불러 이를 보게 하니, 구경이 말하기를, “이 기(記)가운데 성리(性理)를 논한 곳은 중용의 서(序)와 흡사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낙천정기를 지은 세종 원년(1419) 변계량은 의정부 참찬(參贊)으로, 정2품 상계(上階)의 관리였는데, 정6품의 관리가 감히 시와 학문의 잘못을 면전에서 했다고 주장하는 성현(成俔)과 서거정(徐居正)의 말을 믿을 수 없다. 그리고 왕위의 선양(禪讓)은 성리학에서 가장 높은 이념인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탕(湯) 임금이 하(夏) 나라를 멸망시키고 기(杞) 나라를 보존시켜 하 나라의 제사를 받들게 한 것이나, 무왕(武王)이 은(殷) 나라를 멸망시키고 송(宋) 나라를 보존시켜 은 나라의 제사를 받들게 한 것과 문왕(文王)이 덕을 베풀어 대학의 지어지선(止於至善)을 잘 실천하여 천명(天命)을 받은 것, 모두가 중용의 실천이요, 윤집궐중(允執厥中)의 천명을 얻은 것이라는 것은 비록 서(序)이지만, 대학과 중용의 본(本)을 말한 것이니, 김구경이 이를 비웃었다면 김구경이 오히려 혹 사장(詞章)에는 능한자 인지는 몰라도 학문은 반드시 형편없는 사람이란 것을 스스로 말한 것이다. 물론 낙천정 기문은 훌륭한 문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2) 중 둔우(屯雨)와 혼수(混脩)문제. 한편 용제총화에 『중 둔우는 환암의 고제(高弟)이다. 어려서부터 학업에 힘써 경전을 탐독하지 않은 것이 없고, 그 뜻을 정밀하게 연구하였다. 또 시에도 능하여 시사가 청절하여 목은ㆍ도은 등 선생과 더불어 서로 시를 주고받았다.(생략)일본 국사인 중 문계가 시를 구하여 진신(縉紳)중에서 시를 지은 사람이 수십 명이나 되었는데, 스승도 또한 명을 받들어 시를 지었다. (생략)당시에 변계량이 문형을 주관하였는데, 쇄연무위(灑然無位)의 글귀를 고쳐서 소연절세인(蕭然絶世人)이라 하니, 스승이 말하기를, “변공은 참으로 시를 모르는 사람이로다. 소연(蕭然)이 어찌 쇄연(灑然)만 하며, 절세(絶世)가 어찌 무위(無位)만 하겠는가. 이것은 자연무위(自然無爲)의 뜻을 깎아 없앨 뿐이로다”하고, 항상 문사를 보면 섭섭해마지않았다. 』라고 하였다.(성현, 용재총화 제6권) 성현은 이 이야기를 형인 성간으로부터 들은 것을 적은 것이라 하였지만, 이것은 성현이 거짓말을 한것이거나 아니면 성간이 거짓으로 꾸며낸 이야기일 뿐이다. 때문에 성현의 용재총화(慵齋叢話)는 단순한 이야기 책이지 사실을 적은 역사서가 아닌 것을 알아야 한다. 영의정 황희를 청백리로 둔갑시킨 것도 용재총화이다.

그 증거를 말하면 다음과 같다. 용재총화에 등장하는 중 둔우(屯雨)는 혼수(混脩)의 제자인데, 변계량이 문형(文衡)을 맡았을 때, 스승과 함께 일본인 승려 문계(文溪)가 시를 구하러 왔기 때문에 왕명으로 시를 지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당시 변계량이 쇄연무위(灑然無位人)의 글귀를 고쳐서 소연절세인(蕭然絶世人)이라 하니, 스승이 말하기를, “변공은 참으로 시를 모르는 사람이로다. 소연(蕭然)이 어찌 쇄연(灑然)만 하며, 절세(絶世)가 어찌 무위(無位)만 하겠는가. 이것은 자연무위(自然無爲)의 뜻을 깎아 없앨 뿐이로다” 하였다고 한 말의 사실 여부를 추적해 본다. 시는 아래와 같은 수국고정이다.

수국고정 / 水國古精 상쾌한 무위의 사람이로다(灑然無位人) / 빨리 달리는 것도 응당 스스로 그칠 것이요(火馳應自息) / 고목처럼 섰으니 다시 누구와 친하리오(柴立更誰親) / 풍악에는 구름이 발 아래에서 일고(楓岳雲生屨) / 분성에는 달빛이 성문에 가득하도다 (盆城月滿闉)/ 바람 맞은 돛은 해천이 넓고(風帆海天闊) / 매류는 고원의 봄이로구나(梅柳故園春)

먼저 둔우(屯雨)의 스승 혼수(混脩)는 조선이 건국한 1392년(태조 1) 9월 18일 입적하였다. 태조는 그를 위해 충주 소태면 오량리 청룡사지에 1394년에 부도(국보 제197호)와 탑비(塔碑)를 세웠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편, 변계량은 태종 17년(1417)에 비로소 문형(文衡)이 되었는데,(태종실록 33권, 태종 17년 4월 21일 정축) 이때는 이미 혼수(混脩)가 입적한 뒤였기 때문에 제자인 둔우(屯雨)와 함께 왕명으로 시를 지을 수 없었다. 또 세종 22년 5월 20일, 일본(日本) 중 지융(知融)이 사리각(舍利閣)을 유람하고 자신의 스승 문계(文溪)가 15년 전에 조선의 산사에서 독곡 성석린(成石璘)에게서 받은 시를 지참하고 온 사실이 있어, 이로 미루어 일본 승 문계(文溪)가 세종 7년 무렵에 조선의 사찰을 방문한 사실은 있으나, 국왕을 방문한 사실은 없음이 확실하다. (세종실록 89권, 세종 22년 5월 20일 신유) 또한 사실이라 하여도 역시 혼수(混脩)가 죽은 후이니 “변공은 참으로 시를 모르는 사람이로다.”라고 말하였다면 이는 거짓말일 수 밖에 없다.

또 세종 30년(1448) 일본 승 문계(文溪)가 일본국 정사(正使)로 조선 세종의 비(妃)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의 신위(神位)를 봉안(奉安)한 휘덕전(輝德殿)에 진향(進香)하는 일과 대장경(大藏經)을 줄 것을 청하였는데, (세종실록 120권, 세종 30년 4월 27일 임오.) 변계량은 세종 12년(1430)에 이미 죽었기 때문에 변계량이 문형의 지위에서 시구(詩句)를 넣고 빼고 할 가능성은 전무하기 때문에 전후 이야기를 미루어 보아 용재총화의 위 이야기는 모두 허황된 거짓말이 확실하다. 그 장본인은 반증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현재로는 서거정의 필원잡기와 그 제자인 성현의 공동 조작으로 보아지는데, 그 이유는 천재에 대한 질투가 아닐까? 아니면 두 사람다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기 때문에 시샘에서 나온 것임을 짐작케한다. 학계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어 변계량 같은 사람은 반드시 명예를 회복해야 된다.

관련 작품

드라마

각주

  1.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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