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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빈 최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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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이 희빈 장씨 사사 후 계비가 입궁하기 전인 1702년 5월 숙빈을 궁 밖으로 출궁시켜버렸다는 설이 있는데 이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조선왕조실록 숙종 30년(1704년) 4월17일자 기사에 '연잉군(延礽君)의 어머니 숙빈(淑嬪) 최씨(崔氏)는 이현(梨峴)에 갑제(甲第)가 있는데'라는 글이 등장한다.<ref>《조선왕조실록》, 숙종 30년 갑신(1704,강희 43) 4월17일 최종기사</ref> 숙종 재위 당시, 후궁으로 책봉되면 궐 밖에 사제를 지어 주는 것은 흔히 있던 일이었다. 숙종의 또다른 후궁 유씨([[소의 유씨]])는 숙원으로 책봉된 후 전택 매입에 소요되는 값이 6천 금(金)에 이르렀고,<ref>《조선왕조실록》, 숙종 32권, 24년(1698 무인 / 청 강희(康熙) 37년) 8월 2일(계묘) 2번째기사</ref> 숙원 박씨([[명빈 박씨]])의 궁에서도 강원도 춘천의 땔나무 터를 점유하는 일이 있었다.<ref>《조선왕조실록》,숙종 33권, 25년(1699 기묘 / 청 강희(康熙) 38년) 2월 27일(정묘) 1번째기사</ref> 때문에 대사간 이희무(李喜茂)는 '선왕조에서는 후궁의 제택을 별도로 두지 않았는데 정해진 제도를 준수하여 분에 넘치는 일이 없게 하라.'고 간언하기에 이르렀다.<ref>《조선왕조실록》, 숙종 39권, 30년(1704 갑신 / 청 강희(康熙) 43년) 5월 27일(을축) 2번째기사</ref> 그리고 조선왕조실록 숙종 37년(1711) 6월 22일 두번째기사 '옛날의 이현궁(梨峴宮)은 곧 지금의 숙빈방(淑嬪房)이다.'에서 숙빈방을 근거로 그전에 숙빈최씨가 궐을 나갔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지만 이 또한 확실하지 않다.<ref name="ReferenceA">《조선왕조실록》, 숙종 50권, 37년(1711 신묘 / 청 강희(康熙) 50년) 6월 22일(경진) 2번째기사</ref> 조선왕조실록에 희빈장씨를 뜻하는 장숙원방이라는 표현이 나오며<ref>《조선왕조실록》, 숙종 18권, 13년(1687 정묘 / 청 강희(康熙) 26년) 12월 22일(병인) 1번째기사</ref> 숙종의 후궁인 귀인김씨도 김숙원방이라는 표현이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한다.<ref>《조선왕조실록》, 숙종 42권, 31년(1705 을유 / 청 강희(康熙) 44년) 5월 2일(갑자) 1번째기사</ref> 또한 비변사등록 1708년 12월 30일 자료에 그때까지 궐을 나간적 없는 영빈김씨의 영빈방과 연령군방이란 표현이 존재하는것을 보아 숙빈방이란 표현은 단순히 숙빈최씨 소유의 자산 또한 창고를 뜻하는 바일 가능성이 크다.<ref>비변사등록 59책 숙종 34년 1708년 12월30일(음)</ref> 능원대군(綾原大君)의 옛 집인 이현궁(梨峴)은 최씨가 숙의(淑儀)였을때 그녀의 제택으로 정해졌는데,<ref>《조선왕조실록》, 숙종 27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10월 7일(신축) 1번째기사</ref> 숙종은 처음에 이현궁(梨峴宮)을 최씨의 사제로 삼았다가 신묘년(1711년)에 그녀의 아들 연잉군의 제택으로 정하며 내사로 예속시켰다.<ref name="ReferenceA"/> 또한 영조는 숙빈 최씨가 1702년 궁 밖으로 출궁당했다는 설을 확실하게 부정하고 있으며,<ref name="숙빈최씨 신도비淑嬪崔氏神道碑"/> 임방이 지었다는 숙빈 최씨의 제문 역시 숙빈 최씨의 1702년 궁 밖 출궁설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있다.<ref>淑嬪崔氏喪。遣內侍致祭文。/ 水村集卷之六/應製錄</ref> 두 기록 모두 공통적으로 숙빈최씨가 말년에 궐에서 숙종을 간병했다고 하며 말년에 궁을 나갔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렇지만 숙종은 1702년 9월에 소론 집안의 중전 김씨를 책봉했고 10월에는 모든 후궁들의 첩지를 올려주어 내명부 개편작업을 하였는데, 이런 상황에서 숙빈의 궐 내에서의 영향력은 급격히 줄어들 것으로 보이며 자신의 위치에 대한 심리적인 압박을 많이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숙빈은 이시기에 전후로 출궁한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으며 이현궁 출궁 후에도 숙종은 숙빈과 단 한번의 왕래도 없었고 암행을 나갈 때에도 이현궁을 항상 그냥 지나갔다. 그리고 역대 임금들은 왕실 지친이나 오래도록 내명부의 후궁으로 있거나 총애가 깊은 후궁이 죽으면 하루동안 정무를 정지하며 애도를 했는데, 숙종은 숙빈이 죽었을 때 당시 [["제수를 넉넉히 보내고 예장하라"]] 는 말만 있었을 뿐 하루동안 정무를 정지하며 애도하지도 않았다. 또한 숙빈의 묘자리를 알아보는 과정에서 숙종은 두번이나 최씨를 일반인보다 못한 취급을 한 기록이 [[(숙종 44년 1718년 4월 20일1번째 기사, 숙종44년 1718년 4월 29일 1번째기사)]] 실록에 그대로 있는데, 이 기록만 보더라도 숙빈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영조는 숙빈의 신분 상승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는데 특히 소령원에 있는 기록과 신도비에 기록된 내용들은 영조에 의해 기록된 것인데, 여경방에서 태어났다고 기재한 내용도 그렇고 평생 어머니의 신분 컴플렉스에 시달린 영조가 어머니가 7살에 입궁했다는 내용을 기재한 것도 역사학자들도 고지고대로는 믿지 않고 있다. 고종의 주장한 침방나인 설도 고종이 영조의 직계후손이라는 이유로 정설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 사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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