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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빈 최씨"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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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7세 때 [[무수리]]로 궁에 입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ref>[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6JOb_A1670_2_0018115&isEQ=true&kristalSearchArea=true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숙빈최씨]</ref> 다만 최숙빈의 출신에 대한 이설 중의 하나로, 김용숙의 《조선조 궁중풍속 연구》에는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후궁 [[삼축당 김씨]]와 [[광화당 이씨]]가 고종에게 직접 전해 들은 이야기라고 하여 숙빈이 본래 [[침방]] 출신이라는 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설이 설득력이 있는 이유는, 숙빈 최씨가 7살에 입궁했다는 기록이 있는데<ref>숙빈 최씨 신도비명(淑嬪崔氏神道碑銘)</ref> 7살은 보통 궁녀들이 입궁하는 평균 연령대이고, 그렇기 때문에 최씨가 침방 나인으로 있었다는 설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다. 그녀의 아들 [[조선 영조|연잉군]]은 숙빈이 침방나인 시절 세누비가 가장 하기 힘들었다는 말을 듣고 평생 누비옷을 입지 않았다고 한다.<ref>김용숙, 《조선조 궁중풍속 연구》</ref>. 그렇지만 침방 나인의 경우 궁녀 직첩 중에서 두번째로 높은 서열이라 아들인 영조가 신분 컴플렉스에 시달린 것에 비해서는 너무 높은 직책이라는 의견도 있어 확실하지 않으며, 오히려 침방나인의 시중을 들었던 각심이 출신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는 상태이다. 영조가 어머니의 신분 컴플렉스에 평생을 시달렸고 7살에 입궁했다는 두 가지 확실한 기록만을 놓고 봤을 때에는 침방 나인으로 입궁하였다 인현왕후 폐출시 같이 출궁 후 서인들에 의해 무수리로 재입궁한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최씨가 처음 승은을 입은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숙종 19년([[1693년]]) 처음 내명부 종4품 숙원(淑媛)으로 책봉되었고 그해 10월 6일 아들 영수(永壽)를 낳으나 영수 왕자는 두 달만에 세상을 떠났다. 임신주기가 10개월 정도 되는 것을 감안한다면 1692년 겨울 정도에 숙종과 인연을 맺고 1693년 1월 초에 임신한 것으로 본다. [[인현왕후]]가 복위된 해([[1694년]]) 숙종의 특명으로 종2품 숙의(淑儀)가 되었고<ref>《조선왕조실록》, 숙종 27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6월 2일(무술) 1번째기사</ref> 그해 9월 13일 연잉군(延礽君) 금(昑)을 낳았는데 훗날 조선의 21대 임금인 [[조선 영조|영조]]이다. 숙종 21년([[1695년]])에 종1품 귀인(貴人)이 되었고, 숙종 25년([[1699년]])에는 [[조선 단종|단종]]의 복위(숙종 24년(1698년) 기념으로 정1품 빈으로 봉해지면서 숙(淑)이란 휘호를 얻어 숙빈(淑嬪)이 되었다.
 
숙종의 제1계비 [[인현왕후|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와는 친분이 두터웠으며, [[인현왕후]]의 사후 [[조선 숙종|숙종]]에게 [[희빈 장씨]]의 저주굿을 발고하였다.<ref>《조선왕조실록》, 숙종 27년 신사(1701,강희 40) 9월23일 최종기사</ref> 일각에서는 희빈 장씨 사후 숙빈 스스로 왕비가 되고자 했다고 말하지만 이는 신빙성이 없는 추측이다. 숙종이 후궁이 왕비가 되지 못한다는 국법을 만들지 않았다고 해도 숙빈은 다음 왕비 후보가 될 수 없었다. 숙종의 후궁 중에는 서인 명문가 출신인 [[영빈 김씨|귀인 김씨]]가 있었고, 만약 김귀인이 명문가 출신이 아닌 궁인 출신이었어도, 소생이 있는 숙빈 최씨가 왕비가 되면 차기 왕위계승서열에도 차질이 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숙빈 최씨, 귀인 김씨 모두 서인 세력이었고 서인에게 다음 정권이 돌아갔기 때문에 굳이 왕비가 되어야 할 사람이라면 자녀가 없는 명문가 출신인 귀인 김씨가 오히려 유리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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