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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사기]]》의 말갈 ==
== 《[[삼국사기]]》의 말갈 ==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초기 기사에서는 [[강원도]]와 [[함경도]]로 추정되는 지역 주민들을 말갈이라 지칭하고 있다. 그 성격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표명되었다. 대개는 후대의 말갈과는 별개의 집단으로서 예족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ref>권오영(2018). 《백제와 부여의 계승성 여부에 대한 검토》, 동북아역사논총, 247쪽</ref> 이를 세분하여 백제본기에 나타나는 말갈의 활동범위는 강원 영서와 경기 북부로서 이들은 맥계이며 [[적석총]]을 남긴 것으로 보고, 신라본기의 말갈은 강릉 이북의 예계라는 견해도 있다.<ref>김택균, 1997, 「삼국사기에 보이는 말갈의 실체」,『고구려발해연구』 3, 고구려발해학회.</ref> 만주 지역에 거주하던 숙신인 일부가 주변 외족들의 압력을 받아 동북방으로 옮겼는데, 일부는 [[연변]]지구로 들어갔고, 일부는 [[백두산]]을 넘어 자연조건이 훨씬 좋은 남쪽으로 내려가 원주민의 힘이 약한 [[옥저]]지구로 들어간 것이 《삼국사기》백제본기의 말갈이라는 설도 있다.<ref>范恩實(2003), 「‘靺鞨’族称新考」, 『北方文物』 2003-3, 68~70쪽.</ref>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초기 기사에서는 강원도와 함경도 지역으로 추정되는 지역 주민들을 말갈이라 지칭하고 있다. 그 성격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표명되었다. 대개는 후대의 말갈과는 별개의 집단으로
예족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ref>권오영(2018). 《백제와 부여의 계승성 여부에 대한 검토》, 동북아역사논총, 247쪽</ref> 이를 세분하여 백제본기에 나타나는 말갈의 활동범위는 강원 영서와 경기 북부로서 이들은 맥계이며 [[적석총]]을 남긴 것으로 보고, 신라본기의 말갈은 강릉 이북의 예계라는 견해도 있다.<ref>김택균, 1997, 「삼국사기에 보이는 말갈의 실체」,『고구려발해연구』 3, 고구려발해학회.</ref> 만주 지역에 거주하던 숙신인 일부가 주변 외족들의 압력을 받아 동북방으로 옮겼는데, 일부는 [[연변]]지구로 들어갔고, 일부는 [[백두산]]을 넘어 자연조건이 훨씬 좋은 남쪽으로 내려가 원주민의 힘이 약한 [[옥저]]지구로 들어간 것이 《삼국사기》백제본기의 말갈이라는 설도 있다.<ref>范恩實(2003), 「‘靺鞨’族称新考」, 『北方文物』 2003-3, 68~70쪽.</ref>


《삼국사기》 편찬자의 입장에서는 강원도, 함경도 지역의 주민들을 무어라 지칭할 것인지 고심하였고, 종족이나 정치체로서 [[읍루]], 마한, 진한, 변한에 속하지 않고, 국명으로서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도 아닌 이들을 부르기 위한 명칭을 찾을 수 없는 제한된 현실에서 고육지책으로 사용한 용어가 말갈이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ref group="주">[[노태돈]]은 어느 시점에 예(濊)를 말갈로 개서하였다는 해석을 제출한 바가 있다. ''노태돈(2003),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말갈의 실체」,『한반도와 만주의 역사와 문화』, 서울대학교한국문화연구소, 306~307쪽.''</ref> 이 말갈이 고구려 후기의 말갈과 동일한 실체일 수 없다.<ref>권오영(2018), 《백제와 부여의 계승성 여부에 대한 검토》, 동북아역사논총, 247쪽</ref>
《삼국사기》 편찬자의 입장에서는 강원도, 함경도 지역의 주민들을 무어라 지칭할 것인지 고심하였고, 종족이나 정치체로서 [[읍루]], 마한, 진한, 변한에 속하지 않고, 국명으로서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도 아닌 이들을 부르기 위한 명칭을 찾을 수 없는 제한된 현실에서 고육지책으로 사용한 용어가 말갈이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ref group="주">[[노태돈]]은 어느 시점에 예(濊)를 말갈로 개서하였다는 해석을 제출한 바가 있다. ''노태돈(2003),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말갈의 실체」,『한반도와 만주의 역사와 문화』, 서울대학교한국문화연구소, 306~307쪽.''</ref> 이 말갈이 고구려 후기의 말갈과 동일한 실체일 수 없다.<ref>권오영(2018), 《백제와 부여의 계승성 여부에 대한 검토》, 동북아역사논총, 247쪽</ref>

2019년 6월 6일 (목) 22:45 판

말갈(靺鞨; 중국어: 靺鞨, 병음: Mòhé)은 《북제서》 무성제기(武成帝紀) 하청(河淸) 2년조(563년)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북제에 대한 말갈의 조공은 무평(武平) 6년(575년)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이후 《수서》 단계에 이르러서는 독립된 열전이 설정되었다.[1]

말갈 유적에서는 도기를 비롯하여 청동 장식품, 철제 공구, 무기, 갑옷, 마구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철제 무기류가 많은데 비해 농기구류는 수량과 종류가 그다지 풍부하지 않은 편이다. 이는 말갈이 전형적인 농경인이 아니라 반농반수렵민이라는 것을 잘 보여 준다.[1]

어원

말갈 명칭의 출현과 처음 이 명칭을 쓴 대상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중국의 말갈사 연구 중 어원(語源)에 관한 것은 중요한 연구 중 하나가 되었다. 현재 물길과 말갈의 관계에 대해서는 동일한 대상의 전음 또는 이역(異譯)이었다는 것으로 정리가 되었다. 어원과 관련해서 최근 논의되고 있는 것은 거주지역 또는 특정 물건이 종족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되었다고 보는 견해와 종족 융합으로 새로운 명칭이 나왔다고 보는 견해들이 있다. 이러한 견해들은 새로운 것이 아니고 이전의 주장들을 계승·발전시킨 것에 해당한다.[2]

무커() 설

러시아의 학자 A. V. 그레벤쉬취코브(Grebenščikov)는 의하면 말갈이라는 명칭은 물(水)을 의미하는 만주어의 무커(만주어: ᠮᡠᡴᡝ Muke)에서 나오고, 읍루라는 명칭은 소굴(巢窟)·동혈(洞穴)을 뜻하는 만주어 예루(만주어: ᠶᡝᡵᡠ Yeru)에서 나왔다고 하였다.[3] 물길의 경우는 Wu-tsi라고 발음하는데, 여진어에서 삼림을 의미하는 Wei-ji·Veďi·Udi와 같은 말로 생각된다는 견해로 보면[4] 물길은 삼림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을 의미하게 된다. 이렇게 보면 말갈은 물가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따라서 물길과 말갈은 각각 삼림과 강을 생활의 터전으로 삼은 것이 되어 차이를 보이게 되지만, 크고 작은 산맥의 연속과 그 사이 곳곳에 강이 흐르는 만주의 지형을 보았을 때 과연 위와 같이 엄격하게 생활 터전을 구분할 수 있을지 의문이 제기된다.[5] 이에 대해서도 말갈을 물길의 고음을 ‘Muki’로 보아 말갈의 고음이라 추정되는 'Maxo'와 연결시킨 의견도 있다.[6]

물길 전음설

전음설을 살펴보면 대부분 물길과 말갈이 족칭이 바뀐 것이 아니라 동일한 단어가 시기적인 차이를 두고 다르게 번역된 것으로 본다. 물길과 말갈을 같은 음이라고 보는 가장 기본적인 근거는 《통지(通志)》로, ‘말갈(靺鞨)’ 이라는 단어의 주음에서 “물길, 말갈은 그 음이 서로 근접 한다(勿吉, 靺鞨其音相近)”라는 기록이다. 그런데 현대 중국어에서 물길(중국어 정체자: 勿吉, 병음: Wùjí)과 말갈(중국어 정체자: 靺鞨, 병음: Mòhé)은 음이 완전히 다르다. 게다가 말갈은 대부분 말갈(靺鞨)로 표기되었지만, 이역(異譯)으로 말갈(중국어 정체자: 靺羯, 병음: Mò jié)로 표기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물길과 말갈을 같은 말로 보는 입장에서는 수당대의 독음을 연구하여 당시에는 비슷한 음이었음 밝히고 있다.[2]

웨이궈중은 당대의 ‘말갈(靺鞨)’ 은 ‘말갈(靺羯)’ , 즉 말걸(중국어 정체자: 末杰, 병음: Mòjié)로만 읽을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7]

쑨위량과 자오밍치는 말갈이 처음 출현했을 때 ‘靺鞨’ 이 아닌 ‘ 羯’ 로 썼고 'weijie'로 읽었다고 한다. 즉 ‘ ‘靺羯’이 물길의 음전이라는 것이다. ‘靺羯’ 이 말갈(靺鞨)로 개작(改作)된 것은 모양이 비슷해서가 아니라 독음상의 변화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이 현대에 와서 중화서국(中華書局) 교점본(校點本) 『24사(二十四史)』가 간행되면서 ‘ ’ 을 전부 ‘靺’ 로 고치고, ‘ 羯’ 대신 철저하게 ‘靺鞨’ 을 사용하게 되었다 한다.[8][9]

자오잔은 한자의 옛 음에 따르면 말 물(勿)자는 막발절(莫勃切)로서, 그 음은 몰(沒, mo)이요, 길할 길(吉)자는 격질절(激質切)로서, 그 음은 길(拮, jie)이고, 《북제서(北齊書)》에 제일 먼저 물길(勿吉)을 말갈(靺鞨)[주 1] 어음상으로 보면 물길(勿吉)은 말갈(靺羯)과 독음이 매우 비슷하여 대체할 수 있음은 물론이며, 그러나 羯자에는 양 양(羊)자의 변이 있어 종족의 명칭로서는 아마 점찮지 않은 말로 여겨져서 또 羯자를 鞨자로 고치게 되었을 것이라 추측했다. 또한 鞨자에는 여러 가지 음이 있는데, 하갈절(何葛切)은 그 음은 갈(曷, he)으로, 현재 말갈(靺鞨)의 갈(鞨)은 일반적으로 모두 갈(曷, he)의 독음을 취한다고 주장했다.[10]

거주지에서의 유래설

장보촨은 물길, 말갈, 발해의 명칭 모두 하나의 음이 변한 것이라는 주장하였다.[11] 퉁구스어족의 독음에서 m과 b, p, f는 서로 통하고, j, g는 서로 통하기 때문에 물길, 말갈(靺羯), 말갈(靺鞨)은 같은 음이었고 역시 발해로 변할 수도 있었다는 추측이다. 물길, 말갈, 발해는 만주어의 워지(窩集, 만주어: ᠸᡝᡷᡳ Weji)로 그 뜻은 ‘산림’ 을 가리킨다. 물길 또는 말갈은 산과 물을 따라 거주했는데(居山水), 이들을 남북조 시기의 선비족이 물길이라고 불렀던 것이 중원에 전달된 것이라고 보았다. 우선 물(勿)은 몰(沒), 말(靺)처럼 읽히고, 말(末)의 음에서부터 발(渤)이 전음되었다는 것이다. 선비어에서 몰(沒), 몰리(沒里)라고 부른 것은 동호족의 물(水)을 가리키는 말인 목(木), 목(沐), 혹은 목련(沐漣), 목륜(木倫)과 같다고 한다. 길(吉), 걸(羯), 갈(鞨)의 경우 하나의 음이 변한 것으로, j, g가 서로 변하고 k, h로 전독(轉讀)되었는데 그 뜻은 사람이다. 즉 물길·말갈계는 수변에 거주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강인(江人)·강민(江民)을 북위가 물길로 불렀던 것이 말갈로 전음되었다는 것이다.[2] 일본의 시라토리 구라키치는 강의에서 말갈이 동북지방의 여진족을 총칭하는 것으로서 물길·말갈의 어원을 흑룡강을 뜻하는 ‘Magu’에서 유래하였다고 주장했다.[12]

특정 물건에서의 유래설

판언스는 말갈이라는 명칭 자체는 한반도에서 사용되었으며, 이것이 중국에 전해진 것은 고구려에 복속된 백산말갈이 중원과 접촉하게 되면서라고 보았다.[13] 그리고 말갈이라는 단어 자체는 숙신계의 석노(石砮)에서 유래했다고 보았다. ‘말갈(靺羯{鞨})’ 단어의 독음을 살펴보면, 먼저 (靺)은 mo, wa 두 개의 음이 있었다. 이중 비교적 일찍 나타난 것이 wa음이다. 중고한어의 a음류는 대부분 ə로 발전했고, 남북조 말기 이후에 말(靺)도 wə로 바뀌어 읽혔다. 말(靺)자가 mə로 읽히게 된 것은, 중고음 중에 w, m 두 개의 성모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아 m으로 많이 읽었기 때문이다. 갈(羯)자는 고대에 경전을 번역할 때 ka]음에 많이 이용되어 羯麻(karma), 羯那陀(kanada), 羯陵伽(kalinga)처럼 음역했다. 갈(羯)이 jie로 읽히면서 갈족(羯族)을 가리키게 된 것은 비교적 뒤늦게 나타난 현상으로 말갈(靺羯)의 갈(羯)은 ka로 읽어야 한다. 그리고 k, h는 동일하게 설근음(舌根音)으로 중고에서는 통음(通音)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갈(鞨)자로 바꿔 사용한 이후, 통전되어 갈(羯)자는 he로도 읽혔다. 말갈(靺羯)의 음은 현대 만주어의 석두(石頭, 만주어: ᠸᡝᡥᡝ Wehe)와 여진어의 석두(여진어: wəhə)의 음과 같다. 판언스는 백제·신라 사람이 석촉을 사용하던 숙신인의 종족적 특징 때문에 이들을 처음으로 말갈(靺羯, Wehe)라고 불렀던 것에서 말갈 명칭이 유래되었다고 보았다.[14]

그런데 위진남북조 시기에 이르러 입공물(入貢物)인 석촉이 일종의 홍색 보석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중원인이 이 보석을 말갈(靺羯)로 부르게 된 것이라고 봤다. 수당 이후에 와서는 성모학(聲母學)이 정식으로 생겨서 갈(羯)자의 독음이 ‘거알절(居謁切)’로 고정되었고 ‘갈(鞨)’ 자가 새롭게 만들어져 he음을 대체함으로써 ‘말갈(靺羯)’ 서술에서 점차 말갈(靺鞨)로 변화했다고 보았다.[15]

새로운 족명설

리더산(李德山)은 물길은 숙신과 예맥족이 융합되어 형성된 새로운 명칭으로 원래 ‘맥신(貊愼)'인데, 북위가 독음할 때 ‘물길’ 로 발음하면서 전음된 것으로 보았다.[16] 리더산은 280년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숙신인 600여 가가 고구려에 의해 사민 당하고, 6~7개 부락이 항복했던 사례와 매번 고구려를 노략했다는 기사, 북위 시기 부여가 물길에게 쫓겨난 기록, 고구려의 10부락을 공파한 사건 등을 들어 이 과정에서 예맥계와 숙신계가 융합되었다고 주장했다. 특히 고구려가 북위 등 선비계에 의해 압박을 받던 시기에, 새롭게 숙신계가 대거 남하하여 종족 융합이 이뤄졌다고 보았다. 이때 송화강 중하류 유역으로 진입한 숙신계의 일부가 부여인을 복속시키고, 옥저 지역으로 남하한 일부는 이들 지역을 장악한 후 각각 그 지역의 예맥계와 그 이전 시기에 남하했던 숙신인들과 융합하면서 숙신인이 주체가 된 새로운 민족을 탄생시키는데, 물길이라는 명칭은 이 때문에 생겼다고 보았다.[17]

삼국사기》의 말갈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초기 기사에서는 강원도함경도로 추정되는 지역 주민들을 말갈이라 지칭하고 있다. 그 성격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표명되었다. 대개는 후대의 말갈과는 별개의 집단으로서 예족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18] 이를 세분하여 백제본기에 나타나는 말갈의 활동범위는 강원 영서와 경기 북부로서 이들은 맥계이며 적석총을 남긴 것으로 보고, 신라본기의 말갈은 강릉 이북의 예계라는 견해도 있다.[19] 만주 지역에 거주하던 숙신인 일부가 주변 외족들의 압력을 받아 동북방으로 옮겼는데, 일부는 연변지구로 들어갔고, 일부는 백두산을 넘어 자연조건이 훨씬 좋은 남쪽으로 내려가 원주민의 힘이 약한 옥저지구로 들어간 것이 《삼국사기》백제본기의 말갈이라는 설도 있다.[20]

《삼국사기》 편찬자의 입장에서는 강원도, 함경도 지역의 주민들을 무어라 지칭할 것인지 고심하였고, 종족이나 정치체로서 읍루, 마한, 진한, 변한에 속하지 않고, 국명으로서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도 아닌 이들을 부르기 위한 명칭을 찾을 수 없는 제한된 현실에서 고육지책으로 사용한 용어가 말갈이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주 2] 이 말갈이 고구려 후기의 말갈과 동일한 실체일 수 없다.[21]

말갈의 7부의 위치

중국의 고구려 영역도

현대 중국 학계에서는 말갈 제부의 실제 규모와 상관없이 이들의 활동 지역을 곧 광역의 말갈 영역으로 인식함으로써 위 지도에서 보이듯 고구려의 동북 영역을 크게 축소시켜 놓았다. 특정 시기에는 적어도 속말부와 백산부의 영역이 고구려 영역에 포함되었고, 백돌ㆍ안거골ㆍ불열ㆍ호실부 역시 간접 통치의 범위에 속한다고 보는 한국 학계의 인식과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고구려는 지방을 지배할 때 일부지역 집단에는 간접 지배의 방식을 취하면서 고구려 문화를 강제하지 않았다. 고구려가 말갈에 대해 직접지배 방식이나 고구려 문화를 강제하지 않은 것은 고구려의 세력이 상대적으로 약했기 때문이 아니라 지방통치의 효용성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말갈 제부 중 속말과 백산은 일찍이 직접지배로 전환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속말말갈 지역인 길림시 일대에는 용담산성, 동단산성, 삼도령산성 등 고구려 산성이 축조되어 있었고, 백산말갈 지역에는 살기성을 중심으로 훈춘시 경내와 성자산산성 및 용정시와 연길시 경내 등에도 고구려 산성이 분포했다. 산성은 4세기 이후 고구려의 지방 지배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유적으로, 산성의 존재는 고구려의 지방관이 산성을 거점으로 지방 통치를 수행했던 흔적으로 추정된다.[22]   수, 당과의 전쟁시 고구려의 말갈병 동원상황을 통해서 볼 때 고구려의 말갈 지배가 원활하게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즉 고구려 후기에 이들 지역의 말갈족은 고구려민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백돌ㆍ안거골ㆍ불열ㆍ호실부의 경우 간접 지배를 받았지만 그들도 고구려민으로 존재했었기 때문에 고구려가 멸망하고 난 뒤 대부분 자신의 단위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분산미약(奔散微弱)'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유물이나 유적을 정치적 영역이나 세력권을 파악하는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는 것은 고구려에 적용하기 힘들며, 역으로 말갈 유적 분포 현황을 가지고 곧바로 말갈의 영역이나 세력권으로 보는 것도 실상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22]

말갈 특수부대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가동된 것은 수·당 전쟁의 때로 국왕 직속 군대로 편제된 말갈족은 고구려 멸망기와 부흥운동의 과정에서 활동상을 보여주었는데, 이 경우 말갈족들은 고구려 주민의 일원으로서 외부의 적을 맞아 나라를 지키는 고구려군으로 활동했다고 본 것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말갈족들이 부흥운동을 일으킨 것과 훗날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는 발해 건국에 적극 참여한 것도 결국 그들이 고구려인으로 살았고 스스로도 고구려민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완전한 고구려인으로서 활동했던 말갈족이 바로 수·당대 말갈 7부 가운데 속말말갈과 백산말갈이라고 보았다.[23][24] 그러나 부락 공동생활을 해왔을 속말말갈의 경우 고구려에 귀부하여 한 세기도 경과하지 않은 동안, 고구려인과 달리 얼마나 고구려화하여 고구려인으로서 정체성을 갖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설혹 일부가 고구려인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살았다 하여 그들이 곧 고구려 종족은 아니다. 종족은 본인의 귀속의식과 무관한 자타공히 인지할 수 있는 혈통을 기본으로 하여 이루어진 나름의 역사와 문화 등을 영유한 구별 가능한 인간집단으로, 송기도 전통적 관점에서 모종의 사료에 근거하여, 발해 건국 세력의 일부를 속말말갈 종으로 파악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25]

속말부(粟末部)

《수서》에는 속말부가 "고구려와 인접해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속말말갈은 흑수말갈과 함께 말갈 7부 가운데 위치 비정상 논란이 가장 적은 집단이다. 속말말갈과 흑수말갈은 모두 거주지 인근의 강 이름에 따라 부명(部名)이 일컬어졌다. 즉 속말말갈은 속말수, 지금의 송화강가에 사는 말갈이라고 보는 데 의견이 일치한다.[26]

속말말갈의 유적지는 제2 송화강 유역을 따라 분포되어 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 길림 영길(永吉) 양둔(楊屯) 대해맹(大海猛) 유적의 상층 문화층과 유수(楡樹) 노하심(老河深) 유적의 3기층, 그리고 영길 사리파(査理巴) 고분군 등이 있다. 이외에 길림시 북쪽 구태현(九台縣)의 송화강 서쪽 연안 상류 지역에서 발견된 산채(山寨) 7좌 유적이 있으며, 화전현(樺甸縣)과 덕혜현(德惠縣) 등 길림 인근 지역에서도 속말말갈의 주거지와 무덤이 발견되었다.[26]

속말말갈 유적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군사적인 색채가 강하다는 것이다. 양둔 대해맹을 비롯한 속말말갈 유적에서도 농기구류보다 무기류가 압도적으로 많이 출토되었다. 예를 들어 도, 검, 비수, 창, 화살과 갑옷, 마구 등이 나와 이미 비교적 완벽하게 무기 체계를 갖추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생산 공구는 도끼·자귀·낫 등이 있었지만 그 양이 무기류에 비해 적었고, 종류도 다양하지 않았다. 군사적인 성격이 강한 세력 집단이었다는 것이 유물을 통해서 입증이 되고 있는 것이다.[26]

문헌 자료에 의하면 속말말갈은 고구려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면은 고고학적인 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속말말갈의 유적에서 출토된 손잡이가 달린 단지(雙耳罐)는 고구려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 이 고분군에 존재하는 석광묘와 함께 고구려 문화의 영향을 잘 보여 주는 유물이다.[26]  

백돌부(伯咄部)

백돌부는 속말부 북쪽에 있으며 정병(精兵)이 7천이라고 한다. 백돌말갈에 대해서는 명칭의 유사성에 근거하여 백도눌 지방으로 보는 설이 가장 다수를 점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유수도 백돌말갈의 거주지에 포함된다고 보는 연구자들이 늘어났다. 특히 이곳에 있는 노하심 유적을 백돌말갈의 유적지라고 구체적으로 지목한 연구 성과도 제출됐다.[26] 반면 부여(백도눌)와 납림하 유역 쌍성(雙城)을 포함한 주변 일대가 백돌말갈의 근거지였을 것이라 추측하기도 하지만 이 일대에서는 아직까지 말갈 관련 유적 보고는 현재까지 없는 것으로 추정된다.[26]  

안차골부(安車骨部)

안차골부는 백돌부의 동쪽에 있다고 되어 있다. 오늘날 아센허(阿什河)를 만주어로 알추카(阿勒楚客, 만주어: ᠠᠯᠴᡠᡴ᠋ᠠ)라 했고, 금대 여진어로는 안춘(按出虎, 여진어: Antʃu-un)라고 했다.[주 3] 이와 안차골과 발음이 흡사하다고 추정하는 점에서 안차골을 아십하 유역에 있던 말갈이라 보는 데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아십하 하류의 황가외자(黃家崴子), 황산(黃山) 남북산성자, 묵리가(墨里家)와 고태자(高台子) 등지에서 발견된 문물들이 곧 안차골부의 문화 유존이라고 보고 있다.[26]  

불녈부(拂涅部)

불녈부는 위치비정상 차이가 많은 부의 하나인데, 그 중에서도 흥개호 일대로 보는 설과 목단강 유역의 영안 지역으로 보는 설이 가장 많다. 영안에서는 말갈로부터 발해 시기로 이어지는 고분군이 대규모 발견되었는데, 다른 말갈 고분과 성격 차가 현저해서 주목 대상이 되고 있다. 영안시 발해진(渤海鎭)의 서석강고분군(西石崗古墳群), 즉 홍준어장고분군(虹鱒魚場古墳群)이 그것이다.[26]

서석강-홍준어장 유적에서도 역시 말갈관(靺鞨罐)으로 불리는 중순심복관(重脣深腹罐)을 비롯한 말갈도기들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일부 도기는 속말말갈인 양둔 대해맹 3기층에서 나온 도기보다 이른 시기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유적도 말갈 7부 가운데 한 부로 볼 수 있는데, 사료에 나오는 위치 설명으로 보아 이 유적은 불녈말갈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하기도 한다.[26]

그러나 홍준어장 고분군을 토착말갈이나 말갈 평민들이 조성했다는 견해들 자체가 모두 홍준어장고분군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를 통해 얻어진 결론으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는 반론이 있다.[27]

호실부(號室部)

호실부의 위치에 대해서도 학자들 사이에 견해가 나누어져 있다. 사료에는 "불녈의 동쪽에 있다."고만 되어 있어 다른 정보가 없다. 불녈부의 위치도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기 때문에 자연 호실부의 위치도 정설이 없는 것이다. 현재까지 확인된 말갈 유적의 분포를 고려하여 추정해 보건대 이곳은 수분하에서 연해주에 이르는 지역에 비정할 수 있다. 중국 학계에서 조사한 유적 중에서는 수분하 유역 동쪽 동녕전창(東寧磚厂) 유적 등이 호실말갈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26]

호실은 옥저와 동음이라고 하면서 이 일대를 동옥저의 분포 지역이었다고 보는 설도 있다. 하지만 옥저의 범위는 수분하 유역까지 미치지 않았다. 옥저는 남옥저, 북옥저 모두 4세기 이전에 이미 고구려에서 지방관을 파견해 직접 통치를 시행했던 지역이다. 4세기 중반경에 조성된 연변 지역의 고구려 장성도 그것을 입증한다.[26]

흑수부(黑水部)

흑수말갈의 거주지는 흑룡강 주변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흑수말갈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흑룡강 중하류 지역에 있는 나이펠트(乃伊費尒德) 고분군, 수빈(綏繽) 동인유적(同仁遺蹟), 몽북(夢北) 단결묘장(団結墓葬)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나이펠트 고분군은 1960년부터 1961년에 걸쳐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토광수혈봉토묘가 모두 40기였다. 이 유적은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26]

흑수말갈로 소급되는 나이펠트 그룹은 7세기 말에는 제야–부레야 저지대에 출연했던 흔적이 발견된다.[28]  

백산부(白山部)

끝으로 백산말갈에 대해서는 백두산 주변과 연변 지역 일대로 보는 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최근 함경도 쪽으로 내려 보거나 연변 지역과 한반도 동북부 지역을 모두 포괄한 것으로 보는 설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정병이 수천, 또는 7천이라고 나오는 속말말갈, 백돌말갈과 달리 백산말갈은 3천이라고 나온다. 따라서 거주지가 다른 말갈 집단보다 넓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돈화와 백두산 일대 지역이 백산말갈의 중심지였고, 그 외 연길·용정·훈춘과 경성 주변 일대를 포함한 지역으로 한정될 것으로 본다.[29]

구당서》에 "백산부는 본시 고구려에 부속되어 있었다. 그로 인해 평양이 수복된 후에 부중(部衆)이 많이 중국으로 들어왔다."는 구절이 나오듯이, 백산말갈은 고구려 지배 아래 일찍부터 편입되었고 오랫동안 그 지배 아래 있었다. 따라서 백산말갈은 다른 어떤 집단보다도 고구려와 더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발해 건국지가 돈화였던 것도 무관하지 않다.[29]

그러나 백산말갈의 동쪽으로 비정되는 어떠한 말갈 세력도 없음을 감안하며 연해주 남부 일대까지를 고고학적으로 백산말갈의 맥락에서 이해해도 큰 지장은 없기 때문에, 고구려의 책성 치소로 꼽히는 연변과 함께 연해주 일대도 백산말갈의 거주지로 꼽힌다. 그런데 연변지역의 말갈에 대해서는 극히 적은 연구가 있을 뿐 그들의 고고학적 실체는 그리 뚜렷하지 않다. 말갈에 대한 지리적 비정을 한 20여 명의 관련 연구자들은 연변 일대를 중심으로 연변일대와 돈화, 백두산 일대로 본다.[30]

문헌기록을 참고하면 관구검의 침략으로 연변~연해주 일대의 토착 옥저 세력은 큰 타격을 입었고, 고고학적으로 보아도 3~4세기 이 지역 유적이 공백이기라는 점으로도 반증된다. 그런데 편년 논란이 다소 있지만 4세기부터는 말갈 유적이 등장한다. 이들 초기 말갈 유적은 폴체문화의 늦은 단계와 매우 유사한데, 이는 말갈문화가 폴체문화를 기반으로 발전했음을 의미한다.[31] 백산말갈의 문화를 형성 주민들은 다른 곳에서 이주해 왔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주 4] 말갈문화는 읍루(폴체문화)와 강한 친연성을 보여주는데, 이미 폴체문화는 연해주 지역으로 기원 전후한 시기에 남하해서 토착화(올가문화)가 된 상태이다. 원래 연해주 일대에서 옥저계 문화로 간주되는 크로우노프카 문화는 1세기 이후에는 거의 소멸한 상태이다. 따라서 관구검이 침략했을 당시에 옥저계 문화라고 하는 집단들은 폴체계 문화를 위주로 하고 옥저계통의 문화가 일부 섞여있는 정도의 물질문화상이었을 것이다.[32]

연해주 남부 일대의 백산말갈 지역에서 5세기 이후 말갈계통의 문화가 성립돼 발해의 유입 이전까지 독특한 자신들만의 문화를 이루었다고 추정된다. 이와 같이 백산말갈은 이 지역 토착민들이 북옥저와 읍루계통의 사람들이 기반이 되어 성립되었다.[33]

7세기 중반 이타인은 책성도독겸양병마(柵城都督兼揔兵馬)의 관직을 맡아 고구려의 12주와 함께 말갈의 37부를 총괄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책성이 지방행정의 중심지로서 주(州)와 같은 일반행정단위와 함께 말갈 제부를 관할했음을 말해준다.[34] 6~7세기 고구려의 지방제도는 제성(諸城)을 중심으로 하였는데, 제성은 규모와 기능에 따라 대성(大城)·성(城)·소성(小城) 등으로 구분되었고, 그마다 각급의 지방관이 파견되었으며 상하 통속관계에 있었다.[35] 책성은 이 중에서 대성에 해당하였다.[34]

돈화·용정·화룡 등에서 발해 시기 백산말갈의 6기의 주거 유적인 영안(永安) 유적은 확인되었다.[36]

같이 보기

각주

내용주
  1. 갈자는 기사절(居謁切)로 음은 '訐', jie)이다.
  2. 노태돈은 어느 시점에 예(濊)를 말갈로 개서하였다는 해석을 제출한 바가 있다. 노태돈(2003),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말갈의 실체」,『한반도와 만주의 역사와 문화』, 서울대학교한국문화연구소, 306~307쪽.
  3. '금'을 의미한다.
  4. 范恩實(2003), 「靺鞨族屬及渤海建國前的靺鞨與周邊關係」, 『盛唐時代與東北亞政局』(王小甫, 主編), 北京大學盛唐硏究叢書, 上海辭書出版社. 범은실은 고구려와 흑수부는 대립관계에 있었는데, 342년 고구려가 모용씨의 공격을 받으면서 북옥저 지구에 대한 세력이 약화되자 이 지역을 흑수부가 장악한 것으로 보았다. 그는 무구검의 고구려 침범으로 옥저 지역에 세력공백이 발생하자 숙신계가 이곳으로 진출하여 원래 이주해 있던 숙신 부락과 융합하여 백산부를 형성한 것으로 보았다. 그는 또 이들이 고구려에 신속하게 된 것은 영락 8년(399년) 식신토곡에 군대를 보내 굴복시켰기 때문이며, 이후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함께 중원에 조공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백산부를 점거한 후에도 고구려가 그 지역으로 완전히 진입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백산부 지역에 고구려의 유적유물이 매우 적고, 일부 지역에 집중된 고구려성도 신라, 백제에 대한 방어용일 뿐이고, 군사활동 양상에서 말갈이 매우 독립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참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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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정병준; 권은주; 이효형; 바이건싱; 윤영인; 김위현; 왕위랑. 《중국학계의 북방민족·국가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31쪽. ISBN 9788961870566. 
  3. A. V.Grebenščikov,『Contuibution to the Problem of the History of the Amurland』
  4. 國史編纂委員會,『中國正史朝鮮傳 譯註一』(1987), 570쪽
  5. 김락기, 《5~7世紀 高句麗의 東北方 境域과 勿吉․靺鞨》 仁荷大學校 大學院 史學科 韓國史專攻, 2007
  6. 國史編纂委員會,『中國正史朝鮮傳 譯註一』(1987), 572쪽
  7. 魏國忠, 「關於勿吉族的幾介問題」, 『東北民族史硏究(二)』, 中州古籍出版社, 1994.
  8. 張博泉(1998), 『東北古代民族·考古與彊域』, 吉林大學出版社.
  9. 정병준; 권은주; 이효형; 바이건싱; 윤영인; 김위현; 왕위랑. 《중국학계의 북방민족·국가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31~32쪽. ISBN 9788961870566. 
  10. 趙展, 「滿族歷史與宗敎硏究」, 『對皇太極所謂諸申的辨正』
  11. 孫玉良・趙鳴岐(1998), 『中國東北史』 제2권, 吉林文史出版社.
  12. 鳥山喜一(1915), 『渤海史考』, 奉公叢書 第3篇, 船木勝馬 校訂·解題(1977), 原書房.
  13. 範恩實, 「靺鞨族屬及渤海建國前的靺鞨與周邊關係」, 王小甫 主編, 『盛唐時代與東北亞政局』, 北京大學盛唐硏究叢書, 上海辭書出版社, 2003
  14. 정병준; 권은주; 이효형; 바이건싱; 윤영인; 김위현; 왕위랑. 《중국학계의 북방민족·국가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33쪽. ISBN 9788961870566. 
  15. 정병준; 권은주; 이효형; 바이건싱; 윤영인; 김위현; 왕위랑. 《중국학계의 북방민족·국가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33~34쪽. ISBN 9788961870566. 
  16. 李德山, 「六至九世紀東北邊疆民族與中央王朝關系史硏究」,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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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권오영(2018). 《백제와 부여의 계승성 여부에 대한 검토》, 동북아역사논총, 247쪽
  19. 김택균, 1997, 「삼국사기에 보이는 말갈의 실체」,『고구려발해연구』 3, 고구려발해학회.
  20. 范恩實(2003), 「‘靺鞨’族称新考」, 『北方文物』 2003-3, 68~70쪽.
  21. 권오영(2018), 《백제와 부여의 계승성 여부에 대한 검토》, 동북아역사논총, 247쪽
  22. 정병준; 권은주; 이효형; 바이건싱; 윤영인; 김위현; 왕위랑. 《중국학계의 북방민족·국가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50~56쪽. ISBN 9788961870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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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김현숙, 1992, 「高句麗의 靺鞨支配에 관한 試論的 考察」,『한국고대사연구』 6.
  25. 김기흥(2011), 「발해의 종족적 연원」, 『동북아역사논총』 33, 456쪽~457쪽
  26. 김현숙 (2005). 《고구려의 영역지배방식 연구》. 모시는사람들. 438~479쪽. ISBN 9788990699305. 
  27. 김진광 (2012년 3월). “홍준어장고분군의 사회적 지위 및 성격-고분의 유형과 분포상황을 중심으로-”. 고구려발해연구 42: 3. 
  28. 홍형우 (2011년 11월). “서(西) 아무르 지역 말갈(靺鞨) 토기의 특성과 그 전개 : -최근 발굴 유적을 중심으로”. 한국상고사학보 74. 
  29. 김현숙 (2005). 《고구려의 영역지배방식 연구》. 모시는사람들. 438~479쪽. ISBN 9788990699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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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강인욱 (2018년). “고고자료로 본 백산말갈과 고구려의 책성”. 동북아역사논총 (61): 55. 
  32. 강인욱 (2018년). “고고자료로 본 백산말갈과 고구려의 책성”. 동북아역사논총 (61): 5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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