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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m 모바일 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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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녈부(拂涅部) ===
불녈부는 위치 비정상위치비정상 차이가 많은 부의 하나인데, 그 중에서도 [[흥개호]] 일대로 보는 설과 [[목단강]] 유역의 영안 지역으로 보는 설이 가장 많다. 영안에서는 말갈로부터 [[발해]] 시기로 이어지는 고분군이 대규모 발견되었는데, 다른 말갈 고분과 성격 차가 현저해서 주목 대상이 되고 있다. 영안시 발해진(渤海鎭)의 서석강고분군(西石崗古墳群), 즉 홍준어장고분군(虹鱒魚場古墳群)이 그것이다.<ref name="SUK"/>
 
요컨대 서석강-홍준어장 유적에서도 역시 말갈관(靺鞨罐)으로 불리는 중순심복관(重脣深腹罐)을 비롯한 말갈도기들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일부 도기는 속말말갈인 양둔 대해맹 3기층에서 나온 도기보다 이른 시기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유적도 말갈 7부 가운데 한 부로 볼 수 있는데, 사료에 나오는 위치 설명으로 보아 이 유적은 불녈말갈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하기도 한다.<ref name="SUK"/>
서석강 유적은 1990년에 성급 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는데, 양어장을 만드는 과정에서 더 많은 무덤이 발견되어 뒤에 조사 지역을 넓히게 되었다. 그리고 유적 이름도 홍준어장묘지(虹鱒魚場墓地)로 칭하게 되었다. 1992년부터 1995년까지 다시 발굴을 진행하여 323기의 고분과 제단 7기 및 거주지 1기를 조사했다. 이 유적지에서 출토된 유물은 총 2000여 건으로 최대 규모이다.
 
그러나 홍준어장 고분군을 토착말갈이나 말갈 평민들이 조성했다는 견해들 자체가 모두 홍준어장고분군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를 통해 얻어진 결론으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는 반론이 있다.<ref>{{저널 인용|저자=김진광|제목=홍준어장고분군의 사회적 지위 및 성격-고분의 유형과 분포상황을 중심으로-|url=https://www.kci.go.kr/kciportal/mSearch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insiId=INS000000902&sereArticleSearchBean.sereId=001250&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652236|날짜확인=2019년 6월 6일|총서=고구려발해연구|권=42|날짜=2012년 3월|쪽=3}}</ref>
그러나 이 유적에 대한 종합적인 발굴 보고서가 나오지 않았다. 따라서 유적 내의 고분과 제단의 조성 시기가 모두 동일 시기인지, 시기 차가 있는지 등 구체적인 면을 알 수가 없다. 따라서 접할 수 있는 정보 가운데 이 글과 관련된 부분만을 참고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그런데 이 고분군에서 출토된 도기의 일부는 양둔 대해맹 고분군의 도기보다 좀 더 이른 시기 것이라고 한다. 서석강 무덤과 홍준양어장의 일부에서 출토된 도기는 절대 다수가 진흙에 모래를 섞어서 손으로 빚어 만든 그릇이다. 그릇 표면 색깔은 누런 색깔, 붉은 색깔, 흑갈색 등 색깔이 고르지도 않은 편이다. 절대 다수 도기의 구연부에 거치상부가퇴문(鋸齒狀附加堆紋)으로 장식을 했으며, 말갈 도기의 전형적인 예인 심복관(深腹罐)과 장경고복관(長頸鼓腹罐)이 많다. 따라서 이 유적이 말갈 유적지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고분군에서는 석광묘, 장방형의 석실 봉토분, 전실묘(磚室墓) 등만 확인되었으며 토광묘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것은 말갈과 발해의 문화 발전 단계를 논할 때, 토광묘가 석광묘나 석실분보다 시기적으로 앞선 것이라고 보는 일반론과 큰 차이가 있다. 이 때문에 이런 일반론과 달리 토광묘와 석광묘에는 일정한 지방 차별이 있을 뿐이라는 견해도 나오게 되었다.
 
이해에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영안 지역은 중국에 사신을 보내 그 존재를 알리기도 했던 숙신(肅愼)의 고지로서 이곳에 '숙신고성(肅愼古城)'이 존재했다는 이야기가 오랜 뒤에까지 전해졌다. 또 이곳의 정치 세력은 [[광개토왕]]대에 이미 고구려와 조공논사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즉 고구려에 조공을 하고 내부의 일을 논의하는 관계였다. 이처럼 일찍부터 외부 세력과 교류를 경험해왔으므로 말갈 단계에 이르러서도 다른 말갈 지역과 달리 고구려 묘제를 거부감 없이 수용하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어떤 세력의 범위를 보여 주는 표지적인 유적과 유물로 묘제와 토기를 들 수 있다. 다른 유적과 유물에 비해 보수성이 강하기 때문에 어떤 집단의 정체성을 보여 주는 역할을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묘제는 토기에 비해서도 상대적으로 보수성이 강하기 때문에 잘 변화되지 않는다고 본다. 하지만 달리 보면 묘제는 정치적인 영향에 따라 급변하는 경우도 있다. 신라 적석목곽분과 전축분이 백제 [[무령왕릉]]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영안 지역 묘제가 다른 말갈 지역의 그것과 현저히 다른 이유도 이런 점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요컨대 서석강-홍준어장 유적에서도 역시 말갈관(靺鞨罐)으로 불리는 중순심복관(重脣深腹罐)을 비롯한 말갈도기들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일부 도기는 속말말갈인 양둔 대해맹 3기층에서 나온 도기보다 이른 시기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유적도 말갈 7부 가운데 한 부로 볼 수 있는데, 사료에 나오는 위치 설명으로 보아 이 유적은 불녈말갈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 호실부(號室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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