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훙커우 공원 사건"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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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Yoon Bong-Gil in Lu Xun Park 01.JPG|섬네일|300px|윤봉길의 의거현장 기념비]]
[[파일:Yoon Bong-Gil in Lu Xun Park 02.JPG|섬네일|300px|윤봉길의 유적관, 매헌정]]
'''훙커우 공원 사건'''(虹口公園事件)은 [[1932년]] [[4월 29일]] [[중화민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조선 독립운동가인독립운동가 [[윤봉길]]이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 제국]]의 주요 인사들을 죽거나 다치게 한 사건이다. 배후에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 [[김구]]의 제안이 있었으며, 이후 중화민국의 조선 독립운동 지지의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 사건의 계획 ==
 
=== 의거 ===
11시 40분에 [[일본]]일본의 [[국가 (노래)|국가]]국가인 [[기미가요]]가 울려 퍼지는 순간, 윤봉길이 단상으로 접근해 5m거리에서5m의 근거리에서 물통폭탄을 투척., 시라카와 대장과 노무라 중장 사이에 떨어져 폭발하였다.<ref>신용하. 1995. 윤봉길의 농민운동과 민족독립운동. 한국학보:Vol.21. No.4(P.125, P. 126). 일지사.</ref> 윤봉길은 또다른 도시락 폭탄으로 자결하려 했으나 곧바로 일본 헌병에게 붙잡혔고 마구 구타당해 피투성이가 되어 일본군 사령부로 끌려갔다. 이 사건으로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와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쓰구]]가 폭사당했다. [[중화민국]]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는 오른쪽 다리를 잃었고, 우에다 중장은 왼쪽 다리를 잃었으며, 노무라 중장은 오른쪽 눈을 실명하였다. 이 외에도 많은 주요 인사들이 다쳤다부상을 입었다.
 
최초 광경 사진을 찍은 황천 기자는 이후 상황은 찍지못하고찍지 못하고 나중에 어떤 사진가로부터 사진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사건이 터졌을때, 다른 신문사들은 아직 행사장에 오지 않았다. 나는 최초의 사진 1장을 찍은 뒤 공원부근 지국장의 사택으로 가서 전화로 지국에 제1보를 보냈다. 그래서 그 후의 상황은 찍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 어떤 사진가로부터 받은 사진을 냈다"고 증언하였다.
{{인용문2|사건이 터졌을때, 다른 신문사들은 아직 행사장에 오지 않았다. 나는 최초의 사진 1장을 찍은 뒤 공원부근 지국장의 사택으로 가서 전화로 지국에 제1보를 보냈다. 그래서 그 후의 상황은 찍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 어떤 사진가로부터 받은 사진을 냈다.|황천}}
 
=== 이후 ===
 
== 영향 ==
이 일은 1932년 4월 29일, 오후 1시경에 전 세계에 뉴스로 보도되기 시작하여, 전 세계 각국 주요신문들이 제 1면에 대대적으로 이를 보도하면서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ref>The New York Times. 1932년 4월 29일자. Bomb at Shanghai Wounds 6 High Japanese Officials ; Shirakawa and Ueda Hit.</ref> 처음 보도되었을 당시에는 대부분 중국인이 일으킨 항일투쟁 내지는 일본인 혁명주의자 활동으로 인식되었으나 이튿날에 한국청년 윤봉길의 항일운동이었음이 밝혀져 보도되었다.<ref>The New York Herald. 1932년 4월 30일자. Tokio Warlord Felled in Attack with Bomb at Shanghai Review.</ref>
 
이 의거로, [[만보산 사건]]으로 인해 나빠진 한국과 중국의 관계를 회복하게 되어 중국 영토안에서 한국 독립운동의 여건이 좋아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ref>North China Daily News. 1932년 4월 30일자. Korean Bomb Outrage at Hongkew Park.</ref> 또한, 당시 [[중국 국민당|국민당]] 총통이었던 [[장제스]]는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에서의 폭탄 투척 소식을 전해 듣고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했다니 정말 대단하다."라며 감탄하였다. 이 일은 장제스가 조선에 관심을 갖고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 보도되었을 당시에는 대부분 중국인이 일으킨 항일투쟁 내지는 일본인 혁명주의자 활동으로 인식되었으나 이튿날에 한국청년 윤봉길의 항일 독립운동이 밝혀지고 보도되었다.<ref>The New York Herald. 1932년 4월 30일자. Tokio Warlord Felled in Attack with Bomb at Shanghai Review.</ref>
 
이 의거로, [[만보산 사건]]으로 인해 나빠진 한국과 중국의 관계를 회복하게 되어 중국 영토안에서 한국 독립운동의 여건이 좋아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ref>North China Daily News. 1932년 4월 30일자. Korean Bomb Outrage at Hongkew Park.</ref>
 
또한, 당시 [[중국 국민당|국민당]] 총통이었던 [[장제스]]는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에서의 폭탄 투척 소식을 전해 듣고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했다니 정말 대단하다."라며 감탄하였다. 이 일은 장제스가 조선에 관심을 갖고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안창호]]는 일본의 배후 소탕과정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예비검속자들의 탄압이 계속되자 김구는 외신을 통해 자신이 지시했음을 밝혔다. 일본은 [[이봉창]]의 배후이기도 한 김구를 체포하기 위해 1차로 20만원의 현상금으로 수배했지만, 실패되자 외무성, 조선총독부, 상하이주둔사령부 등과 합작해 현상금을 대폭 올려 현재로 환산하면 198억원에 이르는 60만원에 거금의 현상금으로 수배되었다.<ref>[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1801 네이버캐스트 백범기념관]</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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