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오퀘 문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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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오케 문제''' 또는 '''필리오케 논쟁'''은 [[기독교]]의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 수록된 [[삼위일체]]에 관한 [[교리]] 논쟁으로, [[서방교회]]의 모체인 [[로마교회]] 총대주교 [[레오 3세]]가 8세기에 라틴어 신경에서 삭제하였다. 그러나 서방교회 미사에선 그 후에도 필리오케가 있는 형태로 신경이 고백되었다. 1013년 [[로마교회]]는 필리오케를 정식으로 신경에 첨가하였다. 그후 13세기와 15세기에 동서방교회의 재결합을 논하는 공의회에서 이 문제가 다뤄졌으나 일치를 이루진 못하였다. 1874년과 본과 1912년 페테르스부르크에서 [[로마교회]]와 [[정교회]], [[성공회]] 간에 이 문제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졌지만 합의를 이루진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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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 역사 ==

2019년 3월 5일 (화) 07:22 판

필리오케 문제 또는 필리오케 논쟁기독교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 수록된 삼위일체에 관한 교리 논쟁으로, 서방교회의 모체인 로마교회 총대주교 레오 3세가 8세기에 라틴어 신경에서 삭제하였다. 그러나 서방교회 미사에선 그 후에도 필리오케가 있는 형태로 신경이 고백되었다. 1013년 로마교회는 필리오케를 정식으로 신경에 첨가하였다. 그후 13세기와 15세기에 동서방교회의 재결합을 논하는 공의회에서 이 문제가 다뤄졌으나 끝내 일치를 이루진 못하였다. 1874년과 본과 1912년 페테르스부르크에서 로마교회정교회, 성공회 간에 이 문제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졌지만 합의를 이루진 못하였다.

역사

역사적 전개

필리오케(라틴어: Filióque)란 'and the Son(그리고 아들)'라는 뜻의 라틴어로, 본래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381년)에서 채택된 것으로 알려진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하 '신경'이라 함)의 그리스어 원문에 없는 단어이나 589년 제3차 톨레도 시노드에서 아직 스페인 내에 잔존하고 있었던 아리우스주의를 경계할 의도로 서방교회라틴어로 번역한 신경에 처음으로 첨가하였다. 이는 당시 기독교회의 신학 표준 언어가 코이네 그리스어인 상황에서 번역어인 라틴어의 문제였고, 중요한 신앙의 기준인 신경의 원문을 정확하게 번역하지 않았던 문제이며, 신학적 문제이기도 했다.

따라서 코이네 그리스어, 헬라어 신경 원문 중 “성령성부에게서 발(發)하시고(토 에크 투 파트로스 에크포류오메논[1], τό εκ τού Πατρός εκπορευόμενον)”라는 구절은 라틴어 번역본에서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크비 엑스 파트레 필리오크베 프로세디트[2], qui ex Patre Filióque procédit)”로 바뀌게 되어, 동방 교회에서 사용하는 그리스어 신경과 서방 교회에서 번역한 라틴어 신경 간에 불일치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아직 필리오케가 삽입된 신경은 스페인 내에서만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다 796년 프리울리 시노드에서 프랑크 왕국 아킬레이아의 파울리노 총대주교는 필리오케의 신경 삽입을 옹호하였고, 800년경에는 전체 프랑크 왕국의 미사에서 필리오케가 삽입된 신경이 암송되기 시작하여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것이 847년 프랑크왕국의 수도자들에 의해 예루살렘에 소개되자 동방교회 수도자들의 강한 반발을 샀다.

이 문제가 교황 레오 3세에게 와서, 레오 3세는 필리오케의 신학적 문제점보다 번역의 문제와 교회 일치의 문제점으로 보고, 라틴어 번역본에 필리오케 추가를 막고자 하였고, 그는 필리오케가 없는 형태의 신경을 코이네 그리스어 원문과 라틴어 번역문으로 각각 작성하여 성 베드로의 묘에 봉헌된 은제 탁자 2개에 새겨넣도록 하였다. 그러나 레오3세의 의도와 달리, 널리 사용된다는 이유로 신학적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며 교황 베네딕토 8세1013년 필리오케가 삽입된 라틴어 신경을 다시 거론하여 승인하기에 이른다.

이에 서방교회에게 필리오케를 신경에서 삭제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포티우스 시대 이후로, 필리오케는 교황 수위권(首位權) 논쟁 등 여타의 신학적 문제와 더불어 동·서방 교회 갈등의 한 요인이 되었다.

역사적 의미

필리오케의 필요성은 서방교회인 로마교회에만 있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디오키아,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 11세기까지 역사적으로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중심으로 하는 동방교회의 치리 하에 있었던 로마교회, 즉 서방교회는 이미 4세기 니케아 공의회와 5세기 칼케돈 공의회를 통해 확립된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의 치리를 거부하고 자치화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신학적 수위권을 주장할 근거가 필요하였다.

로마교회에서 필리오케 문제는 이미 레오 3세가 필리오케가 불필요한 요소라고 인정하고, 서방교회에서는 공식적으로 부정하여 마무리하였다. 하지만 레오 3세의 결정을 거부해가면서, 11세기가 되어 베네딕투스 8세가 이미 마무리된 문제, 케케묵은 필리오케 문구를 다시 꺼내들었다. 이 문구가 서방교회의 자립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이었다.

역사적으로 로마교회는 사도 베드로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따라서 로마교회가 베드로와 자신의 역사적 연계점을 주장할 수 있었고, 이는 다른 지역 교회에 비해 강조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사도 베드로와 필리오케는 융합하기 좋은 교리적 설계 대상이었다[3].

성부만이 아닌 성자에서 성령이 발한다는 필리오케의 핵심은 로마교회의 총대주교를 교황이 되게 하는 중심 문구이고, 교황을 따르는 로마교회를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와 분리하는 정체성을 부여하는 교리였다. 로마교회의 신학적 설계로 보면 필리오케라는 한 단어로 인해, 성자에게서 직접 수위권을 받은 베드로를 잇는 로마 총대주교만이 성자에게서 나오는 성령의 이끄심을 직접 받을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성령의 이끄심을 받지 못하는 다른 총대주교보다 우위를 지니게 된다. 그리고 그 우위성을 지닌 로마 총대주교는 교황이 되고, 교황이 이끄는 로마교회는 하위에 있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치리를 거부할 수 있다. 로마교회는 스스로 가장 우위의 교회이고, 다른 교회는 하위에 있으며, 로마 총대주교가 성령의 이끄심을 직접 따르는 최고의 교황이 된다는 교리적 설계가 형성된다. 하지만 로마교회, 서방교회 내부에서도 교황의 우위를 주장을 거부하는 지속적인 반대운동이 전개되었다[4].

필리오케 교리는 로마교회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치리에서 벗어나는 로마교회 총대주교, 교황과 로마교회의 정치적 자립을 위한 교리로 사용되었고, 결국 공교회였던 시기를 끝내는 동서교회의 분열에 가장 중추적 교리로 작용하였다.

동·서방 교회의 상호 파문과 그 무효화

그러던 중 교황 레오 9세 재위기간에, 교황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오스가 그의 관할지역에서 라틴전례의 관습을 금지한 것을 계기로 특사 훔베르트 추기경을 그에게 파견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에 대한 '세계총대주교'라는 칭호를 폐기할 것과, 필리오케가 들어간 신경을 공식 채택할 것을 정식으로 요구하였다. 그러나 양측의 타협이 이루어지지 않자 총대주교는 교황 특사인 추기경을, 특사는 총대주교를 서로 파문하기에 이른다(1054년).

그러나 서방교회 측의 파문의 경우 특사 파견자인 교황 레오 9세가 이미 서거한 이후였기에 그 합법성에 문제가 있고, 동방교회 측의 파문도 교황이나 서방교회 전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특사들 개인에 대한 인신공격적인 것이었으므로 교회법상 동·서방 교회가 서로를 파문한 것으로는 볼 수 없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또한, 1965년 교황 바오로 6세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 1세는 1054년의 상호 파문을 무효화하고 화해의 인사를 나눈 바 있다.

신학적 합의의 시도와 좌절

동·서방 교회 재결합을 위하여 열린 리용 공의회(1274년)와 피렌체 공의회(1439년)에서, 동방교회 측이 필리오케의 신경 삽입은 거절하나 그 교리는 승인한다고 밝힘으로서 필리오케에 관한 신학적 논쟁은 일단락되는 듯 보였으나, 1472년 동방교회가 그들 단독으로 개최한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회의에서 위 리용과 피렌체에서의 합의를 정식으로 파기함으로써 동·서방 교회는 완전히 분열되기에 이른다.

동·서방 교회 양측의 입장

필리오케에 대한 동·서방 양측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동방 정교회

  • 세계공의회가 채택한 신경을 전체 교회의 동의 없이 차후 변개할 수 없다.
  • 성령성부에게서 발한다는 말씀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요한복음서 15장 26절)
  • 성자가 성부와 함께 성령을 발한다면 신성(神性)의 근원이 둘이 되는 것이다.
  • 성삼위에 2개의 본질이 성립한다면 성삼위일체의 교리에 위배되는 것이므로 이는 신앙의 오류이다.

로마 가톨릭교회

  • 성부와 성자는 공동체적인 사랑안에 서로 결합되어 있다. 따라서 동방교회의 입장은 성삼위의 일치보다 차이를 강조하는 것으로 오히려 삼위일체의 정신에 반한다.
  • 필리오케의 추가는 신경의 변개가 아니라 그 뜻을 강화하는 것으로 (필리오케가 없는) 신경의 원문이나 성경에 반하지 않는다.
  • 성자는 성부와 본질이 같으므로 성부와 성자가 함께 동일한 성령을 발한다는 것이 제1차 니케아 공의회의 정신에 부합한다.
  • 필리오케는 성삼위일체의 당연한 귀결로서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 오히려 신앙의 오류이다.

개신교회

  • 세계공의회가 채택한 신경을 인정하여, 로마교회가 모든 교회의 동의 없이 변개하지 못한다.
  • 원문인 고대 그리스어 본문을 기준으로 삼는다.
  • WCC 공동 신경을 채택하여 필리오케 문제가 없는 본문을 확인한다.

현재 동방 정교회는 필리오케가 없는 신경을, 서방교회 전통의 로마 가톨릭교회성공회는 받아들이며, 서방교회 전통의 개신교는 WCC 공동 신경을 통해 필리오케가 없는 신경을 사용한다.



같이 보기

각주

  1. 코이네 그리스어 발음을 따름.
  2. 교회라틴어 발음을 따름
  3. 한스 큉. 《그리스도교: 본질과 역사》. 이종한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2002) 404-413.
  4. E. G. 재이. 《교회론의 변천사》. 주재용 옮김. (서울: 기독교서회, 2002). 176-200.